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들이 몰려오는 치유객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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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씨
작품등록일 :
2024.08.20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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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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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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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과 요리의 상관관계 (2)

DUMMY



내가 주방으로 향하자, 서지향도 같이 쫄래쫄래 따라왔다.


이 주변엔 놀 것도 없고, 할 것도 마땅찮거든. 주방에서 요리하는 나를 구경하는 게 그나마 즐길 거리다.


“오늘 점심은 뭘 만드실 거예요?”


궁금증이 가득한 서지향의 질문에 간결하게 답했다.


“이름은 다 끝나고 알려줄게.”

“그럼 어떤 음식인지만 알려주시면 안 돼요?”

“으음, 짭짤 고소하면서도 밥이랑 같이 먹으면 술술 들어가는 그런 음식이지?”

“달걀로 만드는 거고요?”

“그렇지.”


그 말에 서지향이 기대감으로 빵빵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요리는 서지향에게 말한 대로, 밥과 함께 먹기에 최적인 음식.


중원에 떨어지기 전, 한국에서도 여러 번 해 먹었던 음식이기 때문에 고금지미총록은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채소 손질부터 들어갔다.


튼실한 양파와 대파의 껍질을 벗기고, 한입에 넣기 좋도록 적당한 크기로 잘라야 한다.


손으로 껍질을 벗긴 다음, 여전히 잘 벼린 상태인 건달채도의 칼날이 양파에 닿는 순간.


쉬이익···!


“······?”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칼날로 빨려 들어간 느낌과 함께 양파가 숭덩 잘렸다.


양파를 잘게 써는 동안엔 안 그러다가, 이번엔 껍질 벗긴 대파를 반토막 냈더니.


쉬이익···!


이번에도 똑같이 무형의 무언가가 빨려 들어갔다.


설마, 이게 건달채도가 흡수한다는 자연지기?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제포가 전수한 대법을 통해 내공이 생기면서 보는 눈이 달라졌나 싶은데.


“······.”


잠깐만. 채소에 담긴 자연지기를 느낄 수 있다는 건, 결국 기의 움직임 또한 알 수 있다는 거지?


아까 아침에 칼질을 시도할 때처럼 천천히 심혈을 기울이며 채소들을 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포가 대법을 전수할 때 읊었던 법문을 떠올렸다.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은 개불가취(皆不可取)며 불가설(不可說)이며 비법(非法)이며 비비법(非非法)이니 소이자하(所以者何)오.’


뜻은 대략 이러하다. 여래께서 말하신 법은 모두가 잡을 수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


“······.”


뇌 자체에 아로새겨진 듯한 문장이었기에 외울 수는 있었지만,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스님들은 이런 걸 다 이해하고 법문을 외시는 건가?


하지만 그런 법문을 쭈욱 읊으면서 채소 손질을 하다 보니.


움찔!


실체가 있는 신체 부위도 아닌데도 뭔가 묵직하게 자극이 온다.


단전에서 실타래처럼 슬슬 풀리는 무형의 기운은 전신으로 퍼져나가다가, 건달채도를 붙잡은 오른손에 집중적으로 모였다.


에너지 드링크를 잔뜩 들이켠 것처럼 짜릿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 게다가 근육 가닥 가닥에 힘이 깃드는 것 같다.


“아아.”


이게 바로 내공이었다. 정말 콩알만 한 양의 내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전거 보조 바퀴 역할을 하던 식방각 스님들의 실력 보정이 사라진 것도 금방 이해가 됐다. 내공의 힘을 빌려 만든 세밀한 조정에 익숙해지려면 보조 바퀴는 떼놔야 하지 않겠나.


아아, 제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역시 무협에서 스승님을 아버지처럼 극진히 모시는 이유를 알겠다.


반대로 말하면 뒷골목에서 파는 춘화나 색협지에서 등장하는 스승과 제자의 음습한 관계가 얼마나 자극적인 건지도 알 것 같고.


“······.”


참고로 나는 그런 취미가 없다. 좌판에 깔린 책을 어쩔 수 없이, 우연히, 호객하던 주인이 시키는 바람에 완독했을 뿐이다.


어쨌든, 내공의 힘을 빌린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특히 칼질할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세도 올바르게 변하고, 빈틈이 없어지는 것 같다.


이거야말로 좋은 현상이었다. 사실 아침때도 이대로 실력이 없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좀 됐었거든.


본래라면 못해도 절정 고수 같던 객잔이 몇 달 만에 삼류 무사급이 되어버리면 얼마나 사람들이 충격을 먹겠어?


손님 좀 오니까 그새 마인드가 변했다면서, 골목객잔 빌런이라는 오명까지 씌워질 수 있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대로 정진하면 속이 꽉 찬 절정 고수급 숙수로 살아갈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불쑥 드니 손놀림이 더 빨라질 수밖에.


그렇게 다시 요리에 집중하자면.


두툼한 돼지고기를 너무 크지 않게, 하지만 씹는 맛이 있도록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게 자른다.


그렇게 손질한 채소와 돼지고기를 보니, 누가 손질했는지 몰라도 참 정갈하다 싶다.


이것들을 철과에 부어 볶기 전에, 미리 달걀 몇 알을 커다란 그릇에 깨 넣고 열심히 휘젓는다.


한번 휘저은 달걀물을 체에 넣고 거르고 있을 때, 서지향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질문했다.


“달걀물을 체에 거르는 거예요?”

“맞아. 달걀에 알끈이 있는 거 알지?”

“노른자에 붙어있는 거요?”

“그렇지. 그게 남아 있으면 먹을 때 식감이 영 안 좋거든. 체로 한번 거르거나 으깨버리면 괜찮아.”


거기에, 몇 번 휘저은 거로는 흰자와 노른자가 완벽히 섞이지 못하기도 해서, 체로 한 번 더 섞어주는 느낌이 강하다.


달걀물은 잠시 두고, 철과에 돼지기름을 녹인 다음에 대파를 먼저 넣어 파기름을 낸다.


파기름의 향이 주방에 슬슬 퍼질 그때, 나머지 채소와 함께 말린 굴 가루와 황주를 조금 붓는다.


그리고 곧장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평소처럼 볶으려 했는데, 뭔가 아쉬움이 크다. 이대로 볶으면 너무 무난하고 평범한 맛이 날 것 같은데.


잠깐 고민하다가, 주방 한편에 잘 모셔두었던 장작을 잡았다. 정확하게는 잘 마른 싸리나무 한 묶음.


“지향아, 뒤로 물러나.”

“네? 아, 네!”


내 말을 들은 서지향이 곧바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났고, 곧장 싸리나무 한 묶음을 화구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푸화아아악!


순식간에 화구에서 강렬한 불길이 일어나더니, 철과를 뒤엎을 만한 커다란 불길이 일어났다. 화려한 연출에 뒤에서 구경하던 서지향이 감탄했다.


“와아!”


이게 또 묘미지. 강렬한 불길이 씁쓸한 알코올 성분은 모두 날려줄 것이고, 황주 특유의 맛과 향만 채소와 돼지고기에 잔류할 거다.


그렇게 볶아진 채소와 돼지고기를 조금 맛보자, 짭짤하면서도 황주 특유의 향이 살짝 올라오는 게 딱 이거다 싶다.


마지막으로 생추, 그러니까 간장을 주변에 사악 뿌려서 조금 태워서 불맛을 입힌 다음에 달걀물을 뿌렸다.


불향을 가득 입힌 채소와 돼지고기볶음은 끝이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정한 시작은 지금부터니까.


중원에서 숙수의 기본 실력을 확인하려면 볶음밥을 주문해야 하듯이, 양식에서는 이 음식으로 확인한다.


그 음식은 바로 오믈렛.


그냥 달걀 좀 휘젓다가 몇 번 부치면 끝 아니냐 하겠지만, 이게 또 불 조절이 만만치가 않다.


잘못하면 너무 익혀서 겉이 갈색빛이 감돌면서 딱딱해 지거나, 겉만 익고 속은 제대로 익지 않아서 흐리멍덩하고 흐물흐물한 오믈렛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더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채소에 깃든 자연지기를 느낄 수 있다는 건, 만물을 구성하는 기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볶은 채소와 돼지고기가 있는 철과에 달걀물을 천천히 붓고, 싸리나무가 자아내던 강렬한 불길이 사그라들었을 때 철과를 다시 내려놓았다.


자연지기를 구성하는 화기(火氣)를 찬찬히 파악하기 위해서다.


강렬한 화력으로 재료를 압도하라느니, 불 앞에서 쫄지 말라느니 하는 게 모두 이 화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해야 한단 뜻이었다.


요리 초보자가 흔히 실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스레인지를 중불로 맞추고 요리하라 했더니, 빨리 익으라고 강불로 조졌다가 음식과 프라이팬 둘 다 까맣게 태워 먹는 경우가 많지 않나.


숙수가 원하는 온도에 다다를 수 있도록 화기를 조절하는 것.


‘불 또한 숙수의 도구다! 도구에게 겁 따위는 내지 말고,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하지!’


괄괄한 성미의 식방각 스님이 외쳤던 대사가 떠오른다.


나중에 또 건달채도에 깃든 제포 스승님의 공간에 갈 기회가 생기면 식방각 스님들의 법명이 뭔지 물어봐야지.


철과에 부은 달걀물이 점점 지단으로 바뀌어가고 있을 때, 철과를 잡은 손목의 스냅으로 통통 튀겨 반으로 접히게 한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황금빛 지단이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통통 움직이더니, 점점 반으로 접혀갔다.


보름달 같던 지단이 이윽고 반달 모양이 되자, 뒤에서 지켜보던 서지향이 감탄했다.


“우와······!”


기가 막힌다. 어느 곳 하나 타지 않고 반들반들하게 잘 익은 상태에 나 또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 이거지, 이거.


“아저씨가 마무리할 테니까, 얼른 가서 탁자에 수저 놓고 있어.”

“네에!”


큰 접시에 오늘의 음식을 조심스레 올려두고, 곧장 밥 두 공기와 나물 반찬을 챙기고 탁자로 향했다.


“아저씨, 오늘 음식 이름은 뭐예요?”

“부용단권(芙蓉蛋卷).”


처음 듣는다는 듯한 서지향의 얼굴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야 그럴 만도 하다.


저어기 밑 지방인 광동에서 자주 먹는 향토 음식인 부용단을 한 번 말았다는 뜻으로 권(卷)을 붙여, 부용단권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까.


물론 정통 부용단과는 한참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양식의 기본인 플레인 오믈렛과도 많이 다르다.


누군가는 사도에 가까운 음식이라고 뭐라 할 수도 있지만, 음식이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나무젓가락으로 버섯볶음 만드는 수준만 아니면 됐지.


“······.”


나 혼자 잠깐 멍하니 생각하다 보니, 서지향이 초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안 먹고 뭐 하냐는 눈빛에 아차 싶었다.


밥상머리에서 생각에 골똘히 잠기는 것도 어른으로서 할 짓이 못 되지, 참.


“미안, 미안. 얼른 먹자.”

“네!”


서지향의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 일반적인 평민 집안은 아닌 것 같았다. 평민 집안에서 어른 먼저 드시라고 잠자코 기다리는 착한 아이는 생각보다 보기 힘들거든.


대체 정체가 뭐냐고 물어보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하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가장 먼저 먹어야 할 것은 당연히 부용단권부터.


완벽한 자태를 뽐내는 부용단권 귀퉁이를 젓가락으로 조금 잘랐더니, 반드르르한 겉과 달리, 촉촉하면서도 보들보들한 모양새의 소가 드러났다.


뉘집 자식이 만들었는지 몰라도, 이거 참 탐스럽다.


지체할 시간 없이, 곧바로 한 조각을 입에 쏙 넣었다.


“으으으으음.”


당장이라도 촐싹대면서 미미(美味)를 외치고 싶은 맛.


달걀은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고, 안에 들어간 갖은 채소와 돼지고기는 강렬한 불향을 퍼트린다.


거기에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잘게 자른 돼지고기와 대파가 전해주는 압도적 식감. 쫀쫀하면서도 살짝 아삭아삭한 그 맛은 동북아시아 사람이라면 싫어할 수가 없었다.


대파와 돼지고기가 전해주는 식감, 그리고 굴 가루를 통한 감칠맛까지 모두 지닌 최적의 요리.


이건 진짜 식방각 스님들도 소림사 담장 넘어서 파계를 행할 맛이다. 내가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 진짜.


내가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그때.


“······.”


서지향은 부용단권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계속 우물거리고만 있었다.


문제는 그 우물거림이 일반적인 저작(咀嚼) 활동을 한참 넘은 시간이라는 것.


“뭐하니?”

“······안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뭐가, 부용단권이?”


끄덕끄덕.


그게 대체 뭔 말인가 하니, 식도로 넘기지 않고 이게 계속 입에 들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먹기에 아깝다거나, 배 터지게 먹고 싶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계속 입에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말은 또 처음 듣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지향이 너도 참 특이하다.”

“그치만, 너무 맛있잖아요···.”

“몇 번이고 더 만들어 줄 테니까 얼른 꿀떡 삼키고 밥이랑 같이 먹어.”

“네에, 헤헤.”


서지향의 빵빵했던 볼이 쏙 들어갔다가, 밥과 함께 부용단권이 들어가자마자 다시 빵빵해진다.


볼을 옆으로 쭈욱 늘여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침울한 표정만 짓던 서지향이 부용단권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열 살짜리 꼬맹이인 서지향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감동하는 것도 이렇게 기분 좋은데, 더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면 어떨까.


“······.”


천몽규를 쓰러트릴 때와는 조금 다른 호승심이 불타오른다.


신양현의 하지 경연까지는 대략 삼칠 일, 그러니까 이십일 일 정도.


아무래도, 건달심법과 내공을 이용한 조리 연습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겠다.


그리고.


신양연의 하지 경연에서 줄곧 1등만 해왔다는 모올루에 한번 가봐야겠다.


사실상 최대 라이벌이니, 사전 조사부터 싸악 해줘야지.


대체 무슨 맛이길래 매번 1등을 한 거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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