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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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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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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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54

DUMMY

두광은 눈앞의 중궁을 보며 두눈을 깜빡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왜 떡하니 조보를 전하의 서안에 올려두신 건지. 조보를 읽으셨다는 건지, 그걸 말씀하는 건지. 그 순간 기척도 없이 장지문이 열렸다. 장지문을 지키던 나인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엄마야!"

"에그머니 전하?"


문을 열어젖힌 손은 왕의 옥수였다. 믿기지가 않는 표정을 고스란히 두눈에 드러내고, 이순은 김진홍을 그저 바라보았다. 눈시울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


진홍은 숙종의 두눈을 가만히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읽어보진 않았사옵니다. 그저, 전하께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이옵니다. 읽을 순 있지만 읽지 않는 것임을."

"..."

"알 순 있지만 알지 않는 것임을."


진홍의 음성은 여전히 맑았다. 하지만 두눈은 너무도 밝았다. 지아비의 동공에 어린 온갖 감정들을 읽어낼 만큼.


"정말...읽지 않은 것이오?"

"네."


진홍은 해말갛게 웃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짙었다. 정말 읽지 않은 것이냐고 물어보기 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할 줄 알았다. 자신의 눈과 귀를 막은 것을 조금은 미안해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아비는 그녀가 읽었는지, 그 여부가 먼저였다.


그녀는 원망어린 눈길로 숙종의 두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반짝이는 눈빛에 숙종은 정신이 아득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속내를 긁어내는 그 눈길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힘껏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진홍은 두눈에서 스르르 힘이 풀리면서, 콧잔등을 찡그렸다.


"언제든 읽고 싶어지면 읽을 것이옵니다."

"보지 마시오 제발, 중궁이 무사히 해산할 때까지. 그때까지만."

"..."


진홍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서 있었다. 자신은 언제나 지아비가 좋았다. 자신을 볼 때면 두눈에 온갖 감정이 무방비로 드러나는 그 눈이 좋았다. 물론 자신도 똑같은 눈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눈빛으로 읽고, 쓰고, 말하고, 듣고 할 때가 많았다. 서로의 눈길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단단히 묶어주는 동아줄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지아비가 밉기도 했다. 조보를 보지 않고도, 모든 상황을 짐작하게 만든 지아비가 미웠다. 자신보다 더, 허적이, 남인이 필요한 지아비가 미웠다. 그녀는 애증으로 바싹 타버린 입술을 가만히 빨면서 두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예, 지금은 눈 감아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지금은 허적이 필요하다 하시오니, 지금은 눈 감아드리겠습니다. 허적이든, 거적이든, 덮으려면 덮으시고, 앉으려면 앉으시고, 누우려면 누우시고...그 대신 저희를 잡은 손은 놓지 말아주시길...



탱자나무는 봄이 늦었다. 특히 강화도 갑곶에 터줏대감처럼 떡 버티고 선 늙은 탱자나무는 춘삼월 새벽녘에도 푸른 잎을 펴지 못한 채로 뾰족한 가시를 허공에 사납게 찔러댔다. 새가 내려앉지도 못할 만큼, 바다 건너 적들이 함부로 숨어들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기세도 등등했다.


이 늙은 탱자나무 사이로 어린 바람이 도둑처럼 지나다가 굵고 뾰족한 가시에 찔려서 오히려 비명을 질러댔다. 아니, 바다의 비명을 전하고서 그 명줄이 끊기는 소리던가.


그렇게 탱자나무가 물살이 거센 염하鹽河를 굽어보니, 수십만, 수백만 마리가 떼를 지어 물살을 거스르는 정어리들이 더러는 배를 까뒤집고, 또 더러는 지느러미를 멈추고 둥둥 떠다니는 참이었다.


그 탱자나무 아래로 수백개의 큰 돌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2백여명의 칼 찬 승군僧軍들이 제각각 가래와 괭이, 또 더러는 가마솥도 들고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말을 달려도 2각 남짓 걸릴 만큼 머나먼 전등사에서 여기까지, 파루의 종소리가 닿지도 않을, 그리고 오는 사이 이미 그쳐버렸을 거리를 힘겹게 걸어온 탓에, 꼭두새벽부터 그들은 코끝이 벌개져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고된 노역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조심햐. 벌레 떨어질라. 이따만한 거."


고개 숙인 민머리로 탱자나무 아래에서 돈대를 쌓느라 여념이 없는 어린 스님 한명에게 동료 스님이 놀리듯이 주의를 주었다. 손가락 만한 벌레를 시늉해 보였지만, 상대가 신경도 쓰질 않자, 그는 발치의 작은 돌 하나를 줏어들어 탱자나무 가지를 슬쩍 명중시켰다. 그러자 탱자나무 가시가 툭툭 스님에게 떨어져 내렸다.


"앗 따가...가가가!"

"큭..."


어린 스님이 졸지에 민머리에 탱자가시가 찔러드는 고통에 두손으로 감싸쥐고 옆으로 깡충거리다간, 이번엔 짚신바닥으로 가시라도 밟았는지 깨금발로 앙감질을 하기 바빴다. 동료 승군들도 치미는 웃음을 혹은 삼키고, 또 혹은 흘리면서 재미난 구경난 듯 웃었다.


"성능아, 그러게 내가 뭐랬어...승모僧帽라도 쓰라니께..."

"이 자식이...너 오늘 죽어볼텨!"

"어허, 점잖은 스님이 욕을 하다니..."


당장에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시시한 싸움구경은 때로는 몇날며칠 노역에 지친 스님들에게도 기분전환이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팔도 각지의 사투리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히죽거리면서 웃고, 놀리고, 꾸짖고, 달래고 하였다.


"아이야, 밥이나 묵고 싸우라 야!"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자, 취사를 담당한 승병이 주걱을 쥐고 소리쳐 불렀다. 그러자 그들은 또 투닥거렸다.


"꼭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싸우는 놈들이 막상 전쟁 터지면 몸사리재!"

"어매 살려줘 어매...기억도 안 나는 어매 찾아대구 말여."

"닥치그래이!"

"그러는 니는? 어무이 얼굴 기억 나나? 젖은? 묵어는 봤나?"

"중놈이 엄니 얼굴은 와 찾는디?"

"죽을 때가 되야서 그런다 왜!"

"허이구!"

"그란디, 진짜 전쟁이 난다드나?"

"이러고 허구한 날 성축인지 축성인지를 해대는데, 저 북쪽에서 화딱지 나서 쳐들어와뿔지 않겄나. 와, 무섭나?"

"..."

"무섭구나?"

"무, 무섭긴. 내가 이 한 목숨 아까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우리 화엄사 불탈까 그러지."

"하긴 거긴 불타면 아니되재. 아미타불."


그렇게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끼니를 때웠다가 다시 진땀 뻘뻘 흘리며 돌을 나르고, 쌓고, 그렇게 또 시시껄렁한 실랑이도 벌이는데, 멀리서 축성장築城長 이우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온다!"


누군가의 짧은 외마디 말에, 승군들은 저마다 입을 닫고 가래로 흙을 뜨고 돌을 나르는 시늉을 하였다. 지금껏 충분히 팔이며 허리가 뻐근할 만큼 일을 하였어도, 웃는 잇몸만 보여도 농땡이를 부리는 것 마냥 오해받기 일수였다. 왜 죽어라고 일할 때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다가, 좀 살라고 쉴 때면 득달같이 달려오는지.


"꼭 이럴 때만 온대이. 웬수도 저런 웬수가 없대이."

"전생에 너가 쏘아죽인 짐승이었을 거여."

"니가 아니고?"

"에효. 그래도 첨 봤을 땐 쪼매 사람 같드니만."


그렇게 욕을 해대면서 부지런히 일하는데, 서른 남짓한 나이로 보이는 축성장 이우가 사납게 씩씩대며 탱자나무 아래로 걸어왔다.


"이놈들이? 해가 중천에 떴는데 왜 한 게 없어?"


이우는 대번에 인상을 구기고서 호통을 쳤다.


"승장僧將들은 도대체 뭘 한 게야? 여기 없었나?"

"..."

"왜들 대답이 없어? 빨리 나오지 못해?"

"..."

"안 나오면 군령에 의거해 네놈들 모가지부터 베어주랴?"


승장들이 쭈볏쭈볏 이우의 앞으로 나섰다. 이우는 등허리에 찬 환도를 그대로 띠돈까지 거칠게 쥐어뜯고 승장 한명의 목젖을 찔러들었다. 헛숨을 들이키며 바짝 경직된 승장을 쏘아보며, 이우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오네. 모가지가 아깝긴 한가 보지?"

"..."

"모가지가 아까우면, 밑가지는 어떠냐?"

"네?"

"네놈 가운데 토막, 그거 말이다."

"..."

"어차피 쓸모도 없잖으냐?"

"..."


이우가 승장의 물건을 칼끝으로 겨누며 건들건들 찔러대었다. 승장은 겁을 지어먹고 궁둥이를 뒤로 뺐다. 남일 같지가 않아서 지켜보는 승병들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에그머니!"


사내들의 비명이 울릴 시각에, 웬 계집의 수더분한 비명이라니. 이우는 칼자루를 쥔 손을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웬 마흔 남짓한 나이의 아낙이 볏짚을 덮은 소쿠리를 들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낙은 진촌津村에서 오는 길인지 생선비린내가 폴폴 나는 소쿠리를 부여잡고 덜덜 떨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이우의 험악스런 눈초리에 화들짝 놀랐다.


"넌 뭐냐?"

"..."

"귀가 먹은 게야?"

"..."

"허면 입을 쑤셔주랴?"

"..."


살벌한 이우의 입담에 아낙은 그저 몸서리를 치며 도리질을 했다. 승군 중 하나가 두눈을 멀뚱거리면서 혼잣말을 했다.


"어데서 봤더라?"

"아는 계집인가?"


이우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낙은 한숨을 돌렸는지 주섬주섬 볏짚을 들추었다.


"눈치다!"

"순봉이네?"

"정어리도 모르냐?"

"눈치 맞다 아이가!"

"순봉이구마!"


정어리를 알아보고 몇몇 스님들이 옥신각신하며 두눈을 반짝였다. 출가한 승려라 육식은 금기지만, 워낙 부역에 시달리다보니 정어리를 보고도 대번에 입안에 군침이 고였다. 그들은 승장들의 눈총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입술을 빨았다. 아낙은 정어리 세마리를 담은 소쿠리를 이우에게 내밀었다.


"여기, 나루터에서, 어떤 분이 드리라 해서..."

"뭣이?"


영문도 모르고 이우가 아낙을 쳐다보았다. 등이 푸르고 배가 흰, 그 경계의 일곱개의 점마저 흐리멍덩한 정어리라니. 자신도 예전에 썩은 정어리 잘못 먹고 심한 두통이 끓어오르는 증울蒸鬱증세에 시달린 이후로는 입에도 대질 않는 터였다. 증울이 일어서 그 이름도 정어리라던가, 징어리라던가. 이우는 짜증스레 손사래를 쳤다.


"됐네. 난 이딴 거 안 먹네."

"네?"

"정어리 잘못 먹고 죽을 뻔한 적이 있거들랑."

"이건 방금 나루터에서 얻어온 건데..."

"됐으니 도로 가져가게나. 여기선 이 정어리 먹을 사람 아무도 없으이."

"그치만, 정어리는 좋은 선생 같은 생선이라고...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그런 걸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그러셨는데..."


촌계집 주제에 의미 깊은 얘길 주워섬긴다. 이우는 묘한 눈빛으로 아낙을 쳐다보곤 고개를 까딱거렸다.


"놔두고 가든지."


어차피 자신이 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냥 바닥에 놔두면, 먹을 놈은 먹고 버릴 놈은 버릴 터였다.


선생 같은 생선이라...


"어우, 냄새...이런 거 누가 먹는다고..."


아낙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지고 나서, 푸념하며 손가락 끝으로 툭툭 들춰보던 승장 한명의 두눈에 정어리 아래에 깔린 흰 종이가 비쳤다.


뭐지?


손가락에 비린내가 묻는 것을 감수하고 정어리를 들추니 서찰 두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군! 여기, 정어리 밑에..."


그나마 가운뎃놈은 알이라도 품었는지 토실토실한 것이, 승장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펄떡거렸다. 승장은 손가락끝에 힘을 팍 주어 정어리를 움켜잡았지만, 이내 승장의 손에서 뛰쳐나가 돌무더기 위로 떨어져 버둥거렸다.


"어디..."


이우가 다가들어 서찰을 건네받고 보니, 겉봉 하나엔 축성장築城長 존하尊下, 다른 하나엔 제승장諸僧將 귀중貴中이라 적혀 있었다.


"뭐야, 이거?"

"거참..."


이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 앞으로 된 서찰을 받아들고 펼쳐 읽었다. 어엿한 반가의 유생들도 한문으로 몇줄 적지 못한다는데, 서찰엔 버젓이 한문이 빼곡하게 적혀 있어, 더욱 달갑지가 않았다.


"네놈은 뭐라 적혀 있더냐?"


이우가 힐끗 눈길을 돌려서 옆의 승장을 곁눈질하니, 승장은 얼굴이 희뜩하게 질려 있었다. 단아한 서체의 한문이 그의 손가락 끝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듯하였다.


數三奸臣亂其國政,

두서너 간신이 국정을 어지럽혀

反啓外寇, 聚怨築城。

외적을 도리어 자극하고, 원성을 모아 성축을 쌓으니

民之受害, 猶可說也,

백성이 입은 해는 그렇다 쳐도,

在山僧人亦復何罪.

산속의 중은 또 무슨 죄란 말인가?

以不可不除害之意,

그 해로움을 없애려는 뜻으로

通于大小爲將之人,

여러 장수들에게 이미 통보하였으니

師亦與諸僧將相議,

여러 승장들도 서로 상의하여 봉기하여

同心一力, 以副群望,

군중의 바람을 받들어 한마음 한힘으로 합친다면

則重得其賞, 一生安樂矣。

막중히 상을 받고 일생이 안락하리라.


승장은 떨리는 눈길로 고개를 들어 이우의 눈치를 살폈다. 이우 역시 승장의 반응에 불길함을 느끼고 더듬더듬 장문의 서찰을 읽어내려갔다.


嗚呼! 今日此何等時也?

아! 오늘날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가?

昏亂罔極之日也。

혼란이 더없이 심한 날이다.

當革廢亂朝, 以扶宗社,

어지러운 조정을 혁폐하여 종묘사직을 바로잡으려 해도

而恨無其人也。

사람이 없는 것이 한이구나.

嗚呼! 今日之爲政者,

오호! 오늘날 위정자는

上欺其君, 下負百姓,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저버리고,

反啓外寇, 勞民築城,

외적을 도리어 자극하고, 백성을 부려 성을 쌓으니,

此何心術也?

이 무슨 심술인가?

今十三日, 卽癸亥反正日也。

이번 13일은 계해반정일이다.

以此日方議當入,

이날을 맞아 쳐들어가기로 논의하였으니,

而入京路有兩津,

도성 어귀에 나루터가 둘 있으니

前一日呈備邊司,

하루 전날 비변사에 정문呈文을 올려

各送數百人, 預備舟楫以渡。

몇백명을 보내어 배를 준비하여 강을 건넌다.

大衆會于一處, 旣會之後,

대중을 한곳에 소집하여

下令曰

영을 내려 말하기를,

有邪氣犯闕, 欲使僧徒誦經追逐, 故急急招入,

사기가 궐을 침범하여 중들을 시켜 불경을 외워 쫓아내려 하노라.

而昭顯之孫林川君, 卽慶安君子, 而時在安國洞。

그리고 소현의 손자 임천군(임창군)은 곧 경안군의 아들인데, 안국동에 산다.

此眞聖人也, 又國之宗統也。

이분이야말로 진짜 군주이며, 나라의 종통이다.


임창군을 임천군이라 적어놓은 구절에서 이우의 눈길이 걸렸다. 이미 더 읽을 엄두도 나질 않았다. 이우가 받은 서찰은 승장들이 받은 서찰보다 훨씬 장황한 격문이었다. 하지만 글이 길어서가 아니라, 두손이 떨려서 더는 읽을 수가 없었다. 보는 눈이 너무도 많았다.


그는 승장의 팔을 조용히 잡아 자신의 옆구리에 붙이고서 입막음의 눈짓을 보냈다. 승장 역시 겁에 질린 채로 눈치만 보는 터였다.


"저어, 이거 장난이겠지요?"

"..."

"세 간신이면 삼정승...?"

"..."


이우는 손안의 칼을 도로 등허리에 차지도 못한 채로 칼자루를 꼭 움켜쥐고서, 바닥에 떨어진 정어리를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정어리는 원래 한데 모여 몰려다니는 놈들이다. 이 정어리처럼 몸을 붙이고 힘을 보태라는 뜻이던가. 하지만, 너무도 위험했다. 도성 밖은 김만기가, 도성 안은 김석주가 지키는 마당에.


그렇게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어리를 쳐다만 보는데, 이 은청색 생선은 어느틈에 누군가의 짚신 아래로 짓밟혀 뼈도 못 추리고 으스러져버렸다.



"이게 무슨 소립니까? 소인이 이차옥 부녀를 꼬드겨서 거짓고변을 시키다니요?"


훈련원 습독관 조선은 의금부 국청 마당에서 형틀에 엎드린 채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방금 오시수가 했던 말이, 고막에서 도로 튕겨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런 조선을 오시수는 입꼬리를 말다시피 비웃었다.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것이냐? 네놈이 이동귀를 꼬드겨서, 그 딸 차옥이 약탈을 당한 척 하라고 사주한 일을, 이미 이동귀의 처남 박찬영이 불었다지 않느냐?"


싸늘한 비린내가 나는 비웃음이었다. 조선은 눈앞이 노래지며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말도 안돼...말도 안돼...도대체 무슨..."

"차옥은 약탈당한 일이 없거늘...네 감히 영상대감 자제를 해할 흉계를 꾸며?"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지금?"


조선은 숨이 턱턱 막혔다. 어쩌다 자신에게 엉뚱하게 불똥이 튀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동료인 이동귀와 친하게 지낸 죄 밖에 없었다. 연무장에서 대련을 하다가 동료들이 장작불을 피우고, 자신도 끼여들어 곁불을 쬐다 보면, 간혹 눈먼 불똥이 자신에게 튀기도 하는데, 지금이 딱 그짝인가 싶었다.


"왜들..."

"바른대로 말하거라. 누가 시킨 것이냐?"

"왜들 이러세요? 내가 뭘 어쨌다고?"

"네 이놈! 그래도 허튼 수작을 부리는구나. 이미 서억만이 자기 아내는 납치당한 일이 없다고 격쟁까지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거늘! 박찬영이 네놈이 한 짓을 다 불었거늘!"

"허!"


조선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일이 너무 요상하게 돌아간다. 조선은 눈앞이 너무도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서억만은 자기 아내가 겁탈당한 일이 없다고 격쟁을 하질 않나, 박찬영은 자신이 이동귀를 사주하여 없는 일을 꾸몄다고 공초를 바치질 않나...


너무도 기가 막혀서, 그는 판의금 오시수를 쳐다보았다가, 그 좌우로 서 있는 지의금 목내선과 동지부사 정유악을 쳐다보았다가, 한발 뒤로 물러선 이하진을 쳐다보았다. 이하진은 고개를 돌리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길 꺼렸지만, 나머지 셋의 눈빛을 통해, 조선은 지금 자신이 덫에 걸린 토끼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당신들...왜 나야?"

"뭐?"

"난 그냥...이동귀와 친한 죄 밖에 없어. 그 친구 딸년 불쌍해서 같이 술 마셔준 죄 밖에 없어. 왜 나야?"

"이놈이...무슨 말을 하는 게야?"

"거꾸로 나한테 덮어씌우고 허견 그놈 빼돌리려는 거잖아...왜 나냐고! 내가 뭘, 뭘 어쨌길래!."

"저, 저놈이...! 여봐라! 저놈을 매우 쳐라! 쳐라! 바른대로 말할 때까지 쳐라!"


오시수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버럭 소리쳤다. 그 야차 같은 모습에 조선은 몸서리가 쳐졌다. 당장 좌우의 나장들이 자신에게 형구를 들고 바짝 다가서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조선은 두눈을 굴려서 나장들이 손에 든 형구를 어떻게든 확인하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자신의 엉덩이쪽에 선 나장들의 손에 무엇이 들린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 형구가 자신의 볼기를 내려치기 전까지는.


철썩!


넓적하고 묵직한 물건이 조선의 볼기를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심장이 조선의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어흐끄억!"


이건, 이건, 이건...곤棍...곤장이다. 한뼘도 넘는 너비, 한치는 되는 두께...맞는 순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곤장이었다. 그저 회초리 정도의 태笞, 몽둥이 정도의 장杖, 사람 잡는 곤棍...헌데 이 곤장도 등급이 있다. 만호나 별장 같은 자들만 휘두를 수 있는 소곤小棍, 병조판서나 관찰사 등 높은 분들만 휘두를 수 있는 중곤中棍, 그리고 더 사안이 중대할 때만 휘두르는 치도곤治盜棍...뭔지 몰라도 곤장이 맞다.


조선은 너무도 억울하여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건 말도 안되었다. 강도나 대역죄인, 강상죄인에게만 쓰는 곤장이라니. 일곱대만 맞아도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다는, 그러다 저승문턱을 넘는다는 그 곤장이라니.


철썩!


또 다시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조선은 두눈을 부릅떴다. 한뼘, 한뼘이다. 이건 너비가 한뼘이다. 간혹 권세를 가진 양반들이 머슴들을 겁박할 때 입에 담는 그 치도곤이다.


태장곤 중에서도 곤,

곤 중에서도 치도곤...


실제로 치도곤을 쓸 수 있는 양반들은 주변에선 눈을 씻고도 보기 힘들었다. 그 치도곤이 어떻게 지금 인정사정 없이 자신의 엉덩이를 내리치고, 피와 살을 가루처럼 튀게 하고, 뼈마저 조각조각 부수는 건지...


조선은 이제는 비명도 지를 수 없을 만큼 목구멍이 달라붙은 채로, 겨우 한가지 생각을 해내었다.


이놈들은 지금...나를 쳐죽이려는 거야. 지금 여기, 바로 여기...


그 순간,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송진처럼 흘러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노상 칼을 등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칼날 위의 인생을 산다 여겼는데, 자신은 언제든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 믿었는데, 허견 그놈 자신이 죽여주겠노라 큰소리도 쳤었는데, 막상 죽음이 임박하자 심장 속의 심지가 새하얀 꼬리를 드러내었다.


살, 려줘...살려줘, 살려줘!


목숨이 턱밑에서 걸리고, 숨통이 코끝에서 막히는 순간, 그는 간절하게 생각했다. 살고 싶다고. 죽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본능을, 겨우 살고 싶다는 본색으로 이해한 그 순간에, 작살 맞은 정어리처럼 온몸이 펄떡거리더니 마지막으로 그의 숨결이 뚝 끊어졌다.



"습독관 조선은 국청에서 심문을 받는 도중 갑자기 죽었고, 이차옥 집안의 노비들의 공초를 받아적은 포도청 서리 이수방은 포도대장 구일과 종사관 이지경의 사주를 받아 거짓증언을 유도한 사실을 자복했습니다."


이튿날 새벽, 숙종은 통명전 옆 양화당에서 판의금부사 오시수의 보고를 받고서 이내 미심쩍은 눈빛이 되었다. 신하는 왕의 용안을 함부로 봐선 안된다는 법도는 그저 예禮가 아니라, 어심을 함부로 엿보지 못하게 하려는 규례規例일 지도 몰랐다. 신료들을 훑어보는 눈초리에 가시가 고스란히 박혀버리니.


"이 모든 게 구일과 이지경이 꾸민 짓이다?"

"예 전하, 그들을 문초할 수 있게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


숙종은 기가 차서 오시수를 쳐다보았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모르나?"

"그야 당연히..."

"차옥사건이 포도청에서는 허견의 납치 및 강간사건이 되고, 의금부에선 역으로 포도청의 무고誣告가 되니 하는 말이다."

"전하, 그...무슨 말씀이시온지..."

"몰라서 묻나?"


숙종은 쩔쩔매는 오시수의 면상을 보니 미간이 뒤틀리며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포도청보다도 의금부가 더 의심스러웠다. 차옥의 시아비는 사대부는 아니지만, 엄연히 당상역관인 만큼 차옥 또한 반가의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차옥이 자신이 외간남자에게 납치 및 강간 당했다고 주장할 수나 있을까. 저자거리의 상계집은 두번이고 세번이고 서방을 바꾸어도 무방하지만, 규방의 여인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훼절이어도 처벌을 받는 법인데도. 미쳤다고 아비와 어미가 딸을 팔까.


이건 정말, 눈뜨고는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다. 숙종은 물끄러미 오시수를 쏘아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요즘 금부의 옥사가 미어터진다지?"

"아, 아니옵니다. 아직 더 수용할 만 하옵..."

"하긴, 홍예형이 죽고, 유철이 죽고, 조선이 죽고...하나가 들어오면 둘이 죽어나가고, 둘이 들어오면 셋이 죽어나가니, 또 자리가 비긴 하겠군?"


오시수는 등골에 소름이 쪽 끼치며, 오금이 저렸다. 왕의 음색이 심상치가 않아, 몰래 곁눈질로 훔쳐보니 눈빛도 께름칙했다. 마치 자신들 남인들의 손에서 칼자루를 뺏아 저들 서인들의 손에 쥐어줄 것처럼 눈빛이 무시무시했다.


서후행이 영상에게 귀띔한 바로는 중궁이 왕의 서안에 조보를 올려놓아 모종의 압력을 넣었다더니...


"알아보니, 차옥인 친정이 천한 무관집안이라더군? 양천법을 따르자면 종래대로 그냥 포도청에 맡겨야 하지 않는가?"

"하오나 전하, 강상죄이오니..."

"부녀자를 훔친 사건이니 포도청에서 다룰 법도 하지."

"전하..."


오시수는 이제 등골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왕은 허적 앞에선 군소리도 못하면서, 왜 자신들 앞에선 서슬퍼런 눈초리를 비치는지. 하지만 허적은 거듭되는 허견의 사건에 몸져 누운 상태였다. 이럴 때 허적이 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 못해 그의 그림자라도...


"전하, 좌의정 권대운, 병조판서 김석주, 훈련대장 유혁연이 청대請對를 하옵니다."


장지문 밖에서 두광의 음성이 들려왔다. 병조판서 김석주와 훈련대장 유혁연이 함께 알현을 청하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들게 하라."


장지문이 열리고, 좌의정 권대운이 앞장서서 양화당 안으로 들어섰다. 병조판서 김석주, 훈련대장 유혁연, 그리고 도승지 민종도가 차례로 뒤따랐다.


"무슨 일인가?"

"우선 주위를 물려주심이..."


병조판서 김석주가 오시수를 돌아보며 아뢴 말이었다.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져서, 숙종은 오시수를 눈짓으로 물리쳤다. 오시수는 고개를 조아리고 머뭇머뭇 뒤로 물러났다. 양화당에 들어설 때도 기분이 요상하였는데, 분위기가 요상했다.


"안 나가시고 뭐 하십니까?"


등뒤에서 채근하는 두광의 음성에 오시수는 움찔하여 뒤돌아보았다. 괜히 오금이 찔끔 저렸다.


"모두들 오십보 밖으로 물러들 나시게!"


두광은 목청을 돋워서 낭랑히 소리치곤 오시수의 뒤로 바짝 다가들었다. 큰방상궁 이하 상궁부터 나인들이 모조리 양화당 밖으로 뛰쳐나오는데도 미루적대는 오시수가 밉살스러웠다. 그는 말 없이 배를 쑥 내밀었다.


"..."


배치기를 할 기세였다. 오시수는 등골에 소름이 끼치는 느낌으로 화들짝 옆으로 비켜섰다.


"왜, 왜 이러나?"

"예판대감? 꼭 이름을 크게 불러드려야 가시오리까?"

"가네! 가네! 거참!"


오시수는 닭장 속의 수탉이 홰를 치듯 두팔을 푸드득거리 뛰쳐나가고선 뒤돌아서 두광을 쏘아보며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불알 한쪽도 없는 놈이, 배알 한짝도 없는 놈이.


그렇게 오시수가 가고 나서, 두광은 양화당 앞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가만히 지키고 섰다.


그렇게, 닫힌 장지문에 그림자도 닿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김석주를 비롯해서 권대운과 유혁연이 부복했다. 이제 말해보라는 왕의 눈짓에 김석주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군가 강도축성장江都築城將(강화도 축성장) 이우에게 흉서를 보냈는데, 이우가 사람을 시켜 신에게 전했습니다. 방금 유혁연과 함께 범인체포를 의논하고 왔습니다."

"흉서?"

"예 전하."


김석주가 소매에서 서찰 한봉을 꺼내어 도승지 민종도에게 전하였다. 숙종은 민종도의 손에서 서찰을 받아들었다. 겉봉을 열어 안에 든 서찰을 펼쳐보니 모두 두장이었다. 한장은 강화도의 장수들과 대신들에게, 또 한장은 축성장 이우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이었다. 숙종은 미간을 찌푸리고 빠르게 읽어내렸다. 차분하던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더니, 이내 우르르 요동쳤다.


"이건..."

"송구하옵니다 전하..."


김석주가 이마가 바닥에 닿을 만큼, 아니 찧을 만큼 더욱 고개를 납작하게 조아렸다. 아예 고개가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권대운과 유혁연 또한 몸둘 바를 모르는 듯이 더욱 손발이 오그라들어 등줄기가 움츠러들었다. 아예 입술이 달라붙었는지, 목청이 막혔는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였다.


"..."


어찌나 거칠게 움켜쥐었는지, 숙종의 손에서 서찰 두장이 금세 꼬깃해졌다. 宗統失序종통실서라는 네글자가 숙종의 두눈을 콕 찌르고 심장을 후벼팠다.


今日黨禍至此者,

以宗統失序也。

오늘날 당쟁의 화가 이 지경이 된 것도,

종통이 차례를 잃었기 때문이다.


"종통실서宗統失序...종통실서..."


한순간에 피가 끓어올라서 눈코입에 모두 새하얗게 기포가 낀 것만 같았다. 종통실서...증조부인 인조대왕이 친히 후계를 바꾸어 조부 효종대왕에게, 그리고 선부 현종대왕에게,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삼종의 맥이 이어진 것을 부정하는 자들의 광오함이라니.


"망극하옵니다 전하..."

"..."


숙종은 대꾸도 않고 다시금 손안의 흉서를 들여다보았다. 요승 처경 사건으로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이 채 아물지도 않았다. 헌데도 또 종통 타령이라니.

.

今日黨禍至此者, 以宗統失序也。

오늘날 당쟁의 화가 이 지경이 된 것도, 종통이 차례를 잃은 까닭이다.

國人孰不欲立此君, 以正國統, 以去朋黨,

조선사람이면 누구든 이분을 옹립하여 국통을 바로잡고, 붕당을 물리치고, 싶지 않을까마는,

而爲時勢所制, 不得立。

시세에 짓눌려 그러지 못할 뿐이다.

今諸公, 若立此君, 正宗統, 去朋黨, 則撥亂反正,

이제 제공들이 이분을 옹립하여 종통을 바로잡고 붕당을 물리친다면, 반정으로 나라를 평정하는 길이니

非特一時之功, 可不快哉?

한때의 공이 아닐테니 어찌 불쾌한 일이겠는가?


入城之夜, 卽迎此君而立之。

입성하는 그날 밤, 즉시 이분을 맞아 옹립하고

領相、兵判及訓鍊大將, 則分送百餘人,

영상, 병판과 훈련대장에게 백여인을 나누어 보내어

招以闕內有急, 卽卽馳入爲言, 不發則斬之。

궐내에 급한 일이 있으니 말을 달려오란 말로 불러들이고, 가지 않거든 목을 베라.

光城雖無可祛之罪, 亦一帶兵之人, 不可不除。

광성부원군은 죄는 없지만, 일대군병을 거느린 사람이니, 숙청하지 않을 수가 없다.


行政之際, 諸公曾未經事,

행정의 일은 제공이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領府事鄭知和、

영부사 정지화,

前參判申晸、

전 참판 신정,

前參判尹深、

전 참판 윤심,

前判尹金宇亨、

전 참판 김우형,

前判書洪處亮、

전 참판 홍처량,

前大司憲李翊相、

전 대사헌 이익상,

前判書李正英,

전 판서 이정영,

入去之路, 取其在近者, 使之爲政,

지나가는 길목에 가까이 있는 자는 취하여 행정을 맡기되

如有辭避不肯之色,

사피하여 불긍할 기미가 있거든

使五六人挾持而來。

대여섯명이 꿰어차서 끌고 온다.


闕門放火之時, 趙大妃殿則勿犯,

궐문에 불지를 때 조대비전은 범하지 말라,

此乃諸宰所同議者也。

이는 여럿이서 논의가 된 일이다.


諸公雖以不參其謀爲辭, 義之所在, 人無不孚。

제공들이 비록 이 모의에 불참하더라도, 의가 있는 곳에 사람이 붙지 않을 수가 없다.

立國之正統一義也,

나라의 정통을 세우는 것이 첫번째 의리요,

去朝朋黨二義也,

붕당을 물리치는 것이 두번째 의리요,

爲民除害三義也。

백성에게 해로움을 없애주는 것이 세번째 의리다.

願諸公, 萬不猶豫興師, 亟入掃蕩群小, 洗淸朝端,

원컨대, 제공들은 군사를 일으키는 일을 주저 말고, 소인배를 소탕하는 일을 서둘러서, 조정을 깨끗이 치우면,

則日月重明, 群庶再生, 宗社幸甚, 國家幸甚。

해와달이 다시 밝을 것이고, 서민들은 다시 살아나니, 종사와 나라를 위해서도 매우 다행이리라.


"누가 쓴 것이더냐?"

"송상민일 것이옵니다..."


왕의 물음에 권대운이 냉큼 답하였다. 숙종은 송상민이란 이름에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송상민? 은진송가더냐?"

"예 전하."


권대운이 도승지 민종도에게 눈짓했다. 김석주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곁눈질로 보니, 민종도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때를 같이하여, 송상민이 상소책자를 하나 올렸사온데...글이 워낙 장황하여 채 살피지 못했사오나...그 스승 송시열과 송준길을 비호하여, 체이부정이니, 하는 문구가 있어...저 흉서와도 부합되옵니다."

"체이부정..."


숙종은 치가 떨려서 이를 악물었다. 서인 편을 들고 싶어도, 들 수가 없다. 징글징글하게, 또 지긋지긋하게 3대나 흐른 종통을 물고 늘어지며 왕통을 발치로 끌어내리는 자들...


이내 그의 머릿속이 활활 타올라서 차옥의 일은 화덕에 넣기도 전에 바싹 말라버린 흙반죽처럼 부스러져버렸다. 허견이 차옥을 욕보였든, 남구만과 구일이 허견을 모함했든, 이제는 거기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편전으로 가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숙종의 용포자락이 사납게 펄럭였다. 정지화, 윤심, 이정영, 김우형, 이익상...흉서의 손이 이들에게도 뻗친 건가. 이들도 흉서를 받은 건가. 아니면, 거짓흉서가 이들을 엮은 건가. 왜 하나같이 서인들인 건가. 김석주한테 붙었다, 허적한테 붙었다 하며 수거에만 전념하는 윤심을 제외하면 모두 서인인 것을. 서인들의 궐기를 선동하는 건가.


머릿속이 드글드글 들끓는 채로 숙종이 양화당 밖으로 걸어나오자, 뜻밖에도 중궁이 아리따운 자태로 통명전 뜨락에 서서 봄볕을 누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궁?"


진홍은 지아비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지, 가만히 하늘로 손을 뻗어보았다. 다섯손가락을 쫙 벌렸지만, 은금빛 햇살이 손샅으로 흘러들어와서 동공을 비추었다. 진홍은 눈을 살짝 찡그리면서도 고집스럽게 손을 뻗어 해를 가렸다. 하나, 둘, 셋...여섯...여덟, 아홉...끝.


"뭘 하는 거요?"

"..."


진홍은 등뒤에서 들린 지아비의 음성에 멈칫하더니, 뒤돌아보며 말갛게 웃었다. 어느틈에 바짝 다가와서 자신을 보는 지아비의 눈빛에 자신의 기분도 환히 밝아지는듯이.


"전하..."

"뭘 하는 거요 대체?"

"햇빛이 너무 눈부시어...가리려구요."

"뭐요? 그 손으로?"


숙종은 기가 막혀 진홍의 벳고사리 같은 손을, 고부라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아비가 어이 없어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진홍은 해사한 얼굴로 하늘을 다섯손가락으로 가리는 시늉을 하였다.


"예."

"..."


숙종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중궁은 진지하다. 나를 놀리나, 이런 생각이 들긴 해도, 신료들 앞에서까지 장난을 치거나 할 중궁은 아니다. 그때 등뒤로 따라붙은 권대운의 한숨섞인 혼잣말이 들려왔다. 아니, 일부러 혼잣말을 가장하여,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려고..."

"..."


그 순간 진홍은 숙종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권대운의 희붉은 얼굴을 보았다. 전체적으로 예민한 인상을 주는 이목구비였다. 눈매도 날카롭고 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밝은 느낌이 드는데다, 찌를 듯한 콧날에 콧등성이는 물론 콧마루까지 좁고 뾰족했다. 그런 권대운을 보며 진홍은 차분히 대꾸했다.


"내가 언제 하늘을 가린다 하였소?"

"네? 무슨..."

"나는 눈만 가리면 되지요."

"눈...이요?"

"내 복중태아에겐 하늘을 원 없이 보여줄 것입니다. 좌상의 말대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나 있겠습니까."


진홍은 마지막 말은 숙종을 보면서 또렷하게 발음했다. 해사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인데도, 권대운과 유혁연, 민종도, 김석주 네 사람에게는 시린 경고처럼 들렸다.


"..."


숙종은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끓어오르던 피가 잠시 식었다. 워낙 흥분하여 눈앞이 잠시 뿌옇게 보일 정도였고, 관자놀이 주변과 뒷목까지 뜨끈뜨끈하던 것이, 중궁을 보니 진정이 되었다. 이제는 너무 편안해서 탈인 건가. 온몸에 곤두섰던 털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내려앉는 느낌이라니.


"그럼...이만 들어가겠사옵니다."


진홍은 모처럼 햇볕을 쬐러 나왔다가, 신료들과 마주친 것이 불편한지, 어색한 얼굴로 말하고선 양화당 옆 통명전으로 바로 들어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숙종은 그녀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자신은 눈을 가리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나에게 한 얘긴가, 내 뒤의 신료들에게 한 얘긴가...


"일단 흉서의 일은 불문에 부치고, 은밀히 조사하라. 흉서를 보낸 자가 누군지, 받은 자가 누군지..."


숙종은 편전으로 향하면서, 권대운과 김석주, 유혁연에게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영을 내렸다.


"예 전하."


고개를 조아리면서 숙종을 곁눈으로 훔쳐보는 권대운의 갈색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위험하다. 아무리 봐도 위험하다. 용상에 오르고 탈상을 마치고, 얼마나 된다고 벌써 중궁이 세번째 회임이라니...이 모든 게 꼬리 아홉 달린 중궁이 왕을 미혹한 탓이다. 중궁은 상의喪衣가 아니면 포의胞衣만 입는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 소리도 이제 그만...이제는 수의壽衣를 입을 때도 되었다. 권대운의 머릿속에 잠시, 실날 같은 생각이 붙었다가, 바람에 날려 사라져버렸다.


편전 어탑 위 서안에는 온갖 상소와 장계, 관리들의 수본手本까지 산더미처럼 쌓였다. 송상민이 올린 책자, 성균관 전적典籍 한범제가 올린 상소, 이우가 김석주에게 보내온 흉서 두건, 그리고 그런 이우에 대한 보고 문건들이었다.


"한범제의 상소로는 홍예형의 언니가 허견에게 구타당했다는 소문이 항간에 자자한데 허견의 공술로만 사건을 종결하였으며, 차옥 사건 또한 간여하지도 않은 자들을 억울하게 끌어들여 사건의 논점을 흐려놓았다고 하옵니다."


도승지 민종도는 한범제의 상소를 바치기 무섭게 그 개괄적인 내용을 요약하며 자신의 의견까지 보태었다.


"..."

"하오나 전하, 이는 그저 전하의 눈을 가리고 속이기에만 급급한 말이옵니다. 어찌 의금부에서 감히 대비전 서모의 폭행사건을 허견의 공술에만 의존하여 처리하였겠으며, 또 어찌 간여하지도 않은 자들을 끌어들여 누명을 씌우겠나이까?"

"..."


숙종은 입을 다물고 편전 안을 둘러보았다. 이중에서 서인이라곤 김석주 하나였다.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김석주는 입을 닫고 별반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흉서의 출현으로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관망하는 참이었다. 그러자 권대운, 유혁연 등이 서로 앞을 다투어 숙종을 압박했다.


"전하, 차옥 사건은 남구만과 포도대장 구일, 포도부장 신류, 그리고 종사관 이지경 등이 습독관 이동귀를 사주해서 꾸며낸 일이옵니다. 그들을 엄히 처단하시옵소서."

"전하, 윤휴의 금송 사건도, 남구만과 김우형, 신정 등이 기회를 엿보다가 윤휴를 구렁텅이에 밀어넣겠다는 고약한 심사가 보였사옵니다. 김우형과 신정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시옵소서."

"흉서의 내용을 봐도, 거기 적힌 이정영, 김우형, 신정 등은 모두 남구만과 한통속이옵니다. 믿을 수가 없는 자들이니, 그들을 잡아다가 엄히 문초하시옵소서."


민종도의 간언에 숙종은 미간을 찌푸렸다. 흉서에서 지목한 그들도 흉서를 받았을 수는 있다. 하지만 왜 하필 윤심, 이정영, 김우형, 신정인지.


"문초를 하라?"

"예 전하, 흉서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언제 받았는지, 확인해 보소서."


민종도의 간언에 숙종은 입을 꾹 다물었다. 흉서에 거명된 이름들은 한끝차이로 김석주와 남구만을 비껴간 셈이었다. 윤심으로 김석주를, 이정영과 김우형으로 남구만을 엮어버릴 수도 있었다. 흉서가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몰라도, 자칫하면 서인들을 모조리 씨를 말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구만의 고제자인 최석정까지도.


작가의말

실제로 애꿎게 습독관 조선이 목숨을 잃었고, 동시에 강화흉서 사건이 터져서, 국청이 열렸습니다. 여러 사람 잡은 피바람이지요. 워낙 동시다발로 사건이 몰아친 때라 쓰면서도 버겁네요. =_=;;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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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2.29 08:35
    No. 1

    왕노릇 못해먹겠구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1.02 20:56
    No. 2

    특히 왕노릇 하기 힘든 나라가 조선인 듯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2.29 20:43
    No. 3

    이번화는 화려한? 묘사가 많아서 눈이 즐겁습니다.
    얼마간 뜸했던 숙종의 뒤끝과 희로폭발이 본격적으로 터지겠군요.
    그리고 중궁과 숙종의 로멘스가 아름다울 수록 더 슬퍼집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1.03 01:12
    No. 4

    눈이 즐겁다는 말씀 고맙습니다. 강화도씬 묘사에 부담을 느껴서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려고 애쓴 거라...^^;; 중궁의 얘기는 쓰면서도 저도 울컥할 때가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12.29 23:00
    No. 5

    허적이 김석주를 이긴 걸까요. 둘 중에 누가 더 머리가 잘 굴러가는 지 흥미진진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1.03 01:14
    No. 6

    에, 두뇌싸움이라 쓰는 저는 머리에서 쥐가 나고 온몸이 피가 마릅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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