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길을 걷는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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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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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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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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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규칙

DUMMY

집을 구할 여유가 없었던 시밀은 조합장실에 작은 침대를 두고 쓰게 되었다.


도읍의 침대는 시밀이 아는 침대였다.


시밀이 아는 침대란 매트리스를 이용한 지구의 침대를 의미했다.


침대 말고도 흘러들어온 자의 지식이 쓰인 부분이 여기저기 보였다.


지구 말고 다른 장소에서 흘러들어온 자의 지식도 어딘가에서 쓰이고 있을 터였다.


시밀은 매일 잠을 잘 필요는 없다.


사나흘에 한번 짧게 숙면하면 됐고, 빛으로 뇌를 회복해도 됐다. 그래도 시밀은 잘 수 있으면 자두는 편이었다.


침대에서 벗어나 아침을 먹는다.


조합 소속 화가들은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밥을 먹지만, 시밀에게는 미각을 유지하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너무 오래 미각을 사용하지 않으면, 미각이 퇴화하거나 반대로 너무 예민해져 공기에 섞인 먼지의 맛을 느끼거나 했다.


시밀은 적당히 자극적인 맛을 선호했다. 조합장실 앞에 준비된 간식으로 미각을 자극하며, 지하실로 향한다.


지하실에서는 수백 명의 화가 지망생들이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지망생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신의 성장에 영혼으로 기쁨을 느끼면 간혹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오고는 했다.


“때려치워! 난 곧 상위 조합으로 갈 몸이었다고! 이딴 거리에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다 죽이고 여길 나가겠어! 너희도 무기 들어! 화가 새끼들 때려잡는 건 일도 아니잖아!”


지망생의 벅찬 포부는 금방 진압되었다.


시밀이 지망생의 머리로 이어지는 점을 찍었다. 손가락으로, 콕.


근처에서 남자를 제압하려던 화가들이 시밀을 확인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밀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금방 진압되었을 일이었다.


화가 조합의 화가는 백 명이 조금 넘었다. 순수 전투력으로 수백 용병을 앞설 수 없다.


그러나 여긴 조합 소속 화가들이 직접 만든 지하실이고, 싸움에 쓸 물건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준비한 물감을 뿌리기만 해도 용병들은 몸보다 무거운 무기를 붕붕 휘두르던 초인에서 평범한 인간이 된다.


“오셨습니까.”

“상황은 어때. 부조합장.”

“항의해야 할 용병 조합이 사라진 시점에서 저희를 막을 수 있는 건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2년만 그림을 가르치면 저들도 훌륭한 화가가 될 겁니다. 흐흐흐....”


부조합장의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도읍에선 화가의 취급이 좋지 않았다. 화가만이 아니라 색을 다루는 직업들은 전부 그랬다.


색과 빛은 서로 다른 세력이다.


여기는 빛이 태어난 땅이고, 색은 빛을 흡수하는 힘을 가졌다.


그것만으로 차별받을 이유는 충분했다.


조합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 화가가 된 사람들이었다.


과정은 다소 이상하지만, 그래도 타인에게 그림의 매력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조합원이 많았다.


부조합장도 그중 하나였고.


시밀이 고개를 들었다. 별빛이 조합에 발을 들였다.


리질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상위 조합입니다. 빠르군요.”

“조합장님....”

“내가 간다.”


시밀은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왔다.


대검을 맨 남자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꼬마?”

“여기 조합장이다. 예의를 갖춰.”

“용병 조합에서 나왔다. 너희가 납치한 조합원들을 내놔라.”

“그들은 빚을 갚고 있다. 계약과 계산에 민감한 건 화가보단 용병 아닌가?”

“그딴 거 모르겠고.”


남자가 대검을 뽑았다.


빛 맺힌 대검이 시밀의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모가지 잘리기 싫으면 그냥 내놔.”


시밀은 남자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남자의 이마에 붉은색 점이 찍혔고, 남자가 쓰러졌다.


“찾아오는 사람을 전부 지하실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여기가 중간 규모라 했지? 그러면 위랑 아래는?”

“아래로 갈수록 치안과 규율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가장 밑바닥은 화가가 물감이 아니라 사람 피로 그림을 그리고, 용병들은 의뢰가 아니라 살인과 약탈을 주업으로 삼습니다.”

“별 약탈자 같은 것들?”

“약탈자 조합이 있긴 하지만, 도읍에서 그들이 발붙일 자리는 없습니다.”

“위쪽은 어때?”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선, 비교적 규칙들이 잘 지켜지는 법이죠.”

“속으로는 아니란 거고.”


보이지 않는 정치질과 뒷공작이 만연해 있다는 거겠지.


상위 용병 조합에서 손을 쓰기 시작했다.


중간 규모 조합 거리에 있는 이곳보다 규모가 크고, 소속원들의 평균 실력도 높을 게 분명했다.


시밀은 어지간한 일이 터져도 자기 몸은 빼낼 자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위업’이라는 걸 세운 빛의 용사가 고작 용병 따위를 이기지 못하면 용사라는 체제가 유지될 리가 없다.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시밀은 하나의 조합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다.


진정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조합장 자리에서 물러나도 되었다. 시밀이 여기 있는 건 이 자리가, 조합 소속 화가들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제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기각.”


리질란이 권유할 방법은 뻔했다.


폭력으로 찍어누르고 하위 조합 하나 깔끔하게 포기하라고 협박하라는 거겠지.


저번에 무너진 대지는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조합 거리가 사라지며 증발해버린 조합도 있었다.


용병 조합도 그런 조합 중 하나로 처리해버리면 그만이라는 게 리질란의 설명이었다.


“더 쉬운 방법이 있지.”


한 남자가 조합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에는 권총으로 보이는 손잡이가 있었다.


“정장?”

“20번째는 흘러들어온 자였나? 드디어 나도 동향 사람을 동료로 받는군. 연기의 용사 존 본드 18번째 용사다.”

“차라리 제임스라 하지?”

“나는 특수요원보다는 하드보일드 킬러가 마음에 들어서.”

“임무입니까?”


리질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존 본드는 리질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청이 통과됐다. 배정된 임무는 두 개. 나 말고 물방울도 있는데, 그쪽은 현지에서 합류할 거야.”


시밀은 리질란을 통해 집값을 벌기 위한 자원 임무를 신청해뒀다.


이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만, 그래도 하늘이 보이는 집은 필요했다.


‘이것도 유리 누나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어.’


유리는 집의 중요성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집을 살 거면 터 좋고 집값도 높은 곳으로 가라나?


시밀의 가슴에는 유리가, 유리의 지식과 기억이 있다.


행동과 선택에 유리의 영향을 받는다.


“문제를 해결할 쉬운 방법이란 건 뭐지?”

“용병 조합 본부에서 직접 명령하는 거지. 손 떼라고. 그리고 나는 용병 조합 본부장이고.”

“대가는?”

“필요 없어. 동향 출신 신입한테 주는 선물인 셈 치지.”

“그러면 나는 전입 선물로 이걸 주지.”


시밀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싸구려 종이에 그린 그림이지만, 시밀이 제대로 그린 그림이기도 했다.


존 본드는 종이를 펼쳐보고 감탄했다.


“도읍을 그린 그림인가? 몽땅 색을 활용했고. 작은 별에 있는 빛은 전부 빨아들이겠어.”


시밀의 그림 하나로 작은 별을 1달은 묶어둘 수 있었고, 중간 규모의 별도 잠깐은 마비시킬 수 있었다.


말하자면 별 단위의 특급 EMP였다.


“조아쓰. 용병 조합은 내가 책임진다! 용병 조합 이름표 달고 깽판 치는 놈들은 그 순간부터 조합원이 아니게 될 테니까, 알아서들 해.”

“잘됐군.”

“사적인 이야기는 끝났고. 공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첫 번째 임무는 별 하나의 처분. 가서 별을 없애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임무야. 쉽지?”


별을 처분한다.


등골을 타고 한기가 내달리는 말이었다.


시밀은 애써 침착했다.


“별을 없애면, 거기 사는 사람은?”

“이봐, 동향 친구. 용사를 써서라도 별을 없앤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거야. 이미 그 안에 사는 사람을 고려할 단계는 지났다는 거지.”

“... 용사는 빛의 희망 아니었나?”

“눈으로 보면 안다. 선배로서 해줄 말이 없진 않은데, 전부 눈으로 보고 설명하는 게 훨씬 받아들이기 편하단 말이지. 그리고 너, 임무에 특이한 조건을 걸었더라? 별 먹는 것 사냥이 최우선?”

“그렇게 맹세했으니까.”

“맹세 좋지. 이 미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한 가지 심지는 남겨두는 게 좋아.”


존 본드가 조합 밖으로 시밀을 질질 끌고 나갔다.


“잠깐, 아직 준비가....”

“용사의 임무는 무엇보다, 우리 목숨보다 우선이야. 그리고 보조 사제가 왜 용사한테 들러붙어 있겠어? 너는 그냥 시키기만 하면 돼.”

“연기의 용사 말이 맞습니다.”


리질란에게 자잘한 일을 부탁하긴 했지만, 전적으로 그에게 일을 맡긴 적은 없었다.


가늠할 수 없는 리질란이라는 인간이 어떤 짓을 벌일지 몰랐다.


다른 용사를 앞에 둔 지금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시밀은 자칭 존 본드, 연기의 용사의 강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용사조차 가늠하는 눈으로 읽을 수 없는 보조 사제라는 게 있을 수 있는 걸까?


화가 조합은 여러 조합에게 주시받고 있다. 시밀이 자리를 비운 사이 조합을 지켜줄 사람은 필요했다.


“리잘란. 조합을 지켜. 단, 사람이 최대한 덜 죽는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공격해오는 적은 어떻게 합니까?”

“죽여.”


거기까지 봐줄 마음은 없었다.


***


시밀과 존 본드는 도읍의 하늘로 나섰다.


시밀은 작은 별길을 만들었고, 존 본드는 입에서 뿜어낸 연기에 올라탔다.


“용병 조합은?”

“오기 전에 처리했지. 네가 누구든 신입 선물로 처리해 줄 거였어.”

“몇 개 묻고 싶은 게 있다.”

“말해.”

“20번째 용사의 평가가 좋지 않더군. 나는 아직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시밀의 청력은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주위의 소리를 잡아냈고, 20번째 용사를 욕하는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들이 시밀을 욕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중견급 조합 구역이라면 구체적인 정보도 손에 못 넣었으려나. 보조 사제는 아무 말 안 해?”

“알아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밀이 아니라 20번째 용사를 욕하는 건 시밀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약간 기분은 나쁘지만, 그게 다였다.


“20번째 용사가 탄생하는 날, 하늘은 멸망의 기로에 놓일 것이다. 성지에 내려온 오래된 예언이지.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용사의 숫자가 20명이 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불길한 예언은 막연한 불안으로 바뀌었고, 20번째 용사에 대한 적대감만 남은 거지.”

“... 내 인생이지만, 정말 풀리는 일이 없어.”


용사 후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의 용사로 뽑혀 별 먹는 것을 상대로 싸웠다.


기적에 기적이 겹쳐 별 먹는 것을 죽이고 진짜 용사가 되어 도읍에 왔더니, 20번째 용사는 기피 받는 존재란다.


기막히게 꼬인 인생이었다.


“용사 중에도 예언을 불길하게 여기는 놈들이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곧 만날 물방울도 그렇고.”

“용사끼리 죽이기도 하나?”

“경우에 따라선. 등수를 올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 승단전을 신청해서 자기보다 등수 높은 용사를 죽이는 거야.”


몇 번째 용사라는 건 용사가 된 순서가 아니라 용사의 순위였다.


용사 본인 하기에 따라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었다.


존 본드의 구름은 빛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고, 시밀은 그냥 빛이 되었다.


쉬지 않고 움직인 둘은 보통 사람이라면 수십 년은 걸릴 거리를 건너뛰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밀의 앞에 나타난 건 높이 올라간 굴뚝으로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해진 별이었다.


“저건 공장?”

“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는 법인데, 그걸 모르는 머저리가 너무 많아.”


존 본드는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담배를 물고 연기를 뻐끔뻐끔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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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하늘의 규칙 +11 24.09.14 577 54 13쪽
» 하늘의 규칙 +7 24.09.13 569 50 12쪽
24 새로운 생활 +16 24.09.12 599 66 13쪽
23 도읍 +6 24.09.11 619 64 13쪽
22 도읍 +13 24.09.10 635 76 15쪽
21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49 87 12쪽
20 작품명, 새빛별. +14 24.09.08 649 71 13쪽
19 대화 +7 24.09.07 632 71 14쪽
18 대화 +5 24.09.06 659 57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705 72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42 75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72 69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49 94 16쪽
13 친구 +9 24.09.01 836 84 12쪽
12 살인 +6 24.08.31 817 75 13쪽
11 용사 +6 24.08.30 829 78 14쪽
10 하늘을 보는 눈 +10 24.08.29 825 82 12쪽
9 어른들 +8 24.08.28 843 75 13쪽
8 용사들 +3 24.08.27 861 61 14쪽
7 검, 별, 원, 색. +7 24.08.26 884 72 13쪽
6 검, 별, 원. +3 24.08.25 916 71 14쪽
5 촛불 +7 24.08.24 945 84 12쪽
4 촛불 +14 24.08.23 1,038 86 14쪽
3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139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254 75 13쪽
1 작은 별의 용사 +7 24.08.22 2,396 8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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