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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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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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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1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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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변의 시[전투]희생, 불신, 손길 그리고 고맙..습니다.

DUMMY

달빛도 없는 로비의 시꺼먼 어둠 속으로 서슴지 않고 뛰어드는 꼬마를 말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던 도살자는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장은 이곳이 학살조의 전장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저 꼬마의 전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는 바닥의 MP5를 챙겨서 탄창을 교체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 많던 시너들이 벌써 다 죽은 건지, 입 맞춘 함성은 더 들려오지 않았다. 하나 간헐적이던 전투의 소음이 건물을 떨어 울리는 굉음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니..


‘이건 심상치 않아, 어떤 자들일까?’ 그는 로비로 들어서기 전 본관 3층을 보며 크게 심호흡 했다.


지금 이 전장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아까부터 폭음이 들려오는 바로 저곳이리라. 물론, 가장 무서운 전투는 지하 본당에서 일어나고 있겠지만 말이다.


‘저곳에서도 괴물들이 부딪힌 건가?’


호기심이 일었지만, 조장의 명령은 떨어졌고 임무는 주어진 상태였다.


‘꼬마를 챙겨서 다프네와 합류하는 데 집중한다. 혹시 꼬마가 저기에 끼어들면 또 모르겠지만.’


다시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린 도살자는 주차장에서 챙겨온 야시경을 쓰고 로비의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내 야시경을 벗고 걸음을 멈췄으니.. 시야에 처음으로 포착된 게 누군가를 업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꼬마였던 것이다. 등에 업힌 건 노파를 부축해서 본관으로 들어갔던 젊은 여자였다.


‘생각보다 빨리 구해왔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도, 귀찮은 일은 없겠어.’ 그의 눈빛에 아쉬움이 어렸다가 이내 사라진다.


일단 꼬마에게 손짓해 부른 뒤 여인을 살피던 도살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 끊임없이 중얼대는 게 살아남더라도 살아가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할머니, 할머니 죄송해요. 괴물이 죽였어요. 악마가 먹는 걸 봐서, 내가 버렸어요. 죄송해요, 나만 살려고 해서.. 그런데 악마 때문에, 할머니를 죽여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할머니가 도망가라고 머리를.. 머리를.. 머리가..”



안타깝게도 그녀의 이성은 무너진 상태였다. 도대체 어떤 일을 겪은 걸까?


살인마에게 잘려나간 할머니의 팔과 흘러내리는 피, 창백하게 질려가는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을 장도리로 내려치려던 광인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할머니, 할머니 죽으면 안 돼.”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내달려간 그녀는 죽어가는 할머니를 안다시피 부축해서 본관으로 뛰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저 빌어먹을 놈의 본관인 걸까? 그곳은 이 지옥의 중심부이자 만악의 근원이 도사린 곳인데.


“할머니, 내가 기도해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그래, 저런 개 같은 선택을 한 이유가 또 무엇이려고.


본관의 3층에는 개인 기도실이 있었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도, 부모가 이혼하고 다 떠난 뒤 할머니와 둘만 남겨졌을 때도,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죽음을 기도했을 때도 그곳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거기만 가면..” 자신만을 위한 성경과 십자가를 앞에 두고 간절히 기도하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주께서 함께하시니 감히 악이 침범치 못하리라.”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


대관절 언제부터 그녀의 이성이 망가지기 시작한 걸까? 모를 일이다. 저런 모습들이 이면에 닿은 인간 중 생존자의 말로였으니까.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에 피폐해진 정신이 극단으로 치닫지만 않았어도 저토록 어리석고 무모한 판단을 하지는 않았겠지.


“할머니, 우리 이번에도 이겨낼 거야.” 하나 짐승의 낙인을 받고 엽인의 살육을 지켜봤는데 어찌 견디랴?


정녕 이곳이 그분의 집이라면 오롯이 위대한 당신이 어린양을 구원할지도 몰랐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저 여인의 행태도 설명되겠지. 어두컴컴한 로비를 달리고 또 내달리는 저 광신도의 안쓰러운 걸음도 말이다.


“이제 다 왔으니까 포기하면 안 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로 오를 때쯤에는 할머니의 몸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포기하겠는가?


“빨..리, 빨리!” 문이 닫히는 일 초, 일 초가 영겁같이 느껴지자 그녀는 미친 듯 울부짖으며 3층 버튼을 두들겼다.


드디어 문이 닫히고 세상이 조용해지자 그녀는 할머니를 얼싸안았다. 지금부터 기도하면 또 천사를 보내주시리라.


"이 세상 전장에 우리를 보호하사 ··· 세상에 두루 다니며 영혼을 삼키려는 사탄과 다른 악신의 무리를 천주의 힘으로 몰아넣으소서." 그녀는 정말로 간절히 기도했다. 아멘!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문틈으로 새어나간 조명이 엘리베이터 홀을 밝혔다. 기도를 멈춘 여인은 이제 곧 맞이할 신의 손길과 안식의 향기를 떠올리며 할머니를 부축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어둠을 밝히며 퍼져나간 불빛이 복도 전체를 은은히 비추는 순간, 안타깝게도 그녀를 반긴 건 따스한 공기가 아니라 현실의 소리였다. 그것은 날카로운 이빨에 뼈가 부서지고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였다. 거기에 포악한 광기와 요악스러운 괴성까지 뒤섞이자 열렬한 신도는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한바탕 살육이 벌어졌는지 바닥에는 핏물이 흥건했고 시뻘건 잔해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엘리베이터 홀을 비추는 조명의 끝자락에는 아직 온기가 사라지지 않은 인간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마귀가 한 마리 있어, 이 아비규환의 클라이맥스를 그녀에게 선사했다.


“여..기는 주의..성스러운.. 아니, 아니야."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면 자신도 저 지옥도의 일부가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그녀는 비명을 삼켰다. 때마침 3층으로 올라온 마지막 광신도까지 먹어 치운 마귀가 기대했던 신을 대신해 그녀를 반겨주며 일어섰다.


“나, 버..리..지..마.”

“주여, 도우소서. 주여..”


그저 습관적으로 내뱉은 말에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순식간에 엘리베이터 앞으로 미끄러져 온 악마가 기괴한 미소를 그리자, 귀밑까지 찢어진 커다란 입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린다. 그를 본 여인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물러서며 위대한 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부..디, 제발 좀.. 도우소서. 주..여.." 만물을 관장하시는 분은 안타깝게도 바쁜 듯했다.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핏물이 가득한 혈안을 마주보던 여인은 다리에 힘이 풀리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댈 곳을 잃은 할머니도 널브러졌다. 바닥에 머리를 찧었는지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지만, 챙길 겨를은커녕 돌아 볼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할머니를 외면한 채 울먹였다.


“미안, 이게 끝인가 봐. 주님이 왜.. 왜 이런 시련을..”


이제 곧 잡아먹힐 거라는 공포가 그녀의 하나 남은 믿음마저 무너뜨릴 때, 너무나도 미약하지만 친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새..끼..”

‘할머니?’


그녀는 들려온 음성이 천국의 속삭임이라고 생각했다. 주의 품으로 먼저 간 할머니가 천국으로 오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래서 두 눈을 꼭 감았는데, 한층 뚜렷해진 목소리는 머릿속이 아니라 귓가를 간질였다.


“성미야, 우리 성미.. 행복해야 한다.”


당황해 눈을 떠보니 너무나도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도망가!”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할머니가 괴물에게 달려들며 외쳤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란 여인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열림 버튼을 누르려다가,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오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곤 절규하며 외쳤다.


“할머니, 나 어떡해? 할머니!”


가녀린 등을 뚫고 삐죽이 솟아나온 시뻘건 팔과 손에 들린 심장이 눈에 들어오자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졌다. 좁혀지는 문틈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혈안이 번들거리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1층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내려갑니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몇 초 사이에 그녀는 할머니를 버렸다는 자괴감에 짓눌린 채 무참히 망가졌다. 자신도 모르게 이 또한 주의 뜻이라고 중얼대다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혈육이 잡아먹히는 게 또한 주의 뜻이라니? 이 또한 빌어먹을 놈의 시련이라니! 그녀는 한없던 믿음에 유린당하며 붕괴되어갔다.


“없..어, 그딴 건.. 없었던 거야.”


차가운 엘리베이터 바닥에 누워서 자신을 저주하고 증오하며 내면 저 깊숙한 곳으로 침몰될 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1층입니다.]


문은 열렸지만, 그녀는 내릴 수가 없었다. 그저 힘없이 뇌까릴 뿐..


“신은...”


[올라갑니다.]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방향 지시등에 불이 들어오고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녀를 이대로 보내주지 않으려는 자가 엘리베이터를 불렀으리라.


“신은..없어.”


어두컴컴한 로비를 멍하니 보며 눈물 흘리던 여인이 그냥 다 포기하고 눈을 감을 때, 상처투성이에 붉게 물든 손이 문틈을 비집고 불쑥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헐떡이는 호흡 사이로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와 지친 육신을 감싸준다.


“아, 이 아가씨가 진짜.. 저기요,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부정하니까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그분의 품이 아니라 살인마의 등에 업혔지만, 어쨌든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작가의말

부디, 이번 화를 읽으시는 분들 엘리베이터 탈 때마다 저 장면이 떠오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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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대격변의 시[전투]증명 +4 17.09.22 238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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