고수들이 몰려오는 치유객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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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씨
작품등록일 :
2024.08.20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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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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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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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제포적 사고

DUMMY



쿡, 쿡쿡.


끔찍한 고통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을 때, 누군가가 팔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이이.”

“으헉.”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걱정스러운 눈빛의 서지향이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어? 어어, 어어어. 괜찮지. 나는 괜찮아···.”

“아저씨, 뭔가 이상한데···?”

“괜찮다니까. 그냥, 그냥 좀 고통스러운 악몽을 꿔서 그래.”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서지향에게 애써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면에 웃음을 띤 것과 달리, 머릿속은 지끈지끈하고 복잡해 죽을 맛이다.


아무래도 제포에게 사로잡힌 내 정신이 고통을 받는 동안, 내 육체는 의자에 앉아서 밤새도록 곯아떨어졌던 모양이다.


“아저씨도 악몽 같은 거 꾸세요?”

“왜?”

“식은땀을 엄청나게 흘리셔서요.”


그 말을 듣고 이마와 목을 손등으로 훑으니 완전히 땀범벅이었다.


‘대법’을 두 번 이상은 받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 참다 보니, 육체도 견디기 힘들었는지 땀을 한 바가지 쏟은 듯했다.


‘대법을 받을 때 자꾸 꼼지락거리면 안 된다니까! 반쪽짜리 제자가 되고 싶으냐?’

‘갸아아악! 계속 받다가는 제 대가리가 반쪽이 될 것 같으니까 그렇죠!’

‘성공하면 고수고, 실패하면 필부일 뿐인데 뭘 그리 겁이 많느냐!’

‘아아아악! 미친 노인네가 제자를 죽이려 든다!’

‘그리 외친다고 해서 들을 자는 없느니라!’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제포 스승님, 아니. 노인네의 고함을 떠올리니 소름이 쫘악 돋았다.


고통받는 그 순간만큼은 무슨 5억 년 버튼을 누른 것처럼 영겁의 시간이었다니까, 정말로.


강제로 대법을 쏟아붓는 제포를 떠올리자마자 내 얼굴이 창백해지기라도 했는지, 서지향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진짜 괜찮으신 거죠?”

“괜찮다니까. 얼른 가서 씻고 와. 그전에 아침 만들어줄 테니까.”

“네에······.”


서지향이 의심 가는 눈빛으로 나를 줄곧 쳐다보다가 주방 밖으로 나갔다. 꼬맹이가 어른 걱정하기는.


서지향을 객잔 옆에 붙은 세면장으로 돌려보내고 대충 땀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윽.”


밤사이 잔뜩 굳은 몸을 쭉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데, 어째 개운했다. 의자에서 밤잠을 때린 거 치곤 몸이 너무 쌩쌩한 것 같은데.


뻐근한 곳도 없고, 오히려 폭신폭신한 현대식 매트리스 침대에서 늘어지게 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


설마, 이게 그 ‘대법’의 효과인가? 이름이 너무 길어서 풀네임이 기억이 잘 안 난다. 금강마라민초부먹대법이라고 했던가?


‘수처작주면 입처개진이라.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진리가 될 거란 뜻이다. 칼과 도마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방이자 도량이 될 수 있는 법.’

‘오고고곡, 오고곡!’

‘금강대라몽환대법으로 건달채도에 쌓인 자연지기를 돌려, 건달심법으로 형성된 네 단전에 조금 쌓아두마. 앞으로 건달심법을 수련할 때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떽, 떼띡, 띠드디디딕!’


내 괴상한 비명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고, 노인네가 했던 말에 집중해야 했다.


당시에는 머리가 화끈하다 못해, 아주 그냥 활활 타오르는 듯한 작열감이 들고 있을 때라 뭐라 대꾸도 못 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대단히 중요한 말이었다.


건달심법은 이미 내 몸에 자리를 잡았고, 단전까지 마련된 상태라는 것을.


혹시나 싶어서 아랫배를 만져봤지만, 당연히 기로 이루어진 단전이 만져질 리는 없었다.


분명히 어엿한 숙수 겸 무인이 될 거라면서 대법을 행하셨는데, 이게 정말로 자리잡은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


아니지.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


곧장 주방 한편에 있는 광에서 튼실한 무 하나를 꺼내서, 건달채도로 반 토막 내고 그걸 또 반으로 토막 냈다.


무 채썰기.


한식조리기능사 시험에 나올 정도로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능력이다.


재료 썰기를 하다 보면 ‘어엿한 숙수’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나는 한식조리기능사 시험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이신 최선영 여사님이 주민센터에 다니면서 시험 준비하는 걸 조금씩 봐서 알고 있는 거지.


‘아니, 너희들 밥 먹이는 데엔 자격증도 필요 없었는데 나이 오십 먹어서 이런 기초적인 것도 봐야 해?’ 하시면서 달걀 지단을 부치고, 열심히 무도 써셨던 걸 본 적이 있거든.


참고로 우리 여사님께서는 두 번 연달아 떨어졌다가, 삼수 끝에 합격하셨다.


그걸 본 아버지, 황제남 선생께서는 그날 저녁에 가지나물과 연근조림이 나왔을 때 ‘밥상을 보니 삼수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가 사흘 내내 식탁에 즉석밥, 구운 김, 참치 통조림만 내놓게 하셨었지.


어디서나 칭찬만 듣는 바람직한 아들인 나와 달리, 우리 아버지는 좀 매를 버시는 발언을 자주 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 기억이 맞는다면 채 썬 무는 가로세로 0.2cm 정도 두께가 되어야 한다고 들었다.


중원엔 센티미터로 된 자가 없으니 적당히 얇고, 가늘게 썰면 되겠지. 그 생각과 함께 채썰기를 준비했다.


깊은 한숨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뒤, 건달채도를 들고 천천히 무를 썰기 시작했다.


“······?”


뭔가 평소와 다르게 어색하면서도 어렵다.


지금까지 내 실력을 뒷받침해 주던 무언가가 상실된 것 같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네발자전거를 타고 씽씽 달렸는데, 오늘은 보조바퀴 없이 불안불안하게 타는 느낌?


게다가 결과물이 미묘했다. 남들보다 잘하는 건 맞는데, 반도체 공장에서 자른 것처럼 단 1nm의 오차도 없이 똑같아야 할 무생채가 좀 흐트러져 보인다.


이거 설마, 식방각 스님들의 실력 보정이 사라진 건가? 어엿한 숙수로 만들어주겠다더니, 어리벙벙한 숙수가 되어버렸다.


당혹감에 땀 한 방울이 삐질삐질 흘러나왔지만, 이내 진정했다.


그래, 지금까지 몇 주 동안 연습한 가락이 있지 않나. 천천히 스님들의 조언을 복기하며 심혈을 기울였다.


할 수 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내 실력은 결코 ‘정상화’ 당하지 않는다.


수없이 중얼거리며 두 번째 무 토막을 잡았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썰기 시작했다.


몸은 정직하다. 분명히 스님들이 펼쳤던 실력이 근육 가닥가닥 깃들어 있을 것이다.


“으으음.”


나도 모르게 침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렇게 조금 더 썰다 보니 뭔가, 뭔가 알 것 같기도 하다. 막 이게 손에 잡힐락 말락 한다니까?


거기에, 채 써는 속도가 서서히 빨라지고 있었다. 이거 슬슬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은데.


얄팍하게 썰리는 무채를 보니 조금 비뚤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허용범위 내가 아닐까 싶다. 조금만 더 썰어보자.


그렇게 세 번째 토막을 채썰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일정했다. 무채 열 가닥이 있으면 그중 한두 개 정도만 살짝 비뚤어진 정도.


그래, 이게 정상이지. 고통스러운 대법까지 받으면서 파워 업을 했는데 오히려 실력이 퇴화하는 것도 이상한 거잖아?


이제부터는 식방각 스님의 원격 조종이 아닌, 순전히 내 손과 내 정신으로 펼치는 100% 내 실력이다. 며칠간 실력이 안정되도록 노력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휴우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니 긴장이 풀리면서 배가 고파진다. 그래, 아침 만들어야지.


실력이 아직 불안정하더라도,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음식은 무궁무진하다. 큰 솜씨를 부리지 않아도 정성과 노오력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이 존재하니까.


오늘은 푹 끓이면 끓일수록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볼까 한다.


순간 객잔의 즈언통인 소면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침부터 밀가루 음식 먹으면 헛헛하잖아. 역시 쌀과 관련된 음식이 좋겠지.


“······좋아.”


고금지미총록에서 찾았던 요리법을 기반으로 여러 차례 연습했던 요리 중 하나가 생각났다.


커다란 들통에 물을 가득 붓고, 닭을 통째로 몇 마리 넣는다. 물론 기름기 많은 닭 꽁지는 잘라서.


그다음엔 아침부터 원기를 쭈우욱 끌어올릴 마늘과 부추, 잡내를 없앨 약간의 화초와 생강을 넣어 푸욱 끓인다.


이렇게 만든 찐한 닭 육수에 쌀을 풀어서 죽을 만든 다음, 육수를 낼 때 썼던 닭고기를 한 김 식히고 살을 모조리 발라낸다.


닭고기를 결대로 죽죽 찢은 다음 씹는 맛과 색을 더해줄 당근과 파를 잘게 썰어 넣었다.


죽만 먹으면 입이 좀 심심하니, 다른 반찬도 만들어 볼까.


아침에 칼질을 연습하면서 만든 무채를 소금에 잠깐 절여놨다가 물기를 짜낸다.


매운맛을 더해줄 화초가루와 식초, 설탕, 감칠맛이 폭발하는 말린 굴 가루와 다진 마늘까지 넣어주고 잘 버무려주면 끝.


이 정도면 중원 사람들 아침 식사에서도 상위권에 속하지 않을까?


닭죽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다 들어가 있지, 무생채무침에는 들어간 비타민과 미네랄이 빵빵할 테고. 그야말로 하루를 시작하기 좋은 식사였으니까.


아참, 애 불러야지.


“지향아, 아침 먹자!”

“네에!”


바깥에서 객잔 입구를 쓸고 있던 서지향이 쫄랑쫄랑 안으로 들어온다.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곧잘 하니까 참 든든하면서도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느낌이 불쑥 든다니까. 그렇게 탁자 앞에 앉은 서지향과 함께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과연 서지향은 내 변화된 실력을 알아차릴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지향이 닭죽을 떠먹는 모습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응?”


죽을 한 숟갈 떠먹은 서지향이 멈칫했다. 혹시 제거 못 한 닭 뼈라도 씹었나? 아니면 맛이 없나?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아니요.”


서지향이 얼굴을 붉히더니, 뭔가 부끄러운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 죽이 너무 맛있어서요.”

“그래? 평소랑 크게 다를 바 없는데.”

“평소에도 맛있기는 했지만, 이번 건 꼭 엄마가 해주신 것 같은 느낌이 나서 더 좋아요.”


그러면서 배시시 웃는 서지향.


어머니가 한 듯한 맛이 난다는 서지향의 평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난 또 실력이 퇴화한 줄.


아예 별호를 어머니의 손맛과 같은 칼잡이란 뜻으로 모수미도(母手味刀)로 해버릴까?


아니, 아니다. 그런 별호를 써버리면 어머니 손이 맛있다고 외치는 패륜 식인범으로 비칠 것 같다. 왜, 외국인들도 할머니 뼈해장국 같은 간판 보면 섬뜩하다고들 하잖아.


연거푸 숟가락을 들며 닭죽을 퍼먹기 바쁜 서지향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자니, 그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서지향이 속삭이듯 답했다.


“아저씨도 얼른 드세요.”

“음음, 그래야지.”


서지향의 제안에 따라 닭죽을 먹어봤더니, 역시나 실패할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동북아시아 사람이라면 싫어할 수가 없는 닭 육수에 쌀의 조합이니 맛이 없을 수가 있나.


다만 이전에 식방각 스님들의 보정을 받으며 만들었던 요리와는 어딘가 달랐다.


뭔가 딱 설명하기는 힘든데,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서지향이 ‘어머니가 만든 맛’이라 평한 이유도 대략 알 것 같았다.


다만 ‘무슨 이유로 맛이 부드러워졌는가?’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식방각 스님들의 실력과 내 실력의 차이인 건지, 아니면 내가 제포의 대법을 받아들이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그 실력을 체화한 건지 도통 모르겠으니까.


아무래도 당분간은 계속해서 더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새콤 짭짤한 무생채무침과 닭죽을 넙죽넙죽 넘기고 있을 그때.


“형님, 아직 등롱을 안 걸어뒀는데요?”

“인마, 등롱 안 걸려 있으면 객잔 안으로 못 들어가냐?”


귀에 익은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등롱을 걸어둔다는 건 객잔 장사를 시작하겠다고 알리는 뜻.


현대로 말하자면 간판에 불을 켜놓는다거나, 이발소나 미용실 앞에 붙여두는 회전하는 사인볼 역할을 하는 거다.


그런데 등롱도 안 걸어놨는데 저런 무식한 소리를 한다는 건 상당히 예의가 없는 행동. 당연히 객잔 입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뭔가 상당히 불길한데, 이거.


쾅!


객잔의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벽과 부딪쳤다.


“허이구, 아침 식사를 하고 있으셨네?”


그와 함께, 명백하게 적개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시건방을 떨며 등장하는 여섯 덩어리.


곧장 숟가락을 내려놓고 서지향에게 답했다.


“지향아, 방에 들어가 있어.”

“네? 갑자기 왜···?”

“얼른.”


애 앞에서 어른들끼리 다투는 모습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서지향이 쪼르르 방으로 달려가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여섯 덩어리의 대장 놈을 바라보았다.


“······상성육견.”


그리고 천몽규.


제갈세가의 도련님인 제갈단에게 처맞고 상성현으로 돌아간 줄 알았더니, 뻔뻔하게도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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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공과 요리의 상관관계 (2) 24.09.15 70 2 13쪽
14 내공과 요리의 상관관계 (1) 24.09.14 80 2 14쪽
13 우리 마을의 권 선생님 24.09.13 74 2 15쪽
» 제포적 사고 24.09.12 87 2 13쪽
11 준비는 언제나 맑음 24.09.11 101 5 15쪽
10 아침 식사 됩니다 24.09.10 107 5 14쪽
9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세요 24.09.09 106 3 13쪽
8 세가는 역시 제갈세가 24.09.08 119 4 14쪽
7 쪽박, 좋아하세요? (2) 24.09.07 122 3 15쪽
6 쪽박, 좋아하세요? (1) +1 24.09.06 120 3 14쪽
5 공포의 손맛 (2) 24.09.05 134 5 13쪽
4 공포의 손맛 (1) +1 24.09.04 136 6 13쪽
3 안심하세요, 현실입니다 (2) +2 24.09.03 153 6 15쪽
2 안심하세요, 현실입니다 (1) 24.09.03 163 5 13쪽
1 객잔 마련의 꿈 24.09.03 193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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