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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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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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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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21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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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해의 그림자 145

DUMMY

"지금 확실히 알아보지도 않고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우겠다는 건가?"


이민철이 따져 묻자 부여현감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저기 증인도 있습니다."


부여현감의 눈짓을 따라 이민철이 눈길을 돌리니, 창칼로 땅을 짚고 선 관군들 틈새로 웬 붉은 법복法服을 입은 마흔 후반의 무녀가 서른살 안팎으로 보이는 여인과 무동을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법복?"


홍만종과 김지남은 눈살을 찌푸리고 무녀를 쳐다보았다. 감히 붉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무녀가 있다니.


하지만 최석정과 이민철, 김석하 등은 놀라운 일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질 못하는지 그들은 입안 가득 한숨을 삼키는 듯한 표정으로 그저 입술 비죽거렸다. 그런 그들을 태자방이 손가락을 쩍 뻗어서 가리켰다.


"이분들이 쇤네의 영역에서 소나무를 베었지요."

"허! 우리가 소나무를 벌목하는 걸 봤다고?"

"어...나무를 베는 건 보았지요. 나으리들 가고 난 뒤에 잘려나간 소나무 밑동이 보였구요."

"밑동이라, 모두 몇그루인가?"


갑자기 침묵을 깨고 최석정이 따져묻자, 태자방이 멈칫했다. 그녀는 수차를 흘끗 보며 머뭇머뭇 답하였다.


"저 정도면 열그루는 족히 넘지요."

"소나무 열그루가 넘으면 우리들은 장 백대씩 맞고 전가족이 극변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확실한가?"

"저 수차만 봐도..."

"수차가 아니라 정확히 몇그루인지 그루터기를 세어보고 말해야지."

"이 넓은 산을 일일이 뒤지자니 그 편이 더 빠르지요."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계속해서 태자방을 추궁하면서 최석정의 눈빛은 끝을 모르고 점점 싸늘해졌다. 입가에 항상 온화한 웃음을 머금었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니었다. 평소 최석정을 알던 사람들도 놀랄 만큼 눈동자도, 콧날도, 입술 아래로 하얗게 반짝이는 이도 하나같이 얼음조각 같았다.


"이 수차를 조사해보았자 소나무 열그루는 커녕 한그루도 안 들어갔을 게요. 왜냐, 수차엔 소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표해록에 명시되어 있거든."


최석정이 언덕 위 지남에게 대뜸 눈짓하며 냉랭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칼같이 반박했다. 부여현감과 태자방의 얼굴에 당혹스런 표정이 스쳐갔다. 자신들 딴에는 사전에 빈틈없이 계획을 짜고 말을 맞춰서 왔다고 여겼지만, 막상 임해 보니 허술하고 경솔했다. 가장 중요한 수차의 재질이 문제라니. 너무도 큰 허점 앞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최석정의 날선 음성이 그들의 정신을 난도질했다.


"소나무 밑동을 발견했다니, 원칙대로 사흘 안에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나 하시오."

"..."


이번엔 최석정의 날선 눈초리가 태자방을 향하였다.


"그리고, 열그루 이상은, 장백대에 전가사변. 무고죄면 삼척법三尺法에 따라 발고자가 그대로 당할 것이고. 천인이 양반을 무고하였으니 가등加等(죄와 벌의 등급을 더함)하게 된다. 따라서, 목숨을 내놓아야 할 터."


태자방이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섰자, 그 뒤에 있던 시녀 오례가 살짝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신녀님..."

"허나 태자방은 그저 소나무인지는 모르고 나무를 베는 것을 보았다고만..."


부여현감이 재빨리 태자방을 두둔하고 나섰지만 바로 최석정의 싸늘한 눈빛에 질려버렸다.


"현감은 수거나 살펴보시오."


부여현감은 수거에 시선을 돌리고 황급히 기억을 헤집어보았다. 정말로 수차엔 소나무를 쓰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었던가...가물가물했다.


그 순간 언덕 위에서 김석하가 지남에게서 표해록을 건네받더니, 그대로 수차의 톱니 같은 계단을 물수제비처럼 딛고 호수를 건너왔다.


최석정의 눈치를 보느라고 전혀 호수 쪽은 신경도 쓰지 않다가 갑자기 옆구리를 파고 드는 듯한 기척에 부여현감은 기겁하여 뒤로 두발짝이나 물러섰다.


"뭐, 뭐야 너?"


조금전까지만 해도 호수 건너편에 있던 흑옥 같은 자가 눈앞에 번개처럼 나타나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부여현감이 김석하를 가리키자, 김석하가 씨익 웃었다.


"표해록입니다. 참고하시지요."


굳이 표해록까지 펼쳐서 손가락으로 콕 짚어 확인시키는 김석하였다. 언덕 위에서 지남이 자신의 책이라며 엄지로 가슴팍을 가리켜 보였다. 부여현감은 경악이 채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김석하를 쳐다보았다. 이미 김석하의 날선 눈웃음에 압도되어버린 채로.


이놈 뭐야, 진짜?


하필이면 자신이 작년 초가을에 여기 부여현감에 제수되어 하직인사를 하러왔을 당시 왕의 서늘한 눈웃음이 생각나버렸다. 닮았다. 아니, 김석주를 닮았나. 괜한 생각을.


"가져가 살펴보시오. 정녕 이 수거가 증거라면."

"..."


최석정은 보란듯이 손짓으로 수차를 가리켰다. 부여현감은 어쩐지 난감한 기색으로 최석정을 돌아보았다. 최석정의 스승이 하필이면 신임 형조판서 남구만이었다. 증거와 증인, 정황까지 완벽하게 갖춰야만 남구만을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콧잔등을 실룩이며 눈길을 윤이에게로 돌렸다.


소복을 벗고 연옥빛 저고리와 쪽색 치마를 입은 윤이는 한눈에도 피부가 희고 투명했다.


"여기 이 어린 부인은..."


윤이를 보는 부여현감의 눈빛이 묘하게 번들거렸다. 홍만종은 좋지 않은 예감에 한발 앞서 윤이를 자신의 어깨로 가리며 답하였다.


"우연히...소실로 맞이했습니다."

"자넨 처음 보는군?"


행색을 훑어보는 부여현감의 눈길에 홍만종은 책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깍듯하게 인사했다.


"성균관 서재생 홍만종입니다."


부여현감의 눈빛이 시들해졌다. 요즘 누가 성균관에서 지낸다고. 뭐 이리 한심한 놈이 다 있나 싶었다. 보나마나 가문과 사문이 별 볼 일 없을 터였다.


"난 또...나물죽 소금밥이 뭐가 좋다고 거기 붙어있나?"

"글쎄요."


부여현감의 핀잔에도 홍만종은 믿을 구석이 있는지 여유로웠다. 그 모습을 보며 윤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천심...혹여 이이가 아닌가?


"누구 문하이신가...?"

"..."


홍만종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잠시의 망설임에 부여현감의 눈꼬리가 비웃음으로 늘어졌다.


"그럼 그렇지..."


홍만종을 돌아보는 윤이의 눈동자도 불안으로 흔들렸다. 그 때 김석하가 딴청을 부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부여현감이 움찔해서 홍만종을 돌아보았다. 이미 조선팔도에 너무도 잘 알려진 시였다. 그 시의 작자 또한 마찬가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동명선생東溟先生 정두경鄭斗卿. 백사 이항복의 문인이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천재이며, 벼슬을 마다하고 숨어살다가 관직도 없이 백의로 명나라 사신 강왈광, 왕몽윤을 접대할 만큼 조선에서 손꼽히는 문인이었다.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조차도 그의 시를 한수 쯤은 흥얼거릴 정도로.


"설마 동명선생 정두경...은 아니겠지?"

"어유! 그런 천재시인을 소생이 어찌 알겠습니까?"


홍만종이 천연덕스레 고개를 살레살레 내젓자 부여현감의 눈에 더욱 의심이 짙어졌다.


"별호가 설마..."

"몽헌입니다."

"후우..."


부여현감이 뭔가 대단한 이름을 예상하고 바짝 긴장했었는지, 흉골이 들썩거릴 정도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김석하가 대뜸 폭로하려 들었다.


"별호가 하나 더 있는데 현.."

"이 친구..."


홍만종이 황급히 김석하의 입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며칠 전에 홍만종이 근화가지 일을 폭로한 일에 대한 복수심이 담긴 눈빛으로, 어떻게든 만종의 손아귀를 벗어나서 입을 자유롭게 놀리기 위해서 석하는 온몸을 뒤틀었다.


"읍, 혀무..."

"뭐, 현무?"

"효문?"

"형몽?"

"허음자!"


모두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히 되묻자, 김석하는 홍만종의 손에 입을 막힌 채로 답답한 눈빛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최석정이 두눈을 깜빡이더니 슬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나비야 청산 가자, 정두경, 현...


어쩐지...


워낙 학식이 대단하여 뭔가 있는 사람이란 생각은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 정도 학식이면, 과거 보는 시간도 아까워서 책만 파고 들었다는 '그 책벌레들'이나 가능했다. 사기 한권을 천번, 이천번, 삼천번, 심지어 억만번도 더 넘게 읽는다는 '그들'...


부여현감은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최석정 한사람 만으로도 이미 위험했다. 게다가 이경여의 서자에, 귀신같은 어린놈에, 구겨진 갓을 쓰고도 귀한 청국 나침羅針(지남침, 나침반)을 들고 다니는 애송이에, 당대의 시인으로 손꼽히는 정두경과 얽혔을지도 모르는 성균관 유생까지...이들을 상대하려면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터였다. 헌데도 벌써 증거 하나가 어긋나버렸다.


심란한 부여현감의 시야로, 아전들이 멈칫멈칫 수차를 끌고 가야하느냐고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부여현감은 불안하고 초조한 눈동자로 수차를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왕 내친 걸음, 수차를 끌고 갈 수 밖에.



으스름한 섣달 그믐달이 뜬 한밤중에 구드래나루를 오가는 한척의 나룻배에, 호화로운 밀화끈을 단 갓을 쓰고 진귀한 담비털로 손잡이를 감싼 피선皮扇(가죽부채)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올라탔다. 패랭이를 쓴 노비들 열두명도 함께였다.


얼굴을 가리려는 건지, 강바람을 막으려는 건지, 사공은 사내가 수상쩍어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아무나 못 들고 다니는 귀한 담비털 부채라 오히려 눈에 띄었다. 뱃머리에 놓인 어슴푸레한 등불에 노랗게 반짝이는 밀화구슬이 사내의 눈옆으로 찰랑거리는 것을 보며 사공은 평소와는 달리 조심스레 물었다.


"나례를 보러 가십니까?"

"뭐?"

"예. 이제 시작할 건데...때를 잘 맞추셨습니다. 나례 보러 가시는 것 맞지요?"

"아 뭐..."


사공이 확인하듯 되물었지만, 밀화갓끈의 사내는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그는 입가에 사마귀가 있는 수하에게 말을 건넸다.


"겨우 시간을 맞췄으이."

"예. 구석산에서 시간을 잡아먹었는데 검단산에서 시간을 벌었습니다."

"칫. 똑같이 시간만 버린 거지. 이대로 돌아가면 난 또 아버지한테 한소리 들을걸."

"허면 경...정산 그분이라도 찾..."

"누구? 현묵자?"

"에...예..."

"누군지도 모른다며? 무슨 수로?"

"생각해보니 검단산 그분은 아실..."

"말해주게 생겼어? 그 노인네 자칭 송시열 개드만! 개! 나보고 개라고 했지? 지가 더 개야 지가 더!"

"그나마 구석산 노인네보다는 낫던데요."


황씨의 말에 허견은 몸서리를 쳤다.


"그 노인넨 진짜...아버지도 참. 노망난 노인네들을 뭐하러..."

"그래도 이따 돌아가는 길에 한번 더..."

"자네가 하든지."

"소인은 자격이..."

"아 몰라! 몰라!"

"원래 인재를 얻으려면 삼고초려를 하는 법이랬는데..."

"아 됐다니까! 됐다고오!"


사내는 손사래를 치며 발작적으로 펄쩍 뛰었다. 엉덩이까지 들썩거릴 정도로 요란하게 거부의사를 표출하자, 그 순간 사내의 손목에서 달랑거리는 방울소리가 났다. 사공은 흠칫하여 사내를 자세히 살폈다.


"그냥 나례만 보러 가시는 게 아닌가 봅니다요?"

"뭐?"

"혹시 귀매도 잡고 나비도 잡으러...?"


사공의 의미심장한 말을 알아들은 사내가 대답은 않고 눈을 굴리면서 사공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나비 말입니다. 나비."


사공이 재차 강조하자 사내는 그제야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을 머금고 답하였다.


"흥. 당연히 잡아야지. 아마도 나비는 지금쯤 어여쁜 찔레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겠지만."

"아..."

"하지만 곧 가시줄기에 갇혀 날개가 너덜너덜 찢기겠지."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귀매를 잡는 의식이 시작되면, 자신들도 빗자루 하나씩 들고 나타나서 윤이와 최석정을 덮친다...그러면 서인인 최석정은 남인의 영수인 허적의 사위이자 이 허견의 매부가 된 사실에 숨이 콱 막히겠지.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간 찔레꽃 줄기의 뾰족한 가시에 긁히고 찔려서 날개가 만신창이가 될 테니.


그런데 흥이 나서 고개를 흔드는 허견의 귓가에 사공의 반가운지, 두려운지 모를 음성이 들려왔다.


"역시, 그분이시군요."

"그분? 날 아나? 난 여기 처음인데?"

"아...귀한 손님이 오실 거라 신녀님이 말씀하시어..."

"흥."

"저희 신녀님은 워낙 용하시어..."


사공은 사내의 웃는 얼굴을 보며 노를 몇번을 고쳐쥐고 안절부절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이런 속담도 있는데, 지금 말해야 할까, 아니면 좀더 때를 기다려야 할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데...그러는 사이, 사내의 넋두리는 다시 계속되었다.


"아 확실히 도성 밖이 좋아. 인정이니 파루니 하는 것도 없고. 원 없이 쏘다닐 수도 있고."

"도련님도 참..."

"귀매 잡는 의식이 시작되면 모두가 빗자루를 들고 나올테니, 그때 잡는다. 이민철의 집이 동지매 앞이랬지?"

"예. 한겨울이라 꽃이 하얗게 피어 찾기 쉬울 겁니다요."


나룻배가 자온대에 가까워질수록 신명나는 무악巫樂과 기묘하게 어우러진 여인의 음울한 노랫소리가 이 자온대 뒤 수풀에서 면면히 흘러나왔다.


나영공댁羅令公宅

나례일儺禮日이

광대廣大도 금선金線 이시었다.

궁에서 산굿만 겪으면

귀의鬼衣도 금선金線이리라


리라리러 나리라 리라리

리라리러 나리라 리라리


허견은 괴기한 노래를 듣다 말고 황씨를 돌아보며 미간을 확 찌푸렸다.


"나羅, 나儺...이거 나례 때나 부르는 노랜데. 뭐야. 오늘이 벌써?"

"예 나으리. 내일이 아니고 오늘이 그날인가 봅니다."


황씨 역시 노래에서 반복되는 나羅, 나儺음에 주목하여 고개를 기우뚱하는 참이었다. 이 엄동설한을 산속만 헤매고 헤집고 돌아다니다가 벌써 한해가 다 갔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우씨. 왔다갔다 이게 뭐야...이봐 사공, 좀더 빨리 가자고!"

"이왕이면 길 안내도..."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사공은 허견 일행을 부산浮山 둔덕으로 안내했다. 수백의 사람들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운집한 가운데, 무녀가 피나무를 깎아만든 처용탈을 쓰고 머리 위에 모란꽃가지를 꽂고 처용무를 낭창낭창하게 추는 참이었다. 흰 비단을 길게 늘어뜨린 한삼을 손목에 끼고 허공에 뻗었다 접었다...하면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 모습이 사람의 혼을 빼놓을 듯 현란했다.


그런데 군중들 한구석에서 이민철, 최석정, 김지남과 김석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궁시렁거리며 지켜보고, 그뒤로 홍만종이 윤이와 나란히 서서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이, 빗자루부터 찾아들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허견의 두눈에 들어왔다. 동매를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저놈은 뭐야? 왜 둘이..."


허견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누이가 최석정이 아닌 다른 사내와 바짝 붙어선 모습이 불길한 느낌으로 가슴 한구석을 후볐다.


"저어...만에 하나 말입니다. 그 꽃을 엉뚱한 나비가 취했다면...어찌 되는 것입니까?"


갑자기 사공이 불길한 질문을 던졌다. 허견은 뭔가 일이 틀어진 느낌이 들어서 미간을 찡그리고 사공을 돌아보았다. 어둠을 삼킨 시커먼 물결이 또 무엇을 삼키려는지.


"무슨...말인가, 그게?"

"그게..."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당장!"

"하필 그때 그자들을 찾아온 자들이 있어서...혹여 성황당 앞을 지날까 싶어 미리...나비 조심하라고 말해두긴 하였사온데..."

"그자들?"


사공이 지남과 만종을 손가락으로 주춤주춤 가리켰다.


"저기 어린 놈하고, 저기 서생..."


허견이 사공의 손가락을 따라 살펴보니 한사람은 한낱 말단역관에다, 또 한사람은 최석정이 문외출송 당할 때 자신이 오징어다리를 내밀었던 그 비리비리한 성균관 유생이었다. 그런데 하필 사공의 희붉게 튼 손이 그 유생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서생 분이...소실로 삼았..."

"..."


허견의 얼굴이 소리없이 굳어졌다. 귀신을 봤어도 이렇게 겁에 질리지는 못하였다. 마름 황씨와 노비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허견의 눈치를 살폈다. 저 지랄맞은 성미로 당장 이 강물에 자신들을 내던질까 겁이 났다.


그런데 자신들의 작은 주인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자라목이 되어 훔쳐보니, 푸르딩딩하게 얼굴이 변해서는 입가가 온통 주름이 도드라질 만큼 이를 악무는 참이었다.


"죽 쒀서...개 줬어?"


아비가 이 사실을 알면, 칠순 넘은 노구를 이끌고 당장 부여까지 쫓아내려올 판이었다. 오다가 숨이 넘어갈 지도 몰랐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 허여멀건, 비리비리한 멸치 같은 놈이라니.


"나으리,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

"대감마님께 속히 고하여 수습을 하셔야..."

"..."

"아니면 여기 충청감사가 대감마님과 절친한 사이니 그분께 방도를..."

"..."


허견은 아무 말도 없이 입을 꾹 닫아버렸다. 지금 누구 말을 들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장 울화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눈길을 돌려 자드락 건너 먼빛으로 보이는 시커먼 밤물결을 쳐다보았다.


"충청감영으로 간다."


허견은 손에서 빗자루를 탁 내던졌다. 귀매를 잡는 의식 때 윤이를 데리러 왔다고 나타나서 최석정을 놀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 틀렸다. 황씨도 살짝 풀죽어서 빗자루를 내던졌다. 그들은 당장 사공을 잡아끌고 부랴부랴 백마강을 도로 건너갔다.



"재난의 대비책은 수리水利에 있으니 다시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시지요."


허연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겨울날씨였다. 편전에서 왕이 중신들과 정책들을 논하는 가운데, 호조판서 오정위가 나서서 제언사(수리시설을 관장한 관청)의 개설을 주청했다.


그런데 말이 나오기 무섭게 왕은 그 자리에서 일목요연하게 골조를 짚고 살을 보태었다.


"물을 모아 그 이득을 보는 것은 농정의 크나큰 근본이니, 다시 개설하는 것이 마땅하다. 혹여 공무를 빙재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하고, 제방 안에서는 개간을 금할 것을 사목事目(관청의 규칙)에 넣도록 하라."

"영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부호군 윤심이 나서서 숙종에게 간하였다. 사전에 달달 외워서 말하는 듯 어조와 음색이 어색했지만, 발음만은 또박또박했다.


"우리 조선은 치수治水를 할 줄 몰라서 이득을 얻지 못합니다. 듣자니 이민철은 재지才智가 많아서 아래의 물을 위로 끌어올리는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니라 하옵니다. 시험하고자 하나 상喪중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


숙종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어명으로 섣불리 이민철을 불러들이라는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표해록을 쓴 최부조차도 성종이 먼저 최부에게 견문록을 써보라고 하였다가, 상중에 사사로이 왕에게 책을 지어바쳤다고 신료들의 탄핵을 받지 않았던가.


왕이 급한 성미를 꾹 누르고 침묵으로 일관하자, 윤심은 난처한 눈빛으로 허적의 눈치를 살폈다. 윤심은 수리시설에 관심이 많았고, 이민철의 기술을 진심으로 원하였다. 왕이든 신료들이든, 누구 입에서든 먼저 이민철을 도성으로 불러들이라는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


허적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뜸들였다. 사실 누구보다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이민철을 도성으로 불러들이고 싶은 사람은 왕 본인일 터였다. 그 구실을, 그 명분을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그래도 한번쯤 져주는 게 어떠리. 어차피 백성들을 위한 일이었고, 농업을 장려하는 일이었고, 또한 늑대굴에서 늑대를 불러내는 일이었다. 홀로 남겨진 최석정은 구워삶든 찜 쪄 먹든 알아서 하면 되니.


"효묘孝廟께서 당唐의 수거水車를 구경하시고, 각도로 나누어 보냈지만 쓰이지 않고 버려졌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마침 이민철에게 기교가 있으니 그를 불러 한번 시험해 보시는 게...어떠시옵니까?"


뜻밖에도 선선히 이민철을 부르자고 먼저 나서는 허적이 숙종은 고마웠다. 하지만 그 의심 많은 성미로 마냥 좋아할 수 만은 없었다. 우는 아이 젖 주겠다는 심보로, 단순히 왕인 자신이 적적하지 않도록 이민철을 도성으로 불러들인 건지. 아니면 이민철을 도성으로 불러들이고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허면, 그대들의 의견대로 이민철을 불러 시험토록 하라."


숙종은 가만히 허적의 두눈을 들여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문외출송 당한 최석정이 이민철과 함께 부여에 있다는 것을 저들이 이미 알아낸 건가? 하여 이민철을 불러들이면, 최석정 홀로 남는다고 판단한 건가? 그렇다곤 해도 저들이 최석정을 어쩌진 못할텐데.


숙종은 피식 웃곤 계속해서 조지겸의 파출 건을 아뢰는 승지 박신규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허적은 왕의 용안을 슬쩍 훔쳐보다 그만 맥이 풀렸다. 수차가 필요하니 이민철을 불러 시험하자는 자신들의 말에 왕은 덥석 입질을 하였다. 이제 열아홉. 하지만 벌써 여물대로 여문 왕이 이토록 싱거울 리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당장 이민철을 도성으로 올려보내라는 교지가 충청감영으로 내려왔다. 충청감사는 이민철을 찾아 부여현 동헌을 찾아왔다. 졸가리만 남은 배롱나무, 은행나무에 흰눈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아름다운 설경을 이루었지만, 뜨락 한복판엔 커다란 수거가 삼베 덮개에 덮여 놓여 있었다.


충청감사가 손을 뻗어 삼베 덮개를 젖혀 수거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총 스물네개의 톱니같은 계단이 둘레를 이루고, 또한 스물네개의 막대로 주축을 이룬 수레바퀴, 그 옆으로 긴 목관이 장착되어 있는 수거였다. 그런데 수레바퀴의 모습은 어쩐지 눈에 익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윷판 같기도 하고, 관상감의 24절기판 같기도 한 것이 그의 시야로 겹쳐졌다.


누가 관상감 천귀天鬼 아니랄까봐.


"영감! 오셨습니까?"


부여현감이 후다닥 달려나와 허리숙여 인사했다. 충청감사는 어설프게 웃는 부여현감의 얼굴만 봐도 확 짜증이 올라왔다.


"자네 이거 뭔가?"

"네? 말씀하신대로 수거를 수거해와서..."

"최석정은?"

"그게...양반은 어명 없이는 함부로 구금할 수 없는 법이오라...아직 조정에 보고도 못했는데..."

"허면 진작 돌려줬어야지."

"예? 하오나 허견 말대로 소나무 벌채로 엮..."


부여현감이 수하들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누설하는 모습에 충청현감은 안색이 확 변했다. 이리 허술한 인사를 보았나. 충청감사의 험악스런 눈짓에 부여현감은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보면 모르나. 수거에 소나무를 쓰지 않는 건 세살 먹은 애들도 아는 일을. 아니다 싶으면 이 수거를 돌려주고 후딱 심리審理를 종결했어야지."

"세살 먹은 애들도 아는 건 아닌..."

"시끄럽네! 어휴 쯧쯧...아니 심리를 종결하고 얼른 조정에 장계를 올리든지, 아니면 그냥 수거라도 돌려주고 일을 매듭짓든지. 이도 저도 아니고 뭔지."


충청감사는 한숨을 쉬고 혀를 찼다. 척하면 척인 일을, 왜 여태 질질 끌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두달 동안 뭘 한 건지. 개똥보다 못한 똥개 같으니."

"예?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그 수거나 돌려주게. 그리고 당장 이민철을...가만..."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자신의 감영엔 귀빈이 한명 있었다. 이민철만 일단 도성으로 올려보내면 그 귀빈이 최석정과 홍만종을 찾아갈 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수거를 돌려주고, 소나무 불법 벌목 건부터 해결해야 했다. 아무래도 일이 좀 지체될 것만 같았다.



"자넨 지겹지도 않나? 그 백이전. 벌써 두달째가 아닌가?"


여막 한구석에서 홍만종은 주야장창 백이전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모습이 지겨워서 최석정이 바짝 다가들어 손가락으로 콕콕 책을 찌르며 묻는 소리였다. 한번, 두번, 세번 찬찬히 정독할 수는 있어도, 두달 동안 백이전伯夷傳만 읽는 모습이 지겹기 그지 없었다. 가끔 홍만종을 만날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비좁은 여막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두달내내 백이전을 읽는 모습이 질릴 정도였다.


"이 백이전만 억만번을 읽는 분도 계십니다."


홍만종은 백이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답하였다. 두달동안 같은 책을 읽으면서 그의 눈꺼풀엔 졸음도 내려앉지 않았고, 눈동자엔 생기가 반짝였다.


基辭曰,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

虞、

夏忽焉沒兮,

我安適帰矣

於嗟徂兮,

命之衰矣!

遂餓死於首陽山.

由此観之,

怨邪非邪


"이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자 의리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서 굶어죽었지요. 세종께선 진양대군晉陽大君을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이름을 바꾸셨지만, 수양대군은 조선의 백이와 숙제를 품을 수양산이기를 끝내 거부했으니..."

"..."

"사실 의리라는 말은 우리가 살면서 수천번, 수만번도 더 듣는 말이지만, 질릴래야 질릴 수가 없습니다. 백이전 역시, 질릴 수가 없습니다."


최석정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구석에서 김석하는 이민철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벽에 기대어 앉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민철은 그나마 입술을 푸르륵거리기도 하고, 잠결에 어깨도 긁고 하였으나, 석하는 손끝부터 팔끝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석상 같은 석하의 모습에 지남은 신기한 얼굴로 물끄러미 응시하는 참이었다.


"하긴 이 친구 자는 모습도 질릴래야 질릴 수가 없지요."

"안 깨우고 뭐해?"

"지가 알아서 깨겠죠."

"깨우면 가위 옮을까 겁나나?"

"뭐...좀..."


지남은 손사래를 치고는 또 김석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나마 곱게 귀신 들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가끔 이렇게 기면嗜眠에 빠지고, 가끔 멍하니 집중력을 잃은 정도이니 차라리 양호했다.


외풍이 들 세라 꼭꼭 닫아놓은 여막의 문틈으로 찬바람이 솔솔 새어들어왔다. 아예 이불이라도 더 가져다 사방을 틀어막아야 하나...도성보다 남쪽이라 따뜻할 거라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강바람이 몰아쳐서 더 추웠다. 그는 두손으로 어깨죽지를 쓸어내리면서 김석하를 돌아보았다. 저놈 혹시 가위눌린 게 아니라, 얼어죽는 게 아닌가...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 왜 자꾸 구멍이 숭숭 뚫리는 건지."


최석정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새도 막으려고 바닥의 짚을 뜯어서 문틈새로 쑤셔넣으려다, 구멍 저편에 시꺼멓게 꿈틀대는 구슬 같은 것이 얼핏 비치나 싶더니, 화들짝 놀라 자빠지는 사내의 비명에 움찔했다.


"끄허어!"

"응?"


갑작스런 비명에 최석정은 의아히 두눈을 지릅떴다. 누군가 자신들을 염탐했다. 부여현감이 보낸 잔가. 혹여 여전히 자신들이 소나무를 도벌하였다고 믿고 어떻게든 증좌를 잡으려고, 아니면 억지로 가짜증좌를 밀어넣으려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건지.


최석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김석하가 잠들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이럴 때면 김석하가 나서주길 바랐다. 가위 옮을 각오를 하고 지금 석하를 흔들어 깨워 볼까. 하지만 깨워봤자 뭘 할까나.


"그래서, 들켰다?"


충청감영 객사를 차지한 허견은 황금빛 광채가 감도는 청명주淸明酒를 흰 백자에 부으면서, 문간의 노비를 향해 두눈을 홉떴다. 그 무서운 눈초리에 노비는 어깨를 움츠리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죄, 죄송하구먼요."

"..."


인삼과 구기자향이 알싸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온몸을 휘도는 핏줄도 유난히 간지러웠다. 벌써 보름이 넘도록 계집 속살을 맛보지 못하였다. 아비가 초빙하려는 명사를 찾아다니면서 산골을 드나들다보니 눈을 씻고 봐도 계집 구경을 하기가 어려웠다. 충청감사가 관기를 붙여주긴 하였지만, 계집들이 하나같이 성에 차질 않았다. 기녀라고 다 고운 것도 아니어서 그다지 색욕이 동하질 않았다.


괜히 목이 타서 허견은 술잔을 입가에 기울였다. 술이 목울대를 흘러내리면서 화끈하게 지지는 느낌이었다.


"그놈은 어떻더냐?"

"뭐 책에 미친 서생입죠. 나같으면 서방 노릇에 날 새는 줄도 모를텐데..."

"..."

"에...자나깨나 여막에서 책만 들이파더라니까요. 그것도 허구한 날 똑같은 백, 백 머시긴가 하는 것만 읽어대고..."

"배? 백 머시기? 백이전은 아니겠지?"


허견은 백이전伯夷傳의 백伯자만 들어도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백 머시긴가 하는 책만 읽어댄다는 말에 백이전이란 세 글자가 먼저 떠올라버렸다.


내가 미쳤지...


홍만종이란 자가 현묵자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성균관 서재생보다는 좀더 비범한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꿩 대신 닭이란 말도 있지만, 닭이나 되면 다행이지. 아무리 눈엣가시 같은 누이라곤 해도, 신세를 망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왕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만큼 가문과 실력만 되어도, 누이의 앞날이 그리 암울하진 않을 터였다. 이제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확 끌고 와 버려? 하지만 대상이 바뀌었다는 자신의 말을, 그 아이가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 허견은 온갖 산만한 생각들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뭔가 이거? 다시 돌려주는 건가?"


날이 밝자마자, 부여현감이 군졸들을 시켜 여막 앞으로 수거를 보내오자, 이민철은 같이 놀란 최석정, 김석하, 김지남, 홍만종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며 부여현감을 쏘아보았다. 부여현감은 굳은 입가를 억지로 당겨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예에..."

"범인은 잡았는가?"

"그건 아직..."

"진범도 못 잡았는데 왜 수거를 돌려주는가?"


최석정이 날카롭게 묻자, 부여현감은 굳은 윗입술을 꿈틀거리면서 최석정의 눈치를 보았다. 삭탈관직되어 품계도 없는 최석정에게 왜 자신에게 하대를 하냐고 따질 경황도 없었다. 처음에 최석정을 보았을 때만 해도, 마냥 유순하고 온화하던 얼굴이 지금은 마냥 날카롭고 매섭게만 보였다. 눈웃음이 가신 눈은 너무도 무서웠다.


"조정에서 영감을 올려보내라는 공문이 왔습니다. 와서 수차를 만들어보라고."

"수차? 우리가 수거를 만든 걸 어찌 알고? 아...소나무 도벌건이라고 보고는 한 것인가?"

"..."

"보고한 것 치고는 너무 조용한데? 두달동안이나."


최석정은 의혹어린 눈초리로 부여현감을 쏘아보았다. 부여현감이 움찔해서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그는 눈을 찔끔 감고 최석정의 눈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보고, 하였는가?"

"..."

"보고를 했을 리가 없지. 그랬으면 당장 은사님이 사람을 보냈든, 직접 달려오셨든, 둘중 하나는 하셨을테니."


최석정의 말에 부여현감은 안면근육을 실룩였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와 줄 거라고, 스승을 철석같이 믿는 자가 다 있다니. 한숨을 쉬려다가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것도 이른 아침부터. 한사람의 스승이 제자 최소한 제자 열, 백, 천, 심지어는 만 단위를 가르친다. 그들이 제자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제자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물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다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인근 니산에 머무는 윤증만 해도, 그 아비 윤선거의 묘갈문을 써달라고 그토록 스승을 쫓아다녔는데도, 결국 제대로 된 묘갈문을 받지 못하였으니.


도대체 제자가 누명을 쓰면 가만있지 않으리란 착각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만큼 최석정과 남구만의 관계가 돈독한 건가.


"흥흥, 조정에 보고를 안했으면, 어디에 했을까?"


최석정은 코를 훌쩍이듯 냄새를 맡으면서 부여현감을 쏘아보았다. 이민철 역시 미심쩍은 눈초리로 팔짱을 끼고 부여현감을 쳐다보며 그 자리에서 부여현감을 보는 참이었다.


"미안하지만, 우린 소나무 벌목의 혐의로 조사 받는 중이니, 사건 종결 되기 전까지는 한발짝도 부여를 벗어날 수 없네."

"영감..."

"어디 한번, 이송명령을 가져와서 도성까지 압송해 보든지."

"..."


아예 두손을 묶어보라고 내밀면서 약을 살살 올리는 이민철의 태도에 부여현감은 할 말을 잃었다. 그저 벌레씹은 얼굴로 이민철을 쳐다볼 뿐이었다. 사건을 종결할 때까진 한발짝도 부여를 떠나지 않겠다는 이민철의 방침은 합당했다.


하지만 시일을 끌면 끌 수록 부여현감 자신에게 불리했다. 소나부 도벌 건을 보고하지도 못한 채로, 이민철이 도성 입성을 미루면, 결국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갈 터였다.


"지금 나를...겁박하는 겁니까?"

"겁박? 그럼 자네는 도성에 보고하는 것을 왜 깜빡했나?"

"..."


부여현감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 사태를 해결할 만한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수차를 만들러 가라는데 안 가고 버티다니. 수차를 돌려줘도 소용이 없다니. 그는 치를 떨면서 그저 얄미운 최석정과 이민철의 얼굴을 노려보다가도, 다시 그들과 눈길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서 눈길을 회피하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작가의말

홍만종은 실제로 허견과 처남매부지간이며, 실록에는 허견이 누이를 홍만종에게 주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막은 전혀 모르는 바, 상상을 동원했습니다. 최석정과도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기록을 보면, 최석정이 홍만종을 위해 많이 애를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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