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조회수 :
789,137
추천수 :
11,578
글자수 :
5,820,877

작성
13.10.20 02:41
조회
3,221
추천
41
글자
34쪽

해의 그림자 137

DUMMY

"모주 한사발씩, 인절미 한접시씩이요!"


어느덧 썩은 삼월도 가고, 춘사월의 봄바람이 도성 안을 어루만졌다. 공공의 적, 최석정은 이민철, 김지남과 함께 오동나무집을 찾아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술을 시키는 참이었다. 늙은 주모가 부뚜막 위로 빼꼼히 고개를 빼고 이민철과 최석정, 김지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빨, 파, 초?"

"네?"

"아니 옷색깔이...벌거신 양반이..."


주모의 눈동자가 다시금 이민철의 홍단령으로 툭 떨어졌다. 여기는 가난한 민초들이나 오는 곳이었다. 간혹 양반들 중에서도 가난한 서생들이나 하급관원들이나 길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서 염치불구하고 술을 마시다 보니, 불긋한 옷색깔은 눈을 씻고 봐도 구경도 못하였다. 그런데 시뻘건 홍단령을 입고 철푸덕 앉아 있다니.


"우리가 바로 그 유명한 어중이떠중이요."


이민철은 태평하고 태연하게 엄지손가락으로 자신과 최석정, 김지남의 가슴팍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 옆에서 최석정과 김지남도 피식 웃었다.


주모가 입을 비죽이며 웃고 손에 국자를 잡았다. 김지남은 주모가 술상을 차려줄 때까지 막간을 이용해서 봇짐에서 주섬주섬 '錦南先生漂海錄금남선생표해록'이라 적힌 서책을 꺼내어 책장을 펼쳤다. 김지남이 서산에 표시된 쪽을 찾아서 다시 펼치는 순간 이민철이 김지남의 손에서 서책을 나꿔챘다.


"꼭 집에서 안 읽는 사람이 나와서 읽는다니까."


입을 비죽이며 손안의 책을 들여다 보니 손때 묻은 책 표지와 옆면을 봐도,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최석정도 고개를 이민철의 어깨에 닿을 만큼 가까이 기울여 책장을 들여다 보았다.


"표해록?"

"읽어보셨습니까?"


김지남의 질문에 최석정은 기가 찬 듯 피식 웃었다. 표해록을 보았냐고 천진난만하게 묻다니.


"표해록 안 읽어본 사람도 다 있나?"


최석정이 오히려 놀리듯이 되묻는 말에 김지남은 두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우리 역관들만 읽는 책이 아니란 말입니까?"

"우리 일관들도 읽는 책일세."


이민철도 피식 웃었다. 김지남은 이 둘이서 죽이 맞아서 거짓말로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정말입니까?"

"진짜래도. 아니 왜 사람 말을 못 믿나?"

"워낙 두분께 당한 게 있어놔서."


김지남이 게슴츠레 눈을 흘기면서 대꾸했다. 순진한 자신을 물들이는 건 바로 이 사람들이라고 속으로 원망하면서. 물론 상나라 토기인 줄 알고 고구려 토기를 사온 사건으로 여러 사람에게 찍혀서 두고두고 놀림감이 된 자신이 더 문제였지만.


"술상 받으쇼!"


마침 주모가 막걸리를 국자로 떠서 한 사발씩 담아서 인절미를 접시에 수북이 쌓아올린 술상을 차례로 내어주었다. 그 와중에 그녀가 마른기침을 하는 바람에 술사발이 넘실거리며 상위로 넘쳐났다.


"어?"

"이를 어째...죄송하구먼요. 냉큼 새로..."

"됐소이다. 뭐 많이 흘린 것도 아니고."


이민철은 살짝 엎질러진 술상은 최석정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새 술상을 받았다. 최석정도 흘끔 지남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떠넘겨버렸다. 지남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왜 맨날 나만..."


지남은 뽀얀 막걸리가 흥건한 술상을 내려다보고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최석정이 멀쩡한 술상을 받아드는 참이었다.


"맨날 나만 갖고..."

"난 어중이, 이 친구는 떠중이, 너는 막중이니까."


이민철이 웃으며 놀리는 말에 지남은 입을 비죽이며 더 궁시렁거렸다.


"막중이요?"

"막둥이. 막둥이를 저 북쪽에선 막중이라 부르던데?"

"그게 아니라...진짜 너무들 하십니다. 맨날 나한테만 걸핏하면 떠넘기시고, 설핏하면 사기치시고..."

"아니 우리가 언제 사기쳤다고..."


살짝 켕긴 최석정이 부뚜막 위의 행주를 집어와서 지남의 술상 위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지남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다.


"땅이 빙빙 돈다면서요. 저 그 말 했다가 여러사람한테 미친놈 취급 받았거든요."

"진짠데..."

"저 역관입니다! 청국에서도 하늘이 도는 거지 땅이 도는 게 아니라잖아요. 그게 정설이라매요!"

"거기서 잘못 믿는 거래도!"

"그럼 땅은 돈다! 하고 두분이 육조거리에서 소리칠 수 있어요?"

"아니 그런 미친 짓을 우리가 왜..."

"거봐요!"

"진짠데..."


여전히 잘못을 인정 않는 둘을 김지남이 흘겨보았다.


"안 믿어요. 이젠 또 안 읽은 책도 읽었다고 하시고..."

"책 얘기도 진짠데..."

"그럼 책 내용을 말해보시든지요."

"내용? 그 까짓거. 금남선생이 제주에 추쇄관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해서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서 절강성까지 가고, 또 황제 앞에까지 불려가고 하며 보고 들은 중국에 대한 견문록이지."


최석정이 일목요연하게 답했지만 김지남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그 내용은 안 읽어도 대충 들어 알 수 있잖습니까. 외우고 있는 글귀라도 말해보시지요."

"아니...얘 왜 이렇게 됐대요? 의심이 심히 철철철철 흘러넘치네?"


최석정이 입을 떡 벌리고 이민철을 돌아보았다. 이민철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가 그렇게 만들었겠지."

"영감님이 그런 거겠죠."

"난 아닐세."

"음."


최석정은 입맛을 쩝 다시곤 김지남을 돌아보았다. 그는 금남선생 최부가 절강성 관리에게 조선의 고대사를 나열한 장면을 술술 읊어보였다.


"금남선생이 명明나라 절강성에서 왜구로 오인받아 죽을 뻔했을 때, 그때 자신이 조선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를 술술 읊었던 부분이지."


의심으로 얽힌 지남의 눈동자가 조금은 풀렸다.


"정말로 읽어보신 거 맞군요."

"난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도 읽어보았는데?"

"금남선생사실기(일대기 같은 것)요?"

"미암공(미암 유희춘)이 저술한 걸세."


최석정이 손가락 끝으로 표해록을 톡톡 두드리며 하는 말이었다. 김지남은 고개를 갸웃하며 표해록 책장을 휘리릭 넘겨보았다.


"..."


정말인가. 이 낡은 책이 그렇게 대단한가. 그럴 리가 없는데. 김지남은 아무래도 미심쩍은 눈빛으로 최석정과 이민철을 쳐다보았다. 그저 한번 읽어보라고 김근행이 툭 내던져준 서책이라 읽어보는 참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찾아 읽는 책은 아니었다.


"하긴, 역관들은 당연히 일독해야 할 책이지. 중국의 풍습, 산천, 습속을 두루 망라하였으니 아주 값진 경험의 보고지."

"영감님은요? 외우고 있는 부분이라도?"

"험, 사실 난 다 읽은 건 아니고..."

"그럼 그렇지..."

"아니, 거기 수거水車 얘기가 있어서 나도 잠깐 읽어보긴 하였네."


이민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희뿌연 막걸리 위로 침울한 시선을 던지고선 술사발을 입가로 가져갔다. 목젖이 꿀떡거릴 만큼 단숨에 몇모금을 마셔서 목을 축이고는 입가에 묻은 술방울을 손등으로 쓰윽 훔쳤다.


"저 최부는 부친상 중인데 왕명을 받아서 표해록을 써바친 죄로 숱한 탄핵을 받았다지."

"영감...?"

"아무래도 상중엔 전하를 모시면 안되겠지."


이민철이 한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그 모습이 최석정의 눈에도 심상치가 않았다.


"영감, 혹 집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자당께선 강녕하시지요?"

"이만 일어나 보겠네. 너무 오래 집을 비울 수가 없으니."


이민철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엉덩이에 묻은 흙도 신경쓸 여력이 사실은 없었다. 최석정을 돌아보는 이민철의 눈빛이 언뜻 복잡한 감회가 어렸다.


"혹시 편찮으신..."



하지만 이민철은 최석정이 자세한 얘기를 캐물을 것이 두려운지, 곧바로 최석정에게로 화제를 돌려서 말문을 틀어막아버렸다.


"자네, 이번에 또 삼사에서 연명상소를 올린다던데? 궐안에 소문이 파다하이."

"네. 삼사가 연명하여 탄핵을 올리는 경우는 아주 희귀하죠."


최석정은 씁쓸한 눈길을 돌려서 오동나무집 주변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오동나무는 물론, 그 옆으로 늘어선 복숭아나무도 이미 복숭아꽃이 져서 꽃잎 몇송이만 남아버렸다. 벌써 춘사월도 가는 참이었다.


"주모! 여기 계산! 셋이서 얼마요?"

"스, 쿨럭! 스물네푼!"


늙은 주모가 잔기침을 하며 힘겹게 답하였다. 어디 편찮으신가. 이민철은 어쩐지 신경쓰이는지 유심히 쳐다보았다.


"주모, 괜찮으시우?"

"내 걱정 말고 그쪽 어매 걱정이나 하셔."

"..."


이민철은 대번에 안색이 흐려져선 허리춤을 뒤척여서 호패 옆에 가죽끈으로 주렁주렁 매단 엽전꾸러미를 빼내었다.


"상평통보...갖고다니시는군요?"

"편하긴 하드만.."


떨떠름한 표정의 최석정을 쳐다보며 이민철이 쌉싸름히 웃어주고는 오히려 보란듯이 세기 시작했다. 한푼, 두푼, 세푼...열다섯푼. 열여섯푼, 열일곱푼...열일곱푼에서 끝나버렸다. 이민철은 뻘쭘히 노파의 눈치를 보았다.


"일곱푼이 모자라는데...쌀로 내면 안되겠습니까?"

"여기..."


최석정이 허리춤에서 쌀이 꽉찬 쌈지를 풀어 보였다. 하지만 주모가 손사레를 쳤다.


"아유, 그러다 걸리면 나만 잽혀가지. 저 옆에도 그냥 쌀로 받았다가, 누구더라...시꺼먼 도야지가 자부인가 주부主簿인가 뭐라고 부르는 사람한테 끌려갔다니깐."


주모가 손짓발짓으로 설명하는 말에 최석정은 감이 잡힌 눈빛으로 이민철을 쳐다보았다.


"조현기...말하는 것 같은데요? 그자가 상평통보 통행을 책임지고 추진하는 인물입니다."

"조현기?"

"예, 품계와 관직은 낮으나, 재주가 많다고 미수공이 천거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주모로선 알아들을 수 없었던 탓에 무턱대고 두팔을 휘저었다.


"이름까진 내 모르겠고, 그양반이 술삯은 상평통보인지 상팽통보인지로 내야한다잖우. 일행분들도 계신데 좀 달래보등가. 아니면 그냥 외상으로 다시등가."


주모도 난처한 노릇이었다. 나라에서 상평통보를 이번달부터 통행시키더니, 주막이나 주점 같은 곳에선 아예 쌀이 아니라 돈으로 받게 시키는 참이었다. 군포도 쌀과 베로 받던 것을 이제는 아예 두당 두냥으로 하여, 차라리 쌀보다 돈으로 더 받겠다는 곳들이 많았다.


"최교리, 혹시나 있는감?"


이민철은 혹시나 해서 물어보면서도 그다지 기대하질 않았다. 최석정은 애초에 상평통보 반대론자였고, 또 군포를 내야하는 양민도 아니라서, 굳이 상평통보를 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이민철의 생각대로 최석정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있을 턱이 없죠. 녹봉을 월름 대신 돈으로 주면 모를까. 어제 광흥창에 다녀와서 녹미라면 두둑히 있습니다만."

"역시나."


이민철은 쓴웃음을 짓고 미련없이 김지남을 돌아보았다.


"지남이 넌?"

"저야...갖고 다니면 쓰게 되어서, 일부러 두고 다니는 중입니다. 하루에 딱 다섯푼만."

"다섯푼이면 딱 밥값..."

"굶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지남이 씨익 웃었다. 가뜩이나 돈이라면 벌벌 떠는 녀석이, 하필이면 김근행 처럼 노린내 나는 노래기 같은 인간을 따라다니더니, 아예 다섯푼만 들고 다닌다니. 그것도 딱 하루 한끼 값만. 이민철과 최석정은 기가 질려버렸다.


"어휴 지독한 놈..."

"...."

"두푼이 모자라니...외상으로 달아두겠구먼요."


주모가 막대기 하나를 집어들어 쓱쓱 이민철의 얼굴을 그리고 언문으로 복색을 표기해두었다. 아무래도 흔치 않은 홍단령이니 '벌건 관복' 정도로 적어놔도 나중에 찾아내기 쉬울 터였다.


"어무니!"

"할무니!"


갑자기 등뒤에서 들리는 중년 여인과 젊은 여인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최석정 일동은 뒤를 돌아보았다. 각각 서른 중후반쯤, 스물쯤 되었을까. 둘다 마치 대가의 마나님이나 별당아씨처럼 미색이 빼어났다. 늙은 주모의 20년, 30년 전 얼굴을 가늠케 하였다. 다같이 흥미로운 눈길로 세사람을 비교해보는데 노파가 화들짝 놀라서 막대기 쥔 손을 내저었다.


"왜들 나왔어! 들어가 얼른!"

"여긴 제가 있을테니 어무니나 들어가 쉬세요."

"난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얼른 향이나 델꼬 들어가!"


늙은 주모는 마치 부정이라도 탈까 겁내는 듯 계속해서 손을 휘저었다. 이리 고운 딸과 손녀가 취객들 눈에 띄기라도 할까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어무니나 향이랑 어서 들어가세요."

"넌 안된다니깐!"


펄쩍 뛰는 늙은 주모를 보며 최석정과 이민철, 김지남은 피식 웃었다. 이집 손녀가 곱상하긴 하지만, 그저 심상하게 느낄 뿐이었다. 떡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왜 미리부터 겁을 지어먹고 유난인지.


"지남이!"


이민철이 지남에게 엽전을 내놓으란 손짓을 살랑살랑해보였다. 지남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피같은 내 돈!"

"얼른!"


그렇게 이민철은 김지남의 다섯푼까지 탈탈 털어, 자신의 엽전꾸러미와 함께 주모한테 건네고는 최석정과 김지남의 목덜미를 잡고 일어섰다.


"두푼 모자란 건 내 앞으로 달아놓으쇼."


늙은 주모는 조금 겸연쩍긴 하였지만, 꽃보다 어여쁜 딸과 손녀를 생각하면 미리 조심시키는 건 나쁠 게 없다고 믿었다.


"벌써 복사꽃이 다 졌네요."


최석정은 오동나무집을 나와 집을 향해 걸어가며 발밑에 밟히는 복숭아 꽃잎들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감회가 남달랐다. 자신이 문제의 상소를 올려서 조정에 파란을 일으킨 지도 벌써 한달 보름이 훌쩍 넘었다. 지금까지 왕이 버텨주는 것도 신기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런 감상적 흥취를 이민철이 평소답지 않게 말초적인 말로 깨부숴버렸다.


"자네는 술이 들어가면 시가 나오는가? 난 쉬가 나오는데."

"영감님! 쫌!"

"후. 잘 지내게나."


어쩐지 한동안 보지 못할 것처럼 이민철이 애잔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길모퉁이를 돌아 성큼성큼 가버렸다.


"왜 저러시지? 무슨 일이 있나?"

"소변이 마리신가 보죠."

"아니...꼭 댁에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따라가 볼까요?"


하지만 최석정은 이내 맞은편에서 수레 두대에 쌀 열두석, 콩까지 싣고서 이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허견 일행을 발견하고 얼른 담장 쪽에 붙어섰다. 괜히 시비라도 걸어올까 귀찮았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지만 허견은 최석정과 김지남에겐 통 흥미가 없는 듯이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당장 광흥창에서 실어오는 쌀과 콩에 백성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급할 뿐이었다.


"저게 다 뭐래요?"

"월름이잖나."

"아니 저 나이에 저렇게 많이요?"

"그 아비가 영상대감이잖나."

"그럼 대신 타가는 거라구요? 우린 직접 가야 주던데."

"..."


최석정은 괜히 허견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기에, 그대로 지남의 손을 잡고, 오동나무집 앞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최석정과 김지남마저 빠져나간 골목에서, 마름 황씨를 비롯하여 노비들을 거느리고 건들건들 걸어가던 허견의 눈에 허름한 옷을 입은 노파와 소녀가 들어왔다. 웬 인물 반반한 중년 여인에게 술집을 맡기고, 노파가 소녀와 함께 돌아가는 참이었다.


"저 할멈은?"


예전에 최석정과 오도일 등과 마주친 곳이었다. 이후로도 종종 지나다닌 길이라서, 오동나무집 주모라는 사실을 단번에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이 있는 스물 언저리의 계집이 문제였다. 대가의 규수나 양가의 처자도 아닌 주제에 뭘 믿고 저리 반반하게 태어난 건지. 허견이 유심히 고개를 기울이고 눈길을 들여서 쳐다보자, 뒤에서 바짝 뒤따르던 마름 황씨의 표정이 이상야릇해졌다.


"황가야."

"예 작은 주인님."


냉큼 대답하는 마름의 음성만 들어도, 허견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상대가 알아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자이니 열마디 말이 필요가 없었다.


"...."


허견의 입가가 비릿한 웃음으로 비틀렸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사타구니가 묵직해지는 게 저 계집이 요물인 것이라고 뇌리에 낀 티끌만한 죄책감 따위는 계집 탓으로 돌리면서, 그는 어린 계집을 보며 하체를 살짝 비틀었다. 질리지만 않는다면 한두달은 너끈히 데리고 놀 수 있으리라.



오월 말의 이른 아침에, 상참에 참석하기 위해 청단령을 갖춰입고 평소처럼 선정문宣政門에 이른 최석정은, 주춤하며 멈춰섰다. 마치 끈적한 아교라도 밟은 것처럼 두발이 척 들러붙어 도저히 걸음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눈앞을 가로지르는 청회색 기와담장 한가운데로 웅장하고 격조있게 축조된 세칸짜리 솟을삼문, 그 선정문 그대로인데. 이 선정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도 귀하디 귀한 회회청回回靑을 넣은 유약을 발라 번조한 청기와 지붕, 그 선정전 그대로인데.


문제는 여기 선정문에서 선정전까지를 잇는 행각이었다. 왕이 다니는 어도의 좌변, 우변을 신하가 다니는 신도로 감싼 삼도三道에다, 사각기둥들이 좌우를 받치게 하여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지붕까지 얹어놓은 행랑인데, 노상 지나던 길인데, 요즘들어 이 기나긴 행각을 통과하는 일이 마치 깊은 산속 동굴을 지나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물론 중앙의 어문御門을 닫은 채로, 좌우로 신하들이 드나드는 양쪽 협문挾門을 지키는 금군들 역시 우물쭈물하는 최석정이 답답한지 곁눈질로 힐끔거리는 참이었지만.


"흐읍...흐우..."


최석정은 고개를 뒤로 젖혀서 흰 해서체로 宣政門선정문이라 적힌 현판을 올려다보고 심호흡을 하고서, 앞만 똑바로 보며 동협문으로 들어서서 우측 신도臣道에 첫발을 디뎠다.


느낌 탓인지 한걸음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밑이 푹푹 꺼지는 것 같았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행각기둥 옆을 똑바로 걸어갔다.


행각은 삼문 너비에 야박하게도 딱 맞춰서 지붕을 덮어놓은 형태였다. 신도로 짓쳐들어오는 햇살에 최석정이 손으로 눈을 가리지도 않고 가만히 걸어가니 온몸에서 환한 기운이 반짝였다. 오월의 햇살에 신록이 더 싱싱해지듯이, 최석정 역시 지켜보는 시야에 가시를 돋치게 만들 정도로 생생한 모습이었다.


행랑의 좌측 및 우측 신도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고개를 홱 돌려선 가시돋친 시선을 화살처럼 쏘아대었다.


"참 뻔뻔도 하지. 이쯤 되면 지가 알아서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니야?"

"무슨 낯짝으로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는지 원..."


최석정의 의연한 모습이 남인들에겐 뻔뻔함으로 보였다. 이미 조정에 최석정의 편은 한사람도 없는데도, 삼사를 포함하여 모두가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버젓이 고개를 들고 눈치도 보지 않고 저리 환히 웃는 얼굴로 걸어오다니.


하지만 최석정 역시 행각 신도에 다닥다닥 모여있는 신료들을 보고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우측 신도엔 삼정승인 허적과 권대운, 민희, 그리고 이조, 호조, 예조, 사헌부의 수장인 오시수, 민점, 목내선, 윤휴 이하 관료들이 품계대로, 또 좌측 신도엔 부원군 김만기, 그리고 병조, 형조, 공조의 수장인 김석주, 이원정, 홍우원 이하 관료들이 품계대로 서 있었다. 이미 상참의가 시작될 시각일텐데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행각의 신도에만.


최석정 자신이 송시열을 신구하는 상소를 올린, 그 윤삼월이 지나고 춘사월, 지금은 어언 오월이었다. 어느덧 햇볕이 마당을 푹푹 찌는 듯이 찌르는 바람에 마당에는 단 한사람도 서 있질 않았다. 최석정은 예조판서 목내선에게 다가들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판대감..."

"뭔가?"


목내선이 최석정을 보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최석정이 자신에게로 곧장 다가와서 부르니 뭔가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용건이 있다는 사실도 짜증이 났다.


"곧 상참의가 시작되니 모두 뜰로 나가서 기다리는 것이..."

"아직 중엄中嚴(왕의 행차를 알리는 북소리)이 울리지도 않았네!"


예조판서 목내선은 차갑게 대꾸하곤 이내 다른 판서들과 웃는 낯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 상평통보는 백성들이 잘 따른다지?"

"뭐, 군포를 면포 대신 상평통보로 내라니 어쩌겠소이까."


최석정은 입안에 매운 한숨이 들어찼다. 아직 중엄이 울리기 전이니 행각 아래 모여 있어도 된다. 하지만 중엄이 울리고서도 신료들이 행각에 모여 있으면 왕이 언짢아할 것이 자명했다. 상참의처럼 엄숙한 행사에는 신료들의 그림자조차 행각 중앙의 어도를 범하는 꼴을 못보는 왕인 만큼.


"하여튼 전하께서 스승대접을 해주니까 그저 기가 살아서..."

"스승대접?"

"시강원 시절부터 전하께서 사부라 불렀다지. 시강원의 사, 부를 다 합쳐서 사부."

"쯧, 송준길, 송시열, 다 놔두고 무슨 사부야 사부가!"

"..."

"아니 내 말은 꼭 그들을 인정한다는 건 아니고..."

"뭐...."

"그래? 난 그냥 전하께서 저자를 너무..."

"아직 어리신 게지. 저자의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신다더군."

"허이구, 땅이 돈다고 해도 믿으시겠네요."

"전하께서 저자 때문에 형평성을 잃으셨으이."

"황극皇極을 벗어나셨으니...쯧쯧..."


황극이란 두글자에 최석정은 멈칫했다. 황극은 자신도 왕에게 간한 단어였다. 편전에 오직 검은돌만 가득 채워서는 황극을 이룰 수 없다고. 그러니 서인과 남인을 고루 등용시켜야 한다고.


헌데 남인들의 눈엔 송시열을 옹호하는 대죄를 지은 자신을 왕이 참아주는 것이, 형평을 잃고 황극을 버린 소치였다.


최석정은 성큼성큼 오른쪽 행각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방금보다 훨씬 환한 아침햇살이 최석정의 온몸을 끌어안았다. 마치 최석정이 해를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해가 최석정을 따라다닌 것처럼.


"그래야지. 진작 그럴 것이..."


비아냥대던 신료들이 입을 다물었다. 왕의 은총을 입는 자라선지 왜이리 훤히 빛이 묻어나는 건지.


"황극..?"


최석정은 마당 한복판에서 가만히 멈춰서더니, 행각기둥에 삐딱하게 기대어 선 허적과 홍우원, 윤휴 등 우측의 남인들을 한사람한사람 훑어보았다.


"이 조정에 서인반, 남인반 반반씩 채워 탕탕평평을 이루어야 황극일텐데요. 그때가 되면 제발로 걸어나가지요."

"저, 저런 고얀 것을 봤나..."


하지만 최석정의 웃음은 너무도 환했다. 저 여유와 자신이 넘치는 것도 다 자신이 해의 사랑을 한몸에 듬뿍 받는다는 사실 덕분인 양.


마침, 행각 안으로 들어서던 김석주가 미간을 찌푸리고 노려보았다. 가무잡잡한 오른뺨을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문지르며.


둥!

둥!

둥!


그때 왕의 행차를 알리는 북소리가 세번 연속 들려오더니, 행각 한가운데를 뻗어나간 어도의 끄트머리인, 선정문 어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왕이 탄 남여가 들어서며, 좌우로 두명의 운검들이 호위하고, 붉은 홍산을 든 두광이 화개華蓋(꽃 모양의 우산)를 든 묘생과 함께 뒤따랐다.


"아니 전하께서 벌써!"


아직 상참의를 거행하려면 1각 가까이 시간이 남았을텐데 왜 하필 벌써 왕림하셨는지. 마음이 급해진 신료들은 자신들이 방금 전까지 최석정에게 온갖 텃세를 부린 사실도 잊고 그 자리에서 허둥지둥 꿇어 엎드렸다.


자신도 모르게 오른발이 한발짝 어도를 밟았던 홍우원도 황급히 물러나서 부복했다. 누가 보고 고해바치진 않을까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눈치를 보다가, 마침 마당으로 밀려 나가 있던 최석정 역시 그 자리에서 다소곳이 꿇어엎드린 모습을 보았다.


아니...


당장 꼴도 보기 싫어 행각 바깥으로 내쫓았는데, 왕이 그꼴을 보게 생겼다. 홍우원은 고개를 틀어 최석정에게 얼른 행각의 대열에 합류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최석정은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인 채로 홍우원의 신호를 본체 만체 해버렸다.


"저..."


홍우원이 입을 실룩거리는 순간, 숙종은 남여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최석정이 홀로 선정전 마당에 나와있는 것을 보니 어찌 된 사정인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당장 선정전 마당을 에워싼 담장 너머로도 신록이 무성했다. 윤3월 초여드레에서, 이제는 5월 중순이 지나는 참이었다. 여태껏 최석정 한사람 찍어내겠다고 행각에 들러붙어 도끼질을 하는 꼬락서니라니.


"최교리 혼자 상참의를 할 준비가 끝났나?"


숙종이 행각 아래를 노려보며 건넨 말에 목내선과 홍우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꼭 이럴 때 최석정 혼자 왕의 환심을 산다. 그래서 더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런데 정작 최석정 자신은 명리에 초탈한 척 담담한 척 답하는 것이었다.


"잠시 햇볕을 쬐느라..."

"최교리는 햇볕이 그리 좋은가?"

"망극하옵니다."

"해는 곧 나요. 햇볕은 나의 은혜니 마음껏 쬐시오."


최석정이 고개를 들지 않고 답하자, 숙종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따스하게 답하였다. 하지만 행각 쪽을 돌아보는 그 눈초리는 서늘했다.


"허나 내 어도를 범하는 건 딱 싫소."


숙종은 가만히 남여에서 신료들을 내려다 보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열여덟살다운 치기라고 신료들은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겉으로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하였다.


"우상, 내 어도에 경의 고개가 닿았소."

"소, 송구하옵니다."

"이판은 아까 오른발이 내 어도를 밟았던가?"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

"내 분명 보았는데."

"천신이 경황이 없어서..."

"못 알아듣겠소? 곧 상참의를 거행할 것이니 모두 행각 밖으로 나가라, 이 말이오!"

"예 전하."


숙종의 일갈에 놀란 신료들은 허둥지둥 행각 바깥으로 엉금엉금 물러났다. 행각의 시원한 지붕 밑에 있다가 땡볕 아래 그대로 노출되니 신료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급히 고개를 푹 떨구었다. 대부분이 노안이라 햇볕을 그대로 받으면 눈이 부시다 못해 부서질 듯 아파온 탓이었다.


"흥, 무례하긴."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고 숙종은 남여에서 내려섰다. 두광이 얼른 홍산을 숙종에게 씌웠다. 아무리 기와지붕을 씌운 행각이라 해도, 햇볕은 여지없이 짓쳐들어와서 행각을 태반 이상 뜨겁고도 따갑게 비추었다.


숙종은 오른쪽 얼굴은 햇볕에, 왼쪽 얼굴은 그늘에 나뉜 얼굴로 성큼성큼 행각 어도를 걸어들어가서 옥좌에 착석했다.


상참의가 시작되어, 흑단령을 입은 동부승지와 우부승지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어탑 아래에서 왕에게 한번, 두번 절하여 재배再拜를 마치고서 왕이 앉은 옥좌 양쪽에 높인 향안香案 옆으로 가서 시위를 자처하고 섰다.


그리고 좌우측 신도에 있던 신료들이 나란히 들어와서 허적 이하 우측 신도에 있던 신료들은 동벽에, 김만기 이하 좌측 신도에 있던 신료들은 서벽에 붙어섰다. 최석정 같은 당하관들이 말석인 남벽에 서서, 그렇게 상참관들이 위터진입凵자 형태로 대열을 갖추자, 찬의가 목청을 돋우어 창하였다.


"국궁鞠躬!"

"..."

"재배再拜!"

"..."

"흥興!"

"..."

"평신平身!"


몸을 굽히고, 두번 절하고,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펴고, 네번의 창에 맞춰 상참관들이 예를 행하고서 다시 부복했다. 그리고 계사啓事를 올릴 관원들이 차례로 들어와 긴장된 음성으로 읽으려는 찰나, 왕이 먼저 입을 열어 그들의 입을 봉하였다.


"앞으로 상참을 매일 열어야 하나...어쩌다 가끔씩 열었더니, 경들이 색깔이 너무 뚜렷한 것 같소?"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앞으로는 상참의에 흑단령을 입으라, 이 말이오."

"하오나 상참의엔 평상복을 입게 되어 있사온데..."

"내 고사를 상고하니, 세종조에 정한 상참의 복제는 경들이 평소에 입는 홍, 청, 녹단령이 아니라 흑단령이던데?"

"하오나 근래에는 흑단령은 제례복으로만 쓰여서..."

"그러니 다시 국조 때로 기강을 돌려놔야지 않겠소? 앞으로는 상참의에 흑단령을 입으시오. 품계 구분 없이. 색깔 구분 없이."

"..."


허적과 홍우원을 비롯한 남인들의 얼굴이 일제히 구겨졌다.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존대를 하시나.


하지만 지금 존대가 문제가 아니었다. 색깔이 너무 뚜렷하니 흑단령으로 통일하라니.


아니, 그 전에 색깔이 너무 뚜렷하다는 말이 의미심장했다. 색色은 곧 당색黨色이었다. 당색이 너무 뚜렷하다는 말이 그 만큼 왕의 불만을 드러낸 것이었다. 아예 신료들이 각기 품계에 따라서 홍단령, 청단령, 녹단령을 입고 국정을 논하는 절차마저 왕이 흑단령으로 통일시키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이제 계사啓事를 읽으라."


숙종이 시들한 눈빛으로 편전 안을 둘러보았다. 요즘 들어 자신의 서안에 올라오는 상소도, 신료들이 읽는 계사도 새로울 것이 없었다. 하나같이 최석정을 잡아먹겠다고 올리는 글이었으니.


먼저 사헌부 장령이 들어와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허리숙여 인사를 올렸다.


"천신 사헌부 장령 이석관이 계사를 읽겠사옵니다. "

"사헌부 이석관...읽으라."


숙종이 곱씹듯이 말하고서 손짓하자, 사헌부 장령이 떨리는 손으로 계사를 펼쳐서 긴장된 음성으로 더듬더듬 읽었다.


"전하께선...예론을 그르친 송시열을 위리안치하고, 그를 신구하는 자들은...모두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셨습니다. 유생 박회장 역시 근래에 북방으로 귀양을 보내셨으며, 대, 대비전의 인척인 조가석 역시 철퇴를 내리시어 문외출송을 하시었습니다. 최석...정은 예론의 원흉 송시열을 현사로 지칭하고 신구한 바, 마땅히 유배, 감하여 문외출송...택일하셔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최석정에게만 죄를 다스리지 않고 인정을 두십니까? 죄인 최석정을 문외출송하시옵소서."

"비답은 한꺼번에 할 것이다. 다음 계사를 읽으라."


이석관으로선 이제야 침착을 되찾고 술술 읽어내려갈 만한데 계사는 거기서 끝나 있었다. 숙종이 치미는 분노를 누르려 이를 악물고 답하자, 이석관 옆으로 이번엔 사간원 헌납 이봉징이 들어왔다.


"신 사간원 헌납 이봉징이 읽겠나이다."

"사간원...읽으라."


사간원 헌납은 앞서 읽은 장령보다는 한결 담담하게 계사를 읽었다.


"영명하신 전하께선 그동안 한번 정하신 일은 굳건하게 형평성을 지키시어 황극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론을 오도한 송시열을 비호하는 관원은 한명도 예외를 두지 않으시고 유배, 차율로 문외출송으로 다스리셨습니다. 하온데 이제 와서 한낱 교리 최석정에 예외를 두시니, 제신들이 모두 애석해합니다. 전하께선 부디 황극의 법으로 최석정의 일을 엄히 다스리시옵소서."

"다음 읽으라."


이번에는 쉰 즈음의 홍문관 교리 민취도가 걸어들어왔다. 앞선 사헌부, 사간원의 관료들이 서 있는 옆으로 다가서고, 그는 당당하게 허리숙여 인사를 올렸다. 한때 여식이 당금의 중궁, 또 민정중의 손녀와 함께 삼간택에 올라, 선왕에게 미리 낙점되어, 그는 여차하면 왕의 장인이 될 뻔한 인물이었다. 실세인 민희의 아들에다 원래 당돌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라, 그는 왕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신 홍문관 교리 민취도가 존귀하신 전하를 뵈옵니다."

"홍문관...읽으라."


숙종은 미간을 찌푸리고 정면을 쏘아보았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삼사의 관원들이 계사라고 읽어대는 것이 하나같이 최석정을 성토하는 글이라니. 세번째로 자신 앞에 선 민취도가 읽을 계사의 내용이 충분히 짐작이 된 탓에, 숙종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하지만 홍문관 교리 민취도는 사뭇 당당하게 읽어내려갔다.


"송시열의 무리가 그동안 조가석의 선친 조계원과 최석정의 선조 최명길을 멸시하여 갖은 모욕을 가하였는데도, 조가석과 최명길은 자신들의 선부와 조부를 몰라보고 송시열을 두둔하였습니다. 헌데 전하께선 그 아비를 잊고 송시열을 옹호한 조가석은 문외출송으로 단죄하시고, 그 조부를 잊고 송시열을 비호한 최석정은 성총으로 면죄하시니, 형평성을 잃은 처사이옵니다. 하물며 조가석은 대왕대비전의 의친懿親(정의가 두터운 친척)인데, 조가석은 벌하시고 최석정은 봐주시니, 대왕대비전에 대한 예의도 잃은 처사이옵니다. 대왕대비전의 체모를 살려드리기 위해서라도 최석정 또한 조가석과 같이 문외출송을 하시옵소서."

"다음! 또 있는가? 이번엔 승정원인가?"


왕의 눈빛이 시들하니 지쳐갔다. 최석정을 비난하는 상소에 일일이 비답을 내리는 것도 힘들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이렇게 삼사가 사흘이 멀다하고 상소를 올리는 참이었다.


"저희는 아직..."


도승지가 머쓱하여 어정쩡히 답하는 것을 보고 숙종은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연명상소를 올릴 것이지."

"연명상소도 준비되어 있사옵니다."


윤휴가 차갑게 답하였다. 숙종은 윤휴를 노려보며 입가로 한숨을 흘렸다. 이대로는 자신이 아무리 최석정을 지켜주려 해도 지켜줄 수가 없었다. 마치 벼랑 아래로 떨어지려는 최석정을 붙잡은 한손에서 점점 힘이 풀리는, 그런 느낌일까.


"허면 이것으로 끝인가? 계서를 모두 가져오라."

"예 전하."


왕의 영에 도승지가 문앞으로 다가들어 삼사의 관료들에게서 계서를 받아와서 바쳤다. 숙종은 날선 눈빛으로 문간을 쏘아보며 서늘한 옥음을 내뱉았다.


"비답을 내리지. 셋다 불윤不允..."


그때 운문雲紋(구름문양)이 있는 흑단령 차림에 해괴하게도 방갓을 쓴 웬 사내가 문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에 흑단령 타령을 한 터라, 숙종은 하던 말을 멈추고 문쪽을 주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너무도 공교로웠다. 누굴까. 흑단령의 운문을 보니 당상관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모 대신 굳이 방갓으로 얼굴을 가린 것을 보니, 신비한 느낌도 들었지만 어쩐지 해괴한 느낌도 들었다.


"..."


편전에 엎드린 다른 관료들도 서로 조금씩 속닥거리면서 문간을 돌아보는 참이었다. 숙종이 먼저 물어보기도 전에 방갓을 쓴 관료가 머리에서 방갓을 풀어내렸다. 순간 숙종에겐 너무도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숙종의 두눈에 충격과 의혹이 어린 순간이었다. 엎드린 채로 눈알만 굴리던 신료들도 어느덧 고개를 문간으로 돌리고 소리쳤다.


"이민철?"

"뭐하는 짓인가?"


이민철은 눈시울이 젖은 채로 자꾸만 얼얼하게 목울대를 부풀려오는 울음을 애써 삼키면서, 품에서 웬 단자봉투를 꺼내어 어탑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슨...일이오?"


숙종의 음성도 눈빛도 뾰족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이민철의 핏기 없는 얼굴을 탐색하다 말고 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민철이 두손에 모아쥔 단자봉투가 아무래도 불길했다. 사실 저런 단자를 숙종은 한해에만 골백번이 넘게 보았다. 영의정 허적만 해도, 한달 걸러 열두번은 더 내어놓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방갓이라니. 저런 방갓은 최석정이 상중에 부득이하게 궐에 들를 때나 쓰고 왔던 물건이었다.


작가의말

1. 水車를 수차라고 읽어야하지만, 수레가 ‘거’로 읽었던 용례가 많다 보니 ‘수거’로 표기했습니다.

 

2. 이민철과 송이영이 인척관계가 아닐까 생각해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자료가 희박해서 일단 남남으로 설정해서 써왔습니다. 아직도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이민철의 아내가 여산송씨라는 정도의 기록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송이영은 본관조차도 기록이 남지 않았네요. 이민철에 관한 기록은 그나마 “최석정기崔錫鼎記”에 전해지는 것이라 합니다.

 

3. 제 소설에선 인경왕후 생전에 최석정, 이민철, 김지남이 인연을 맺은 걸로 되어 있지만, 사실 시기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저 최석정이 관상감 교수 및 제조도, 사역원 제조도 하면서 저들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켰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최석정기에 적힌 이민철에 관한 기록들은 제가 백강이씨 후손이 아닌지라...자세히 열람하지 못해서 애석할 따름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원래 인연이 있었을 거라 직감하고 써나가는 참에 ‘최석정기’와 이기지의 일암일기 정도에만 이민철에 대한 기록들이 전해진다는 사실만 근래에 접했을 뿐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0.20 10:38
    No. 1

    사극보면 없는것도 지어내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나요 =)
    작가님의 설정은 어떨때는 너무 정교하고 날카로워서 사실보다 더 사실같습니다.
    허견은 -_-;; 할 말을 잊게 만드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23 02:50
    No. 2

    시놉 설정상 천지인 때보다 복선 회수를 늦게 하다 보니...덜 정교해지는 게 아쉬운데요. 허견은 실록에 기록된 사건들도 꽤 되어서 머릿속으로 그려진 모습도 개차반 그 자체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0.20 11:06
    No. 3

    꺽정이가 고생많은 건지
    숙종이 애쓰는 건지...
    암튼 틀안에 같혀있는 신료들도 애많이 쓰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23 02:52
    No. 4

    실제로 열여섯번 상소, 석달 가까운 시간을 끌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숙종시대는 별난 일이 많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10.31 12:15
    No. 5

    한 사람 가지고라니. 이렇게 정국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 왜 잘 알려지지 않았나 신기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06 16:31
    No. 6

    지수귀문도도 알려져 있고, 경세훈민정음도설도 핸드폰자판 천지인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하고, 일제시대 헌병대가 강화도 전등사까지 일부러 찾아와서 최석정의 그 책을 탈취해갈 정도로 일본학자들은 좀 아는 듯 하고. 그런데 동시대 장희빈에 묻혀버렸네요.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해의 그림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4 해의 그림자 163 +5 14.02.03 2,361 33 38쪽
163 해의 그림자 162 +5 14.01.30 2,157 34 37쪽
162 해의 그림자 161 +4 14.01.26 2,161 26 40쪽
161 해의 그림자 160 +6 14.01.22 2,411 35 38쪽
160 해의 그림자 159 +5 14.01.18 2,205 31 40쪽
159 해의 그림자 158 +7 14.01.14 2,524 33 39쪽
158 해의 그림자 157 +4 14.01.10 2,097 33 38쪽
157 해의 그림자 156 +4 14.01.06 2,460 30 37쪽
156 해의 그림자 155 +7 14.01.02 3,414 32 38쪽
155 해의 그림자 154 +6 13.12.29 2,489 40 38쪽
154 해의 그림자 153 +4 13.12.25 3,128 35 39쪽
153 해의 그림자 152 +4 13.12.22 2,491 43 35쪽
152 해의 그림자 151 +6 13.12.17 3,966 102 37쪽
151 해의 그림자 150 +5 13.12.13 2,122 36 38쪽
150 해의 그림자 149 +6 13.12.09 1,971 30 38쪽
149 해의 그림자 148 +6 13.12.04 2,107 34 36쪽
148 해의 그림자 147 +8 13.11.29 1,968 35 37쪽
147 해의 그림자 146 +10 13.11.25 2,623 30 37쪽
146 해의 그림자 145 +11 13.11.21 2,295 30 33쪽
145 해의 그림자 144 +5 13.11.16 2,287 33 34쪽
144 해의 그림자 143 +5 13.11.12 2,680 32 31쪽
143 해의 그림자 142 +8 13.11.07 3,089 32 24쪽
142 해의 그림자 141 +6 13.11.05 1,872 37 39쪽
141 해의 그림자 140 +6 13.10.30 2,350 61 38쪽
140 해의 그림자 139 +6 13.10.26 1,973 41 33쪽
139 해의 그림자 138 +6 13.10.23 3,544 33 34쪽
» 해의 그림자 137 +6 13.10.20 3,222 41 34쪽
137 해의 그림자 136 +8 13.10.18 2,101 37 36쪽
136 해의 그림자 135 +8 13.10.13 3,191 36 36쪽
135 해의 그림자 134 +10 13.10.10 2,332 34 3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