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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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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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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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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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달 (11)

DUMMY

***


아주 오래전, 천 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는 머나먼 과거.

무(武)의 시대 이전에 선(仙)이 살았다.


천지 자유로운 기운과 통할 재능을 타고난 자들이었다.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부르고, 인간 속세는 업신여기며 초월에 이르고자 힘썼다.


어디든 오고 갈 기운들이 유달리 좋아하던 공간, 하늘과 땅 가운데 복숭아나무 만발한 도원향에서.

원인불명인 화재로 향(鄕, 도원향)이 불타오르기 전까진.


쿠오오오오-!

겁화에 달아난 기운들이 하계로 숨었다.

잃어버린 기운을 찾아 신선들도 내려왔다.

이른바 신선혈세라 불리는 난세의 시작이다.


나라 수십이 태어나고 사멸했다.

왕성한 기운을 탐낸 요마들이 들끓었다.

선기(仙器) 아닌 인간들에게도 힘이 찾아왔다.


싸우고, 죽고, 고통스럽고.

모든 비극의 중심에 신선들이 있었다.


요마를 거느리고, 인간을 부리고, 저가 일군 세력으로 더욱 많은 기운을 회수하려 경쟁해갔다.

지상에서 멎을 줄 모르던 눈물조차 그들의 먹잇감이매 핏빛 세상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천 년이 흘렀다.

이제 신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금제일인이자 천하 무학의 개파조사, 무조(武祖) 백은(白銀)이 다 죽였기 때문이다.

본디 신선을 물리칠 상극이었던, 기운을 몸 안에 들이켜 단련하는 역천을 창안함으로써.


하늘을 어긴 대역죄인이 땅의 전란을 거두었다.

팔대진선(八大眞仙)과 십이마귀(十二魔鬼)를 멸했다.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다루어야 할 기운을 붙잡아 범상하게 끌어내렸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서, 지난 천 년간 존립해온 어느 제국보다도 굳건한 영역, 무림의 기틀을 세웠으니.

인위로 가둬 순리에 어긋나버린 그 칼날을······ 오늘 강호는 내가기공(內家氣功), 내공이라 칭한다.


다만 무조의 위업을 기리면서도 세간엔 의문이 떠돌았다.

정말로 신선들은 멸절했을까?

하다못해 맥을 이어갈 후예마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무조가 탈각하여 신이 되고서 어언 천 년.

여기에 한 사람은 있다.

한가로이 생을 거니는, 어쩌면 유일하게 남은 수행자가.



관관저구(關關雎鳩)

꾸욱 꾹 물수리는


재하지주(在河之洲)

황하 강섬에서 노니고


요조숙녀(窈窕淑女)

아리따운 아가씨


군자호구(君子好逑)

군자의 고운 배필이라네



활기찬 목소리가 시경(詩經)의 첫 수를 노래했다.

싱그러운 햇살 아래서 들뜬 웃음기를 머금은 소녀였다.


“우으음- 날씨 좋은걸?”


열다섯 살 넘되 방령(芳齡, 20세)까진 못 미침직한 용모.

붉은 요대를 둘러맨 차림새가 제법 멋을 부렸고, 어깨 위편으로 정돈해 목덜미를 살며시 스친 머리칼이 복숭아색을 닮아 인상적이었다.


애칭도 외견과 어울리게 도홍(桃紅, 복숭아꽃처럼 연한 분홍빛)이니 가끔 지난날을 떠올려 소녀는 즐거워한다.

그야 바보 천치지만 작명 솜씨는 인정해야지.



참치행채(參差荇菜)

들쭉날쭉 노랑어리연


좌우류지(左右流之)

이리저리 흐르니


요조숙녀(窈窕淑女)

아리따운 아가씨를


오매구지(寤寐求之)

꿈에서도 그리네



다음 가락을 흥얼대며 도홍은 호박색 눈을 반짝였다.

한동안 수행은 내팽개치고 잠이나 실컷 청하다가 속세를 찾아선지 가는 데마다 진기한 물품들이 널려 있다.


‘흐흥, 기대를 저버리질 않는군.’


구주 팔황 드넓으니 지낼 곳 향뿐이랴.

이왕 왔는데 일에만 열중한들 손해라 사바세계의 번영을 만끽해줘야 도리일 터.

한마디로 맘껏 빈둥거리겠단 뜻이다.


“어디 보자. 뭐부터······ 오, 월병(月餠).”


모레가 중추절임에 따끈한 김이 솔솔 피어난다.

동전 주머니를 꺼낸 도홍은 힘차게 걸어가서 말했다.


“아주머니, 월병 하나 주세요! 음? 너희들도 먹고 싶어? 언니가 사줄까? 좋아, 월병 세 개 주세요. 아니- 열 개!”

“와아!”


한창 자랄 나이라 군것질이 고픈 자매에게 하나씩.

저만치 뛰어다니는 동네 개구쟁이 무리와 금실 좋은 노부부에게도 하나씩.

잠든 여아를 업고 장 보던 새댁은 과일까지 한 보따리.

마침 깨어난 아기가 칭얼대길래 월병 대신에······.


“짤랑짤랑- 신기하지? 까꿍!”


맑은 소리를 내는 장난감을 사서 쥐여주니 꺄르르 웃는다.

그리고 도홍에게만 감지됐다.

갓난아이 특유의 발그레한 뺨 주위로 기운이 다가와선 춤을 추듯 반가워하는 모습.


글을 배운다면 재상이고 무과를 치른다면 장군감이다.

강호에서 살아간다면 절정고수쯤은 이룰 테지.

만약 천 년을 일찍 태어나 신선이 보았다면······.


‘부모와 생이별이려나?’


몰래 데려가든, 가족을 치워서라도 얻든.

생각할수록 정신 나간 패악이라 무조가 죽일 만했달까.

내심 분노를 갈무리한 도홍이 일렀다.


“오호라······ 장차 큰일을 해낼 아이로군요.”

“어머나! 참말인가요, 도사님?”

“물론이죠. 부디 훌륭히 키워주세요. 잘 가!”

“뺘아아.”


차라라랑- 장난감 소리를 내며 모녀가 멀어졌다.

한데 그즈음부터 신기하게 도홍을 주목하는 사람이 없다.


반경 일 장으로 지나쳐간 이들만 여럿인데.

호박색 눈과 연분홍빛 머리칼이 워낙 특이해 시선을 잡아끌어야 정상인데.


상리를 넘어선 기사건만 본인은 대수롭잖게 여겼다.

명색이 수행자거늘 이쯤 해야지.

그보다는 식으면 맛이 떨어질라 얼른-


“아차차.”


텅 빈 꾸러미를 보고야 도홍은 깨달았다.

사둔 월병을 전부 줘버렸다.


······다시 살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니다.

고소한 내음으로도 족한 데다 하계에 와서 살펴보니 상황이 그리 여유롭진 못하다.


‘기운이 너무 없단 말이야.’


신선은 자연지기를 소유하지 않는다.

내가기공을 익힌 무인은 가둔다.

하물며 천 년일진대 이젠 회복이 불가능할 지경.

늦게나마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앞으로 사오 년? 십 년? 이십 년까진 어렵겠네.’


신선혈세와 버금갈 파국이리라.

흉년이 들고, 천재지변이 닥치고, 사람의 수명마저 줄고.

막으려면 무림 전체가 힘을 모으는 수밖에.


‘이름······ 뭐였더라?’


별호에 검(劍)이 들어가는 것과 이 씨 성까진 기억이 난다.

당대 천하제일은 가뿐한 무재니 한번 찾아가서 의논을-


“무황께서 참으로 매몰차시지.”

“미심쩍구먼. 서천검월 같은 귀인이 역적이란 말인가, 원.”

“아! 검천 이소청!”

“허억!”


지나가다 들은 대화에 외치자마자 이목이 쏠렸다.

다들 왜 저런담.

아무리 절세무인이라도 존함 석 자 불렀다고?


“음······ 하하, 이만 출발할까. 랄라라!”


두려워 수군대는 말로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도홍은 모른 척 걸었다.

어째 계획만큼 순탄치는 않을 예감이다.


‘이소청이 천도를 잘못 열었나?’


낮게 잡아도 무후칠존(武後七尊)일 터라 싸우기 곤란한데.

서천검월은 누구야.


조용히 확인해야겠다.

하남성 북단인 안양현까지 육백 리.

이곳 하북과는 비교적 가깝고, 이소청의 사람 됨됨이부터-


“괜찮으니 내려주세요. ······오라버니?”

“안 돼.”


그 순간 도홍은 보았다.

사방이 트인 큰길에서 찰나만 마주친 오누이를.


열여섯 살 어림인 소년, 평범한 인상착의, 키는 큰 편에 체형이 늘씬하며 팔다리가 곧게 뻗으니 무골이었다.

서너 해 터울일 여동생, 부드러이 가녀린 용모, 영세지재의 천품을 타고난 바가 엿보이되 창백히 질린 얼굴빛으론 병색도 완연했다.

업어주고, 업혀서, 함께 저잣거리를 나선다.


‘사이좋네······.’


근처 약방을 다녀오는지 소년은 자그만 탕제 꾸러미를 목에 걸었다.

그 가벼운 무게조차 동생을 주긴 싫어서일까.

몹시도 깊고 갸륵한 우애지만 도홍은 탐탁잖다.

어쨌거나 도둑질이야.


‘그래도 저만하면?’


임시 보호자로는 합격.

역용해 진면목을 감춘 소년이 홀려버린 자연지기가 천지 사방마다 휘논다.

무림인이 도적이라면 대도 중의 대도랄까.


되려 지닌 재능만큼 기운을 받아들이질 못하니 아쉬운 모양새다.

심마가 있나?

올바른 사복(私腹, 사사로운 욕심)이거늘 버리지 않아 이겨냄과 동시에 천하제일이 가까울 텐데.


오순도순 남매가 갈림목을 돈다.

애달파 길 한가운데 멈춰 도홍은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역용한, 이제는 샛별처럼 작은 뒷모습.

날 때부터 서린 명운이 너무도 거대하기에 기운조차 두려워하는 혼이다.

물론 예쁘게 변장했으매 웃음기가 들고.


“푸흐흣- 어쩐담.”


섣부른 추측이 아닌 인연생기의 흐름을 안다.

오늘 밤 액운일 저 소년이 서천검월인바.

마을 북동쪽 산어귀를 넘어갈 듯한데 도와줄까?


상대 입장에선 경계하겠지만.

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지만.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


망설임보다 시도가 빠른 법.

도홍은 떨어져 있던 버들가지를 주웠다.


“따라간다, 안 간다, 따라간다, 안 간다.”


잎을 떼어내던 손이 멎었다.

첫판은 연습이지.


“따라간다, 안 간다, 따라간다······ 안 간다?”


뚱한 시선으로 버들가지를 흘긴들 외로이 남은 잎사귀가 늘어날 순 없다.

말가니 푸른 하늘 올려다보며 볼멘소리뿐.


거 얄밉게 나오시네.

방해한다고 내가 그만둘 것 같아?


“삼세판!”


위풍당당 외친 도홍이 새 가지를 주워들었다.

행여나 부정을 탈까 조심스레 마지막 시도.


따라간다, 안 간다.

따라간다, 안 간다.

따라간다, 안 간-

휘유웅!


“앗!바람에날렸는걸?이러면그냥가볼까나.”


갑자기 불어닥친 금풍과 담담하고도 재빠른 선언 저편 나뭇가지가 작별을 고했다.

당황스럽지만 우연히 사고······였으니 됐어.


바라는 대로.

마음속의 고동이 움직이는 대로.

어제 향도(鄕桃) 두어 알 먹으며 챙긴 짐보따리를 풀었다.


“읏차.”


쪼그려 앉아 얼마간 뒤적이다가 긴 세월만치 정취가 묻어난 동경(銅鏡, 구리거울)을 찾아냈다.

소맷자락 가져다 대어, 맑디맑은 윤기 나도록 매만지곤, 슬며시 얼굴 비추어본다.


웃는다기엔 슬프고, 운다기엔 기쁜, 이상한 표정.

그저 일념영원 품은 애련만 명확하다.


한동안 말 없던 도홍이 오른손을 들었다.

입술 아래에 포개고서, 다섯 손가락으로는 양 뺨 쓸어올려, 제게 허락된 가장 싱그러운 미소를 그린다.


“······됐다.”


씨익- 기운차게, 눈시울 닦고, 코끝을 훔치고.

먼발치 고향 땅이 아른거리듯 벅찬 발걸음 서둘렀다.



구지불득(求之不得)

그리운들 볼 길 없어


오매사복(寤寐思服)

꿈에서도 생각네


유재유재(悠哉悠哉)

그립고도 그리워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뤄 뒤척이네



음력 8월 13일, 중추절 이틀 전.

시경(詩經) 애탄 노랫말도 반짝반짝 살랑인 가을날이었다.


***


천인위전 열흘 차.

어검등영으로 하북(河北)에 진입, 현재 위치의 동향부터 살피며 도주·휴식을 반복.

다행히 추격대를 앞서 이백여 리 이동했다.

조금이나마 희망이 보인다.


천인위전 열하루 차.

사시(오전 9시~오전 11시) 무렵 포위망과 맞닥뜨렸다.

역용 덕분에 쫓기진 않았으나 한밤중까지 칠팔십 리를 북상하는 데 그쳤다.

내일은 무리해서라도 나아갈 때다.


천인위전 열이틀 차.

총 전투 8회, 확실히 벤 무림인만 예순.

해가 저물어서야 숲에 들어와 헤아려보건대 북경은 오백 리 이내인가.

하지만······.


“아월(兒月)? 왜 그러니, 아월!”

“읍- 쿨럭, 커흑!”


천인위전 열사흘 차 새벽.

돌연 잠꼬대처럼 신음을 낸 화월이 붉은 핏덩어리를 토하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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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빛나는 달 (18) 24.09.12 88 1 15쪽
19 빛나는 달 (17) 24.09.11 90 1 12쪽
18 빛나는 달 (16) 24.09.10 102 1 12쪽
17 빛나는 달 (15) 24.09.09 112 0 10쪽
16 빛나는 달 (14) 24.09.08 116 0 10쪽
15 빛나는 달 (13) 24.09.07 133 0 9쪽
14 빛나는 달 (12) 24.09.06 133 1 10쪽
» 빛나는 달 (11) 24.09.05 148 1 11쪽
12 빛나는 달 (10) 24.09.04 158 1 20쪽
11 빛나는 달 (9) 24.09.03 165 1 15쪽
10 빛나는 달 (8) 24.09.02 180 0 10쪽
9 빛나는 달 (7) 24.09.01 179 0 10쪽
8 빛나는 달 (6) 24.09.01 187 1 7쪽
7 빛나는 달 (5) 24.08.31 204 0 9쪽
6 빛나는 달 (4) 24.08.30 205 0 7쪽
5 빛나는 달 (3) 24.08.29 232 1 10쪽
4 빛나는 달 (2) 24.08.28 302 3 9쪽
3 빛나는 달 (1) 24.08.28 352 2 9쪽
2 서 (序) 24.08.28 559 5 10쪽
1 정천리격문 (訂天理檄文) 24.08.28 653 7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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