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길을 걷는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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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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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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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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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DUMMY

시밀은 빛의 인도에 따라 하늘을 걸었다.


여전히 같은 광경이 이어지기만 했다. 시밀은 멍하니, 동시에 머리 구석으로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내가 죽었나?’


죽은 사람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밀은 되살아났다.


꿈이었나?


꿈은 아니었다. 별 먹는 것의 눈동자에서 튀어나온 가시가 전신을 꿰뚫던 장면을 머리가 기억한다.


죽었지만, 되살아났다. 그리고 다시 별 먹는 것, 그 답이 보이지 않는 괴물과 싸우기 위해 별길을 걷고 있다.


걸어도, 걸어도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행상들은 별빛의 크기와 위치를 보고 하늘에서 길을 찾는다고 했다. 시밀에게 그런 재주는 없었다.


별빛의 이끌림에 따라 그저 걸을 뿐.


“이토록 어린 용사라니, 이 또한 비극이구나.”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둥근 바위에 탄 노인이 시밀 앞으로 내려왔다.


“누구신가요?”

“자고로 용사라면, 작은 별의 용사라면 더더욱 자신을 낮춰서는 안 된다네. 세상에는 존중과 주눅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많거든. 무뚝뚝하고 강하게. 하지만 날을 세우지는 않는다는 느낌으로 말해보게.”

“저는....”

“그래, 모르는 거군. 그 나이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러면 상상해 보게. 자네 근처에서 가장 차가운 사람. 아마 기사나 사제겠지? 자, 해보게.”


노인의 말에는 거역하기 힘든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시밀은 힐런을 떠올렸다. 시밀이 아는 가장 감정 변화가 없는 사람.


“이렇게?”

“처음치고 괜찮아. 차차 적응하면 되는 일이지. 시간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목숨은 많지 않은가.”


노인은 길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어허.”

“너, 너는 누구지...?”

“나? 나는 몰락한 사제이자 진리의 탐구자라네. 별을 먹는 것을 보러 왔지.”


사제라는 말에 시밀은 노인이 타고 있는 바위의 정체를 알았다.


“별...?”

“빛을 잃고, 빛날 가능성도 잃어버린 작은 별이지. 하지만 늙은이의 교통수단으로는 요긴하다네. 용사여, 자네는 별을 먹는 것을 죽이려는 거겠지?”

“그, 그래.”

“검은 배웠나? 별빛을 다루는 법은?”

“아, 아무것도 안 배웠다.”


노인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한 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 몇 살인가?”

“10살.”

“전대 용사 후보는 몇 살이었고?”

“... 15살? 아니, 16살?”


유리의 나이가 정확하지 않은 건 그녀의 인생에 잠깐의 공백이 있어서였다.


유리는 자신의 이름을 거부하고, 스스로 이름을 정했다. 이름과 함께 주어지는 축성도 미뤄졌다.


새빛별 사람들은 모두 아는 유명한 일화다.


“별의 이름은? 새빛별? 새별? 아니면 평화나 용기 같은 단어가 섞였겠지?”

“새빛별인데... 새빛별이 또 있나요?”

“어허.”


노인이 엄하게 시밀을 꾸짖었다. 시밀은 어깨를 움츠리고 쥐어짠 목소리로 말했다.


“새빛별이 또 있나?”

“막 임명된 사제들이 가장 많이 짓는 이름이라네. 어감도, 뜻도 나쁘지 않으니까. 이 하늘에 새빛별과 새빛별이었던 별을 합치면 수만 개가 넘을 거야.”

“....”

“충격받았나? 그럴 수도 있지. 별길도 나지 않은 작은 별의 주민에게는 별이 세상 전부일 테니. 하지만 용사로 하늘을 걸으려면 알아야만 하는 내용이네.”

“저는... 나는 뭘 해야 하지?”

“별의 위기를 해결해야지.”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모든 용사가 별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별의 용사만이 별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 또한 아니라네.”

“그럼....”

“하지만 작은 별에서는 용사 혼자 모든 걸 처리해야 하지. 별 먹는 것은 자네의 먹이이며, 동시에 자네는 별 먹는 것의 먹이야. 이건 변치 않을 사실일세.”


시밀은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냉정한 노인의 말은 시밀에게 현실을 자각하게 했다.


가늠되지 않는 거대한 괴물과 싸워야 한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시밀의 부모님은 전염병으로 죽었다. 전염병이라는 게 알려지자마자 부모님은 격리되었지만, 그전까지는 시밀이 부모님을 간병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부모님의 모습은, 그 고통은... 보고 싶지도, 겪고 싶지도 않은 것이었다.


“끝없이 부딪혀라. 실패한 사제가 해줄 조언은 이것밖에 없네. 운이 좋다면 다른 별에서 온 용사들과 공투할 수도 있을 거라네.”

“... 그들을 기다리면 안 되나요?”

“어허.”

“안 되나...?”

“추천은 하지 않네. 죽음을 앞둔 인간은 성숙해지지. 죽음 앞에 현자가 된다고 해도 좋네. 남들이 일생 한 번밖에 하지 못하는 경험을 용사는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지. 그게 용사의 힘이자 용사가 용사라 불리는 이유이고. 다른 용사를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그 상태로 다른 용사를 만났을 때 당당히 앞에 나설 수 있겠나?”


없었다.


다른 용사들이 어떤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이 상태로는 시밀이 가장 약한 용사의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건 확실했다.


시밀은 제대로 된 검술도 익히지 못한 용사니까.


싸울 줄도 모르는 용사니까.


“그렇지. 그러니 가서 싸우게. 싸우고 죽게.”

“죽음은 무섭습니다.”

“무섭고 두렵겠지. 그래도 해야 한다는 말밖에 나는 해주지 못한다네. 그러니 내게 답과 안식을 찾지 말게.”


시밀은 사제가 타고 있는 별을 보았다. 빛도 내지 않는, 작은 돌덩이와 같은 별이었다.


“사제님은, 당신은 왜 실패했나요? 아니, 실패했지?”

“용사가 별의 자원을 들고 튀었네. 그런 짓은 소용없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더군. 별에 깃들었던 모든 별빛을 빼앗기고, 이런 초라한 모습이 되었지.”

“그 용사는?”

“별빛을 모두 뽑히고 죽었지. 아주 통쾌했어. 이런, 이만큼 가까워졌나. 연이 닿으면 다시 보세. 어리고 여린 별의 용사여.”


노인은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 속도로 날아가 저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시밀은 검을 뽑았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앞이 온통 검었다.


“흐아아압!”


시밀은 검을 들고 별 먹는 것을 향해 달려갔다. 전신에서 별빛을 뿜으며, 하나의 별이 되어 별 먹는 것을 향해 돌진했다.


별 먹는 것의 중앙이 벌어졌다.


그 안에 있는 건 별을 먹기 위한 이빨이었다. 오돌토돌하고, 뾰족한, 별을 부수고 갈아 마시기 위해 있는 이빨.


이빨 안에서 무수한 검은 촉수가 날아왔다. 촉수가 시밀의 몸을 묶었다.


시밀의 저항은 어떤 성과도 내지 못했다.


콰득.


별 먹는 것은 별과 유사한 것 하나를 씹었다.


***


침대에서 깨어난 시밀은 몸을 웅크렸다.


최초의 죽음에 고통은 따르지 않았다. 고통 전에 모든 게 끝났다.


이번엔 아니었다.


뾰족하고 꺼슬꺼슬한 이빨 사이에서 시밀은 즉사하지 않았다. 시밀은 그 이빨들 사이에서 으스러졌다. 단 몇 초였지만, 고통을 온전히 느꼈다.


전신이 으스러지고, 갈리고, 끊어지고, 마지막으로 정신이 꺼지는 감각.


시밀은 떨었다.


노인의 말이 생각났다. 죽음의 반복이 용사의 힘이자 용사가 용사라 불리는 이유라고.


그건 용사 시밀에게 남은 죽음이 몇 번이나, 어쩌면 수백, 수천 번이나 있음을 뜻했다.


이건 절대 힘이 아니다. 끝나지 않는 악몽, 더없이 끔찍한 현실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용사 후보 같은 건 되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의식의 방을 나왔어야 했다.


발소리가 들렸다. 시밀은 잽싸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숨을 곳을 찾았지만, 두 사람이 사는 작은 집은 요한의 집처럼 방이 나뉘어 있지도 않았고, 가구가 많지도 않았다.


유리가 문을 열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숨길 장소를 찾던 시밀은 유리와 눈이 마주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누나....”

“앉아. 누워도 되고.”

“용사 같은 건 되는 게 아니었어.”


시밀은 마른풀 위에 천을 덮은 침대에 주저앉았다. 유리가 의자를 가져와 시밀 앞에 앉았다.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건 꿈이다. 나는 그렇게 믿어. 그렇게 용사 후보가 되었고. 네가 용사 후보가 된 건, 나 같은 년보다 더 큰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야.”

“계속 이런 짓을 반복할 거라면 차라리 꿈 같은 건...!”


유리가 시밀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이어 달콤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게 꿈을 줄게. 어떤 역경에도 꺾이지 않을 튼튼한 날개와 같은 꿈을.”

“꿈 같은 건 꾸고 싶지 않아.”


시밀은 꿈에서 깨어났다.


용사에게 들이밀어진 현실은 끝나지 않는 악몽이었다.


“그래도 들어. 내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이야.”


귀를 막고 싶었다. 동시에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시밀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유리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어. 어떤 특별함도 없는, 평범한 여자아이였지. 쑥쑥 자란 아이가 3살이 되었을 때 그 일은 일어났어.”


그건, 평소 유리의 이야기보다 훨씬 깊고, 풍부하고, 다채로웠다.


시밀은, 유리의 이야기 하나만을 목표로 용사 후보가 되었던 소년의 본성은 이번에도 그 형형색색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거의 독백에 가까웠던 유리의 이야기가 멈췄다. 시밀은 그녀의 품에서 잠들었다.


유리는 시밀을 침대에 눕혔다.


“이런 식으로 특별해지는 건 원하지 않았어.”


유리는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집으로 오는 도중 한 명이 더 죽었다.


운이 나빴다면 그녀가 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사제 요한까지 포함된 죽음의 룰렛, 하지만 룰렛을 돌리지 않으면 새빛별 자체가 사라진다.


유리는 숨을 멈춘 사람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


별 먹는 것은 작은 별 수준에서 어찌해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요한이 그녀를 불러 자신의 뒷일까지 맡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유리는 자신을 남기기로 했다.


그녀를, 유리라는 영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든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유리라는 이름을, 인간을 남긴다.


한 사람을 영혼까지 더럽히겠다는 음습하고 저열한 결심.


유리는 시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너의 엄마이자 연인이자 친구가 되어줄게. 나는 죽어서도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 시밀, 너는 내 세계가 되어줘.”


***


엄마가 차려준 아침을 먹어.


콩밥에 베이컨, 이름 모를 나물 2개랑 케찹. 아, 나는 콩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밥을 먹으면 학교에 가. 걸어서 20분. 너무 길지. 그런데 그때는 괜찮았어. 같은 아파트 친구들이 있었거든.


아파트가 뭐냐고? 역시, 시밀. 넌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그래. 그게 네 꿈이 되고, 네 세계가 될 거야. 끝나지 않는 호기심. 내가 너한테 호기심을 줄게.


몇 번이고 죽어도 해소되지 않을 갈망을 줄게.


아파트는 말이지....


학교에 도착하면 사물함에서 작은 판을 꺼내 그 안에 수백 권의 책과 그림과 필기도구가 들어 있거든.


그게 가능하냐고? 알려줄게. 하지만 조금 나중에. 차근차근.


책상에 앉고, 선생님이 들어오면 수업을 시작해. 내 옆에는 최민기라는 친구가 앉았어. 매일 공부는 안 하고 딴짓하는 녀석이지.


....

....

....


중학교에 가면....


여자들은....


대학은....


그렇게 아편 전쟁을 시작한 거야....


전류가 흐르는 방향은....


사상에 정답은 없어.


수학은 신기하지?


....

....

....


세상은 넓어.


이 세상은 내가 살던 세상보다 더 넓고, 더 많은 비밀이 감춰져 있겠지.


이건 나침판이자 신념이자 꿈이야.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우면, 그래도 죽지 못하면, 나를 떠올려.


다른 세상에서 온 유리라는 영혼이 있었다는 것을.


무한한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거야.


네가 보지 못한 모든 것들을 기억해. 내가 네게 남겨준 것들을 기억해.


신념과 호기심이 역경을 버텨낼 힘을 줄 거야.


만일 내가 죽더라도, 네가 나를 기억하는 한 나는 네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


사랑해, 시밀.


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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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하늘의 규칙 +7 24.09.13 570 50 12쪽
24 새로운 생활 +16 24.09.12 599 66 13쪽
23 도읍 +6 24.09.11 620 64 13쪽
22 도읍 +13 24.09.10 636 76 15쪽
21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49 87 12쪽
20 작품명, 새빛별. +14 24.09.08 649 71 13쪽
19 대화 +7 24.09.07 632 71 14쪽
18 대화 +5 24.09.06 659 57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705 72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43 75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74 69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49 95 16쪽
13 친구 +9 24.09.01 836 84 12쪽
12 살인 +6 24.08.31 818 75 13쪽
11 용사 +6 24.08.30 829 78 14쪽
10 하늘을 보는 눈 +10 24.08.29 825 82 12쪽
9 어른들 +8 24.08.28 843 75 13쪽
8 용사들 +3 24.08.27 861 61 14쪽
7 검, 별, 원, 색. +7 24.08.26 884 72 13쪽
6 검, 별, 원. +3 24.08.25 916 71 14쪽
» 촛불 +7 24.08.24 946 84 12쪽
4 촛불 +14 24.08.23 1,039 86 14쪽
3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139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255 75 13쪽
1 작은 별의 용사 +7 24.08.22 2,398 8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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