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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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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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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1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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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대격변의 시[전투]사제의 연.

DUMMY

마치 절규하듯 얼어붙은 제신을 보며 현은 새하얀 입김을 뱉어냈다.


“이스가리옷.”


그가 본당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인간의 목소리와 결을 달리하는 울림이 들려와 그를 청한다.


“내 직접 가지 못하니 이리로 들라 적대자여.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눈처럼 새하얀 정장과 핏빛 행커치프가 눈에 들어오자 현은 그가 흘리는 냉기만큼이나 차가운 미소를 띤 채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한 지배력을 감지하였음에도 이스가리옷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네 병정들을 잃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불러들이는 게 좋을 거다. 그들이 감당할 존재는 이 전장에 없으니.”


산산조각 난 문의 파편을 밟고 본당 안으로 들어서던 현은 천장을 슬쩍 쳐다보고는 답했다.


“누가 온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도살자와 꼬마는 내 병정이 아니다. 그리고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지금 저 위에 있는 것들 중 살아남을 놈은 없어. 내가 그렇듯이 말이야.”

“도살자와 꼬마?”


대강당을 가로질러 오는 혼돈의 유리구슬에 새파란 살의가 어리는 것을 보았음에도 이스가리옷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둘의 기척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 대지에 발 디딜 때까지만 해도 먹잇감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전사의 기세를 풍기는구나. 이래서 어미가 위험한 것이다. 그들 모두가 다른 시간 속에서 사니까. 어쩌면 저 두 명도 송광극이 도달한 그 불공정한 세상을 엿보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다.”


싸움보다는 대화를 하자는 듯 묘한 뉘앙스로 말을 이어가는 이스가리옷의 행태에 흥미를 느낀 현은 걸음을 멈추곤 되물었다. 이면에 관한 정보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오늘 송광극의 검격을 보지 않았다면 불공정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 어미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두려움, 그건 이제 나도 알겠어. 한데 아까부터 시간이 없다니, 무슨 뜻이지?”


여차하면 치고 들어올 만한 간격 안에 선 어린 시초의 물음에 불멸의 세월을 살아온 짐승은 흐린 웃음으로 답했다.


“네 어쭙잖은 지배력에 들인 정성을 감각에 집중하면 알게 될 거다.”

“감각?”


교회 건물을 비롯한 주변 모든 생명체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기에 그가 되묻자 이스가리옷은 뭐가 즐거운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가르침을 내렸다.


“생존을 위한 가장 큰 무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권능 따위가 아니라 바로 그 감각이다. 잃는 순간 하찮은 버러지들에게도 사냥당하게 된다. 그래서 가문의 일원이 되면 가장 먼저 그 감각부터 단련하게 한다. 하나 너는 홀로 섰을 테니 그저 레이더처럼만 사용해 왔겠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어린 시초의 눈에 어떠한 거부감도 없는 걸 본 오래된 짐승은 무슨 생각인지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이어갔다.


“감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강해지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양날의 검이 된다. 도시의 모든 생명체가 머릿속에 들어와서 움직이는 순간 일상이 무너지고 마니까. 어쩌면 이 또한 어미의 저주일지도 몰라.”


저주를 언급하는 그의 눈빛에 숨기지 못할 증오가 어린다.


“하나 다행히도 이 감각은 컨트롤이 가능하다. 단련하기에 따라서 필요한 생명체만 선별해내고 원하는 것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린 시초는 당연한 물음을 던졌다.


“왜 이러는 거지?”

“어린 시초여, 차차 알게 될 거다. 네게 필요하다 여기면 배우고, 아니면 하던 것을 마저 하면 그만이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남겨질 자여.”


그가 답 없이 자신을 보자 오래된 짐승은 두 눈 가득 기이한 광기를 흘리며 생존을 위한 가르침을 내리기 시작했다. 곧 서로의 목을 노릴 두 짐승이 그렇게 묘한 대화를 이어갈 때, 도살자는 약 30여 명의 시너와 부딪혔고 명진은 한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악전고투를 벌였다.


동생을 찾은 걸까? 모를 일이다. 재미있는 건 그의 생각지도 못한 전투는 스승인 송광극이 뿌린 시대의 일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점이었으니까. 참 아이러니하고도 서글픈 일이지 않은가?


전장에 서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막연한 사명을 따라 움직이던 초짜 엽인이 유난히도 적막한 신관을 지나서, 섬뜩한 소음이 들려오는 본관으로 걸음을 옮길 때쯤.. 제신을 무너뜨린 스승의 궤도가 전장의 대기를 뒤흔들었다.


‘잠깐만, 이건?’ 제자는 너무나도 익숙한 울림에 이끌려 홀린 듯 방향을 잡았다.


그가 도착해 밟은 곳이 본관 건물의 측면에 위치한 야외계단, 그러니까 스승과 도살자, 그리고 현이 내려온 그 계단이라는 것까지는 좋았다. 살짝 열린 철문으로부터 은은히 비쳐오는 불빛과 어떤 미약한 울림이 뭔가 표현키 어려운 애틋함으로써 자신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저곳에 누군가 있어.’


그래서 계단을 내려가던 중에 갑자기 그는 멈춰섰다. 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후끈한 열기가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뭐지?’ 그것은 위기감이나 두려움 등은 아니었다.


그 뜨거운 바람에 실려와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만드는 서늘함의 정체는 어떤 지독한 아픔이나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가족을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끔찍한 절망감처럼 너무나도 무거운 감정을 감내할 수 없어 그는 더 다가가지 못했다.


“이런, 좆 같은 거.”


해서 망설이며 욕설이나 흘리고 있을 때, 삶의 유일한 기둥이자 안식처인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와 잡념을 정리해줬다.


‘네놈이 더 잃을 것이 있더냐? 그날의 원한을 숨 쉬듯 되씹어라.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매진해라.'

‘저기 스승님, 그러니까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이 우둔한 놈이.. 그냥 나아가라는 말이잖아!’

“그래, 좆도 내가 잃을 게 뭐 있다고 망설여. 할 수 있는 걸 하자.”


다짐하듯 중얼거린 그는 허리띠의 파우쳐와 무장을 확인한 뒤 우 장검과 대검을 빼들어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보다 많이 회복했지만, 사신의 손에 한 번 맡겼던 육신이 전투에 임할 때 뜻대로 움직일지는 미지수였다.


‘자칫 잘못하면 아주 좆 되는 거야.’ 거기에다가 눈도 한쪽 없지 않던가? ‘이제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야.’


그는 왼쪽 눈에서 끊임없이 전해지는 고통을 씹어 삼키며 호흡을 조절했다. 양손에 들린 검을 천천히 들어서 사선으로 교차했다가 상하좌우로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휘두르며 속도를 조절했다. 다행히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검이 움직였지만, 좌 단검 대신 낯선 대검을 들어서 그런지 종종 손이 꼬였다.


‘이거 좆될 뻔했네.’


그렇게 어긋나고 어색한 점을 잡아내며 수정하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승의 일갈이 들려온다.


‘놈! 일평생 검을 잡아 온 나도 전투에 임하기 전 검과 육신의 날을 세우거늘, 네놈 따위가 뭐라고 준비도 없이 사냥터에 발 들이려 하느냐? 날을 세움에는 적당히라는 말이 없다. 혹여 피곤해서 휴식이 필요하거든..’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미세한 어긋남까지 바로 잡은 명진은 머금었던 숨을 뱉어내며 좌우 쌍검을 갈무리했다. 그리곤 스승님 특유의 거친 말투를 흉내 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휴식이 필요하거든, 그 자리에서 칼을 물어! 다른 엽인에게 민폐나 끼치지 말고.”


언젠가부터 사지가 익숙해져서 별다른 준비도 없이 들어서려다가 떨어진 불호령이었다. 그냥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헝클어진 마음이 정리되고 여유가 생기니 괜히 더 스승이 보고 싶어진다.


“설마 별일이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연락은 좀 받으시지. 뭐, 하늘이 무너져도 홀로 설 분이니까.”


저 철문 안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상실감 때문일까? 불쑥불쑥 고개 내미는 불길한 생각을 쉽게 떨치지 못하던 제자는 한없이 강인한 스승을 자기 자신보다 믿었기에 단호히 말했다.


“흑검주 송광극을 어찌할 자는 세상에 없다.”


그리곤 고개를 강하게 한 번 흔들어 편치 않은 잡념을 떨쳐내곤 크게 기지개를 켰다.


‘명진아, 네가 누구를 걱정해? 내 앞길이나 챙겨. 마안도 뺏겼는데 이대로 가면 얼마나 욕을 처먹겠냐?’


지금 중요한 건 그에게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의 전장에서 싸워 나가다 보면 나도 스승님처럼 강해지겠지.'


한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건, 남명진이 혼돈의 전장에 서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영혼에 새겨진 혼돈의 명 때문일까? 아니면 그 빌어먹을 놈의 운명에 의해서? 모를 일이다. 우리는 다시 계단을 밟아가는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으니..


‘그런데 저기 뭐가 있길래 이렇게 망설여지는 거야?’


저대로 서너 계단만 더 내려가면 저 온기에 섞인 끔찍한 상실감이 스승의 음성이었음을 깨달으리라. 미친 듯 내달려가 스승을 얼싸 안았겠지. 서럽게 절규하며 그의 유지를 듣고 혈미궁의 진면목까지 배웠다면, 아마도 그의 여로가 달라졌을 거다.


어느 덧없는 바람처럼 시대를 종횡했으리라. 일검으로 천하를 떨어울렸으리라.


그냥 저 빌어먹을 놈의 계단을 조금만 더 내려갔으면 말이다. 하나,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폭음과 괴성에 섞인 날 선 비명이 그를 붙잡아 세우고 말았으니..


“이..건?” 서글픈 사제의 운명을 뒤틀어버린 방해물은 젊은 여성의 처절한 외침이었다.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이의 절규로 들려온 애달픈 비명 말이다. “명..희야?”


담긴 공포가 고스란히 전해져 올 정도로 위급한 음성이 다시 들려오는 순간 그는 동생을 부르며 미친 듯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도대체 왜 잊었던 걸까? 이곳에 온 이유를 망각하였다는 사실이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이런 병신 새끼!'


혹여 동생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쫓겨 교회 마당으로 질주해갈 때, 혼돈과 마주한 스승은 제자를 잘 보살펴 달라고 빌고 또 빌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고도 개 같은 상황이 아닌가? 한데 저 여인의 비명 또한 일 검의 울림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안타깝구나. 내 지금에서야 보게 된 저 커다란 벽까지 깨뜨렸다면, 너를 얽맨 피의 사슬을 끊었으련만..’



육림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광신도들은 제신의 명 아래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본관 건물과 교회 마당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막연한 분노를 되씹고 이단을 찾았다. 한데 절대지경에 든 검사가 휘두른 일검의 여파가 그들을 얽맨 사슬 중 하나를 끊어낸 것이다.


“추..워.”


별다른 문양 없이 정갈한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두 팔로 몸을 감싸며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치마 밑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 본능적으로 움츠린 채 손을 들어 얼어붙은 귀를 감쌌다.


“여기는..?”


지독한 악몽에서 막 깬 듯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워서 이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안경에 낀 서리가 사라지듯이 붉게 물들었던 시야가 바로잡혀갔기에 일단 주변부터 살폈다.


“여기는..?”


작가의말

서글픈 사제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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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대격변의 시[검주]마환 vs 송광극 +9 17.09.29 320 15 16쪽
254 대격변의 시[검주]조우 +2 17.09.28 296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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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대격변의 시[전투]송광극 +10 17.09.26 237 11 12쪽
251 대격변의 시[전투]일보직전 17.09.26 728 10 13쪽
250 대격변의 시[전투]슈지, 마지막 도주로 +4 17.09.25 246 11 12쪽
249 대격변의 시[전투]진입 +6 17.09.24 246 12 13쪽
248 대격변의 시[전투]증명 +4 17.09.22 238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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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대격변의 시[전투]자각 +8 17.09.21 232 1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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