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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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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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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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51

DUMMY

- 허견은 손만 들었을 뿐, 대비전 서모께는 감히 폭행을 휘두른 바가 없으며, 유철은 곧바로 죄를 인정하였으나, 홍예형이 줄곧결백을 주장하는 중입니다. 이제 예형의 자백만 남았사오니, 예형을 더욱 엄히 문초하도록 윤허하여주시옵소서.


예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오시수가 서계로 고하였다. 숙종은 편전 어탑 아래에 오시수와 도승지를 따로 불러 세워두고 서 서계를 검토하고 允윤 한글자를 적었다.


"윤허한다."


왕의 재가가 떨어지고, 예형에겐 더욱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나장들이 찰자拶子(여성에게 주리를 트는 기구)가 그녀의 열손가락에 끼워 줄을 당기며 예형의 손가락을 무자비하게 옥조였다.


"아악! 제발, 제발...그만...그만...!"


예형이 온몸을 뒤틀며 몸부림을 쳤다. 아직도 성균관 노비안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자신인데, 허견이 양인이니 그녀도 양인이란 남인들의 궤변에 휘말려 이렇게 우포청이 아닌, 의금부에서 문초를 겪는 참이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영의정의 서자놈과 혼인해서 이꼴이 되었다.


"멈추어라."

"예. 대감."


형신이 멈추고, 예형은 열손가락은 물론 두눈도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는 예형의 두눈에 원독이 어렸다. 황천길에 동행은 데려갈 생각이었다.


"실수요? 유철 그놈이 오히려...겁간한 것입니다. 저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이것 봐라?


오시수의 두눈이 먹이를 낚아채는 솔개처럼 번뜩였다. 유철과 홍예형은 스스로 무덤을 팠다. 서로를 위한 무덤을. 서로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고, 물어뜯는 사이에 이미 관뚜껑도 닫혔다. 남은 일은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여 주상께 보고하는 것이었다. 다 끝났다고 배부른 눈웃음을 짓고서, 그는 예형의 찰자를 잡아당기던 나장에게 눈짓했다.


나장들이 예형의 손에서 찰자를 풀고 차꼬를 채웠다. 예형은 손톱이 갈라지고 피에 절은 자신의 손가락을 덜덜 떨었다. 자신이 빠져나가겠다고, 그녀를 불구덩으로 밀어넣은 지아비와 시아비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예형은 걸을 기운도 없어서 나장들에게 끌려 의금부의 옥사로 들어왔다. 철창으로 가득한 문이 예형을 집어삼켰다. 감방 한구석엔 손도 대지 않은 식사를 발치로 밀어둔 채로 드러누운 계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갑자기 들어와서 아직 문초도 받지 않았는데 쓰러져버린 계집...


"먹어 이것아...먹어야 살지..."

"..."

"먹고 힘을 내야 허견 그놈을 찢어죽이지..."


허견이란 이름 두글자를 듣자마자, 예형은 저절로 눈이 떠졌다. 동공에서 갑자기 불꽃이 터진 느낌이었다. 눈커풀이 파르르 떨려서 시야가 깜빡거렸다. 예형은 애써 두눈을 지릅뜨고 눈앞의 계집을 쳐다보았다.


방금 허견이라 했다, 허견...며칠 내내 감방에만 갇힌 예형으로선 오늘 갓 들어온 계집이 누군지, 무슨 죄목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쓰러져 누운 계집을 본 순간 예형은 최소한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지랄 맞은 지아비를 위해 온갖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아서 처리하는 준기란 놈이 별채로 데려왔던 계집들 중 하나라는 사실.


흥, 흑흥, 흑흥...


예형은 코로 웃음이 나오고, 입으로 울음이 들어갔다. 힘없이 눈길을 들어 자신을 쳐다보던 계집도 코로 울음이 나오고, 입으로 웃음이 들어갔다. 예형은 제정신을 잃고 울고, 웃었다. 이렇게 지랄 맞은 인연이 다 있나. 물론 여인들은 사내들과 한방에 두지 않는 법이라, 예형 자신과 저 계집을 한방에 몰아넣었겠지만. 덕분에 계집도, 자신도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예형은 고개를 돌려서 맞은편 감방을 쳐다보았다. 문초 흔적 하나도 없이 말쑥하게 허견이 앉아 있었다. 옷자락도 구겨지지 않은 모습이 더욱 예형의 울혈을 들끓게 했다. 하지만 예형은 소리를 질러 욕할 기운도 없었다. 이미 비명으로 목이 온통 쉬었고, 고문으로 열손가락 마디마디가 후들거렸다. 그런 자신을 보고 허견이 비웃으며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였다.


넌 끝났어.


"..."


예형의 두눈에 힘이 들어갔다. 혼자서는 절대로 죽지 않을 셈이었다. 죽어 물귀신이 되어서라도, 허견의 팔다리를 잡고 물고 늘어질 셈이었다. 예형은 사촌오라비 진석이 넣어준 사식의 국그릇 속에 잠긴 작은 은장도를 내려다 보았다.


미친 거다. 고문을 당하여 칼을 쥘 기운도 없는데, 은장도라니.


이 칼로 자신의 목을 벨 지언정, 손을 베어 피로 전언을 쓰고 말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피투성이 손가락을 들어, 치맛자락에 글을 썼다. 피가 굳어가다 보니 농담濃淡이 들쑥날쑥했다. 그녀는 하얗게 웃으며 계집을 향해 자신의 치맛자락을 펼쳐보였다. 순기인지, 준기인지, 제대로 보이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그저 펼쳐보였다. 계집이, 자신의 전언을 알아차려주길 바라면서.


이슥한 밤이 되어 숙종은 야대청에서 오시수의 보고를 받았다. 좌등이 줄을 이은 방안에서, 숙종은 대청에 부복한 오시수를 차갑게 쳐다보며 귀를 기울였다.


"허견은 대비전 서모에게 손을 대지 않았사옵고..."

"그만. 그 얘기는 지겨우니 홍예형과 유철의 일을 고하라."

“에...유철과 예형의 죄를 법에 비추어보면, 대명률 친속상간조로는 장杖 일백과 도島 삼년에 해당하고, 대명률의 속록으로는 두 간부가 함께 교형에 해당하옵니다."

"속록으로 교형에 해당한다?"


왕이 더욱 엄한 처벌에 마음이 기우는 반응을 보이자, 오시수가 움찔했다. 적당히 장 1백과 도 3년으로 처리하려던 일이, 왕이라는 변수에 부딪혔다.


"예형은 성균관 노비안에 아직 이름이 붙어 있으니 사족이라 이를 수도 없고, 허견이 문과 출신으로 교서관 정자를 지냈으니, 그 아내인 바, 천인이라 이를 수도 없습니다."

"..."

"따라서 대명률과 속록의 어느 법을 적용할 것이며, 사족인가 천인인가를 구별할 일이 극히 중요하여 감히 결정할 수가...”

"결정할 수 없다?"


숙종은 날선 눈빛으로 오시수를 쏘아보았다.


"비국備局(비변사, 즉 의정부) 당상들을 불러 논의하라."


야대청에 3정승 중 당사자인 허적을 제외하고 권대운과 민희가 불려왔다. 오시수 또한 불려와서 일의 내막을 보고했다. 이미 들어 아는 일인데도 권대운과 민희는 선뜻 홍예형과 유철의 처벌을 주저했다.


“그 범죄의 정상을 논하면 조금도 용서할 수 없으나 대명률이나 속록에 따라 결정하기도 어려우니 가볍게 논하기가...”

“함께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종신토록 석방하지 않는 것이 맞게 처리하는 도리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숙종은 코웃음을 쳤다. 무덤을 파놓고서 관은 못넣겠다니.


"왜들 약한 모습을 보이는가? 이제 와서?"

"예? 약한 모습이라뇨?"

"법대로 정할 일을, 왜들 한발 뒤로 빼냐 이 말이다."

"..."

"유철은 사촌의 아내와 간통하였으니, 개, 돼지와 같은 행동이다. 이처럼 풍기문란을 일으키는 무리는 결단코 천지 간에 숨을 쉬게 둘 수 없으니, 모두 속록의 법대로 처단하라.”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것처럼 숙종의 음성은 가차 없었다. 진상을 알 수 없는 숙종으로선 이제 와서 솜방망이 처벌을 하자고 나선 신료들이 이해되질 않았다. 이번 추국을 통해 얻은 것은 허견은 절대로 청풍부원군의 첩실에게 손대지 않았다는 증언들 뿐이니.


"..."

"왜들 대답이 없는가?"

"속록이라면..."

"왜 갑자기 못 알아듣는가? 다 알면서."


숙종은 차갑게 손날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오시수는 물론 권대운과 민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권대운과 민희, 오시수가 쭈볏거렸다. 유철의 목숨만은 건지려던 것이 소용 없게 되었다. 왕은 이왕 이렇게 된 것 똑같이 교형에 처하라는, 살벌한 분부를 내렸다. 유철의 집에서 가만 있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랴. 자신들의 왕은 약관도 되기 전에, 이다지도 모질고 거칠어진 것을.



"또 뭔가?"

"유철의 집에서 궐문 앞에서 격쟁을 하였사옵고...유철이 다시 진술을 번복하여..."


다음날 아침 곧바로 편전에 올라온 보고였다. 숙종은 보름이 넘도록 허견이란 이름과 그에 연루된 이름과 씨름을 하느라 속이 울렁거렸다. 죽을 날을 받아놓은 자들이 진술이 바뀌는 일이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숙종 자신은 즉위하고 5년째 이런 심리의 생사여탈을 주관하였으니, 더욱 신물이 났다.


"이제 와서?"


간밤엔 대비전 서모가 울며 찾아와 엎드려 빌었다. 죽은 아비의 첩실이 고울 리도 없지만, 대비전도 함께 거들었다. 자신의 체면을 보아 허견도 처단해야 한다고. 물론 어미는 서모의 동생인 예형이 죽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허견만 죽으면 되었다. 허적의 아들 목숨만 거두면 되었다. 그런 어미의 태도를 숙종은 더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둘을 다시 문초하라."


숙종은 차갑게 명하였다. 눈 가리고 아웅이든 뭐든, 최대한 들쑤실 생각이었다. 최소한 자신을 속이는 일은 없어야 했다. 알고는 속아줄 수 있어도, 모르고는 속아줄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녘에, 숙종이 편전에 당도하자, 행랑 좌우로 줄지어 서 있는 신료들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벌집을 쑤신 꼴을 보니 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은 의문이 숙종의 뇌리에 또아리를 틀었다.


편전에 들어가서, 도승지가 가져온 상소더미를 서안에 쌓아놓고 하나하나 살피다 보니, 눈에 익은 남구만의 서체가 눈에 들어왔다.


"또 남구만인가? 이번엔 무슨 상소..."


신료들에게 툭툭 내던지듯 말하면서 상소를 읽어내리던 숙종의 두눈이 부릅떠졌다.


發掠人妻事,

自法曹推覈,

則李東龜女次玉爲徐億萬妻者,

被人掠去之事發露,

而爲積所壓, 事將無實。


남의 아내를 약탈한 일이 발생하여

본부에서 추핵해보니,

이동귀의 딸 이차옥은 서억만의 아내였습니다.

그녀가 남에게 약탈당한 일을 적발하였으나

허적의 압력으로 일이 부질없이 될 듯합니다.


"허적의 압력이라...?"


숙종은 목울대를 콱 짓눌린 기분이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곡절인 건지.


"전하, 남의 재물을 도둑질한 자를 도둑이라 부릅니다. 남의 부녀자를 도둑질한 자는 도둑 중에서도 상도둑이니, 마땅히 포도청이 조사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외숙 김석주의 말에 숙종은 가만히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김석주가 두눈에 불을 켜고 나선 걸 보니 이번에도 허견이다. 왜들 허견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헌데 기분이 찜찜한 것이, 중궁이 사가로 도망쳤다가 광통교 어귀에서 전기수의 공연을 보다가 허견하고 엮인 장면이 뇌리를 간지럽혔다. 느닷없이 밀화를 훔쳤다며 진홍을 도둑으로 몰며 포도청으로 끌고 가려던 허견이었다. 그 허견이, 지금은 유부녀를 납치하여 욕보인 죄목으로 남구만에게 지목 당했다.


"한점 의혹도 없이 심리하라."

"예 전하."


도승지가 답하면서 허적의 눈치를 보았다. 허적의 얼굴은 차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차라리 차옥을 친정으로 보냈더라면, 조용히 넘어갈 것을. 왜 아들놈은 구태여 초가삼간도 아니고 기와백간에 불을 지르는지, 속에서 열불이 일었다. 하필 한성부는 서인의 권역이 되어 있었다.


"이건 또 한성부 판윤 김우형의 상소로군. 한성부에서 김세보에게 내준 허가보다, 김세보가 훨씬 많은 금송을 베어 윤휴에게 넘겼다...무려 삼백 예순 그루라..."

"그것은..."


숙종이 다음 상소를 펼쳐들고 하는 말에, 남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기저기 서인들이 한꺼번에 들쑤시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를 막으면 저기가 터지고, 여기를 기우면 저기가 해지니...


"한성부가 참으로 바빠지겠군. 더불어 경들도."


숙종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윤휴의 금송 불법거래, 허견의 대비전 서모 폭행사건, 허견 처와 허견 외사촌간의 불륜, 이제는 허견의 유부녀 납치 및 강간 사건이라...모든 사건의 중심에 허견이 있었고, 허견의 뒤에 허적이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 아비 허적은 언제고 빠져나갈 굴을 세개는 넘게 파놓을 수 있는 토끼였다.



한성부 우윤 겸 포도대장 구일은 당장 이동귀의 노비들을 잡아들여 추문했다. 그 중 득민과 숙지란 자들에게서 우격다짐으로 진술을 손에 넣었다.


- 방목교 근처 이씨집에서 술자리를 차리고 맞아서...차옥이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납치되었는데...

- 납치한 자가 누구냐?

- 그것이 잘... 아씨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 네 아씨가 끌려가서 누구의 얼굴을 보았다더냐?

- 허가...놈입니다.

- 허가? 허견 말이냐?

- 예에...

- 허면 허견의 종놈이겠구나?

- 예, 예에...그렇죠.

- 허면 그놈 이름이 무엇이냐?

- 그게...뭐더라...

- 순...

- 아...순기였습니다. 순기요.


구일로선 이미 차옥이 허견을 지목한 사실을 알았고, 예형은 의금부 국청에서 문초를 받으며 차옥에게 피로 두글자 전언을 남겼다. 순기. 남편 허견의 명을 받아 평소 계집들을 유인하고 납치하는 그놈의 이름을 적은 것이 분명했다.


"이댁에 순기란 자를 찾으러 왔습니다. 만나게 해주시지요!"


해가 저물기 무섭게, 구일은 종사관 1인, 군관 30여인, 포도부장 2인, 군사 30여인을 이끌고 인달방 허적의 집을 에워쌌다. 무려 영의정의 집이었기에, 문턱도 넘지 못하고 고함쳤다.


"순기만 내놓으면 곱게 물러가겠습니다!"


정중하다면 정중할 수도,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도 있는 음성이었다. 마치 도발하는 듯한 구일의 고함은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계속되었다.


마침내 끼이이 문이 열리더니, 언제 퇴청을 했는지 붉디 붉은 홍단령을 입은 허적이 솟을대문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구일이 황급히 말에서 내리자, 허적은 문간에 버티고 서서 오히려 그들을 꾸짖을 뿐이었다.


"우리 집엔 순기가 없다. 못 믿겠으면 가서 장적帳籍(관청에 등재된 호적)을 살펴보면 될 게 아니냐?"

"그러지 마시고 순기란 자를 내보내 주십시오..."

"없다니까! 네놈들은 이 허적의 이름이 그리도 하찮더냐? 그리도 보잘 것 없더냐?"

"..."


구일은 미간을 찌푸리고 허적을 쳐다보았다. 집에 순기가 없다니. 이건 예형이 차옥에게 전언으로 알려준 이름이었다.


하지만 허적이 장적에도 순기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불안해졌다. 12간지 중에서 子자, 卯묘, 午오, 유酉가 들어가는 식년式年, 즉 3년마다 호적을 등록하고 경신하게 되어 있다. 작년 술오戌午년에 午자가 들어가니, 작년에 호적을 경신하였는데도 거기에 순기가 없다면, 혹은 힘깨나 쓰는 왈짜들이 더러 천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채로 식객 겸 머슴살이를 하는 경우라면...자신들도 수색할 명분이 없다. 더군다나 양반, 그것도 관리의 집은 왕의 허락 없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허적은 할 말을 잃은 구일을 오만하게 쳐다보더니 그대로 뒷짐을 지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다시 대문이 닫히고, 빗장이 철커덩 걸리는 소리를 들으며 구일은 암담한 눈빛이 되었다.


"어떻게 할까요?"

"할 수 없지. 다들 여기서 기다릴 수 밖에."


종사관이 묻는 말에 구일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하였다. 거의 일백에 가까운 좌포청 군관과 군사들이 영의정 허적의 갑제를 물샐 틈 없이 에워쌌다. 이미 해는 떨어졌고, 인정이 울리고, 닭이 울고, 다시 파루가 울릴 때까지, 주야장천 허적의 집앞을 지킬 참이었다.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허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뒤에 시립한 마름 황씨를 잡아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뼈를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듯이 두눈의 흰자위가 온통 시뻘겋게 실핏줄이 터진 상태였다. 그 눈을 보니 마름 황씨는 가슴이 섬뜩하여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


허적은 목에 가래가 낀 듯 쉬어버린 음성으로 마름 황씨에게 넌지시 지시했다.


"그놈 이름을 저들이 어찌 알았다더냐? 알아보거라."

"..."


대답조차 못할 정도로 입이 얼어붙은 마름 황씨를 보고 허적은 한숨이 나왔다. 그놈의 미친 짓을 누가 말릴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멀쩡하게 옷을 입히고 친정에 돌려보냈어도 알음알음 소문이 날 판인데, 다 찢어놓고 멍석에 돌돌 말아서 시댁에 버렸다니. 이 미친 놈이 가문을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허적은 가슴에 돌덩어리가 내려앉은 기분으로 대문의 어깃장을 쏘아보았다. 구일 놈이 이대로 물러갈 리가 없었다.


대문 저편에 구일 그놈이 지키고 서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도 답답하여,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쳤다. 이러다 심장이 멎어 죽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하지. 여전히 담장 너머로 말갈기들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아직도 구일은 물러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예 저들은 말 위에 올라타서 집안을 기웃거리며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


안에서도 위협을 느낄 만큼 담장마다 말탄 군관들의 얼굴이 빼곡했다. 물론 밖에서도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지나가던 백성들이 걸음을 멈추고 두눈을 멀뚱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한발씩 뒤로 물러났다.


"무슨...일이래요?"

"..."

"여긴 영상대감 댁인데?"

"..."


굳은 얼굴로 아무도 대답을 않자, 행인들은 제풀에 지쳐 떠나기도 하고, 여기 있다가 괜히 불똥이 튈까 싶어서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내빼기도 하고, 그나마 쇠심줄처럼 끈질긴 자들은 몇발짝 뒤로 물러나서 목을 빼어 지켜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씩 사태를 감잡은 백성들이 허적의 높은 담장을 쳐다보는 눈빛이 점차 험악해졌다.


"차옥이를 납치해?"

"세상에나..."

"차옥이가 누군데?"

"왜 있잖아...도성에서 제일 이쁘다는..."

"어이구우..."

"그지꼴로 시댁 집앞에 버려져 있더래. 그것도 멍석에 돌돌 말아서."

"아니 누가 그런 짓을?"

"쪼오기..."

"저런 쳐 죽일 놈들..."

"하고 많은 여인 중에 왜 남의 부인을..."


구일은 민심이 술렁이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곤 솟을대문 건너편을 향해 목청을 가다듬어 고함을 쳤다.


"영상대감! 이만 순기를 내주시지요!"

"그런 물건 없대도!"


굳게 닫힌 솟을대문 뒤편에서 허적의 노한 음성이 답하였다. 구일은 한숨이 목에 꽉 차는 것을 느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건가...


하지만 상대는 하필이면 남인천하를 이룩한 영의정 허적이었다. 어심이 송시열을 목에 걸린 생선등뼈처럼 여기는 마당에 영의정 허적을 상대로 순기를 확보할 수는 있을까? 이러다 허적이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서 왕을 압박하면 큰일이었다. 병조와 한성부가 자신을 뒷받침 해주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예형아...예형아..."


밤이 이슥하여 청풍부원군의 소실 홍씨는 황망히 자경전을 찾아왔다. 그 등뒤로 인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녀는 대비 김씨를 마주하자마자 눈물로 하소연했다.


"이럴 수가 있답니까...맞은 건 난데, 이가 부러진 것도 난데...당사자인 내 얘기는 듣지도 않고 우리 예형일..."


앞니 한대가 빠져서 미관에도 흉할 뿐더러, 발음도 새었다. 하지만 홍씨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열심히 애원했다.


"살려만 주십시오, 대비마마, 우리 예형일 살려만 주십시오...살려만 주시면..."

"나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굴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쉽지요."

"..."


홍씨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누굴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쉽다니. 창군, 복평군이 궁녀들을 간음했다고 죽은 청풍부원군이 발고하였다가 오히려 무고로 몰렸을 때도, 대비 김씨는 왕에게 눈물로 호소하여 김우명의 목숨을 건졌다. 한밤중에 야대청에 대비가 들어왔다 하여 한동안 시끌시끌했었다. 그러니 대비 김씨가 마음만 먹으면 동생 예형을 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오나 우리 부원군대감은 살리셨잖습니까..."

"겨우 절반만 살려놓았을 뿐, 그래서 죽었습니다. 내 아비는, 작은 어머님의 지아비는."

"..."

"내게 힘이 없다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처음부터 그들에게 손을 벌렸더라면...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회한에 젖어서 대비김씨는 나직이 뇌까렸다. 눈시울을 붉히면서 중얼거리는 모습이 초라했다. 홍씨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들? 그들? 세상에 누가 있어 대비 김씨도 못할 일을 한단 말인지?


"그들이 누굽니까? 누구예요?"


홍씨는 정신 없이 달려들어 대비 김씨의 두손을 맞잡았다. 자신이 대비전의 서모라곤 해도, 감히 맞잡을 엄두도 나지 않는 손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뵈는 것도 없고, 물불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누구기에...?"

"..."

"만나게만 해주시면 제가..."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둘다...지금은 만날 수가 없으니..."

"마마?"

"한사람은 도성 밖으로 쫓겨났고, 또 한사람은 작은어머님이 나보다도 더 만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게 누굽니까?"

"..."

"누굽니까?"

"..."



동료 금군과 함께 협문을 지키던 허후는 통명전 앞으로 들이닥친 대비전과 홍씨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초췌한 얼굴의 홍씨를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문제는 눈앞의 홍씨도 자신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인달방으로 동생 예형을 찾아 드나들던 홍씨였으니.


물론 홍씨로선 협문을 지키는 금군의 얼굴을 눈여겨 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켕긴 허후로선 홍씨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최대한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리는 수 밖에 없었다.


"대비마마께서 여긴 어떻게..."

"내 중전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하오나 지금은 침수에 드시어..."


허후는 이미 사태를 알아차렸다. 지금 대비전은 홍씨의 성화에 못 이겨 통명전으로 중궁 혹은 주상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더욱 홍씨와 대비전을 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중궁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문중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 부지런한 중궁이 벌써 침수에 들었을 리 없다. 서책을 들이파든, 그림을 그리든, 할 터이니..."

"하오나 회임...하시어...옥체가..."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기분으로 허후는 더듬더듬 답하였다. 중궁의 회임을 입에 담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입에 담았다. 중궁이 홍씨를 만난다면, 중궁이 왕을 움직인다면...전세가 오히려 역전되어 자신들 양천허씨 문중이 결딴날 일이었다.


"비켜라. 난 중궁을 만나야겠다."

"..."


허후는 입을 꾹 닫고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대비전은 허후의 과도한 충성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궁을 깨워선 안된다? 감히...내가 누구라고...치가 떨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협문을 지키는 금군까지도 중궁의 위세를 믿고 자신을 우습게 안다니.


"내 이놈...죽고 싶으냐?"

"..."


홍씨는 감히 대비전의 일갈에도 끄떡도 않는 금군을 의혹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한밤중이라 고작 횃불과 등롱에 비친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눈에 익었다. 허견 그 짐승 같은 놈과 닮은 것 같기도 하였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허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는...?"

"..."


허후는 홍씨가 자신을 알아볼까 바짝 긴장했다. 물론 홍씨와 직접 맞닥뜨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예형이 자신의 존재를 아는 만큼, 그녀가 아무도 모르게 언니에게 자신의 존재를 귀띔할 수도 있었다. 그는 더욱 허리를 낮추어 홍씨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대비마마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사내의 음성에 대비김씨와 홍씨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허후의 얼굴을 쳐다보던 홍씨의 눈길은 이내 쌍학흉배雙鶴胸背를 단 홍단령 차림으로 다가오는 오시수의 비웃음 어린 눈길과 마주쳤다.


다 끝났다...한발 늦었어 이것아...


말로만 대비전 서모일 뿐, 그들에겐 그저 천것일 뿐이었다. 오시수는 차가운 속엣말로 홍씨를 비웃고는 대비김씨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는 예판이야말로 여긴 어인 일인가?"

"의금부 판부사로서 전하께 사뢸 일이 있어..."


오시수는 대비김씨의 사갈蛇蝎같은 눈길을 회피하기 위해 시선을 대비전의 당혜에 고정시켰다. 그는 허후에게 눈길을 던졌다.


"전하께 고해주게나."

"예 대감."


허후는 동아줄을 만난 기분으로 동료에게 자리를 맡기고 협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라도 홍씨의 눈길을 피하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대비김씨는 성질 같아서는 그냥 허후를 따라 들어가서 오시수보다 한발 앞서 자신의 용건을 말하고 싶었다. 사실 그녀는 예형을 살릴 필요도 의욕도 없었다. 하지만 허견을 죽일 필요도 의욕도 있었다. 아예 산불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참이었다.


"비켜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은 이미 자리를 비우고 없겠다, 남은 놈들이야 간이 뱃속에 멀쩡히 있어서 웃전 무서워할 줄 알 알테니 그냥 밀고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대비 김씨는 그대로 홍씨와 함께 협문 안으로 금군들 틈새를 뚫고 거침없이 전진했다.


"아니...대비 마마...?"


오시수는 깜짝 놀라 부르다 말고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등뒤의 대신 조차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자 대비 김씨는 너무도 손쉽게 통명전 뜨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마침 두광에게 오시수가 입시를 청한다는 것을 고하던 허후는 흠칫 놀라 돌아다 보았다.


철썩!


그 순간 대비 김씨가 표독하게 허후를 쏘아보며 오른손목을 힘껏 휘둘러 허후의 뺨을 후려쳤다. 두광이 두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허후와 대비 김씨를 돌아보았다. 대비 김씨가 웬 부인과 함께 통명전 안으로 사납게 걸어들어와선 대뜸 금군의 뺨을 후려치다니. 그것도 고개가 돌아갈 만큼 힘껏.


"대비마마!"


두광이 놀라 대비 김씨를 보며 소리쳤지만, 정작 맞은 허후는 신중하게도 돌아간 뺨을 묵묵히 만지며 그저 땅만 내려다 보았다. 이럴 때 대비 김씨를 돌아보면 오히려 화를 자극할 뿐이란 것을, 그는 형 허견과의 경험상 너무도 잘 알았다.


"감히 천것 주제에 나를 막아서?"

"..."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채로 대비 김씨는 허후를 때린 손을 파르르 떨며 움켜쥐고, 다시 폈다 쥐었다 하며 허후를 쏘아보다가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어둠 속이긴 하지만 뜨락 구석구석에 놓인 횃불과 통명전 대청에 놓인 좌등에서, 그리고 동온돌과 서온돌에서 새어나오는 환한 불빛 탓에 허후의 벌겋게 부어오른 왼뺨이 적나라하게 눈에 띄었다.


두광은 난처한 얼굴로 혀로 윗입술을 축이며 눈치를 보았다. 밖에 대신도 와 있다는데 왜 이런 소란을 피우는지.


아무래도 주상의 다혈질 내지는 불뚝성은 외탁이 아닐까 싶었다. 왕의 눈밖에 났다고 제 성질에 못 이겨서 두어달 만에 홧병으로 죽어버린 청풍부원군이나, 아비가 왕의 눈 밖에 나서 죽었으니 자신도 곡기를 끊어 굶어죽겠다고 허적을 비롯한 약방 책임자에게 유서를 내던지던 대비 김씨나, 수틀리면 길길이 날뛰는 왕이나...외탁이야 외탁이야...두광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달짝였다.


"이토록 불빛이 훤한데, 뭐? 침수에 들어? 네놈이 나를 능멸하고도 감히 살기를 바랐더냐?"

"..."


허후는 그저 고개를 떨군 채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 모습은 비굴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한소끔 끓어오른 대비의 열화를 오히려 북돋웠다.


"네 이놈! 누가 시킨 것이냐? 감히 왕실어른인 나를 통명전에 들이지 말라, 중전이 시킨 것이냐?"

"..."


허후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저 홍씨 앞에서 최대한 목소리를 아끼려던 것 뿐인데, 오히려 대비 김씨는 중궁이 시킨 것이라고 넘겨짚고 몰아세우는 참이었다.


"아닙니다..."

"그럼 누가 시킨 것이냐? 네 뒤에 필시 누가 있으렸다? 누구냐 그게?"


순간 허후는 바짝 긴장했다. 격장지계로 자신을 도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억지를 써서 왕이든 중궁이든 제발로 뛰쳐나오게 만들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대비 김씨는 갈수록 언성을 높여 자신을 다그치는 참이었다.


"아니옵..."

"제가 그랬습니다."


대비 김씨는 귀를 의심했다. 언제 들어도 반가운 아들의 귀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어느 틈에 동온돌 문이 열렸는지 누구보다 귀가 밝은 왕이 대청으로 걸어나오면서 내던진 말에, 대비 김씨는 눈과 귀를 의심했다.


"주상?"

"전하..."


왕의 등장에 홍씨가 눈물이 왈칵 치밀어서 허리를 숙였다. 중궁을 통해 왕에게 하소연을 해보려던 것이, 왕이 직접 나왔으니 오히려 다행이라 여긴 탓이었다.


"전하...소인은 물고하신 청풍부원군의 소실로..."


홍씨가 입을 열어 예형의 억울함을 호소하려는데, 왕은 듣지도 않고 차갑게 대비 김씨에게 말하였다.


"중궁은 태중胎中입니다. 헌데 어찌 흉한 말을 귀로 듣고, 속에 담겠나이까?"

"..."

"하여, 조보에 오르는 일들에 관해서는 일절 중궁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엄단하라 일렀사옵니다. 물론 어마마마도 예외는 아니옵니다."

"..."


허후는 흠칫 놀라 숙종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신이 독단으로 대비전을 가로막은 일이었다. 헌데 왕이 오히려 자신을 두둔해주었다. 그것도 왕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하였다고 말하면서까지 감싸주었다. 도대체 왜?


아니, 자신을 감싸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침 왕도 벼르던 일이라 나선 건가? 조보에 오르는 일은 일절 중궁에게 전하지 않길 왕이 원했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왕이 대신 덮어준 덕분에 자신도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입술새로 조용히 흘려내며 허후는 대비 김씨쪽을 흘끗 곁눈으로 살폈다.


"조보에 오르는 일들이라...허면 아직 조보에 오르지 않은 일이면 됩니까?"


대비 김씨가 입술이 뒤틀리며 묻는 말이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조보라...평소 자신이 중궁에게 억지로 조보를 낭독케 했던 일이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들답지 않았다. 아들 역시 허견의 일로 자신들이 중궁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마마마...어쩐 일로..."


서온돌에서 진홍이 황급히 머리를 매만지며 대청마루로 달려나왔다. 대비 김씨는 두눈에 가시가 박힌 눈길로 찌르듯이 진홍을 쳐다보았다. 사내인 왕보다야 계집인 중궁이 더 치장할 것도 많고 한발 늦게 나오는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중궁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울화가 치솟았다.


"왜 이제야..."


대비 김씨가 꾸짖는데, 숙종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중궁, 그만 들어가시오!"

"네?"

"들어가라 이 말이오!'

"하오나 전하...어마마마께오서..."

"어마마마께오선 날 만나러 온 것이니 걸리적거리지 말고 얼른 들어가시오!"


진홍은 숙종의 거친 언사에 흠칫 놀라 숨을 죽였다. 걸리적거리다니....왕이 자신을 귀찮아한 적이 있던가? 말 한마디가 가슴에 생선등뼈처럼 콕 틀어박혀서, 침만 넘겨도 아플 지경이었다.


"어서 들어가시오 어서!"

"주상!"

"못 들었소, 중궁? 어서 들어가시오!"

"주상! 정말 이러깁니까?"

"..."


진홍은 지아비의 눈치를 봐선 들어가야겠지만, 시어미의 눈치를 봐선 들어가선 안되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시어미와 그 뒤에 선 부인 홍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부인은...


자신이 처음 회임을 하였을 때 시어미가 태교를 빙자하여 시회를 열어서 여러 부인들을 초대했던 일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 마주쳤던 대비전 서모의 얼굴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무슨 일로 대비전이 서모를 데리고 통명전으로 찾아왔는지, 자신을 찾아왔는지, 지아비를 찾아왔는지...분위기는 대비와 대비전 서모는 자신을 만나려 하고, 지아비는 자신을 못 만나게 하려는 것 같았다.


날 찾아온 것이야...


진홍이 한발 앞으로 내딛는 것을 본 숙종은 다급히 대비 김씨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대비 김씨를 돌아보았다.


"소자와 함께 산보나 하시지요..."

"..."


대비 김씨의 입가가 조용히 비틀렸다. 이건 단순한 태교 차원이 아니었다. 왕은 홍씨와 중궁을 마주치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허견이 홍씨에게 폭력을 휘두른 일? 아니면, 예형이 유철과 통간을 한 일? 아니면...


"주상이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서모의 말로는 인달방으로 홍씨 일가가 다 함께 찾아간 것은 평소 허견의 행실이..."

"나가서 말씀을 하시지요."


아들이 자신의 말을 가로막는다. 그만큼 다급한 모양이었다. 중궁이 들으면 안될 이름, 혹은 사건인 건가...대비 김씨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대청의 진홍을 쳐다보았다. 아들은 얼른 자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통명전 뜨락을 나서는 참이었다.


뭐...급할 건 없지...


대비 김씨는 느긋하게 진홍을 한번더 쳐다보곤, 숙종을 따라 통명전 협문을 나섰다. 아들이 아무리 영민해도, 표정을 읽을 줄은 알아도 감출 줄은 모르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렇게 대비 김씨와 홍씨가 숙종을 따라 협문을 나서자마자, 문밖의 오시수와 맞닥뜨렸다. 오시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천신 오시수, 전하를 뵈옵니다."

"경은 또 무슨 일인가?"

"송구하오나 전하...죄인 홍예형이 스스로 목을 베고 자진하여..."

"..."

"또한 유철도 문초 도중 숨을 거두었사옵니다."

"..."


오시수를 보는 숙종의 두눈이 어둠 속에서 검게 번뜩였다. 남구만이 보고한 대비전 서모 폭행사건은 이렇게 허견의 처와 외사촌에게 불똥이 튀어서 그들의 목숨을 집어삼키고서야 끝이 났다. 천인으로 태어나서 강상綱常죄로 의금부에서 죽은 저들...저들이 눈雪처럼 깨끗한 사이였든, 눈眼처럼 검은 사이였든,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서로 간통한 사이였으면 죗값을 받은 것이고, 결백한 사이였으면 핏값을 받을 것이었다.


"안돼..."


홍씨가 그 자리에서 목이 졸린 듯이 겨우 한마디를 내뱉았다. 숙종과 대비 김씨가 눈가가 굳은 채로 고개를 돌려 홍씨를 쳐다보니, 이미 두눈에 실핏줄이 터져 온통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홍씨는 얼굴근육이 모조리 푸들푸들 떨리는 채로 오시수에게 덤벼들었다.


"누가 죽어? 내 동생이 죽어? 네놈들이 죽였지?"

"부, 부인..."

"살려내! 내 동생이 무슨 죄야? 언제 간통을 했어? 언제? 왜 죽여?"

"아니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뭘 어쨌다고?"

"우리 홍씨 집안한테 따지려고 불렀어? 따지긴 뭘 따져? 우리가 따져야지! 그놈이 납치해서 욕보인 계집들만 수십, 수백이야! 참다 못해 우리가 따지러 간 건데!"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수백이라니...말이 되는 소리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유분수지.."

"이보시오 부인, 어느 안전이라고..."

"너 같으면! 세상천지에 부모 다 잃고 형제들만 남았는데, 그 형제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눈에 뵈는 게 있겠어?"

"..."


홍씨의 발악에 오시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왕의 눈치를 보았다. 어쩐 일인지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왕도 노한 기색으로 자신들을 쏘아볼 뿐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문앞을 지키던 금군 하나가 얼굴이 핼쑥해진 채로 왕의 눈치를 보는 참이었다. 어쩐 일로 대비 김씨가 잠자코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막상 대비 김씨의 얼굴을 보고 오시수는 문득 생각했다. 저 성미로 홍씨를 말리긴 커녕 같이 왕에게 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그만하시지요!"


웬일로 대비 김씨가 차분한 음성으로 제지하고 나섰다. 홍씨는 눈물이 그렁해선 대비 김씨를 돌아보며 쏘아보았다.


하지만 대비 김씨는 여느 때처럼 차갑게 자신을 쳐다보았다. 말이 서모지,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얼마든지 찢어죽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 눈빛으로.


"..."


홍씨는 할 말을 잃은 채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다 끝났다, 다 끝났다...동생을 살리겠다고 실날 같은 희망이라도 붙들려고 하였는데, 이만 늦어버렸다. 무슨 정신으로 걷는 지도 모르고, 홍씨는 대비전 김씨를 뒤따라서 걷다가, 어느덧 통명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온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대비 김씨의 등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며 소리쳤다.


"대비마마께선 대체 무얼 하셨습니까? 아무리 소첩이 밉기로서니 제 동생은 살려주셨어야 했습니다. 왜 아무 죄도 없는 그 아일..."


앞장서서 걷던 대비 김씨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격앙된 홍씨의 음성을 듣고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말씀 드렸잖습니까? 홍예형을 살릴 수는 없어도, 허견을 죽일 수는 있다고."

"..."

"어쩌시겠습니까? 함께 하시겠습니까?"

"..."


어둠 속에서 대비 김씨의 눈동자가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홍씨는 대비 김씨의 제안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동생을 보러 가야 했다. 이제 생각 났다. 자신은 의금부로 가던 길이었다. 동생 예형의 시신을 확인하러 또 수습하러 가는 길이었다. 당연히 대비 김씨의 제안이 귀에 들어올 계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걸음을 내딛는 홍씨의 발걸음을 대비 김씨의 검은 혓바닥이 쭉 늘어나서 묶어놓는 것만 같았다.


작가의말

예형이 의금부에서 죽기 하루 전날엔가 차옥이 의금부에 갇힌 기록이 있어서 예형의 전언을 차옥이 알아보는 걸로 스토리를 전개했습니다. 차옥이 밥도 안 먹고, 몸도 연약해서 문초하면 죽을 거라 난감하다는 의금부 쪽 기록을 참고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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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2.17 13:11
    No. 1

    에궁~
    참 어렵다 사는게...
    犬한마리때문에 여럿 잡아죽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21 18:28
    No. 2

    엄청나죠. 줄줄이...아직도 그 파장을 못 다 써서...쓰면서도 혀를 내두르는 참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2.20 18:31
    No. 3

    숙종 6년인가요?
    역사 소설은 결과를 알고 보는 소설이지만
    작가님이 워낙 재미있게 쓰셔서
    결과도 궁금하고, (그러다 보니 계속 인터넷 검색을 하게되네요)
    1만 7천여 글자가 그냥 스르륵 넘어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21 18:31
    No. 4

    숙종 5년 2월에서 3월입니다. 재미 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축약판을 따로 써야사나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많아지는 게 아쉽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디오지크
    작성일
    13.12.21 22:23
    No. 5

    오랜만에 댓글 남겨보네요.
    글이 갈수록 흥미진진해 작가님의 필력에 감탄하고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22 20:17
    No. 6

    디오지크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 전 요즘 제 필력과 체력에 좌절하는 중이라, 격려가 많이 되네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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