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길을 걷는 용사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새글

태대비
작품등록일 :
2024.08.22 10:36
최근연재일 :
2024.09.19 1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5,253
추천수 :
2,182
글자수 :
184,865

작성
24.09.17 19:00
조회
505
추천
54
글자
13쪽

비탄의 사랑

DUMMY

강아지를 한 마리 주운 기분이었다.


물론, 시밀은 애완동물은커녕 애완벌레 한 마리 키워본 적 없다.


모두 유리의 경험이다.


그것은 고양이라기에는 친근했고, 강아지라기에는 까칠했다.


시밀이 가까이 가며 눈치를 보며 살살 거리를 벌리고, 시선이 느껴져 그쪽을 보면 고개를 돌렸다.


물방울 용사 비옌은 조합 화가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녀가 용사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조합장이 거지꼴 여자 하나를 주웠다는 것에 화가들이 관심을 보였고, 다음에는 비옌이 가진 미술의 재능에 꽂혔다.


몸을 잘 다루는 사람은 그림도 잘 그린다.


두 개의 재능이 완전히 대응하는 건 아니지만, 생전 처음 붓과 연필을 잡은 사람이 긋는 선과 자기 몸을 완벽에 가깝게 통제할 수 있으며, 뛰어난 수준의 검술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 긋는 선이 같을 수는 없었다.


조합 화가들은 재능 있는 신입에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풀었고, 비옌도 눈앞의 종이를 노려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시밀은 비옌의 뒤를 지나가며 그녀가 그린 그림을 힐끗 보았다.


저택을 그린 풍경화였다. 이 근방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었다.


‘디테일이 없어.’


그림은 대부분이 뭉개져 있었다.


특수한 기법은 아니었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손가락 형태가 변하도록 풍경화를 그린 경험이 있는 시밀이 보기에, 저건 생각이 안 나서 못 그린 것이었다.


디테일 없이 뭉개진, 형체만 남은 거대한 저택.


물을 것도 없이 비옌의 집이었다.


평생을 살았지만, 기억에 없는 장소. 그래서 물감을 뭉개서 표현해야만 하는 장소.


그게 비옌이 기억하는 집이었다.


그림 한쪽 구석에 유난히 붓이 자주 간 건물이 하나 있었다.


벽돌에 새겨진 실금까지 표현된 작은 훈련장이었다.


조합장이었지만, 시밀이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잘한 일은 부조합장이 전부 처리했다.


그런 부조합장이 시밀을 불렀다.


“나를 산다고?”

“예. 그림 의뢰입니다.”

“의뢰자는? 내 그림을 사 갔다는 그 사람?”


시밀이 자리를 비운 사이, 팔려고 내놓은 시밀의 그림 한 점이 팔렸다.


시밀의 그림은 중견 규모의 조합 거리에 걸려 있기에는 너무 비싼 물건이었다. 물건값을 낮출 수도 없었다.


조합장이자 조합 소속 화가인 시밀이 자기 그림의 가치를 낮추면, 조합 소속 화가가 그린 모든 그림이 제값을 받지 못한다.


팔릴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대뜸 그림 하나가 팔렸다며 상당한 금액이 들어와 놀랐었다.


“뒤가 구린 일 같은데.”

“그쪽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부조합장이 단언했다.


이어지는 말이 부조합장이 가진 확신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그 사람은 비탄이 이어지는 저택의 관리자입니다.”

“비탄이 이어지는 저택? 비탄의 용사?”

“그렇습니다.”


비탄의 용사. 만난 적은 없지만, 시밀과 완전히 연이 없다고 하기에도 힘든 인물이었다.


별 먹는 것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붉은빛. 그리고 빛에 색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을 해준 사람이 비탄의 삼녀 애도였다.


부조합장은 도읍에서 손꼽 는 실력을 가졌으면서 도읍 물정에는 어두운 조합장을 위해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뛰어난 신입 화가가 나타나면, 비탄의 용사는 그들을 집으로 불러 한 장의 초상화를 요구합니다. 여태 비탄의 용사를 만족시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최상위 화가 조합의 화가들마저 비탄의 용사가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화가 사이에선 유명한 이야기죠.”

“초상화라면, 누구를 그리는 거지?”

“그의 아내입니다. 비탄의 용사 본인이 직접 찢어 흩뿌린.”


전후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탄의 용사는 죽은 아내의 시신을 찢어발겼고, 그 잔해에서 비통, 상심, 애도의 세 자매가 태어났다.


비탄의 용사는 그 일로 빛에게 인정받아 용사가 되었다.


시밀 빼고 조합 사람 전원이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아내의 시신을 찢었다고? 어째서?”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비탄의 용사가 만족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는 그 진실을 알게 되리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비탄의 용사는, 돈이 많나?”


어린 조합장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던 질문이었기에 부조합장은 대답에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예. 많습니다.”

“얼마나?”


비탄의 용사는 도읍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문가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수천 년 전 망했지만, 현재도 그 자산이 남아있다고 한다.


가문의 재산이 남아있지 않아도 그는 13번째 용사였다.


용사.


도읍 안에서는 불가능을 찾는 게 더 빠른 직책이다.


비탄의 용사가 돈이 얼마나 많은지 표현하라고?


한참이나 고민하던 부조합장의 입에서 나온 건 결국 이런 말이었다.


“어... 아주아주?”

“수락할게. 언제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부조합장이 연락을 취하고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을 무렵이었다.


조합 건물 앞으로 탁한 별길이 깔렸다.


“비탄의 마차잖아?”

“화가 조합이라면, 그거겠군.”

“그 작은 조합장의 실력이 비탄이 부를 정도였나?”

“야! 조합장이 작으면, 조합장하고 얼마 차이도 안 나는 사람은 뭐가 되냐!”

“아, 씨 인간도 아닌 게!”

“마음은 인간이다! 싸우자!”


비탄의 용사의 그림 의뢰는 다른 조합의 조합원들에게도 유명했다.


비탄의 용사에게 초대받은 화가와 작업하면 적어도 화가의 실력으로 피를 볼 일은 없었다.


거대한 어둠이 끄는 마차가 화가 조합 앞에 멈췄다.


마차에서 머리에 두 개의 커다란 뿔을 단 남자가 내렸다.


시밀 옆에 있던 부조합장이 말했다.


“관리자입니다.”


관리자는 조합 앞에 나와 있던 시밀에게 곧장 다가왔다.


“그대가 조합장인가?”

“그래.”

“타라. 지금 간다.”


시밀은 마차로 걸어갔다.


관리자는 약간 당황해 물었다.


“도구는 따로 챙기지 않나?”

“어지간한 도구는 그쪽에 다 준비되어 있겠지. 없다면 지금 꺼내오고.”


자존심이 상한 관리자가 말했다.


“있다. 최상위 화가 조합에서 쓰는 물건이지. 다룰 수 있나?”

“싸구려만 아니라면.”

“... 허세만큼이나 실력도 있길 빌지.”

“그렇게 들렸나? 나는 진심이었는데.”

“... 지켜보겠다.”


역할은 다하겠다는 건지 관리자가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는 하늘을 달려 도읍을 벗어났다. 그리고 도읍 아래로 들어갔다.


마차가 대지 아래를 달렸다.


아래에는 태초의 빛이 있었고, 위에는 대륙의 밑부분이 보였다.


쭉 이어진 갈색과 중간중간 박힌 별들이 또 다른 하늘 같기도 했다.


마차는 성지와 이어진 줄기 근처에서 멈췄다.


줄기 옆에 별빛으로 만든 땅이 있었다. 비탄이 이어지는 저택은 그 별빛 위에 세워져 있었다.


마차가 저택 정원에 착지했다.


정원에는 색색의 꽃과 관목이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저택 안에서는 역할에 충실할 셈인지 관리자의 태도는 정중했다.


“정원을 관리하는 건 당신인가? 아니, 한 명 더 있어.”

“... 저와 둘째 아가씨가 관리합니다.”

“색이 빼앗긴 부분이 둘째 아가씨가 관리하는 영역이겠지?”


이 정원에 있는 색 태반은 가짜였다.


자연의 꽃은 저런 색을 내지 않는다. 누가 꽃잎에 색을 칠했다. 진짜 꽃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색칠이었지만,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할 기술은 아니었다.


그보다 관심이 가는 건 색을 빼앗긴 부분이었다.


정원 군데군데 유난히 색이 옅어진 부분들이 있었다.


“노랑, 파랑, 초록 약간. 신기한 식성이군. 둘째 아가씨의 이름이 뭐지?”

“거기까지 보면서, 둘째 아가씨의 성함도 모른다고...?”

“모른다.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관리자는 경악과 황당함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부조합장과 조합 화가들이 질리도록 보여준 표정이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시밀도 자신에게 상식이 부족한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상식을 따로 배울 마음은 없었다.


‘알아야 할 지식이라면 나중에 다 알게 되겠지.’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유리는 마지막까지 지구의 지식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밀의 평가가 아니라 유리 본인이 말했다.


조금만 더 빨리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좋았을 거라고.


“상심. 둘째 아가씨의 성함은 상심이십니다.”

“상심과 애도라. 첫째는 애통인가?”

“비통이십니다.”


비탄하고, 비통하고, 상심하고, 애도하라.

그리하여 죽음을 추모하리.


시밀은 만나지도 않은 비탄의 용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관리자는 시밀을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왔다. 저택 중앙에는 거대한 계단이 있었고, 계단 위에는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랬다. 사진이었다.


시밀은 사진 자체에는 놀라지 않았다. 침대 매트리스도 있는데 사진이나 동영상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시밀이 의외라고 생각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비탄의 용사는 왜 초상화를 바라는가?


가장 잘 그린 초상화도 사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저건 실물을 그대로 담는 물건이니까.


“사진이 있으면, 초상화는 필요 없지 않나?”

“사진은 가장 확실하게 그 순간을 담아내지. 하지만 사진이 담는 빛은 너무 정직하고, 무미건조하다.”


계단을 타고 한 남자가 내려왔다.


흔들리는 앞머리 사이로 날카롭고 피폐한 눈빛이 드러났다.


정장을 닮은 낡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건 남자의 품위를 조금도 훼손하지 못했다.


“붉은색.”

“옅은 회색.”


두 명의 용사는 한눈에 서로가 품은 빛을 알아보았다.


“이번에 부른 화가가 20번째였군.”

“이제 17번째지.”


앞에 있던 관리자가 화들짝 놀라 시밀을 돌아보았다.


“내 의뢰는 가장 완벽한 초상이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그 시절의 아내를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이 필요하다.”

“그 눈, 평범한 색이 보이지 않아.”

“색은 보인다.”

“색의 감촉은 느낄 수 없겠지.”

“... 그래.”


비탄의 용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색은 빛을 흡수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가 성립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비탄의 용사가 품은 빛은 색을 흡수한다.


‘아마 빛도 흡수하겠지. 색과 빛을 흡수하는 빛. 그게 비탄의 빛인가.’


색에도 감촉이 있다.


다양한 색을 보고 떠올리는 감상이 곧 그 색이 가진 감촉이다.


주변에 있는 색을 모조리 흡수해왔을 비탄의 용사에게 일반적인 색은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할 것이다.


실물을 완벽히 옮겨놓은 사진은 비탄의 용사에게 어떤 자극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이다.


뛰어난 화가가 색으로 그린 초상화는 비탄의 회색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요청은 없나? 사진을 그대로 옮기기만 하는 거라면 심심한데.”

“자신 있나?”

“내 색이 어디서 나왔을 것 같아?”

“그렇군. 실례했다. 요구는 바뀌지 않는다. 아내를 떠올릴 수 있는 완벽한 초상화. 그리오스, 그림에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모두 구해줘라.”

“알겠습니다.”


그리오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시밀이 용사라는 걸 알고 그는 완전히 꼬리 내렸다.


“이쪽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말해라.”

“어떤 사람이었지?”

“그림을 완성하면 알려주지.”


그 질문에는 대답해 줄 마음이 없다는 듯 비탄의 용사는 시밀을 지나쳐 저택을 나섰다.


“그림에 필요한 정보를 그림을 완성하면 알려주겠다니.”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날의 비탄과 함께 대부분의 기억을 잊으셨으니까요. 이쪽으로.”


시밀은 그리오스를 따라 저택에 딸린 별채에 들어갔다.


별채 내부 전부가 그림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 안에 있는 물건은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어떻게든 구해보겠습니다.”

“지금은 필요 없어.”


수많은 화가를 초청했던 별채에는 과장 조금 보태 도읍에서 구할 수 있는 그림 도구가 모두 있었다.


그리오스가 별채를 나갔다.


“나오지?”


별채 구석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너지? 셋째가 침이 마르도록 말하던 별의 용사가.”

“그러는 너는?”

“상심. 서서히 마음을 잃어갈 뿐인 인형이야. 그림 그리는 걸 지켜봐도 돼?”

“마음대로.”

“괜찮겠어? 다른 화가들은 식겁하면서 거절하던데.”


시밀은 화가들이 그녀를 거부한 이유를 알았다.


상심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주변 물건들이 색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걸로는 물감을 만들어도 그림에 써먹지 못한다.


그녀 앞에 오래 노출되면 기껏 만든 물감이 끈적한 물이 되어버린다.


“집에 장식할 그림이다. 식구가 보지 못하는 그림이라면, 차라리 안 그리는 게 나아.”


시밀은 몇 번이나 별채에 와봤던 사람처럼 재료를 찾아 물감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헤에. 재미있네.”


상심은 아예 시밀이 작업 중인 작업대에 걸터앉아 시밀의 작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별길을 걷는 용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1 비탄의 사랑 NEW +6 3시간 전 233 42 13쪽
30 비탄의 사랑 +9 24.09.18 441 46 15쪽
» 비탄의 사랑 +8 24.09.17 506 54 13쪽
28 비옌 +16 24.09.16 529 54 12쪽
27 승단전 +11 24.09.15 561 60 12쪽
26 하늘의 규칙 +11 24.09.14 604 56 13쪽
25 하늘의 규칙 +7 24.09.13 597 52 12쪽
24 새로운 생활 +16 24.09.12 623 69 13쪽
23 도읍 +6 24.09.11 645 66 13쪽
22 도읍 +13 24.09.10 663 78 15쪽
21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75 89 12쪽
20 작품명, 새빛별. +14 24.09.08 673 73 13쪽
19 대화 +7 24.09.07 655 73 14쪽
18 대화 +5 24.09.06 681 59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730 74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68 76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94 70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74 95 16쪽
13 친구 +9 24.09.01 856 84 12쪽
12 살인 +6 24.08.31 839 75 13쪽
11 용사 +7 24.08.30 851 78 14쪽
10 하늘을 보는 눈 +11 24.08.29 848 82 12쪽
9 어른들 +9 24.08.28 864 75 13쪽
8 용사들 +4 24.08.27 884 61 14쪽
7 검, 별, 원, 색. +8 24.08.26 910 72 13쪽
6 검, 별, 원. +4 24.08.25 945 71 14쪽
5 촛불 +8 24.08.24 978 84 12쪽
4 촛불 +15 24.08.23 1,072 86 14쪽
3 작은 별의 용사 +6 24.08.22 1,174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6 24.08.22 1,295 75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