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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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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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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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1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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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대격변의 시[전투]정지

DUMMY

피에 절어 축축한 등에서 역한 피비린내가 풍겨왔지만,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따스했고 편히 기댈 만큼 넓었기에 그녀는 안식을 얻었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와서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을 평온하게 가라앉힌다.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다 괜찮아 질 테니까.”


그녀는 스르륵 눈을 감았지만, 죄책감과 공포를 벌써 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본 악마와 그곳에서 저지른 죄악을 고해성사 하듯 내뱉었다.


“신은..없어요. 하지만, 악마가 있었는데, 할머니를..”


기댄 등의 따스함에 감사하며 두서없이 하소연하던 여인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행한 구원을 할머니에게도 베풀어 달라며 빌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괴물에게 죽었지만, 시체라도 건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자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그럴 거면 내려주세요! 나 혼자서.. 아니, 나 혼자서는 안 된단 말이에요!”


그녀의 이 말 같지도 않은 짓거리는 참으로 이기적이었지만, 홀로 남겨질 것이기에 차마 놓지 못할 쓰라린 동아줄이기도 했다.


“나.. 혼자서는 안 돼요. 우리 할머니 시체라도..” 그냥 죽어서 떠나는 것과 잡아먹히는 건 천양지차이지 않던가?


만일 이 애달픈 부탁을 뜨거운 가슴을 가진 영웅이 들었다면 깊은 고민에.. 아니, 고민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녀를 구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뭐? 이 여자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어?’


뒤늦게 합류한 자는 그녀 자체를 불필요한 짐이라 여겼으니..


‘기회를 봐서 덜어내야겠어.’


도살자의 서늘한 눈빛을 어설프게나마 읽어낸 명진은 기다란 한숨을 뱉었다.


‘스승님이었어도 저런 눈빛으로 날 봤겠지? 그런데 대체 왜 나는..?’ 그녀는 명희가 아닌데 자신은 목숨을 걸고 있었다.


이럴 게 아니라 한시바삐 이 교회의 어딘가에 있을 명희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도무지 이 여자를 버릴 수가 없었다. 망령들의 비난처럼 피에 절은 손으로 타인을 구하려는 행태가 역겨웠지만, 그래도 어찌 외면하겠는가?


‘좆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교회 밖에 대충 던지고 오자. 뒤는 알아서 하겠지.’


지금의 이 행동은 좀 전에 저지른 무차별적인 살육에의 자기 위안이며 역겨운 위선일 게 분명했다. 하나 마음 한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옳아서 외면하기 어려웠다.


‘단지 명희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준 희망을 빼앗는 게 옳은 일일까? 그녀는 이 빌어먹을 전장의 피해자일 뿐이잖아?’


엽인은 포식자를 사냥하고 죽이는 자이지, 살인마는 아니었다. 일면 옳은 생각이라 걸음에 속도를 더할 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위선 때문에 명희가 죽는다면, 나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이런 선택을 한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게 가능할까?’


그런저런 잡념 속에서 로비를 나서며 길게 한숨을 뱉어내자 뒤따라오던 도살자가 그를 툭 치며 주차장을 가리켰다.


“대화가 되질 않으니 일단은 그 여자도 함께 간다. 하지만, 그 여자를 구한 게 동정심이라면 내가 바로 처리하겠다. 이곳은 전장이고 우리는 짐을 허용하지 않아. 다프네가 합류하면 알 수 있겠지.”


멍하니 그를 보던 명진은 도살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충 처리하고 신경 쓰는 것보다 안전한 장소에 두는 게 좋겠지. 그 미인이라면 잘 보살펴 줄 것 같아. 어쩌면 그분이 해결책을 줄지도 모르고.’


혼자만의 망상 속에서 터프가이의 뒤를 따를 때, 대여섯 걸음 앞서 걷던 도살자가 갑자기 휙 돌아서더니 고함을 질러대며 뛰어오는 게 아닌가?


'뭐? 도망? 비켜?' 당황한 명진이 걸음을 멈추자 도살자는 그를 걷어차버렸다.


일격에 바닥을 나뒹군 명진은 뼛속까지 울리는 묵직한 충격에 질려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하다가, 이내 바닥을 딛고 일어서며 욕설을 뱉었다.


“좆 같은 거,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신 설마..”


그 짧은 부딪힘으로 상대와의 격차를 느꼈기에 더 언성을 높이려던 그는 자신을 힐끗 쳐다본 도살자의 눈에서 살기를 읽어내곤 슬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눈앞의 사내는 더 이상 여유로운 베테랑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해서 모든 걸 찢어발길 듯한 전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왜..”


스승님에게서나 느꼈던 기세에 눌려 주눅이 든 명진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의 전의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이 업고 있던 여인이 무너질 듯 서 있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떠는 게 영 불안해 보였다.


‘왜..저래?’


그는 다급히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머리를 흔들었다. 긴장해서 잘 몰랐는데, 좀 전의 일격이 뇌까지 흔드는 바람에 눈의 초점까지 어긋난 상태였던 것이다.


‘그냥 한 대 차였을 뿐인데..’


다행히도 금세 초점이 잡혀서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기던 그는 다시 손을 들어 눈을 비비며 알 수 없는 의문을 뱉었다.


"아니, 왜? 그럴 리가 없잖아?"


혹시나, 설마 하면서 외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보니 가녀린 배를 뚫고 나온 새빨간 팔이 눈에 들어온다. 내장을 꽉 말아 쥔 손을 타고 진득이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뇌리에 새겨지자, 반쯤 벌린 입에서 절망이 뱉어진다.


“또 나..는.”


그의 울먹임을 듣고 고개 든 여인은 어렵사리 손을 들어 구원자를 불렀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떼자 주르륵 흘러내린 핏물이 원피스를 붉게 물들인다.


“악..마가 쫓아..왔어요. 나, 잡아먹히기..싫어요.”


죽어가는 자의 두려움과 고통이 소름끼치도록 선명히 다가오는 순간 망령들이 어머니의 목소리로 흐느꼈다. 욕이나 저주, 비난 같은 건 하지 않고 그저 아들의 이름만 불렀다.


‘명진아, 우리 아들.. 이번에도 네가 죽인 거야. 죽게 내버려뒀어.’

“죄송해요, 이번에는 구하려고 했는데. 이러려고 그런 게...”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대던 명진은 자신을 향해 뻗은 조그만 손이라도 잡아주려고 홀린 듯 다가갔다. 그러자 애타게 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여인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리며 증오를 머금는다.


‘아파, 너무 힘들어. 이게 다 저 사람 때문이야.’


세상 모든 것이 빨갛게 물들어 가는 와중에 그의 얼굴만 천연색으로 보였다. 한데 그 이유가 가슴에 어린 따스함 때문이 아니라, 그 또한 악마라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모든 게 저 마귀들의 농간이었으리라.


‘저 악마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할머니를 그렇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내가..’


자신을 깨우고 할머니의 팔을 잘라서 죽음으로 몰아간 핏빛 살인마가 바로 저자였다. 저 마귀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엘리베이터를 타지도 않았을 테고, 주를 부정하는 일도 없었으리라. 이 끔찍한 고통과 절망은 신벌일 게 분명하니, 근원은 바로 저 악마임이 분명했다.


‘3층에서 악마를 보고 할머니를 두고 온 것도 다 시험이었어.’


불현듯 든 생각이 덜컥 진리로 믿어지자, 절망에 일그러진 얼굴과 충혈된 외눈이 악마의 형상으로 비친다. 그래서 저주라도 퍼부으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거라곤 한 움큼 핏물 뿐이었다. 이 또한 악마의 힘이리라. 주를 부르지 못하게 함이리라.


‘천국에서 할머니를 만나려면, 죄를 사해달라 기도해야만 하는데.’


그녀는 찢어 죽일 듯 그를 노려보다가, 몸을 관통한 손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빠져나가는 최후의 순간에서야 겨우 원한을 뱉어냈다.


“다, 너 때문이야.”


얼마나 원통했는지 죽어서도 감지 못하고 부릅뜬 눈을 마주보던 명진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을 되씹다가 변명하듯 뇌까렸다.


“정말로 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 나는..”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가슴에는 또 하나의 구멍이 뚫렸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최소한의 도리, 같은 사람이기에 느끼는 자그마한 양심을 지키니 모두가 죽어간다. 내 가족이 그랬듯 그녀의 비참한 죽음도 자신 때문이리라.


“나..는..”


그렇게 부서진 인성의 찌꺼기가 허무하게 뱉은 숨결에 묻어나자 외눈에 어린 열기가 회색으로 바래졌다. 말할 수 없이 섬뜩한 흉기가 몰려와 사지를 휘감아오건만, 그는 여인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또 구하지 못했어.”


차마 그녀를 버리지 못한 이유가 한낱 측은지심 같은 게 아니라 가족과 동일시했었기에 그랬다는 걸 깨닫는 순간, 끔찍한 상실감이 몰려들어 그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사소한 일이요, 일면식 하나 없는 타인의 죽음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을 때 부서진 이성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한 트리거인 듯했다.


‘그동안 뭘 한 거지?’


참으로 어리석고 서글픈 물음에 대한 답은 역시나 스승이 해줬다.


‘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내가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고 몇 번을 더 말해야 하느냐!’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스승의 음성 덕에 급작스러운 패닉상태에서 벗어나려 할 때, 그렇게 찾아 헤매이고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려와 심장을 옥죄였다. 그의 모든 걸 산산이 조각냈다.


“오빠.” 머릿속이, 아니 세상이 그대로 정지해버린다. “오빠, 왜 지금 왔어? 나.. 나 데려가려고 온 거야? 그러면 이제 나..버리면 안..돼.”


작가의말

이렇게 남매가 만났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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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대격변의 시[전투]사제의 연. +2 17.10.11 293 9 11쪽
264 대격변의 시[전투]제신 +7 17.10.10 308 1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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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대격변의 시[검주]마환 vs 송광극 +9 17.09.29 321 1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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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대격변의 시[전투]송광극 +10 17.09.26 237 1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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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대격변의 시[전투]증명 +4 17.09.22 239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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