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길을 걷는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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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비
작품등록일 :
2024.08.2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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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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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활

DUMMY

시밀은 떨어지는 대지에서 모든 사람을 구해냈다.


사방에서 찬사가 쏟아지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감사를 표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었다.


“내 집... 내 공방....”

“차라리 같이 죽었더라면 좋았을걸....”

“왜 나를 살린 거야!”


집과 가산을 모두 잃었다. 그 절망은 시밀이 진정으로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정이다.


시밀 또한 잃은 적이 있으니까.


마음이 뜯겨나가는 상실은 사물을 보는 눈까지 함께 앗아간다.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 한 명이 시밀의 멱살을 잡았다.


“나는 거기서 죽으려고 했어! 그런데 왜 살린 거야! 왜!”

“그래?”


시밀에게 죽음은 무거우면서 가벼웠다.


본의 아닌, 무의미한 죽음은 한없이 무겁지만, 당사자의 바람이라면 시밀은 수백만 명도 망설임 없이 학살할 수 있다.


그게 시밀이 별의 용사로서 지낸 세월이며, 배우고 익힌 것들이다.


사람을 그리는 화가는 인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시밀은 전문가들을 가르치는 전문가였다.


별빛을 담은 손가락으로 팔에 점을 찍었다.


노숙자의 팔이 마비되었고, 시밀은 그대로 팔을 잡고 노숙자를 구멍 아래로 던졌다.


“이, 이 미친 살인마! 사, 살려줘! 살려줘어어!!!”


시밀은 살려달라는 노숙자를 구했다.


그리고 그를 앞에 두고 물었다.


“죽고 싶다며?”

“그, 그건....”

“떨어지는 게 무섭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시밀은 검을 뽑았다.


점 하나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시밀은 이걸 연합에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던 방법으로 알게 되었다.


“자, 잠깐!”

“그는 돈을 달라는 겁니다.”


리질란이었다.


사제 옷은 어디 가고 완벽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이 옷 말입니까? 보조 임무에는 이쪽이 더 적합해서 갈아입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의 말은 무슨 뜻이지?”

“외형은 어린데 빛처럼 움직이는 능력을 가졌고, 말투도 오만하니 어디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으로 보였겠죠.”


도련님은 아니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건 맞았다.


“당신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물에 빠진 사람 구하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격입니다.”

“나는 그걸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워.”

“지구 쪽 개념은 리틸렌 쪽과 함께 유용하게 자주 쓰이니, 알아두면 좋습니다. 용사 중에도 그쪽 출신이 한 명씩 있습니다.”

“... 이런 대화를 길거리에서 해도 되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적당히 각색되어서 들리고 있을 겁니다. 도읍의 힘이죠.”


시밀은 보따리 내놓으라는 노숙자에게 눈을 돌렸다.


노숙자는 시밀의 안색을 살피며 벌벌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이지?”

“죽이는 겁니다.”

“... 죽여?”


시밀의 눈썹이 안쪽으로 모였다.


“근처를 보시죠. 얼굴은 이미 팔렸습니다. 여기서 어설프게 자비를 베풀면, 비슷한 인간들이 끝도 없이 꼬일 겁니다.”

“살려주십쇼. 제발 살려주십쇼.”


이번 대화는 각색되지 않았는지 노숙자는 무릎 꿇고 시밀에게 빌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죽여라 살려라 여러 말이 들렸다. 죽이라는 쪽이 압도적이었다.


구경꾼들에게는 즐겁기만 하면 그만이겠지.


시밀은 검을 넣었다.


“꺼져.”

“감사합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몇몇 사람이 시밀을 야유했다. ‘우우 겁쟁이!’. ‘남자도 아니다!’ 따위의 내용이었다.


‘피곤해.’


3번은 죽었다가 살아난 수준으로 피곤했다.


죽어야 할 사람을 살렸다. 분명 올바른 일이다.


이게 이만큼 피곤해야 할 일이고, 야유까지 들어야 할 일이었던가?


“이게 현실입니다. 씁쓸하고, 개 같죠.”

“내가 용사라는 걸 밝히면, 저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도망간 노숙자와 똑같을 겁니다. 고개를 박고 빌겠죠. 근본적으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고요.”

“이 대화도 검열되고 있겠지?”

“검열이 아니라 각색입니다. 용사를 언급했으니, 각색되고 있습니다.”


시밀은 구경꾼 사이에서 화가 조합 소속 화가를 찾았다.


“아무것도 안 하실 겁니까?”

“비슷한 인간들이 끝도 없이 꼬인다며? 기왕 이렇게 됐으니, 어디까지 나올지 한 번 보고 싶어졌어. ”

“시간만 낭비할 겁니다. 집을 구한다는 계획도 미뤄지겠죠.”

“상관없어. 이게 더 궁금하니까.”

“궁금증?”

“그게 내가 사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야.”


시밀은 화가에게 다가갔다.


조합장이 빛이 되어 죽어야 할 인간 수백 명을 구하는 장면을 직관하며 충성심이 최대치까지 올라간 조합 소속 화가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조합장을 영접했다.


***


화가는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직업이 아니다.


그림은 기본이고, 간단하게라도 색을 다룰 줄 알게 되면 무력이 필요한 다양한 일에 투입된다.


빛을 흡수하는 색은 빛만을 무기로 사용하는 자들의 천적이다.


그림도 팔고, 색도 팔고, 무력도 파는 화가 조합은 재정이 풍족했고, 도구를 중요시하는 화가 조합은 이런 사태를 대비해 건물 전체를 띄울 수 있는 장치를 해뒀다.


시밀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조합 건물에 들어가자 전 조합장이 달려 나왔다. 그는 시밀 옆에 있는 리질란을 힐끗 보고 시밀에게 고갤 숙였다.


“조합장님 오셨습니까.”


조합장 말고도 시밀이 얼굴을 아는 조합원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한 번씩 리질란의 눈치를 보았다.


시밀이 처음 연합에 왔을 때는 사제복 차림의 리질란과 함께였다. 저들은 리질란이 사제라는 걸 알았다.


시밀이 전 조합장에게 물었다.


“이런 경우 보통은 어떻게 하지?”

“근처 땅에 건물을 내려놓습니다.”

“빈 땅이 있나?”

“토지 매매 자금이 따로 있습니다. 일단 땅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그래. 그리고 그림을 팔아야겠어.”

“조합장님의 그림을요?” “당연히 내 그림이지. 또 이제부터 네가 부조합장이다.”


시밀이 조합장 자리를 뺏으며 부조합장의 자리가 애매해졌다.


조합장이 실력에서 밀려 내려왔으니, 당연히 부조합장이 되어야 한다는 쪽과 자기가 스스로 물러났으면서 부조합장 자리를 요구하는 게 말이 되냐는 기존 부조합장의 갈등이었다.


저들은 조용히 처리한다고 시밀에게 안 들리는 곳에서 떠들었지만, 시밀의 신체 능력을 너무 우습게 본 행동이었다.


비밀을 찔린 전 조합장의 몸이 꿈틀 움직였다. 그와 별개로 얼굴에선 웃음꽃이 피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새로 부임한 부조합장은 일머리가 좋았다.


공터를 구매하고, 그곳에 조합 건물은 안착시키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화가 조합의 건물 말고도 여러 건물이 새로운 땅을 찾아가고 있었다.


“위로 가는 건물은 뭐지?”

“이참에 좀 더 수준 높은 조합 거리로 이전하던가, 아예 하늘에서 살려는 자들입니다.”


부조합장은 시밀이 도읍에 막 왔다는 걸 알았다.


딱히 숨길 내용도 아니었다.


지방 청년들이 도시로 상경하는 것처럼, 도읍 인근 별의 청년들은 돈을 모아 도읍에 오는 게 흔하다고 했다.


빛의 아이만이 아니라 색이나 하늘, 기타 세력에 속한 사람들도 도읍을 찾는단다.


“하늘에 산다고?”

“저희도 무리하면 가능합니다.”

“딱히 필요하진 않아. 매일 보기 좋은 경치는 아니고.”


하늘은 시밀에게 동경과 모험의 장소이자 고독의 장소였다.


목적을 가지지 않고 하늘에 나가는 행동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다.


“부조합장. 그림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조합 경매에 걸던가, 바깥에 보이도록 걸어둡니다. 무너진 대지를 복구하고 경매를 열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바깥에 걸어두는 게 좋습니다.”


조합 안쪽에는 유리가 있었고, 바깥에서 보이도록 여러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


시밀은 조합장실에 있는 그림 몇 개를 골랐다. 시밀이 그린 그림들이었다.


“조합장님. 그림이 아니라 조합장님의 무력을 사러 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력은 안 팔아.”

“알겠습니다.”


부조합장이 그림을 가지고 나갔다.


시밀은 옆에 있던 종이를 앞에 두고, 연필을 잡듯 허공을 살포시 쥐었다.


붉은 물감이 뭉쳐 붉은 색연필이 되었다.


“원색...?”


뒤에서 멍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꺼내면 안 되는 물건이었나? 자리를 잡은 다음에는 써도 된다고 들었는데.”

“그걸 대체 누구에게?”

“삼원색 우레길.”

“그에게 직접 배운 거라면, 그 비정상적인 실력도 말이 되는군요.”


리질란은 그 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다만, 깊은 침묵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시밀은 붉은 색연필을 종이 위로 쭉쭉 그었다. 색연필은 시밀의 의지에 따라 붉은 계열에 속한 색이라면 뭐든지 만들어냈다.


칠해진 색에 빛을 흘렸다. 색은 빛을 흡수하며 은은하게 빛났다.


“이것도 팔면 안 되나?”

“가능하지만, 당연히 추천은 안 합니다.”

“가진 건 많지만, 팔 수 있는 건 없군.”


색연필에 익숙해지는 작업이다. 진심으로 그림을 그릴 건 아니었다.


시밀은 도읍과 성지의 풍경을 그렸다. 완성한 그림은 빛으로 태웠다.


시밀이 열 장째 그림을 태웠을 무렵 부조합장이 문을 두드렸다.


“조합장님.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려.”


시밀은 1층으로 내려갔다.


“용병입니다.”


리질란이 말했다.


거지꼴의 남자 한 명이 찢어진 그림을 든 채 화가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 조합장 나리셔? 이 그림, 실수로 찢어버렸어. 그래서 내가 사려고 하는데, 안 판다는 거 있지?”

“꺼져가는 빛 한 조각을 제시했습니다. 실수 이전에 그림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림의 주인이 말했다.


찢어진 그림은 색을 쓴 그림으로, 유사시 자기 방비 도구로도 쓸 수 있는 작품이었다.


색을 쓰지 않은 부분을 골라 찢었다. 고의성이 다분했다.


리질란이 속삭였다.


“시야를 넓게 보시죠.”

“뭐가 많아.”

“그냥 던져본 겁니다.”


은밀히 이쪽을 지켜보는 사람이 십여 명. 모두 비슷한 성질의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응? 내가 산다니까. 안 팔 거야? 안 팔 거냐고!”


용병이 소리쳤다.


시밀은 용병에게 좋은 기억이 없었다.


처음 만난 용병이란 작자들이 시밀을 팔아넘기려 했으니, 첫인상부터가 최악이었다.


“부조합장. 지하실 하나 만드는 데 얼마 걸려?”

“화장실 가셔서 볼일 보고 나오는 사이 완성할 수도 있습니다!”

“지, 지하실? 그런 짓을 하면 용병 조합에서 가만있을 것 같아?!”

“내가 무슨 짓을 시킬 줄 알고?”

“고문...?”

“아니. 넌 그림을 그릴 거야.”


용병이 입을 헤 벌렸다. 지하실 공사에 착수하려던 부조합장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실수로 찢었다. 책임질 의사도 있다. 그러면 이쪽 요구도 수용할 준비가 되었겠지?”

“그러니까, 돈 주고 산다고!”

“그림은 화가의 영혼이다. 영혼을 파는 건 화가 본인의 의지가 있을 때만 허락되지. 이봐, 그림을 팔 건가?”

“제 영혼이 불타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안 팔 겁니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지. 똑같이 영혼을 담은 그림으로 갚는다.”

“그, 그런 억지가....”

“나는 억지 부려도 돼. 제압해. 부조합장은 지하실 만들고.”


용병이 무기를 뽑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포위당한 상태였다.


용병을 제압하자 바깥에 있던 무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무기를 들고 조합 건물 앞에 모였다.


“다들 할 일 해.”


시밀은 빛이 되어 그들을 제압했다. 이 근방에 있는 조합과 조합원들의 수준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연합에 있던 별의 용사를 아무나 데려와도 정리가 되는 실력이었다.


시밀은 그들도 묶어 조합 안으로 던졌다.


“받은 대로 갚는다.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명분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조합원을 잃은 용병 조합이 항의하겠죠.”

“보조 사제는 용사를 보조하는 자리라고 하지 않았나?”

“명하신다면 용병 조합을 침묵시키고 오겠습니다.”


하늘을 보는 눈으로도 리질란의 역량을 읽을 수가 없었다.


시밀이 명령하면, 리질란은 용병 조합을 모두 죽여서라도 문제를 해결하고 올 것이다.


“됐어. 색다른 경험은 바라는 바니까.”


하지만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일에 남의 손을 빌리는 건 시밀의 방식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났다.


용병 조합에서 수십 명의 용병이 몰려왔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용병 조합에서 백여 명의 용병이 몰려왔다.


또 하루가 지났다.


용병 조합에서 수백 명의 용병이 몰려왔고, 용병 조합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화가 조합 지하에는 수백 명의 화가 지망생들이 생겨났다.


화가 조합의 유례없는 부흥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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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하늘의 규칙 +11 24.09.14 577 54 13쪽
25 하늘의 규칙 +7 24.09.13 568 50 12쪽
» 새로운 생활 +16 24.09.12 598 66 13쪽
23 도읍 +6 24.09.11 618 64 13쪽
22 도읍 +13 24.09.10 635 76 15쪽
21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48 87 12쪽
20 작품명, 새빛별. +14 24.09.08 648 71 13쪽
19 대화 +7 24.09.07 631 71 14쪽
18 대화 +5 24.09.06 659 57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704 72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42 75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72 69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48 94 16쪽
13 친구 +9 24.09.01 835 83 12쪽
12 살인 +6 24.08.31 817 74 13쪽
11 용사 +6 24.08.30 828 78 14쪽
10 하늘을 보는 눈 +10 24.08.29 824 82 12쪽
9 어른들 +8 24.08.28 842 75 13쪽
8 용사들 +3 24.08.27 860 61 14쪽
7 검, 별, 원, 색. +7 24.08.26 883 72 13쪽
6 검, 별, 원. +3 24.08.25 915 71 14쪽
5 촛불 +7 24.08.24 945 84 12쪽
4 촛불 +14 24.08.23 1,038 86 14쪽
3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138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254 75 13쪽
1 작은 별의 용사 +7 24.08.22 2,396 8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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