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길을 걷는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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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비
작품등록일 :
2024.08.2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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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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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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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빛별, 그리고 나.

DUMMY

새빛별 주민들은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에게 하늘이란 변치 않는 하나의 풍경을 가리켰다.


별이 빛나는 어두컴컴한 하늘.


그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하늘을 보고 있었다.


붉은 별이 빛나는 하늘이었다.


새빛별에는 양봉업자가 한 명 있었다.


벌과 벌집은 수십 년 전 요한이 행상에게 직접 구입한 물건이었다.


양봉업자가 채취한 꿀과 벌집은 마을의 자산이었지만, 벌을 키우며 어쩌다 나오는 꿀은 양봉업자 차지였고, 마을 어른들은 누구나 꿀을 얻어먹으려고 양봉업자 주변을 알짱거린 경험이 있었다.


새빛별 주민이라면 벌집에서 무수한 벌이 날아오르는 장면을 한 번씩은 보았다.


벌집에서 나오는 벌떼처럼, 열여섯 개의 검은 별에서 검은 인간들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새빛별에서 뻗어나간 붉은 길을 부수려 했다.


별길은 부서지지 않았다.


점이 찍히고, 선이 그어졌다. 이어 스스로 빛나는 찬란한 별 하나가 자신의 빛으로 검은 별을 감쌌다.


하늘이 별빛으로 반짝였다.


하늘은 어느 때보다 많은 별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새빛별 주민들은 알았다.


저기 빛나고 있는 건 용사의 목숨이다. 동시에 그들의 목숨이다.


용사는 목숨을 불살라 새빛별을 노리는 적과 싸웠다.


털썩.


한 사람이 쓰러졌다.


새빛별에서 솟아난 붉은 별빛이 별을 노리는 거대한, 별보다 큰 검은 기둥을 반으로 갈랐다.


누구도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돌볼 필요가 없었다.


그냥 저들은 모두가 떠날 여행을 조금 앞서갔을 뿐이다.


이 전투가 누구의 승리로 끝나든,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어쩌면 아무도 없다.


털썩. 털썩. 털썩.


사람이 쓰러졌고, 그때마다 새빛별에선 조금 더 강해진 빛으로 용사가 날아올랐다.


두려움을 잊은 사람도 있었고, 두려움을 잊으려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붉은 별빛이 어지러이 휘날리는 하늘 아래서, 새빛별은 조용히 멸망해갔다.


***


붉은빛은 일반 별빛보다 훨씬 빠르고 강맹했다.


유리는 빛보다 빠른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빛이 된 용사들 사이에는 속도 차이가 있었다.


시밀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일반 별빛의 한계를 넘어섰다.


주변이 천천히 움직였다.


멈춰버린 세계 속에서 시밀만이 자유로웠다.


말 못할 해방감이 몸을 감쌌다. 그리고 말 못할 고통이 전신을 찔렀다.


열여섯 개의 별. 그리고 별의 표면에서 꾸물거리며 만들어지는 인형.


처음 봤을 때보다 족히 10배는 커진 별 먹는 것의 육체와 그 육체에서 날아오는 세는 게 무의미한 숫자의 공격들.


저게 모두 시밀의 적이었다.


시밀은 별길을 박차고 뛰었다.


선두에 선 환결과 레이의 모습을 한 인형의 목에 선을 그었다.


두 인형이 공격에 반응하려 했지만, 이미 시밀은 인형을 지나친 후였다.


하늘을 보는 눈은 난잡한 굴곡도 모두 빠짐없이 보여줬다.


그 굴곡들 사이에서, 시밀은 가장 많은 적을 꿰뚫을 수 있는 점과 선을 찾았다.


하나의 점에 수백 개의 인형이 부서졌고, 하나의 선에 수천 개의 인형이 부서졌다.


점과 선으로 칠해져 가는 하늘을 달리며 시밀은 열여섯 개의 별 중 하나에 착지했다.


별이 꿈틀거리며 시밀을 삼키려 했다. 이건 평범한 별이 아니었다. 별 먹는 것이 자신의 몸속에서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물체였다.


시밀은 빛과 색을 짜냈다.


붉은색 물감을 바른 검을 들고, 별의 표면을 달렸다.


시밀은 별 전체를 붉게 칠했다. 붉게 칠해진 별 위에서 검을 휘둘렀다.


선을 구부리면 곡선이 된다.


평범한 인간은 그 간단한 행동을 평생 익히지 못한다. 시밀도 그랬다. 수백 번의 죽음 끝에 겨우 선을 구부릴 수 있게 되었다.


검의 궤적이 별의 표면과 똑같은 굴곡으로 휘어졌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빛이 남았고, 시밀은 겨우 붙잡은 원리의 힘 일부를 끄집어냈다.


“곡선.”


별의 절반이 부서졌고.


“곡선.”


다시 그려진 곡선에 마침내 별이 붕괴했다.


원리를 담은 곡선은 모든 것을 부순다.


시밀이 사용한 건 온전한 원리가 아니라 원리의 극히 일부였다.


일부마저 별을 부순다. 온전한 원리라면, 능히 별 먹는 것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원리를 사용하고 드러난 빈틈으로 수백 개의 가시가 날아왔다.


가시가 시밀의 머리를 관통했다.


시밀은 새빛별에서 눈을 떴고, 곡선이 만든 빛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하늘로 날아갔다.


***


별을 열 개쯤 부수자 별 먹는 것이 입을 벌리고 다시 별을 만들어냈다.


시밀은 그 별들도 모조리 부쉈다.


서른두 개의 별을 부수자 별 먹는 것은 별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별을 만들기 위한 자원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물량 공세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건지 시밀에게는 알 방법이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별 먹는 것도 최후의 힘을 짜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밀은 전투를 시작할 때와 똑같은 시간 속에 있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가시와 기둥, 그리고 촉수의 속도는 명백히 빨라졌다.


방심하면 시밀도 사지가 꿰뚫릴 정도였다.


별 먹는 것은 단순히 시밀만을 노리지 않았다.


거대한 막대 하나가 시밀의 옆을 스쳤다.


시밀은 몸을 돌렸다. 등에 박힌 가시와 촉수가 가슴까지 튀어나왔지만, 고통과 치료보다 우선해야 할 게 있었다.


시밀은 새빛별에 착지했다.


별 먹는 것의 공격이 새빛별로 날아오고 있었다.


기둥과 가시는 새빛별보다 컸다. 저 가시를 말뚝으로 쓰면 새빛별을 가뿐히 가루로 만들 수 있다.


별 먹는 것은 새빛별을 먹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시밀을 죽이려 했다.


별을 부술 수 있는 거대한 물체가 수백.


“힘내요.”


백 번이 넘게 죽었다. 시신도 정리하지 못했을 텐데, 저들은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


시밀은 원리에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곡선.”


가시와 기둥에 물감이 묻었고, 기둥과 가시가 붕괴해 부서졌다.


붉은색 별길은 여전히 깔려 있었다. 시밀은 몇 번인지 모를 각오를 다지며 별길을 달리는 별이 되었다.


---!!!!


별 먹는 것이 포효했다.


시밀은 수십 번을 더 죽었다.


겹겹이 쌓인 죽음피로가 정신을 둔하게 만들었다.


이건 안 좋다.


용사에겐 팔다리보다 중요한 게 의지다.


사라진 팔다리는, 심지어 머리마저 빛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정신에 쌓인 피로는 단기간에 풀리지 않는다.


되살아난 시밀은 입술을 깨물었다.


“힘내라.”


소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시밀의 귀에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렸다.


앞만 보고 달리던 시밀이 옆을 보았다.


서 있는 사람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시신들은 땅에 방치되었다. 그리고 남은 주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밀을 응원하고 있었다.


“힘내!”

“조금만 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본인이 다음 차례가 될 수도 있다.


“가라!!!”


붉은빛을 쓰는 건 여전히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 고통조차 등을 떠미는 응원이 되었다.


시밀은 하늘이 떨리도록 소리쳤다.


“기다려라! 그곳에서 기다려라! 우리가, 너의 죽음이 간다!!!”


***


별 먹는 것의 크기가 쪼그라들었다.


시밀이 내뿜는 빛의 밝기도 줄었다.


별 먹는 것도 자신을 소모했다. 시밀은 알 수 있었다.


시밀이 목숨을 쥐어짜듯 별 먹는 것도 생명의 근원을 짜냈다.


---!!


별 먹는 것의 외침에선 처음과 같은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더욱 명료해졌다.


별 먹는 것은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며 시밀을 비웃었다.


뭉툭한 기둥이 시밀의 전신을 때렸다. 별 먹는 것은 시밀을 죽이지 않았다.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리며 공처럼 이리저리 날렸다.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붉은 별길도 군데군데 부서져 길의 역할을 잃었다.


별 먹는 것은 이제 새빛별을 향한 공격도 멈췄다.


시밀의 몸이 하늘을 날았고, 시밀의 의식도 둥둥 떠다녔다.


“아.”


실패의 단말마였다.


해내지 못했다. 실패했다.


그 많은 목숨을 짊어지고도 별 먹는 것을 죽이지 못했다.


‘이제 됐잖아?’


노력했다. 2천 번이 넘는 죽음으로 노력했다.


여기서 뭘 더 하라고?


평범한 인간 시밀은 노력했다.


불가능에 도전했고, 넘지 못했다.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시밀은 추락했다.


거꾸로 떨어지는 시밀의 눈동자 안에서 붉은 별이 반짝였다.


새빛별 위에 서 있는 건 이제 한 사람밖에 없었다.


시밀을 용서하지 않겠다던 남자였다.


남자는 시밀을 향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시밀은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싸워!”


시밀이 죽으면, 이제 마지막 남은 남자의 차례다.


정해진 죽음 앞에서 남자는 시밀을 향해 말했다.


“일어나! 싸워! 너는 마지막 희망이잖아!!!”


불현듯 남자의 몸이 기울었다. 시밀의 몸도 흩어졌다.


2천 번이 넘는 죽음 동안, 시밀은 하나의 촛불이 꺼지는 장면을 처음으로 보았다.


허망했다.


시밀이 봐왔던 어떤 죽음보다.


새빛별 주민들은 저런 걸 몇 번이나 봐왔던 건가.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된 붉은 별은 둥글었다.


시밀이 끝까지 그리지 못한, 모난 곳 없는 원이었다.


순간, 시야가 트였다.


새빛별 근처에도 별은 있다. 하지만 그건 빛도 내지 못하는 커다란 돌이다.


빛이 없는 하늘에는 빛을 내지 않는 무수한 별들이 있었고, 모두 둥그레함을 품고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리(元理)는 멀리 있지 않았다.


시밀이 평생 살아온 땅이 원리였고, 시밀이 지키려는 것 또한 원리였다.


원리는 시밀의 삶 속에 있었다.


시밀은 눈을 떴다. 새빛별이었다.


별 먹는 것이 입을 벌리고 다가왔다. 패배한 시밀을 향한 조롱이었다.


별빛은 보이지 않았다.


소용돌이무늬를 가진 눈과 크게 벌린 입이 새빛별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의 전부였다.


시밀은 별 위에 홀로였다.


모두 죽었다. 시밀이라는 불꽃이 모든 초를 태워버렸다.


시밀은 검을 별에 꽂았다. 죽은 이들의 시신이 별에 흡수되었다.


새빛별이 한층 커졌다.


시밀이 그린 붉은색에 이물질이 섞였다.


무색의 빛. 새빛별이 만드는 빛이었다.


새빛별이 내는 두 가지 빛이 눈앞에서 산란했다.


시밀은 검을 들었다.


검이 붉게 물들었다. 빛은 사방으로 뿜어지지 않고, 검에 머물렀다.


“용사의 뜻이 별의 뜻이라면, 용사의 운명이 별의 운명이라면.”


별의 용사는 별의 다른 모습이라 해도 되겠지.


그러니까.


“나를 그리면 되는 거였어.”


시밀은 검을 한 손으로 들었다. 별 먹는 것을 향해 검을 쭉 뻗었다.


그리는 것은 나 자신.


연습은 이미 넘치도록 했다.


시밀이 딛고 있는 이 별이, 별에 그어진 모든 점과 선이 시밀의 인생이며, 시밀이었다.


새빛별에 새긴 모든 그림을 한 번의 붓질에 담는다.


“나는 작은 별들의 용사. 그리고.”


빙글.


“시밀.”


춤을 추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시밀은 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검을 휘둘렀다.


궤적의 시작과 끝이 맞닿았다. 완벽한 원이었다. 동시에 시밀이자 새빛별이자 가장 높은 이치였다.


시밀은 감았던 눈을 떴다.


반으로 갈라진 별 먹는 것 사이로 별빛이 흘러들었다.


별빛이 눈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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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하늘의 규칙 +7 24.09.13 568 50 12쪽
24 새로운 생활 +16 24.09.12 598 66 13쪽
23 도읍 +6 24.09.11 619 64 13쪽
22 도읍 +13 24.09.10 635 76 15쪽
»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49 87 12쪽
20 작품명, 새빛별. +14 24.09.08 648 71 13쪽
19 대화 +7 24.09.07 632 71 14쪽
18 대화 +5 24.09.06 659 57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704 72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42 75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72 69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48 94 16쪽
13 친구 +9 24.09.01 836 83 12쪽
12 살인 +6 24.08.31 817 75 13쪽
11 용사 +6 24.08.30 829 78 14쪽
10 하늘을 보는 눈 +10 24.08.29 825 82 12쪽
9 어른들 +8 24.08.28 843 75 13쪽
8 용사들 +3 24.08.27 860 61 14쪽
7 검, 별, 원, 색. +7 24.08.26 884 72 13쪽
6 검, 별, 원. +3 24.08.25 915 71 14쪽
5 촛불 +7 24.08.24 945 84 12쪽
4 촛불 +14 24.08.23 1,038 86 14쪽
3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138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254 75 13쪽
1 작은 별의 용사 +7 24.08.22 2,396 8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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