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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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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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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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9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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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67

DUMMY

"최석정을 정오품 병조정랑兵曺正郞에 제수한다."

"감읍하옵니다."


경신년 새해가 밝았다. 벽두부터 왕이 내린 교지가 조정에 한방울의 파문을 던져놓았다. 시퍼런 청단령을 갖춰 입고 다시 행각 사이로 걸어들어와서 왕에게 직접 교지를 하사받는 모습에 허적은 입을 벌린 채로 혀끝을 입천정에 대었다. 괜히 입안이 쓰고 매웠다.


"아니 어떻게 괴수를 옹호한 자를 병조정랑 씩이나 앉히시는 거야."

"..."


좌측에 고개를 조아린 민희가 투덜거리는 음성에 허적은 속눈썹을 뻣뻣하게 치켜떴다. 지금껏 송시열의 편당으로 분류된 자들은 하나같이 조정에 발도 붙이지 못하였다. 송시열을 비호했던 이들은 목숨을 잃고, 귀양을 떠나고, 다시는 조정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버젓이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까지 썼던 최석정이 복귀했다. 그것도 병조정랑으로.


허적은 한순간 허공에서 왕과 시선이 얽혔다. 가시돋친 눈초리가 자신의 목줄을 휘감는 것을 느끼고 허적은 가슴이 섬뜩하여 헛숨을 들이켰다. 독한 눈빛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느낌에 모골이 송연했다. 방금 왕은 자신에게 표정을 들켰다. 북풍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춘풍같은 눈빛으로 최석정을 쓰다듬어본다.


그런데 정작 꿇어엎드려 교지를 받는 최석정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눈초리가 슬그머니 병조판서 김석주를 향했다. 저 김석주金錫胄, 아니 김석저金錫猪...저리 겉과 속이 모두 시꺼먼 작자의 밑에 기어들어가다니. 그나마 석하놈은 속이라도 눈처럼 새하얗지. 최석정은 소태를 한입 가득 씹은 기분이었다. 김석주가 두 눈썹을 꿈틀대며 묘한 쓴웃음을 짓는 게 눈에 들어왔다.


"..."

"..."


엄숙한 조정에서 굳이 말을 섞을 필요는 없었다. 최석정은 정오품의 대열로 돌아와서 엎드리곤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실룩였다. 김석주 밑에서 일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반년 남짓 관직 생활을 못한 탓에, 이미 애 셋 딸린 아내한테 온갖 바가지를 긁혔다. 당신 없는 사이 친정에서 눈칫밥을 먹느라고 힘들었다, 없는 살림에 스승까지 챙겨주는 오지랖에 집안 살림만 거덜났다, 차라리 외아들을 팔아서 의빈이라도 시킬 걸 그랬나 싶다, 그러다 공주마마가 요절해서 홀아비로 평생 개가도 못하고 대가 끊겨도 나는 모른다, 등등...피를 말리는 바가지였다.


찬밥 더운밥, 진자리 마른자리 가릴 처지가 못되어서 할 수 없이 김석주의 밑으로 기어들어왔다. 그것도 밤낮으로 상전이랍시고 저 시꺼먼 얼굴을 마주하고 수본을 올리고, 보고를 하고, 하면서.


하지만 눈앞에서 왕이 너무도 해맑게 웃는다. 교지를 건네면서 두손을 정답게 맞잡으며 반짝이는 두눈이 가슴에 빗장처럼 철컥 걸린다. 마누라가 문제가 아니라, 전하가 문제다. 전하의 뜻을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다. 감히 용안을 볼 수 없는 신하의 도리를, 왕이 고개를 낮추어 눈높이로 바라보며 웃는 바람에 잠시 망각했다. 이리 진심으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주군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다.


"자네도 결국 내 사람이 되었구만."


편전을 물러나와 행각 사이로 걸어들어가는 순간, 하필이면 김석주가 뒷짐을 지고 옆으로 다가서서 짐짓 건넨 말에, 석정은 온몸의 신경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에 코끝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저는 병판대감의 사람이 아니라, 전하의 사람입니다."

"..."


기어코 선을 긋는 석정의 발언에 김석주가 콧잔등을 꿈틀거렸다. 비위가 뒤틀리긴 해도 맞는 얘기였다.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누구보다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 스스로 전하의 사람이라 자처하는 꼬락서니가 아니꼬울 뿐이었다. 물론 자신만 저 최석정이 눈엣가시인 건 아니었다. 행각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최석정의 등뒤로 사방에서 눈총이 따갑게 박히면서 험담도 박혔다.


"기껏 쫓아냈더니 또 돌아오다니."

"어떻게 송시열을 비호하고 전하를 비난한 자가..."

"아...저 불출이가 전하 눈에 들긴 들었으이."

"그러게 전하께서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김석주가 굳이 최석정을 두둔하지 않고 잠자코 듣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오도일의 껄렁껄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불출이는 무슨."


남인 신료들이 뜨악해진 눈빛으로 돌아보니 역시 청단령을 입은 오도일이 히죽 웃었다.


"자네..."

"말이야 바른 말이고, 발이야 마른 발이지, 말을 입으로 하는 겁니까, 발로 하는 겁니까?"

"아니 이 친구가..."

"저 친구야 천재 중의 천재지요. 우리 중에 저 친구 학문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나 있답니까?"


오도일이 유들유들하게 대꾸하며 신료들을 비웃었다.


"무슨 말을 그 따위로..."

"놔두게. 저 친구야 가끔씩 정신이 오락가락하잖나."

"아니, 그쪽 홍문관 사람인데, 하관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요?"

"한땐 그쪽 예문관 사람이었는데 말이오?"

"지금 말이오 지금!"


신료들이 치를 떨며 오도일을 욕했다. 하지만 오도일은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이제야 외롭지 않았다. 시제 사건 장본인인 박태보는 아직도 조정에 복귀하지 못하는 참이었고, 그나마 자신은 복귀할 수 있었다. 뭐 가끔씩 초를 치는 말실수 정도야 그럭저럭 묻어갈 수 있었다. 글실수만 하지 않으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탓에. 그런데 오도일은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한 손길인지, 눈길인지가 느껴졌다. 느낌이 이상하여 뒤를 돌아보니, 하필이면 김석주가 거뭇한 얼굴로 흑심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참이었다.


응?


오도일은 기분이 요상했다. 어쩐지 온몸에 끈적끈적한 거미줄이 친친 감기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김석주의 새로운 먹이가 된 기분이었다. 설마...



"수찬 오도일을 병조정랑에 제수한다."


보름쯤 지나자 오도일도 졸지에 김석주의 밑으로 끌려들어갔다. 편전에서 교지를 받아들고 오도일은 기분이 묘하였다. 물론 부동의 가막쇠나 다름 없는 병판대감 밑으로 딸려들어가면, 쉽사리 남인들의 도끼질에 찍혀나갈 위험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친한 동기인 최석정과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또 술잔도 맞댈 수 있으니 좋았다. 하지만 왠지 찜찜했다.


"오정랑, 내 밑으로 들어온 걸 환영하네."


자리로 돌아가는 오도일의 귓가에 김석주가 속닥였다. 오도일은 고막에 김석주의 비릿한 입김이라도 닿은 기분이 몸서리처지게 싫었다. 그나마 최석정 만큼은 김석주에 대한 반감이 없는 탓에, 그저 썩어빠진 웃음을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예, 뭐..."

"헌데, 자네, 최정랑...아직도 전하께 사은謝恩을 하지 않았나? 이러다 일월이 다 가게 생겼으이."


석주가 석정을 돌아보며 타박을 하였다. 도일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최석정이 병조정랑에 제수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미적거리면서 사은을 미루다니. 뜻밖이었다.


"아직도 안했나?"

"오정랑이 먼저 하시든지."


석정이 오도일에게 상체를 바짝 기울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시큰둥히 대꾸했다.


"내가 먼저 사은을 하면 내가 선밸세."

"어차피 한살 많으시니 선배 하시든지."

"자네, 왜 그리 속이 배배 꼬였나?"

"배배 꼬인 게 아니라 기름이 고인 거요. 난 누구만 보면 속이 느글느글하다 못해 지글지글하거든."

"그러다 눈가에 주름부터 자글자글해질 걸세."

"아니 지금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라..."


석정은 미간을 찡그리며 대꾸하다 말고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도대체 전하께서 왜 자신을 병조정랑에 제수하셨는지, 게다가 또 오도일까지 잇달아 병조정랑에 제수하신 건지. 덩달아 제수된 오도일은 그저 속도 모르고 함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즐거워하지만, 자신은 아무래도 찜찜했다. 벼슬자리가 없어서 병조인가. 도대체 왜 병조인가.


"어디 보자...다음이 누구더라...아...현묵자가 있었지. 이 친구도 우리 병조로 데려와야지. 이거이거, 우리 병조가 아주 문재文材들을 싸그리 싹슬이하게 생겼으이."


석주의 식탐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석정은 현묵자까지 데려오겠다는 석주의 발언에 양쪽 팔뚝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두손으로 양팔을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병조판서 김석주는 김석하의 족형이고, 김석하는 홍만종과 둘도 없는 지기知己이고 하니, 홍만종과 친분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병조는 무관들이나 임의로 천거하거나 할 수 있는 만큼, 김석주가 만종을 앉힌다면, 아마도 무관자리일 터였다. 도대체 왜 이렇게 병조에 인물들을 끌어모으는 건지, 느낌이 좋질 않았다.


께름칙했던 최석정은 결국 일월이 다 가서야, 두손에 홀을 쥐고 통명전으로 가서 사은례를 행하였다. 석정이 올린 전문箋文(하례의 뜻으로 올리는 글)을 펼쳐 읽으면서 숙종은 왜 한달이나 속을 썩였냐는 듯 석정에게 두눈을 흘겼다. 하지만, 최석정은 그저 손안의 홀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전하, 천신을 병조에 두시는 까닭이라도 있는지요?"


석정이 조심스럽게 물어도, 숙종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사부야 어디 앉혀놓아도 제몫을 해내는 인재잖소."

"그게, 답니까?"

"뭐가 그리 궁금하시오?"

"천신을 병판의 휘하에 두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저 믿을 만한 사람들한테 병권을 맡기려는 것 뿐이오."


숙종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 짙은 눈동자는 아침 햇살에도 더욱 어둡게 번뜩였다. 자신보다도 사부가 더 순진한 것 같았다. 닳고 닳은 허적은 벌써 자신의 표정을 읽고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모양인데. 누구는 보지 말라 해도 몰래 자신의 안색을 읽는데, 누구는 보라 해도 자신의 안색을 읽지 못하니...경륜이란 이런 건가.


"천신은 김석주를 믿지 않습니다."

"..."


숙종은 흠칫 놀라서 석정을 쳐다보았다. 읽었나. 고개를 조아린 최석정의 속눈썹에 눈동자가 가려져 있었다. 사부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발치를 보는 느낌이었다. 발치의 그림자를 보고도 읽어내나.


그런 숙종의 눈앞에 석정이 품속에서 손바닥만한 앙부일구를 꺼내어놓았다.


"신이 전하께 일영日影을 보는 법을 알려드렸지요. 기억하십니까?"

"그야..."


숙종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앙부일구의 시반 위로 시선이 뚝 떨어졌다.


"해보라고?"

"네."

"참내...이 나이에 사부에게 시험을 치러야 하오?"

"연치가 무슨 상관입니까? 설마, 벌써 잊으신 겁니까?"

"날 뭘로 보고. 기다리시오."

"네."

"먼저 수준부터 맞추고..."


숙종은 통명전이 동향인 걸 감안하여 앙부일구 둘레에 새겨진 십이지신의 닭이 마당 반대편인 서쪽으로, 그리고 토끼는 마당쪽인 동쪽으로 오도록 동서남북 방위를 맞추었다.


"전하, 닭이 서쪽인데 어찌..."

"맞잖소."

"아니, 이쪽이 남쪽이니 서쪽은..."

"사부가 틀렸소. 통명전은 남향이 아니라 동향이오."


숙종은 씨익 웃었다. 스승이 틀리니까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물론 자신이 여기 통명전에서 오랫동안 지낸 탓에 동향인지 남향인지를 아는 것이지만.


"그렇습니까?"

"그러니 지금이 사시巳時."


숙종은 어깨가 으쓱해져서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으로 영침의 끝을 짚어보였다. 석정은 숙종의 손끝을 따라 영침의 그림자를 살피며 담담히 웃었다.


"해의 그림자...백성들도 여기 해의 그림자를 보고 시각을 보지요. 전하의 그림자를 보고 조선을 보지요."

"..."

"하오나, 김석주는 살아서 염근리廉謹吏, 죽어서 청백리淸白吏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욕심 많은 그림자는 민심도 천심도 덮을 테지요."

"..."


영침을 만지던 숙종의 손가락 끝이 꿈틀거렸다. 김석주의 그림자를 백성들에게 비치지 말라? 그 그림자로 조선을 비추게 하지 말라? 김석주에게 어심을 기울이지 말라? 평소엔 귀담아들을 충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김석주가 필요했다.



춘삼월로 접어드는 이월의 마지막날 밤에, 왕이 느닷없이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병조의 대소신료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승정원 대청 앞에 빼곡하게 모인 신료들은 영문도 모르고 불려나온 채로 두눈을 멀뚱거렸다.


이윽고, 왕이 그 측근내관을 거느리고 승정원 본청으로 들어섰다. 위풍도 당당하게 내관들이 산선을 들고 뒤따랐는데, 최측근인 두광은 금빛실로 수를 놓은 두루마리를 받친 연상을 들고 뒤따르는 참이었다.


"전하..."


신료들이 황망히 꿇어엎드리자, 숙종은 좌중을 쓰윽 훑어보며, 신료들 틈새로 최석정의 얼굴을 확인했다.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병조까지 다 왔는가?"

"저희 승정원도 준비되었사옵니다."

"저희 예문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홍문관과 병조도 왔습니다."


저마다 수장들이 고하였다. 숙종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청마루를 올랐다. 두광이 재빠르게 목화를 벗기고 섬돌에 올려놓는 동안, 승정원의 승지들이 왕이 앉을 의자를 북쪽에 설치했다. 숙종이 곤룡포자락을 펄럭이며 의자에 착석하자, 예문관 대제학이 대청 앞에 모인 신료들의 면면을 훑어보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하온대 어찌...신들을 여기 정원에..."

"내 모처럼 경들의 글솜씨 좀 견식하려고 불렀소."


숙종은 빙그레 웃으면서 두광에게 턱짓을 보냈다. 두광이 고개를 조아려서 답하더니 두루말이를 떡하니 대청에 내걸었다.


- 置酒凌煙閣

능연각에서 주연을 베푼다.

- 七言排律十韻詩

칠언배율십운시


신료들이 두눈을 꿈틀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능연각凌煙閣, 당태종이 공신 24인의 얼굴을 그려 치하하던 누각 이름...즉, 승정원, 예문관, 홍문관처럼 난다 긴다 하는 문장가들이 모인 관청들의 관료들을 모조리 모아놓고 시험을 치러서 표창을 하겠다는 의도였다. 긴장되어 목젖이 꿈틀할 정도로 침이 넘어갔다.


"저건..."

"천신들을 제술시험을 보시려구요?"

"그렇소."


왕의 대꾸에 수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쏠렸다. 홍문관이나 예문관, 승정원이면 몰라도 병조가 끼여 있다니. 격이 맞지가 않았다.


"저기, 병조도 말입니까?"

"왜, 뭐 잘못됐소?"


왕이 의미심장하게 웃어보였다. 도승지가 긴장된 얼굴로 왕의 어필로 쓰인 시제를 쳐다보곤 승정원의 아랫관리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승정원의 체면을 걸고, 꼭 거수居首(으뜸)을 차지하라는 압박의 눈짓이었다. 그가 예문관 대제학을 곁눈질로 살피니 예문관 대제학은 설마 예문관이 고작 승정원과 병조에게 장원을 뺏기겠나 싶어서, 특히 병조쪽을 마뜩찮게 흘겨보았다. 홍문관 대제학도 마찬가지였다. 글재주가 빼어난 자들만 모인 곳이 예문관, 홍문관, 승정원이었다. 병조에게 뺏길 수는 없었다.


당장 대청 안에 제술시험을 위한 문방사우가 준비되고, 신료들이 대청에 올라 시험을 치렀다. 최석정은 가만히 시제를 올려다보며 머릿속으로 시상을 정리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아니, 병조는 왜 낀 거야."

"먹이나 갈려나 보지."

"먹을 갈 줄은 알고?"


신료들이 푸념하고 또 비웃는 것이 귀에 들려왔다. 불과 반년 전까지 홍문관, 예문관에서 한솥밥을 먹던 자들이 하는 소리라니. 석정은 피식 웃곤 일필휘지로 시를 써내렸다. 붓끝에서 퍼지는 은은한 먹향이 즐거웠다.


"과시科試 결과를 발표하겠다. 갑甲 병조정랑 최석정, 을乙 병조정랑 오도일, 병丙 승지 박태상, 정丁 검열 이현기...거수居首(장원) 최석정!"


숙종의 발표에 승정원 대청 안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이럴 수가.


지금 제술시험의 장원과 차석을 병조정랑 둘이서 독차지했다. 게다가 상위 셋이 모두 서인이다. 검열 이현기만 겨우 체면치레를 할 뿐이었다. 대청 안이 온통 침통해진 분위기가 되었다. 예문관 대제학들과 승정원 도승지는 차마 승복하지도, 불복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 표정으로 안면근육을 실룩거렸다.


"거 보시지요. 무려 거수, 거수로다!"


오도일이 소리내어 웃으면서 으스대듯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러자 신료들이 아니꼬운 눈초리로 핀잔을 주었다.


"자넨 차석을 하고도 웃음이 나오나?"

"도대체가 생각이..."


그래도 오도일은 싱글벙글이었다.


"웃음이 나오지요. 저 최석정이 갑, 이 오도일이 을, 무려 우리 병조에서 갑을을 다 차지했는데. 거기 승정원은 박승지가 병, 또 홍문관은 이검열이 정이구려."

"..."

"어떻게 조선팔도에서 글빨 좋은 천재들만 모이는 옥당, 정원에서 우리 병조한테 밀리나 몰라?"


오도일이 계속 염장을 긁는 말에, 예문관과 홍문관 관료들이 눈을 흘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조정랑에 수찬이었던 놈이 말끝마다 우리 병조, 우리 병조라니. 같은 예문관에 홍문관 출신이던 최석정을 좀전까지 비웃던 것은 생각도 못하고서 그저 아니꼬웠다.


"우리 병조?"

"뭐?"

"그럼 뭐 너네 병조겠수?"


오도일이 실실 웃으면서 사람 속을 벅벅 긁었다. 예문관과 홍문관의 콧대가 납작해지니 속이 시원했다. 남인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니 더 속이 시원했다. 좌중을 쓰윽 둘러보는데 수장인 김석주 또한 어깨가 으쓱해져 있었다. 어차피 홍문관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겸하는 김석주야 홍문관에서 거수가 나와도, 병조에서 거수가 나와도 그만이었지만.


"잘한다! 우리 오정랑!"

"...."


오도일은 움찔해서 최석정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최석정도 장원을 차지한 것이 뿌듯하여 힐끔 왕과 시선을 교환하며 입가에 웃음을 짓는 참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오도일은 조금은 속이 쓰렸다. 친한 동기이고, 같은 서인이긴 해도, 그래도 자신이 간발 차이로 장원을 놓친 것이 아쉽기는 하였다.


그래도 뭐...


오도일은 아쉬운 가슴을 추슬렸다. 다음에 자신이 더 분발해서 거수를 차지하면 된다. 어차피 문장은 최석정과 자웅을 겨루는 자신이니. 그는 부러운 마음을 접어두고 진심으로 최석정의 거수를 축하하며, 최석정의 어깨를 한팔로 끌어안고 툭툭 쳤다. 석정이 빙그레 웃으면서 눈웃음으로 답하였다.


"고마우이."

"웃지 마. 정들어."


오도일이 피식 웃으면서 핀잔을 주자, 최석정은 더욱 입꼬리과 눈꼬리에 힘을 주어 씨익 마주 웃었다. 오도일이 눈을 흘기거나 말거나, 최석정은 대청으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더욱 환히 웃었다. 웃으면 정든다니 더 웃어줄 수 밖에.


"갑 최석정에겐 표피豹皮 한벌一領을, 을 오도일에겐 호피虎皮 한벌을, 병 박태상과 정 이현기에겐 초주지 세권과 붓 일곱자루七柄, 먹 두홀笏을 지급하라."


왕의 옥음에 석정과 도일은 더욱 싱글벙글해진 얼굴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고 웃었다. 그 모습을 왕은 그저 흐뭇하게 쳐다보았지만, 김석주는 입꼬리를 비틀며 지켜보았다.


내 새끼들...


벌써 한두달을 데리고 있었더니 정이 조금 들었다. 유난히 맛이 있는 술을 묵혀두고 마시는 그런 기분으로, 그저 술이 잘 익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기다리는 심정으로, 석주는 석정과 도일을 응시했다. 술이 다 익었다. 자신의 인질은 이제 제 값을 할 터였다. 물론, 여기 없는 더 귀한 인질이 먼저 제값을 할테지만.



춘삼월의 봄기운이 거리마다 넘실거리는 오후, 늙은 곱사등이 하나가 병판대감 김석주가 보내온 웬 어린 화공을 따라 남산 앞으로 불려왔다. 지팡이를 짚고 걷는데도 기력이 달려서 벌써 다리가 후들거렸다. 병판대감이 산다는 남산자락에 이제 초입에 이르렀는데도.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으리으리한 재산루가 눈에 들어오자 두눈을 움찔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요상했다. 벌건 대낮에 불려오는 일이고, 자신의 업이 병풍을 만드는 일이니 응당 병풍이나 만들자고 부른 것이겠지만서도. 저 높은 재산루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남산자락에 당도하자, 화공은 시냇물 사이의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 뒤를 따르는 노씨의 두눈에 태극정太極亭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노씨는 현판에 써진 글씨의 임자를 추억하며 자신도 모르게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영상대감...


물고한 지 스무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기억이 선연했다. 그분 함자가 김육金堉, 별호는 잠곡潛谷이던가...목멱산(남산)에서 우연히 만나서 이 얘기 저 얘기도 나누고, 그때만 해도 몰랐는데 까마득히 높으신 양반이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신이 높은 양반과 나무도 같이 한 사이라고 떠벌렸다. 물론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 역시 사실 나무를 같이 했다기 보다는 나무를 같이 골랐을 뿐이지만.


어쨌든 높은 양반이 소탈하게 자신과 함께 두손으로 시냇물도 떠마시고 시국을 논했다는 사실을 믿어주는 이가 없었다. 나중에 그 양반이 나무를 해다가 초가로 태극정을 짓고, 또 구루정과 공극당을 지으면서 병풍을 맡긴 덕에 사람들이 그제서야 알아주었다. 덕분에 자신도 솜씨를 인정받아서 도성 안에 손꼽히는 병풍장屛風匠이 되었으니...자신의 팔자에 무슨 복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감회가 깊었다.


"아, 차그..."

"거 조심하시지..."


어린 화공이 잠깐 상념에 빠져서 두눈을 반짝이며 화공을 뒤따르다 그만 실수로 오른발이 실수로 시냇물에 빠졌다. 화공은 살짝 인상을 쓰곤 무뚝뚝히 다시 걸음을 보채었다. 등에 멘 붓통을 더욱 조심스레 고쳐 메고서. 그 싹수 없는 모습에 화공은 콧잔등을 실룩거리면서 더욱 집중해서 시냇물을 건너갔다.


재산루로 가나?


도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재산루였다. 어쩌면 조선팔도에서 머리에 먹물 좀 든 사람들은 다 알 만한 곳이었다. 도성에서 가장 높은 누각이고, 가장 서책이 많은 장서루라 하였으니.


헌데 화공은 재산루를 지나 더 높은 언덕에 있는 태극정을 향하였다. 이번엔 반달 형태의 연못을 지나 태극정 앞으로 가는 것이, 다행히도 저 높은 재산루가 아니라 태극정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재산루나 태극정이나 지세가 높아서 가는 데에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헌데 이 어린놈의 화공은 태극정으로 들어가긴 커녕 걸음을 멈칫했다.


"아차차...높은 데 싫어하세요?

"..."


빨리도 묻는다.


병풍장 노씨는 입맛을 쓰게 다시면서도 대꾸를 하지 못하였다. 돌아가신 영상대감과 달리 그 손자인 병판대감은 그다지 평판이 좋질 못하였다. 오히려 조부의 권세를 물려받아 더욱 위세를 부린다 하였다. 그 휘하에 있는 자들에게 함부로 따지거나 할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노인네라 높은 곳은 부담스러울테니 낮은 곳으로 모시라 하셨는데."

"..."


더는 서 있을 기운도 없을 지경인데, 어린 화공은 이제 와서 낮은 곳으로 모시라 하였다며 다리에서 힘을 좌악 빼놓았다. 노씨는 헛숨을 거칠게 삼키며 눈알이 빠지도록 어린 화공을 노려보았다.


"그걸 왜 이제..."

"다리 아프시죠. 업어드릴게요."


갑자기 어린 화공이 너스레를 떨면서 병풍장 노씨를 향해서 등을 굽혀 보였다. 정말로 업을 기세였다. 병풍장 노씨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 되어서 머뭇거렸다.


"뭐? 아니 난..."

"에이, 업히시라니까요!"


어린 화공은 싹싹하게 웃으면서 병풍장을 업고서 언덕을 또 씩씩하게 내려가서, 또 다른 언덕을 올라갔다. 평소 지팡이를 짚고 발치를 조심하며 걸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어린 화공의 등에 업혀 가다보니, 우뚝 솟은 남산이며, 서로 마주한 백악산과 낙산이며, 머리가 볼록한 인왕산(필운산)이며, 또 머리가 뾰족뾰족한 도봉산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헌데 그 산들 틈새로 유독 납작한 초가 한채와 야트막한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물고하신 영상대감의 그리운 필체로 공극당拱極堂이라 현판이 달린 초가, 그리고 구루정傴僂亭이라 현판이 달린 정자 사이에, 어린 화공은 노씨를 내려놓았다.


"다 왔습니다."

"어..."


노씨는 멍하니 발밑이 땅에 닿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겨우 추스렸다. 병판대감이 재산루며, 태극정이며, 다 제쳐두고 이곳 공극당과 구루정으로 자신을 부르다니, 심상치가 않았다. 특히 구루傴僂는 곱사등이를 뜻하는 단어로, 이곳 구루정은 유독 등허리를 낮춰야만 들어갈 수 있는 정자라는 의미로 영상대감이 지으신 곳이었다. 노씨가 두눈을 끔뻑이자, 구루정에 올라선 시꺼먼 멧돼지 같은 자가 이쪽을 내려다보는 참이었다.


누구?


노씨는 한순간 김석주를 몰라보았다. 스무해 전 영상대감이 살아계실 때나 몇번씩 오다가다 보았을 뿐, 영상대감이 돌아가신 뒤로는 그 손자가 겸인들을 시켜서 병풍을 맡겼을 뿐, 직접 만나서 시킨 적이 없었기에 서로 얼굴을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헌데 영상대감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삐쩍 마른 보릿자루 같던 녀석이 이렇게 시꺼먼 똥자루가 되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


"노씨, 오랜만이외다."


김석주가 씨익 웃으며 건넨 말에 노씨는 귀를 의심했다. 오랜만? 아무리 봐도 영상대감의 손주뻘인데...워낙 손이 귀한 집이라서 그때 자신이 이 집에서 보았던 손주라곤 하나였다. 그런데 떡하니 여기 구루정을 차지하고 오랜만이라고 인사할 만한 사람은 역시 이집 손주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가끔씩 개돼지라며 허견과 김석주를 싸잡아서 말하는 걸 들어보긴 하였지만, 이렇게 막상 두눈으로 김석주의 모습을 확인하니 그저 기가 질릴 뿐이었다.


"뭐야, 나 기억 안나는 거유?"

"..."

"아니 이거 섭한데. 나요 나. 노씨가 만든 병풍에 손가락으로 구멍도 내었었는데."

"..."


역시 그놈이 맞다. 노씨는 그저 할말을 잃어서 눈밑만 실룩거렸다. 그토록 헌칠하니 준수하던 얼굴이 어쩌다 이렇게 멧돼지인지 똥자루인지가 되었는지. 두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나 정말 기억 안나쇼?"

"..."

"아...하긴 내가 좀 변했지."


좀이 아니라 많이 변했지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에서, 터지기 일보 직전인 똥자루가 되었는데. 노씨는 차마 목구멍으로 치민 말을 입밖에 내뱉지를 못하고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석주 도련님이십니까요?"

"어디 나갔다 들어왔나? 내 소식도 모르고?"

"아니...너무 변하셔서."

"뭐...짠내 나는 염근리를 조부로 둔 덕분에..."

"네?"

"어릴 때 하도 굶고 곯아서...하도 한이 맺혀 하도 먹어댔더니, 그새 이렇게 불었지 뭐가?"


노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김육은 만천하에 존경받는 명재상이었다. 자신이 직접 목멱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 지언정, 백성들의 식량과 재산은 탐하지도 않았다. 염근리로 산 덕분에 조선 백성들에게 청백리의 이름을 남긴 그가, 정작 자손에겐 끝없는 허기와 식탐을 남겼다니?


"..."

"그래도 반갑긴 하지? 반갑지?"


김석주가 재차 물어오니, 노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참으로 묘하였다. 자신도 모르게 두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늙은이가 주책이라고 욕할까봐 겁도 났지만, 기분이 참으로 요상했다. 왜 여기 구루정에 오니 새삼스레 영상대감이 그리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는 건지. 죽을 날이 가까워진 건지.


"소, 소인은 무슨 일로..."


주책맞게 목도 메인다. 노씨는 갑자기 아이가 된 기분이 되어 울먹였다. 그런 노씨를 보니 석주는 코끝으로 살짝 웃음을 흘렸다. 되었다. 일부러 노씨의 향수를 자극하러 이곳 구루정으로 노씨를 불렀다. 재산루부터 태극정 등을 두루두루 구경하게 하고서. 물론 초가는 체질에 맞지 않아서 일부러 재산루 앞에 기와집 한채 지어놓고 거기서 기거하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이곳 구루정은 왕과 세상을 향해 몸을 낮추고자 했던 조부 김육, 그리고 그런 김육과 인간적인 정을 나누었던 저 구루 노씨의 추억이 어린 곳인 만큼, 노씨는 자신의 제안을 결코 외면할 수 없을 터였다.


"왜긴, 병풍이나 좀 맡기려고 모셨지..."

"그게 전붑니까?"

"아니 뭐...당연히 아니지 전부가."

"그럼..."

"노씨가 영상대감댁하고도 거래한다며?"

"네?"


순간 노씨는 스무해 전 영상대감과 당금의 영상대감이 누군지 착각을 일으켰다. 그는 잠깐 멍한 상태로 과거와 현재가 뇌리에서 교차하며, 그제야 오한을 느끼면서 말귀를 알아들었다. 영상대감 허적을 말하는 건가.


"네...그런데요?"

"그집에서 병풍을 맡길 때, 저놈도 데려가."


석주가 턱짓으로 어린 화공을 가리켰다. 노씨는 두눈을 멀뚱거리면서 화공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녀석을 데려가라는 건지, 말귀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속내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가 멍청히 화공을 돌아보니 그저 어린 화공이 뻔뻔하게 자신에게 눈웃음을 칠 뿐이었다.


"뭘...하시려고?"

"그냥 이놈만 끼고 있어주면 돼. 나머지는 이놈이 다 알아서 할테니."

"..."


노씨는 더는 물어보지 못하였다. 영상대감도 생전에 도깨비 같은 구석이 있었다. 유난히 애국심으로 넘쳐서, 충무공 이순신의 신도비를 세운다 어쩐다, 백성들을 위해 대동법을 펼친다 어쩐다,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돈을 통행시킨다 어쩐다,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재산루에서 군병들을 양성시켜 대궐로 들인다 어쩐다...


그래도 그분이 하는 일은 다 조선을 튼튼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 손자는 어떨런지. 그래도 그분 손자가 시키는 일이니 눈 딱 감고 한번쯤은 괜찮겠지...노씨는 자신을 업고 구루정으로 데려온 어린 화공을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승윤은 노씨의 표정을 봐서 이미 반승낙한 것을 알아차렸다. 애초에 노씨를 재산루부터 태극정, 구루정으로 끌고 다니다가 자신이 생각해주는 척 업고 온 것도 처음부터 계산된 일이었다. 구루정이란 장소부터, 또한 그 이름부터 노씨한텐 특별한 의미인데다, 잠곡 김육의 손자인 김석주가 옛추억을 건드려 노씨의 심금을 울린 후에, 또 노씨를 업고 오면서 모종의 친근감을 쌓아서 자신을 끼게 만든 것도, 다 상전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뤄진 일인 만큼.



"고故 지사知事 허잠許潛에게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에게 익헌翼憲이란 시호를, 고故 상신 이성구李聖求에게 정숙貞肅이란 시호를 내리노라."

"감읍하옵니다."


왕이 죽은 문신들에게 시호를 내렸다. 허적은 두눈을 끔뻑이며 슬쩍 왕의 눈치를 살폈다. 왕은 허잠이란 이름이 자신의 조부라는 것을 모르고 시호를 내렸을 리가 없다. 요즘 왕이 자신을 보는 안색이 험악해서 내심 불안하였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던가. 하긴, 이미 힘의 균형은 왕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기울었다. 왕이 아무리 자신을 쳐내고 싶어도, 쳐낼 수가 없을 만큼 견고한 입지를 다져 놓았다. 송시열을 욕할 게 아니었다. 신하가 강하니 이토록 조정이 안정되는 것을.


"감읍하옵니다."


허적이 그 자리에서 이마가 전돌 바닥에 닿을 기세로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죽은 조부에게까지 광영이 내렸다. 조부가 충정이란 시호를 받은 사실에 어깨도 으쓱하고 흉골도 들썩하니 감격이 치밀었다.


"경하드립니다 영상대감."

"경하드립니다."


민희가 옆에서 슬쩍 어깨를 기울여 은근하게 축하의 말을 건네었다. 오시수도 질세라 고개를 숙이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편전 안의 신료들 대부분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저마다 한마디씩, 혹은 입모양이나 눈웃음으로라도 축하의 말을 건네느라 바빴다.


"경하드립니다."

"잔치를 크게 벌이셔야겠습니다."

"좋으시겠소이다."


여기저기서 물밀 듯이 밀려드는 축하인사에 허적은 답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서 답할 뿐이었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픈 법이지만, 배가 아픈 내색을 할 주제도 안되는 이들만 이곳 편전에 있었다. 단, 속을 모를 존재가 하나 있긴 하였지만.


"..."


숙종은 자신의 입으로, 손으로 허적의 조부 허잠에게 시호를 내리고도, 입맛을 쓰게 다시며 어탑 아래를 굽어보았다. 몇몇 서인들만 달갑지 않은 얼굴로 입을 닫았을 뿐, 대부분의 신료들이 편전을 나서기도 전에, 왕이 보는 앞에서 허적에게 축하를 건네기 바쁜 사실이 마뜩치가 않았다. 허적을 보는 숙종의 눈동자가 점점 차가워졌다. 하지만 왕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신료들은 그저 희희낙락 편전을 나설 뿐이었다.


"시호연은 언제쯤..."

"아니 우상은 뭐 벌써 우물가에서 숭늉 찾나."

"아니 나는 그냥...며느리 출산이 코앞이니 미리 날짜만 알자는 거지..."

"아이구. 영상대감, 저는 미리 말씀 안해주셔도, 딱 그날 통보만 하셔도 갈 겁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가지요. 암요."


편전을 나서면서도, 민희와 오시수는 허적의 좌우에 들러붙어, 시호연諡號宴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서로 상대방이 허적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것을 아니꼬워하면서, 그들은 허적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이 났다. 이미 권대운이나 권대재, 허목이 한꺼번에 허적에게 찍혀나가는 것을 목도한 뒤라, 허적의 눈밖에 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너무도 잘 아는 탓이었다.


"글쎄...우리집이 좀 누추하고 남루해서...잔치를 열 형편이 아닐세."


허적이 대꾸하는 말에 민희와 오시수는 순식간에 입안에 쓴침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인달방에서 가장 큰집이 누구의 집이던가. 허견이 보낸 종놈에게 납치되어 온 차옥이 허적 부자의 집인 걸 알아차린 것도 그만큼 집이 으리으리한 탓이었다. 그런데 지금 누구 앞에서 누추니 남루니 하는 말을 입에 담는 건지.


"겨울에 눈이 좀 왔잖나. 그래서 집이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내 나랏일에 바빠서 아직도 보수를 못하였으이."

"아..."

"그렇지요. 하긴...이번, 아니 저번 겨울에 눈이 좀 왔지요."


허적이 둘러대는 말에 민희와 오시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하긴 눈이 좀 왔다. 어쩌면 여름보다 더 골치인 게 겨울이려나. 눈이 집안 곳곳에 쌓여서 얼어붙어버리면, 손을 보기도 힘이 든다. 얼음을 녹이자니, 불을 함부로 때웠다간 목재가 다 쩍쩍 갈라지며 상해버리고, 그렇다고 놔두면 그 며칠새에 시꺼멓게 썩어버리고. 뿐이랴. 집밖은 물론 집안에서도 방안 구석구석 시꺼멓게 곰팡이가 피더니, 가구들은 경첩마다 시퍼렇게 녹이 슬고, 병풍들도 눅눅해졌나 싶더니 누렇게 곰팡이가 슬고, 이래저래 골치였다.


"허면 언제쯤...하긴 하시지요?"

"자넨 때가 어느 땐데 잔치타령인가? 지금 저 북쪽에서 오삼계가 죽고, 그 아들이 망하고, 청이니 정금이니 서로 쳐들어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참인데."

"아니...뭐...우상이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겠다고 그러겠습니까. 그저 선물이라도 미리 준비를 해놓으려는 것이겠지요."


허적이 오시수를 타박하자,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민희가 오시수를 거드는 척 슬그머니 깔아뭉갰다. 오시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입을 실룩거렸지만, 허적은 지금 당장은 죽은 조부의 시호연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왕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확실히 있다. 중궁전은 세번째 회임마저 잘못된 이후로 산실청일기까지 가져다 읽더니, 왕은 자신이 신임하는 김석주와 최석정을 한꺼번에 병조 관할로 묶어놓았다. 아니, 최석정을 김석주의 휘하로 꽁꽁 싸매놓았다. 그리고 평소에 자신만 보면 두눈에서 살기가 번뜩이더니, 갑자기 오늘은 조부의 시호를 내려주었다. 뭔가 심상치가 않다.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만약 왕이 이쪽을 치려면, 이쪽에서 먼저 칠 수 밖에 없는 것을.


굳이 역모까지 벌일 필요는 없겠지. 그저, 김석주든 김만기든, 둘중 하나만 쳐내면 될 일을. 허적은 허공 속에서 두눈을 차갑게 번뜩이며, 머릿속을 분주하게 굴렸다. 일단 왕의 손발을 꼼짝도 못하도록 결박해야 한다. 김석주야 속을 알 수 없어서 더 위험한 괴물이지만, 김만기는 당장 자신들과 적대적인 중궁의 아비니 두고 볼 수가 없다. 역시 김만기를 먼저 쳐내야 하나.


"영의정 허적에게 궤장几杖과 일등악을 내리노라."


그 다음날도, 숙종은 허적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죽은 조부에겐 시호를, 허적에겐 연로한 공신들이나 받을 법한 궤장을 하사했다. 또한 장악원 악사樂師 1인, 여기女妓 20인, 악공 10인을 인달방 허적의 집으로 보내서 호화로운 연주와 춤사위를 벌이게 하였다. 물론 왕의 웃음 속에 시퍼런 비수가 숨어 있었다. 허적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숙종은 허적에게 두둑하게 저승길 노잣돈을 챙겨줄 요량이었다.


"감읍하옵니다."

"시호연은 언제요?"

"스물여드레입니다."

"그렇소?"


숙종은 가만히 되물으며 심상하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왕은 중궁의 세번째 회임이 잘못되었을 때부터 어딘지 성정이 변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허적의 조부는 공신으로 책봉하여 시호도 내려주고, 또 허적에겐 궤장도 하사했다. 더 올라갈 데가 없을 곳가지 허적을 높이높이 띄우는 느낌이었다. 마치 연을 얼레에서 밑도 끝도 없이 연줄을 풀어 하늘로 올려보낼 때까지. 그러다 연줄이 끊겨서 연이 하늘로 올라가든, 땅으로 추락하든 할 것 같은데.


어쩐지 왕이 시호연을 벼르는 느낌이었다. 아니, 죽을 날 받아놓은 사형수를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여주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끝을 모르고 마냥 승승장구하는 허적의 추락이 두려웠다. 왕은 지금 허적을 가장 높은 곳에 띄우면서, 조부의 시호도 내려주고, 허적 본인에게도 궤장을 하사하여 가장 영예로운 반열에 올리고서, 그 발밑을 부술 궁리를 하는 참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갈 수록, 떨어질 때 아픈 법이지.


숙종은 차갑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귀엔 고양이 울음과 아기 울음이 함께 뒤섞였다. 아기 울음인지, 고양이 울음인지 혼동하며 혼몽에 빠지던 중궁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였다. 세차례의 회임...하지만 결국 상복을 입고 고통받는 중궁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서 금세라도 사라질 신기루처럼 반짝거렸다. 허적과 허견은 감히 용종을, 왕비를 어둠 속에서 해하였으니, 이제 그들의 발밑을 빠뜨려, 추락시킬 차례였다. 그때까지만이라도, 그들은 더 높이, 더 높이 올라가야 했다.


작가의말

1. 실제로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에 병조를 끼워서 숙종이 뜬금 없이 제술시험을 치렀는데, 최석정과 오도일이 둘다 함께 병조정랑으로 있으면서 왕의 제술시험에서 각각 1, 2등을 차지했습니다.


2. 병풍장 노씨는 실제 저 사건에 제가 상상을 더한 인물입니다. 성씨가 어떻게 되는지, 무슨 사연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3. 처음부터 시놉을 짜고 집필했습니다. 중간에 많이 스토리가 바뀌긴 하였지만, 엔딩 역시 짜여져 있습니다. 단, 진홍의 경우만 미정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두가지 엔딩이 나오더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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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2.19 20:17
    No. 1

    제목이 '해의 그림자'란 의미를 알게하는 글이네요

    어린 왕이 드디어 늙은 생강을 잡을 차렌가요

    아직 송시열이도 찜쪄먹지 못했는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2.22 14:52
    No. 2

    중의적으로 정한 거라서, 또 하나의 의미는 엔딩 때 나옵니다. 송시열을 찜쪄 먹으려면 속편에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2.23 16:07
    No. 3

    며칠 골골거리다 보니 늦었습니다.
    이제 허적과 아이들이 호되게 당하겠군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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