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길을 걷는 용사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새글

태대비
작품등록일 :
2024.08.22 10:36
최근연재일 :
2024.09.18 19:00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23,970
추천수 :
2,100
글자수 :
178,837

작성
24.08.31 19:00
조회
817
추천
75
글자
13쪽

살인

DUMMY

레이는 홀로 수백 병력을 학살했다.


시밀이 아는 기사는 힐런 한 명이 전부였다. 다른 별에서 기사가 어떤 취급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기사로 보이는 자들은 힐런과 비슷한 별빛을 사용했다.


용사와 사제의 열화판에 해당하는 별빛. 그런 별빛으로는 레이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피가 우두둑 땅에 떨어지며 소음을 만들었다.


내장이 튀었다. 몸 한 부분이 갈라진 시신들이 땅에 떨어졌다.


“우웁...!”


시밀은 수십 번을 죽었다. 타인의 죽음을 지켜본 것까지 합하면 백 번이 넘는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


하지만 그 죽음들은 시신을 남기지 않았다.


별검의 검은 피가 튀지 않았고, 별 먹는 것에 덤빈 용사들은 시신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타인의 시체를, 하늘에서 떨어지는 백 단위의 시신을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레이는 악귀처럼 기사를 학살했고, 중간중간 빛이 되어 저택에서 되살아난 용사를 다시 죽였다.


시밀은 녹색 자연별에서 도망쳤다.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레이를 말려?

어떻게?


힘으로 레이를 막으라면 막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용사들 사이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겼다.


살인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감정의 골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해도 되는 걸까.


시밀은 익숙한 별빛을 찾아 움직였다.


지식은 넘치지만, 경험은 부족한 시밀과 달리 지식도 경험도 풍부한 조언자가 있었다.


금빛 교차별은 이름대로 금빛이었다.


별을 오가는 마차들이 밝은 색채를 뽐냈고, 별에 지어진 건물 지붕도 밝은색이 주였다.


시밀은 환결을 찾아갔다. 중간에 앞을 가로막는 벽이 몇 개 있었지만, 선을 하나 그어주니 부서졌다.


환결은 그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묶여 있었다. 별빛을 흡수하는 특수한 밧줄로 몸통을 감고, 이어 쇠사슬로 사지를 묶었다.


방 안을 돌아다닐 수는 있지만, 방을 나갈 수는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레이는 학살자가 되었고, 환결은 감금당했다.


시밀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감정을 꾹 눌렀다.


“빨리 왔네?”

“넌 또 왜 그러고 있어.”


시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최근 좀 많이 죽었잖아? 재수 없게 유력자 몇이 죽은 모양이야. 우리 집에서도 한 명 죽었고. 아, 참. 열 번이라는 숫자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았다? 별이 망하더라도 내가 죽는 건 못 참는 녀석들의 작품이었어. 용사가 덜 죽을수록 자기가 죽을 확률도 내려가니까.”

“잠깐. 잠깐! 네가 죽어서 유력자가 죽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용사가 되어 하늘에 나갈 시밀에게 유리가 몇 번이나 강조한 말이다.


시밀은 유리에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인과관계가 머리에 연결된다.


위화감을 느껴야 하는 부분은 몇 개가 더 있었다.


열 번의 제한이 거짓인 걸 알고도 레이와 환결은 목숨에 제한이 있다는 듯한 발언을 몇 번이나 했다.


시밀의 반응에 환결은 눈을 부릅떴다.


“너희 별의 사제는, 그것도 말 안 해줬어? 가장 중요한걸? 잊었을 리는 없고,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럴 이유가....”

“새빛별은 전체 인구가 2천 명 남짓이야. 내가 죽은 숫자만큼 사람이 줄면 작업 대부분이 마비돼. 그리고, 절대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 한 명 있어.”

“... 그러냐. 빨리 가 봐. 가기 전에 이것 좀 풀어주고.”


시밀은 사슬에 점을 몇 개 찍었고, 밧줄에 선을 그었다.


자유가 된 환결이 손을 뻗자 별빛이 뭉쳐 그의 무기로 변했다.


“나중에 보자.”

“그래, 나중에.”


시밀은 금빛 교차별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새빛별.


고향이었다.


***


새빛별에 돌아온 시밀은 요한을 찾았다. 물어야 할 게 많았다.


요한은 공동묘지에 있었다.


새빛별 사람들은 죽어 공동묘지에 묻힌다.


시밀은 가끔 공동묘지에서 부모님의 묘비를 보고는 했다.


공동묘지에 있는 묘비의 숫자는 시밀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확연히 늘었다.


“여길 오셨군요. 우연은 아니겠죠.”

“이 묘비들. 제가 생각한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시밀은 요한의 멱살을 잡았다. 키 차이 때문에 요한의 몸을 끌어당기는 형태가 되었다.


요한은 그저 시밀을 바라봤다.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용사는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망설임은 별의 망설임이고, 당신의 실패는 별의 멸망입니다.”

“자기는 안 죽는다고....”

“저도 죽습니다.”


요한이 시밀의 말을 끊었다.


“별에 속한 사람 중 예외는 없습니다. 저도, 유리도, 이미 죽은 힐런도 별을 위한, 당신을 위한 부속품에 불과합니다. 별과 용사라는 대의를 위한 부품이죠.”

“힐런이 죽었다고...?!”

“예, 죽었습니다. 55번째였죠. 지금은 그가 못한 일을 유리가 처리하고 있습니다.”

“유리 누나는?”

“도박장이나 그쪽 패거리의 집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당신의 죽음과 마을 사람의 죽음 사이의 관계가 밝혀지고, 마을에도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도박장.


용사 후보였다가 힐런에게 밀려난 자들이 운영하는 장소였다.


잠시나마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고, 약간이나마 별빛도 사용할 수 있는 그들은 힐런을 제외하면 새빛별 최고의 무력이었다.


그들은 그 힘을 이용해 마을 규칙에 아슬아슬하게 걸리지 않는 사업을 벌였다.


시밀은 도박장 문을 발로 차 부쉈다.


도박장 안에는 몇 명이 도박 중이었다.


요한이 도박을 허락한 건 농한기와 일이 끝난 저녁 시간 잠깐이다. 이 시간에 도박하는 건 마을 규칙에 어긋난다.


시밀은 자신을 발견한 그들의 표정에 두려움이 스치는 걸 보았다.


‘내 탓이구나.’


시밀은 많으면 하루에 다섯 번을 죽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이 모든 의욕을 빼앗았을 것이다.


죽음은 끝이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끝을 앞둔 사람을 통제하는 건 사제인 요한에게도 불가능했다.


새빛별의 체제는 붕괴했다.


시밀은 유리의 별빛을 찾았다. 조금 떨어진 건물이었다.


공기에 흐릿하게 피 냄새가 섞였다.


시밀은 건물 문을 열었다. 기절한 남자들 사이에 유리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날붙이에 스친 상처 몇 개가 보였다.


“왔어?”

“... 누나 실력이면 그냥 죽일 수 있잖아.”

“최대한 살려야지. 아까운 촛불인데. 급하게 뛰어온 걸 보니, 알았구나?”


유리가 일어났다. 그녀는 한 차례 심호흡하고, 몸을 똑바로 세워 시밀에게 걸어왔다.


“두렵니?”

“두려워.”

“그래서, 하늘을 포기할 거야?”

“....”


눈앞에 빛이 반짝였다. 유리에게 뺨을 맞았다. 이어 영혼을 위로하는 포근함에 감싸였다.


“시밀, 내가 뭐라고 했지? 내가 죽는다고?”

“... 아니.”

“나는 네 안에 있어. 너한테 모든 걸 전했어. 나는 네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 네가 보는 걸 나도 볼 거고, 네가 고민하는 걸 나도 고민할 거야. 네가 고민하는 게 나 때문이라면, 전혀 고민할 필요 없어.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하지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두려움은.”

“미지에서 나온다.”


유리가 시밀의 어깨를 잡았다. 둘의 코가 맞닿았다.


유리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 없어진 줄 알았어. 너는 어때?”

“나도 그래.”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네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 이 생명이 꺼지기 전에는, 너한테 하늘의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그래야 공평하지.”


유리는 시밀을 지나쳤다.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밤낮이 없는 하늘 아래서, 시밀과 유리는 밤이 지나도록 대화를 나눴다.


시밀이 말했고.


유리가 들었다.


***


시밀은 전대 용사 후보들을 정리했다. 제압한 다음 시밀만이 풀 수 있는 별빛으로 묶었다.


“용사가 움직이면 일이 이렇게 편해지는군요.”

“당신에게도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별을 가꾸는 사제에게는 몇 가지 제약이 있습니다.”

“별의 독재자?”


레이가 딱 한 번 꺼낸 말이었다.


많은 사제가 별의 독재자가 되었다고.


“거기까지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독재자를 방지하기 위한 제약이죠. 촌장으로서 간단한 지시를 내리는 거라면 모를까, 직접 손을 쓰는 건 안 됩니다.”

“어떤 별에서는 용사의 한계가 열 번이라 했습니다.”

“누구나 용사의 대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겠죠.”


용사들이 그렇게 떠받들던 열 번의 기회는 죽기 싫었던 누군가의 농간이 맞았다. 연합의 용사들은 그 농간에 놀아나 이제 서로 죽고 죽일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별이 망가지고, 무수한 사람이 죽겠지.


자신들이 살기 위해 만든 거짓 소문이 별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별을 가꾸는 사제는 몇 가지 본능을 거세합니다. 별에 파견되는 시점에서는 별의 발전만을 위해 움직이게 되죠.”


별빛에 묶인 장정들을 관리하는 요한의 옆모습은 인간성을 완전히 덜어낸 무기물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어쩐지 서늘함이 올라와서, 시밀은 화제를 돌렸다.


“제가 다른 별의 분쟁에 뛰어든다면, 말리실 겁니까?”

“그게 별 먹는 것 사냥에 도움이 된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몇 번이나 죽어도?”

“저는 당신이 새빛별 사람 전부를 학살해도 긍정할 겁니다. 별만 지킬 수 있다면 말이죠.”

“그 자리에 당신이 없어도 된다는 겁니까?”

“제 운명이 이 별에 있는데, 다른 운명을 찾아 무엇 할까요.”


시밀은 하늘로 나아갔다.


뚜렷한 목표가 정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우선 연합의 전쟁을, 레이와 환결의 분투를 눈으로 봐두고 싶었다.


연합에 속한 별들이 모여있는 하늘에는 수백 개의 별길이 이어져 있었다.


무장한 사람들이 별길 위를 달렸고, 별에서 별로 날아가는 물건도 보였다.


별길 위에서 흐른 피는 저 아래로 떨어져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시밀은 별빛에 실린 소리를 들었다.


레이와 환결을 규탄하는 목소리 말고도 용사들이 서로를 헐뜯는 소리가 들렸다.


용사 하나가 다른 용사의 심장에 단검을 꽂고 하늘을 갈랐다.


그 속도와 힘은 시밀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배는 빠르고 강맹했다.


연합에서 내분이 생긴 모양이었다.


레이는 혼자서 ‘별’을 상대하고 있었다.


도망치려는 용사의 발목을 잡아 다시 별로 던지고, 홀로 별로 날아가 무기를 든 상대를 모두 베어냈다.


몸에 튄 피를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털어내고 말리는 레이는 용사보다는 마왕이나 악귀에 가까웠다.


‘시밀, 너는 평생을 호기심으로 살아가겠지만.’

‘앞을 가로막을 수많은 장애물을 호기심만으로 넘을 순 없겠지.’

‘너만의 길을 정해야 할 때가 올 거야. 그건 먼 미래일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 당장일 수도 있어. 시밀. 그때가 오면.’

‘스스로 생각해 길을 정해야 한다.’


시밀에게 길이란 하늘을 누빌 별길이 전부였다.


별길에 오를 수만 있으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빛 하나가 시밀 옆으로 날아왔다.


“너도 한 손 거들게?”

“몇 번 죽었어?”


환결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남아있었다.


고통을 동반한 피로. 죽음피로였다.


“서른 번?”

“... 네가?”


시밀이 자리를 비운 건 하루 남짓이었다.


레이도 하루 사이 환결을 서른 번이나 죽이는 건 힘들었다.


“레이의 폭주를 기폭제로 곯은 상처가 터졌어. 결론만 말해주면, 전부 죽이고 이기는 놈이 연합의 머리가 된다는 이야기야. 쉽지?”

“전부 죽이고 이긴다....”

“왜? 네가 하게?”


환결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봉을 양손으로 잡았다.


“시밀, 너 사람 죽여본 적 없지?”

“없어.”

“첫 살인은 기억에 오래 남거든. 그 멍한 눈동자도, 질척이는 손맛도.”

“그래서, 그건 무슨 뜻이야?”

“우리 인생은 둘 중 하나야. 1년도 살지 못하고 별 먹는 것에 먹혀 전부 끝나거나, 진짜 용사가 되어 영원의 삶을 얻느냐. 어느 쪽이든 첫 경험이 찝찝한 기억으로 남는 건 안 좋아. 그러니까.”


봉이 얼굴을 노렸다. 시밀은 고개를 움직여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날 죽이고 가라. 네 첫 살인을 웃는 얼굴로 장식해 주마!”


시밀은 웃었다.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닦으며 시밀은 검을 들었다.


“그치만 환결. 너 한 방이잖아.”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별길을 걷는 용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비탄의 사랑 NEW +9 7시간 전 268 36 15쪽
29 비탄의 사랑 +8 24.09.17 435 51 13쪽
28 비옌 +16 24.09.16 488 53 12쪽
27 승단전 +11 24.09.15 530 58 12쪽
26 하늘의 규칙 +11 24.09.14 577 54 13쪽
25 하늘의 규칙 +7 24.09.13 570 50 12쪽
24 새로운 생활 +16 24.09.12 599 66 13쪽
23 도읍 +6 24.09.11 620 64 13쪽
22 도읍 +13 24.09.10 636 76 15쪽
21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49 87 12쪽
20 작품명, 새빛별. +14 24.09.08 649 71 13쪽
19 대화 +7 24.09.07 632 71 14쪽
18 대화 +5 24.09.06 659 57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705 72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43 75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74 69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49 95 16쪽
13 친구 +9 24.09.01 836 84 12쪽
» 살인 +6 24.08.31 818 75 13쪽
11 용사 +6 24.08.30 829 78 14쪽
10 하늘을 보는 눈 +10 24.08.29 825 82 12쪽
9 어른들 +8 24.08.28 843 75 13쪽
8 용사들 +3 24.08.27 861 61 14쪽
7 검, 별, 원, 색. +7 24.08.26 884 72 13쪽
6 검, 별, 원. +3 24.08.25 916 71 14쪽
5 촛불 +7 24.08.24 945 84 12쪽
4 촛불 +14 24.08.23 1,039 86 14쪽
3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139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255 75 13쪽
1 작은 별의 용사 +7 24.08.22 2,398 8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