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조회수 :
789,146
추천수 :
11,578
글자수 :
5,820,877

작성
13.12.25 02:56
조회
3,128
추천
35
글자
39쪽

해의 그림자 153

DUMMY

"알아보았느냐? 대비전 서모께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진홍은 봉이와 상아를 시켜 내막을 캐어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사나흘이 걸리고도 봉이와 상아는 보고를 미루기만 하였다. 지금도 중궁이 우희에게 그림을 가르치다가 문득 생각나서 불러들였더니, 둘다 입도 벙긋 못한 채로 중궁의 서안 앞에 부복한 채로 서로 눈치를 보며 쭈볏거릴 뿐이었다.


"송구하오나 다들 모른다고만 하여..."

"예에...아무도 말해주질 않았사옵니다."


이미 동온돌에서 금언령禁言令이 내렸다. 조보에 나오는 흉한 얘기는 중궁에게 전하지 말라는 지엄한 분부와 함께, 어기면 출궁을 시키겠다는 살벌한 겁박까지.


하지만, 대비전 근처로만 가도 거기 나인들이 알아서 술술 불어줄 일을, 굳이 아무도 말해주질 않는다는 말은 무지 어설픈 핑계였다.


"허면, 말해 주겠느냐?"

"네?"


봉이는 두눈을 깜빡였다. 뭘 말해 달라는 건지, 머릿속이 아득했다.


"전하께서 왜 대비전 서모께 생긴 일을 감추는지, 왜 조보에 나온 일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엄히 단속하시는지 말이다."

"..."


봉이는 두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라선 진홍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옆에서 상아가 봉이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말했다간 우린 전하께 죽어! 죽는다구!


그런 상아의 눈짓에 부딪혀, 봉이는 죽을상이 되어 진홍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상아보다는 봉이 자신이 더 입을 쉽게 입을 열 거라 믿으시고 이렇게 채근하시나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미 왕이 자신들에게 으름장을 놓은 터였다. 중궁은 손톱 밑에 가시를 찔러도, 왕은 턱 밑에 비수를 들이댈 성품이니만큼.


"소녀들도 그건..."

"그래...?"


진홍은 더는 추궁하지 않고, 비스듬히 앞에 앉은 우희를 쳐다보았다. 우희는 그리라는 꽃과 나무는 그리지 않고 엄한 언덕 두개와 호수 같은 계곡만 그려놓은 참이었다.


"우희야, 꽃과 나무를 그리랬더니 산과 물을 그렸구나."

"용흥사 스님들 생각이 나서..."

"스님들?"

"예에...혼내실 것이옵니까?"

"혼내고 싶어도 목이 말라서..."

"하오시면 물을 가져오겠사옵니다."


우희가 얼른 서온돌을 나가자, 진홍은 붓을 들어 서안 위의 종이에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상아와 봉이는 중궁이 너무도 조용하여, 의아히 눈길을 들어 서안 위를 올려다 보았다.


도대체 무슨 그림인 건지. 선인 듯, 혹은 점인 듯, 짧은 선이 점철되더니, 두개의 산봉우리가 솟아나고, 큰물이 흘렀다. 멀리, 흐릿한 농도로 다른 봉우리들도 희미하게 형체를 갖추었다. 봉우리에 맞닿은 호수 표면에는 물비늘이 조금씩 늘어갔다. 그리고 한시진, 두시진...시간도 자꾸만 흘러갔다.


"중전마마, 저희는 이만 나가봐도 되옵니까?"

"우희가 돌아오면 그때 나가거라."

"예에..."

"..."

"..."

"얘는 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야?"


상아의 푸념에 진홍은 빙그레 웃었다. 우희는 언제부턴지 물을 한번 길으러 가면 한시진이고, 두시진이고 함흥차사였다. 아마 자신이 소산을 한 뒤였던가. 어디서 물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상아와 봉이는 무릎이 욱신거리고 허리는 뻐근한데다, 발까지 저릿했다. 하지만 상전은 편히 일어나 앉으라는 말도, 나가라는 말도 하질 않았다. 정말 우희가 올 때까지 앉혀두시려고?


이럴 상전이 아니었다. 평소에 아랫것들에게도 살뜰하고 사려깊던 상전이었다. 헌데도 여태 이렇게 힘들게 앉혀두시다니.


벌을 주신 건가.


상아는 부복한 채로 가만히 눈을 홉뜨고 중궁의 손끝을 쳐다보았다.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여 자신들을 잊은 건지, 아니면 자신들을 일부러 괴롭히시는 건지 가늠하고 싶었다. 봉이 역시 입술을 빨며 눈치를 보는 참이었다. 뒤로 접은 발을 꼼지락거리면서 손으로 무릎을 슬쩍 어루만지는데도, 상전은 붓끝만 쉬지 않고 놀릴 뿐이었다.


뭐라 기분을 풀어드려야 하나. 그저 스치듯, 혹은 포개듯 짧은 선과 점들을 그었을 뿐인데, 바위의 기백이 봉이의 두눈에 들어왔다.


"와아...중전마마 솜씨가 부쩍 느셨사옵니다. 내다 팔아도 되겠사옵니다."


봉이가 살살 비위를 맞추려고 건넨 말에, 진홍은 그제야 붓질을 멈추고, 붓을 벼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장난기도 없는 눈웃음으로 봉이를 쳐다보았다.


"허면 팔아오겠느냐?"

"네?"


뜻밖의 말에, 봉이와 상아는 두눈을 깜빡였다. 실없는 아첨에 중궁이 진지하게 나오시다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팔아오너라."

"하오나 중전마마..."

"귀한 그림은 은 두냥이 넘지만, 천한 그림은 술 한동 혹은 쌀 한섬 값이라던가...어디, 내 그림 값어치 좀 시험해 봐야겠구나..."

"..."


봉이와 상아는 할 말을 잃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아무리 중궁이 그림 실력이 뛰어난들, 갖다 팔 생각을 하시다니.


에이 설마. 그냥 해본 소리시겠지. 그들은 이내 자신들의 고막에 닿은 말을 부인하고 싶어졌다. 평소 중궁이 실언失言이나 희언戱言(웃자고 해본 소리)을 일삼지 않는 성품이란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때때로 자기답지 않은 일도 하기 마련이라고, 그저 농지거리일 뿐이라고, 그렇게 치부하고 싶었다.


"설마...진담은...아니시겠지요?"

"왜, 나도 내 그림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어서 그런다."

"예? 그런 거면 그냥 나인들을 불러모아 물어보심이..."

"그래서야 정확한 평가를 듣겠느냐?"

"하오나..."

"나가서 그림을 팔아보면 얼마를 쳐주는지, 그걸 보고 내 솜씨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법. 가서 팔아오래도."

"하오나 중전마마..."


상아와 봉이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상전은 지금 진심이다. 정말로 자신들에게 저자거리로 나가서 그림을 팔아오라는 것이다.


궐안에서 사내들과는 낯을 맞대지도, 말을 섞지도 않고 곱게 심부름만 하던 그녀들이, 저자거리에서 물건을 팔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무도 눈앞이 막막한 하교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인데, 상전은 한술을 더 떴다.


"그래, 이왕이면 같이 나가서 팔자꾸나."

"마마...홀몸도 아니신데 어찌...참아주시옵소서..."


진홍은 봉이의 애원을 들은 체 만 체 했다. 그저 손가락 끝에 살짝 묻은 먹물을 보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문지르더니, 경대를 펼쳐서 얼굴에 먹물이 묻진 않았는지 비춰보고, 당의를 벗더니, 또 빗접을 펼쳐서 떨잠과 비녀, 어염족두리를 빼고 머리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예 여염 부녀자처럼 잠행할 기세였다.


"마마, 정말로..."


부인하고 싶은 마음에, 봉이는 연거푸 '정말로, 정말로'를 뇌까렸다. 그런 봉이를 진홍은 못본 척 외면하고 옷고름을 매만졌다.


"마마, 여인이 산수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본래 세상이 용납 못하는 것이온데...갖고 나가서 팔아오라니요...마마께오서 그리신 게 알려지면 저흰 모두 대비마마께 죽은 목숨이옵니다."


여태 침묵을 지키던 상아가 차분하게 입을 열어 반박했다. 단순히 봉이는 갖고 나가서 팔 일을 걱정하였지만, 상아는 그 후환까지 걱정하는 참이었다. 봉이는 감탄의 눈빛으로 상아를 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에, 전하께도 요절이 나옵니다."


진홍은 그런 봉이와 상아를 냉담하게 쏘아보았다. 얼음 송곳 같은 진홍의 시선이 그들의 두눈을 찔러들었다.


"허면 나 혼자 밖에 다녀와야겠구나. 이왕이면 요사이 조보도 좀 얻어오고."

"..."

"조보...요?"


그제야 봉이와 상아는 여태 진홍이 자신들에게 벌을 준 이유를 알아차렸다. 왕의 협박이 두려워서, 혹은 대비전의 처벌이 두려워서 당장 자신을 기망欺罔한 자신들이 얼마나 괘씸할 지 깨닫게 한 것이었다.


"잘못했사옵니다. 중전마마..."

"..."


봉이는 얼른 고개를 납작 엎드려 빌었지만, 상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망설였다. 그런 상아를 쳐다보며, 진홍은 냉담하게 다그쳤다.


"조보의 내용은 아느냐?"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조보의 일은 마마께 전하지 말라고 하시어..."

"아느냐 물었다..."

"모르...옵니다."

"봉이 너는?"

"저도..."

"알지도 못해?"


진홍은 쭈볏거리는 상아와 봉이를 보고, 더욱 그 눈에 서릿발이 내렸다.


"이 구중심처에서 너희들은 내 눈과 귀다. 내가 알아보라 하였으면, 우선 알아보고 나중에 전하던가, 적당히 가감하여 전하던가, 가감 없이 고스란히 전하던가...셋중 하나는 했어야 했다. 헌데 알아보지도 않고 전하의 분부만 생각하여 알아보지도 않은 게냐?"

"하오나 전하께서 마마께 전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마마를 위해 그러시는 것이온데..."

"그러니 나는 몰라도 너희는 알아두란 것이다. 알겠느냐?"


진홍의 따끔한 질책에 상아도 그제야 고개가 수그러졌다. 자신들이 직무를 유기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중궁도 왕을 믿는다. 왕이 자신을 위해 전하지 말라 하였으면, 중궁도 굳이 알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랫사람들까지 모르는 것은 원치 않았다. 충직한 수하라면, 그녀를 위해 자질구레한 일이라도 손발이 되고 눈귀가 되어 알아두어야만 했다.


"잘못했사옵니다. 당장 알아오겠사옵니다."

"예, 당장 알아보겠사옵니다."


상아와 봉이의 사죄에 그제야 진홍의 굳은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진홍은 슬그머니 서안 아래로 손을 내려 자신의 배에 가만히 손을 얹고서는 봉이와 상아에게 서안 위의 그림을 던져주었다.


"이제 이 산수화는 직접 불에 태우거라."

"예 마마..."


봉이가 얼른 받아들어 품에 넣었다. 그림이 아깝긴 했지만, 상아의 말을 듣고 보니 이런 그림이 중궁전 밖으로 유출되었다간 큰일이었다. 봉이는 부리나케 뒷걸음질로 서온돌을 나와서 우물가로 달려갔다. 마음이 급해선지 깜빡하고 초롱도 안 챙긴 것을, 상아가 조족등을 챙기고 따라왔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봉이가 덜렁대고 덤벙대면, 상아가 야무지게 챙겨주었다.


그렇게 둘이 우물가로 달려가 보니 우희가 눈처럼 흰 달항아리를 끌어안고서는 눈자위와 코끝까지 벌개져서 달항아리 속을 노려보는 참이었다. 흰 달항아리에 은은한 옥빛의 물이 찰랑여서,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지도 않는 우희의 얼굴이 비쳤다.


"너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애심이가...저더러 무수리래요...중전마마 물 떠다 드리는 무수리라고."

"..."


또래 생각시가 자기한테 무수리라 불렀다고 저리 서럽게 울다니. 또 저리 벌겋게 약이 올라 있다니. 봉이와 상아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열살이 된 아이라선지, 무수리란 말을 듣고 펑펑 울 줄도 알았다.


"기집애 하여튼...근데 너, 단지는 왜 끌어안고 그래?"

"물이 너무 차서...따뜻해지라고요."


우희가 오들오들 떨며 하는 말에 상아가 혀를 찼다.


"이 기집애 똑똑이인 줄 알았더니 헛똑똑이네. 어차피 생숙탕이나 백비탕이 있는데 뭐하러..."

"생숙탕이랑 백비탕이 저번처럼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부뚜막에 놔두면 되지 뭐하러..."

"낮엔 불을 안 때우잖아요."

"졌다...졌어..."


상아는 치를 떨며 몸서리를 쳤다. 겨우 열살하고 말씨름을 해봤자, 본전도 못 건질 일이었다. 요 잔망한 계집애가 일부러 미련떠는 시늉을 한 것이든, 정말로 미련을 떨든, 참견할 일도 아니었다. 애한테 정신 팔려 할 일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품속의 산수화를 불에 태워야만 했다.


상아는 우물가 주변에 널브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그러쥐고 조족등 입구 속에 넣어 불을 붙이고서 봉이에게 말없이 내밀었다. 당장 무슨 뜻인지 신호를 알아보지 못한 봉이가 멍하니 두눈을 크게 떴다.


"어?"

"빨리..."


상아는 봉이를 노려보며 턱짓으로 신호했다. 봉이는 미간을 확 찌푸리다가 비로소 알아차리고, 품속을 더듬어 네번 접어 먹물이 번진 산수화를 꺼내었다. 그리고 불붙은 나뭇가지에 냉큼 태워버렸다. 검은 연기에 휩싸여서 이내 재가 되어 흩날리는 순간, 맵고 독한 연기가 봉이의 목을 콱 졸랐다. 봉이가 입을 틀어막고 잔기침을 하는데, 우희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뭐하는 거예요?"

"보면 몰라?"

"네."

"모르면 됐어."

"누가 그린 건데요?"

"내가."

"에? 항아님이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셨다구요?"


그 와중에도 눈이 어찌나 재빠른지, 그림을 이내 알아본 우희였다. 자신이 아는 봉이 항아님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릴 리가 없었다. 아예 한시진 이상 진득하게 앉아서 뭔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상 바쁜 상아 항아님일 리도 없었다. 얼굴이면 몰라도 종이에 상아 항아님이 뭔가를 그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딱 하나였다.


"에이, 중전마마시겠..."

"조용히 해..."


봉이가 화들짝 놀라서 우희의 입을 막았다. 요 입이 방정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뭘 알고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 뭘 몰라서 사고를 치는 터라, 사사건건 신신당부를 해야만 했다.


"읍, 읍읍!"

"조용, 조용하래도! 들키면 중전마마께오서 곤란해져."

"에?"


우희는 두눈을 멀뚱거렸다. 찰나간 한눈에 들어온 풍경은 자신이 아까 그리다 만 용흥사 앞 계곡이었다. 자신이 조악한 솜씨로 망쳐놓은 풍경을, 누군가 빼어난 솜씨로 되살려 놓은 것만 같았다. 아무리 봐도 용흥사 같았다. 이건 중전마마께오서 그리신 게 분명한데...우희가 두눈을 크게 뜨고 상아와 봉이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알았지? 우리 넷만 알아야 해."


우리 넷...그 말에 우희는 손가락 네개를 펴보고선 눈앞의 상아와 봉이, 그리고 자신을 계산해서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가 남았다. 중궁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막혀 물을 수가 없었다. 남은 손가락을 꼬물거리자, 상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어."


하지만 우희는 중궁이 시킨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헌데 왜 태워야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들키면 왜 중전마마께오서 난처해지시는 지도. 그저 멋진 그림이었는데 아쉬웠다. 상아가 입을 막은 손을 풀어주자, 우희는 자신도 모르게 시꺼먼 잿더미로 손을 뻗었다.


"앗 뜨..."

"얘가 미쳤어?"


봉이가 다급히 우희의 팔을 끌어당겼지만, 우희는 이미 가운데 손가락 끝이 시뻘겋게 데인 뒤였다. 우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손가락을 잡고 호호 입김을 불었다.


"아흐..."

"그러게 왜 손을 거기다 대? 앗뜨거 조심하라고 내가 몇번을 얘기했어?"


상아도 속상한 마음에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우희는 이미 눈시울이 젖은 채로 시무룩해져 있어서 한마디만 더 했다간 기가 죽을 것 같았다.


"우리 절인데, 절인데..."

"절?"


봉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평소 우희가 절 얘기를 종종 해서 상전이 얘기만 듣고 그려준 건지. 생각해 보니 우희가 대충 산봉우리 두개, 넓다란 호수 같은 풍경을 장지에 그린 것이 기억이 났다.


"상아야, 상상으로 그린 것도 죄가 될까?"

"에휴...여인이 산수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안될 말이래도."

"에흐.."


두 사람은 속이 답답하여 우희를 보았다. 그나마 열살이 되어서, 우희는 조금 더 철이 들었다. 어느 정도 말귀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열살이란 세상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스물에 즈음한 자신들도 이해하질 못하는데, 고작 열살인 우희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자."


상아는 힐끔 우희 품속의 달항아리를 쳐다보더니 두팔을 뻗어 대신 달항아리를 안아들었다. 두눈이 동그래진 우희를 보며 상아는 턱짓으로 동그란 조족등을 가리켰다.


"저거나 들고 따라 와."

"예? 그건 제가 들어야 하는 것이온데..."

"누가 멋대로 이 달항아리를 들고 나오래? 이건 갑번甲燔이라 깨뜨리면 큰일나거든?"

"갑번이요?"

"번천리樊川里에서 만든 백자, 그 백자 중에서도 으뜸을 갑번이라 하는 거야."

"아...십성十成 같은 거로구나. 갑번..."


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우희를 보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따스한 눈빛으로 보았다. 상아가 앞장서서 걸어나가자, 봉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피식 웃고 조족등을 집어들었다.


"내가 들게."

"그럼 저는요? 빈손이잖아요..."

"데였잖아."


봉이는 우희의 얼굴을 맨손으로 툭 쓰다듬고 얼른 돌아서서 상아를 뒤따랐다. 우희의 얼굴에 꺼먼 검댕을 묻히고서, 짓궂은 웃음으로 키득이면서. 우희는 영문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빈손으로 따라왔다. 그런데 셋이 돌다리 옆을 지나다 보니 월대 앞에 서 있는 대비전의 궁인들 십여명이 눈에 들어왔다.


"어?"

"대, 대비마마..."


흠칫 놀란 그들이 걸음을 서둘렀다. 대여섯발짝을 더 걸었더니, 이제 막 치맛자락을 잡고 섬돌을 오르는 대비 김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비 김씨는 섬돌을 오르다 말고 고개를 돌려 셋을 흘끗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너희 셋이 몰려다니는 게냐?"

"예?"

"너희 셋이 우물가에서 떼를 지어 나오기에 하는 말이다."

"물을 떠오느라고..."

"이리 좀 오너라."


갑자기 대비 김씨가 손짓하자, 상아와 봉이, 우희는 긴장하여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그들을 보고 대비 김씨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더욱 지켜보았다. 달항아리를 보니 셋이 함께 다녀올 만도 하지만, 그래도 의심이 동하여 일단 확인부터 하려는 것이었다.


"예에..."


셋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대비 김씨의 분부에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어차피 그림은 태우고 없는 터라 대비 김씨가 몸수색을 하든 뭘 하든 들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셋이 대비 김씨의 눈앞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자, 대비 김씨는 우희의 볼에 묻은 검댕을 볼 수 있었다. 봉이가 장난으로 묻힌 검댕이었지만, 그 검댕을 본 순간 대비 김씨의 눈초리가 은근히 날카로워졌다. 대비 김씨는 봉이의 소맷부리에 묻은 검댕을 보고 가만히 코끝을 실룩였다. 뭔가를 태운 냄새가 났다. 그것도 독한 아교 냄새가.


"아교냄새. 뭔가 글을 태웠구나."

"..."

"그림이냐?"

"..."


봉이와 상아는 흠칫 놀라서 우희를 쳐다보고, 이내 얼굴에 묻은 검댕이 화근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더는 누설해선 안되었다. 그들은 최대한 공손한 척 눈길을 낮추고 대비 김씨의 눈길을 자연스레 회피했다.


대비 김씨는 자신의 유도신문에 쉬이 넘어오지 않는 셋을 게슴츠레 노려보았다. 저 어린 것까지 딴청을 하며 눈을 내리깔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눈길을 피하는 것을 보니, 뭔가 감추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뭘 태운 것이냐? 그림을 태운 것이 맞느냐?"

"..."

"물론 먹에도 아교가 들어가긴 한다지만, 유독 냄새가 독하니...이건 안료가 들어간 그림을 태운 냄새일 터."

"..."

"혹 춘화라도 그린 게냐?"


우희는 춘화가 뭔지 몰랐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어리둥절히 호기심을 드러냈다.


"춘화요?"

"춘화도 아니면 산수화인 게로구나?"


대비 김씨가 자꾸 재우쳐 묻더니 마침내 정곡을 찌르자, 우희의 손끝이 굳어졌다. 감침질을 익히면서 검지와 중지 끝을 바늘에 콕콕 찔린 자리가 새삼스레 아파왔다. 우희가 두 손가락을 비비는 것을 대비 김씨의 예리한 눈썰미는 놓치지 않았다.


"맞구나? 여인의 몸으로 산수화를 그리면 부덕을 의심받거늘, 누가 그린 것이냐? 중궁이 그린 것이더냐?"


대비 김씨가 우희를 다그쳐 물었다. 우희는 두눈이 동그래질 정도로 겁을 지어먹고 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소녀가 살던 용흥사 풍경을 그린 것이옵니다."

"뭐라? 네가?"

"예. 소녀가 그렸사옵니다."

"흥, 네가 그려놓고 네가 태웠다? 요망한 아해구나. 감히 누굴..."


대비 김씨가 계속해서 우희를 문책하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비 김씨가 돌아보니, 협문을 지키는 그 시건방진 금군 놈이, 웬 노부인을 데리고 걸어오는 참이었다. 대비 김씨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노부인을 쳐다보았다. 환갑은 넘겼고, 칠순은 아직인...얼굴에서 윤택한 광채가 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비마마..."


해평 윤씨가 다소곳이 두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대비 김씨는 통명전을 찾은 이 노부인의 정체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대비 김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왕대부인이시군요."

"예 대비마마...사가에서 너무 출입이 잦아도 중전께 누가 될까 싶어 자중하였사온데...서신을 주신 덕분이옵니다."


해평 윤씨는 대비 김씨가 소공주동으로 보낸 서찰을 언급했다. 수태한 중궁을 위해서라도 자주 찾아오란 신신당부였다. 서원부부인 청주 한씨가 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해평 윤씨가 왔다. 대비김씨의 눈빛이 은근히 반짝였다.


"이럴 때일 수록 본방에서 중궁을 더 챙겨줘야지요. 이럴 때일 수록."

"..."


해평 윤씨는 대비 김씨의 지나친 관심도, 환심도 어쩐지 거북했다. 무슨 꿍꿍이일까. 그간 중궁이 회임을 할 때마다, 대비 김씨가 자신들에게 연통을 넣은 적은 없었다. 헌데 이번엔 거듭, 또 거듭 자신들을 초청했다. 중궁을 위해서라도 한번이라도 더 들여다 보라면서.


지금도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는 대비 김씨의 손길이 보드랍고 따스하면서도, 어쩐지 살갗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가시가 튀어나와 콕콕 찔러드는 것만 같았다.


"난 다음에 다시 올 테니, 회포나 부시지요."


대비 김씨는 해평 윤씨에게 제법 인자한 시어미의 면모를 보여주며 물러갔다. 대비 김씨를 따라온 수행 궁인들도 물러갔다. 해평 윤씨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용마루가 없다던 통명전 지붕을 올려다 보았다. 용마루도 없는 지붕을 왜 이리 찍어누르는 사람들이 많은 건지.


"중전마마, 왕대부인이 왔사옵니다."


수일내로 온다던 해평 윤씨가 정말로 왔다. 그것도 아침이 아니라,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에. 진홍은 눈앞에 앉은 조모를 얼떨떨히 쳐다보았다.


"정말로 또 오셨군요. 그것도 할마님께서 싫어하시는 저녁에."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니까요."


산수화를 그렸다고 대비에게 질책을 받게 생긴 진홍을 해평 윤씨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계 김장생은 유난히도 차茶를 좋아했고,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을 쓰며 중국 그림에도 없는 것을 스스로 찾아서 정묘하게 그릴 정도로 그림 솜씨까지 빼어났다. 그 사계의 핏줄을 오롯이 이어받은 듯하였다.


"그림을 좀 가져 왔습니다."


상아가 찻상을 준비하는 사이, 해평 윤씨가 소매에서 돌돌 말린 비단족자 두 필을 꺼내어 소반 옆에 내밀었다.


"그림이요?"


진홍은 의아한 눈길로 소반 옆에 눈길을 주었다. 진홍이 직접 팔을 뻗어 두루말이를 집어들려 하자, 봉이가 재빠르게 두루말이를 집어 진홍에게 건네었다.


"..."


진홍이 비단족자를 받아들어 펼쳐보니 두 필 모두 상단부, 혹은 하단부에 한문으로 발문이 적힌 채로 자그마한 포도나 화초, 곤충이 아니라 거대한 산과 물이 나타났다.


한필은 연한 담묵으로 먼산을 그려내고, 소나무숲에 세워진 누각에서 바둑 두는 스님들, 나무다리를 지나는 선인의 모습이 한가로운 정취로 담겨 있었고, 그 위쪽 여백에 비슷한 농도로 7언시가 적혀 있었다. 또 한필은 폭포가 힘차게 흐르는 산속의 풍경이었다.


안견의 필치를 닮은 붓끝으로 산과 언덕의 굴곡을 나타내고, 흑백의 대비가 뚜렷한 풍경이 손에 잡혔다. 자신이 풍경 밖으로 뛰쳐나오고 풍경이 자신의 눈속으로 들어오다니.


"누가 그린 것이겠습니까?"

"물과 바위에 점준법을 쓰고 산을 원근법으로 그린 것을 보아 안견이 아닐런지?"

"틀렸습니다."


해평 윤씨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구?"

"안견의 필치를 물려받은 이가 또 있지요."

"설마..."


진홍은 의혹 어린 눈빛으로 그림을 내려다보고, 확인하듯 해평 윤씨를 쳐다보았다. 해평 윤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홍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부인이...아니 신씨가 산수도를 그렸던가요?"

"진품이 아니라 가품인가...의심스러운 게지요?"

"..."


진홍은 긍정도 부정도 못한 채로, 족자의 발문들을 재빠르게 훑어내렸다. 두 족자에 적힌 글은 먹물의 농담도, 필체도 전혀 딴판이었다. 상단에 적힌 시는 그 농도가 조금 흐릿했고, 하단에 적힌 발문은 농도가 짙었다. 농도를 봐선, 상단에 흐린 글씨로 적힌 칠언율시는 그림과도 농도가 엇비슷해 보였다.


百折溪流千疊山。

巖廻木老路紆盤。

樹林霧靄空濛裏。

帆影煙雲滅沒間。


落日板橋仙子過。

圍棋松屋野僧閑。

芳心自與神爲契。

妙思奇蹤未易攀。


시냇물 굽이굽이 첩첩 산을 흘러가고,

언덕은 나무 두르고 옛길은 큰돌 굴리네.

숲에는 아지랑이 자욱하게 끼었는데

돛대는 먼 구름 틈에 아스라이 멀어지네.


해질 녘 선녀가 나무다리 지나가고

소나무 정자에는 야승들이 한가로이 바둑 두네.

여인의 마음은 신이 내려 맺었나니

오묘한 생각 빼어난 자취 따라잡기 어려워라.


진홍이 7언율시를 대번에 읽어내린 눈빛이 되자, 해평 윤씨는 묘한 눈빛으로 지켜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소세양의 시이지요."

"소세양이요?"

"양곡 소세양. 신씨와 동시대의 문인...아녀자의 그림에 외간사내가 무엄하게 시를 써놨다고, 후대의 송시열에게 욕을 들을 줄은 본인도 몰랐겠지만."

"그럼 여기 이 글은 또 누가..."


진홍은 하단에 그림보다 진한 글씨로 발문跋文(끝에 설명을 적어놓는 꼬릿말)이 덧붙여진 족자로 눈길을 옮겼다. 선대의 인물에게 송시열이 노발대발 해보았자, 죽은 사람에겐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 발문의 먹색이 진한 것이 후대, 특히나 근대의 것이라면...


"백헌 이경석..."


이경석도 발문으로 이렇게 적어놓았다. 배워서 될 수 없는 일이니, 하늘이 내린 솜씨라고. 율곡선생을 낳은 일도 하늘이 내린 것이고, 천지의 기운이 쌓여 어진 이를 벤 것도 그 이치이니, 조화가 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허면..."

"송시열, 그 쌈닭이 가만 있을 리가요."

"쌈...닭..."

"당장 소세양을 욕하는 장문의 서찰을 백헌공에게 보냈지요."

"서찰을요?"

"남녀가 유별한데 부인의 그림에 감히 외간사내가 시를 적어놓았다느니, 점잖은 부덕婦德을 꽃다운 여심이니, 빼어난 자취니 어울리지도 않는 묘사로 흠집을 냈다느니, 스님인지 확실치도 않은데 스님이라 적어놓았다느니, 내외가 엄격한데 여인의 몸으로 유람하며 산수화를 그렸을 리 없다느니...이래서 자신은 이 그림들이 불편하다느니...주저리주저리..."


다시 상아가 찻상을 들여왔다. 대화가 잠시 끊기는 동안 진홍은 신사임당의 산수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송시열의 말대로 이 그림이 사임당의 그림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사임당이란 당호는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지은 것인 만큼..."

"꼭 집구석에 갇혀 있어야 태임이 되는 건 아니지요. 헌데 송시열은 그걸 인정을 안해요. 아예 이 그림마저 사임당의 그림이 아니라고 부정을 해가면서."

"..."

"그러니 여인네들을 집밖으로 못 나가게 부덕이란 말로 꽁꽁 묶어서 꼭꼭 가둬두고...어느집 안주인이 죽어 묘갈문을 써줄 때마다 성스런 부덕이 어쩌고 덕행이 어쩌고 온갖 과장을 해대지...저것도 병이에요 병..."

"..."

"내가 낳은 아들, 손주들이 모조리 송시열의 제자가 되어 똑같은 짓거리를 하니...하아...이러니 조선이 갈수록 여자가 살기 힘든 나라가 되어가지요."


해평 윤씨는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신세한탄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이었다. 진홍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할미였다. 하지만 모순되는 점도 있었다.


"저에겐 암탉이 울면 형제들 앞길 막으니 너무 먹물 들이지 말라고 하셔놓고..."

"그걸 기억하십니까?"

"예...무척 섭섭했더랬습니다. 할머님 본인은 두 아들에게 직접 소학, 사략, 당시唐詩까지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나신 분이 정작 저는 가르치지 못하게 하시고..."


해평 윤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싱그러운 차향을 코끝에 음미하고, 한모금 마시어 입가를 적시고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야...그땐 송시열이 중전마마께 글을 가르치겠다고 나서니...근묵자흑이 될까 그랬지요."

"네? 저를요?"


진홍의 두눈이 동그래졌다. 자신이 송시열의 제자가 될 뻔 했다? 제자랄 것도 없지만 송시열 밑에서 글을 배울 뻔 하였다니. 지아비가 그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 지, 진홍은 머릿속으로 숙종의 갖가지 표정을 떠올렸다.


"어느 불출이가 딸 자랑 좀 한 모양입니다."


아들 만기의 점잖은 얼굴을 떠올리며 해평 윤씨는 빙그레 웃었다. 그 조용한 성품으로 호들갑을 떨진 않았겠지만, 구태여 가르치지 않아도 한문을 깨우치는 딸이 얼마나 예뻤을까 싶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터였다.


이미 태임 같은 왕후가 될 거라고 술사가 예언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다 총기가 남다르니, 일찌감치 길을 들여보겠다는 송시열의 속내가 괘씸했다.


물론 감히 들여다 볼 수도 없을 만큼 대단한 경지의 송시열을 두 아들 만기와 만중, 손자 진구, 진규까지 대를 이어 사사師事하는 것이 큰 광영이긴 하지만, 귀한 손녀마저 그 곁불을 쬐게 하고 싶진 않았다.


송시열이 시집 가는 큰딸을 위해 지었다는 '계녀서戒女書'는 이 땅의 딸들을 더 살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문구 뿐이었다. 여인들 눈앞에서 대문을 닫아놓고 온갖 덕목을 훈계하면서도, 지아비가 과거 준비를 하는 동안 집안 생계를 위해 돈을 꾸는 법, 버는 법 등을 주절주절 늘어놓았으니.


하지만 포부 좋게 붓을 들어 그녀 자신이 지은 '규범閨範'도 결국 벼룩의 뜀박질에 그쳤다. 자신 역시 폐쇄적인 틀 안에서 살아가는 미욱한 계집일 뿐이었다. 그저 사내가 계집을 보는 시각보다, 조금 더 계집이 계집을 이해하는 시각에서 쓴 것이 달랐을 뿐, 닫힌 대문 안에서 한숨 쉬면서도 똑같이 부덕婦德 타령을 하였으니.


"언젠가, 궁 생활이 힘들다고 사가로 울며 도망쳐 오셨다지요?"

"울진 않았습니다. 그냥 집 생각이 나서..."

"지금도 집 생각이 나십니까?"

"..."

"저희 때만 해도 딸이 친정집을 찾고, 친정부모를 부양하고, 애들이 클 때까지 친정에서 더부살이하는 일이 당연할 때였지만...지금은 아니지요. 특히 중전마마께서는 백번이고 천번이고...삼가셔야 하옵니다."

"..."

"전란 이후 세상이 점점 야박해져서 여인이 살기가 힘들어지니...이제는 딸 키우기 무섭다는 말도 나옵니다. 허견 그자 때문에 바깥나들이도 더 힘들어졌으니..."


해평 윤씨의 한숨에, 진홍은 흠칫 놀라서 쳐다보았다.


"허견이요?"

"아닙니다. 그놈이 하도 소문이 안 좋아서 말입니다. 여러 계집을 후리고 다닌다지요."


해평 윤씨는 에둘러서 말하였다. 사실 차옥의 사건은 남구만의 상소가 편전에 닿기도 전에 이미 광통교와 수표교 일대를 휩쓸어서 회현방 소공주동에도 흘러들었다.


조정보다도 소식이 한발 빠른 것이 여인네들 빨래터였다. 아낙네들이 홍두깨로 빨랫감을 두드릴 때마다, 또 멈출 때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달리고, 또 문 없는 소문이 나갔다.


그렇게 흉흉한 소문이 나돌자, 먼저 대비 김씨가 발빠르게 자신들을 물밑에서 움직였다. 홍예형이 죽은 뒤로는 성화와 독촉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언질을 줄 생각이었다.


해평 윤씨는 진홍의 짙은 속눈썹 틈새로 언뜻언뜻 비치는 검은 눈동자를 그윽한 눈길로 들여다 보았다.


"소인이 쓴 규범은 읽어보셨지요?"

"물론이옵니다."

"열달 내내 모태에 품은 아기는 곧 그 어미를 닮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곧 자손을 가르치는 일임을 명심하고, 혹여 모난 생각이 들거든 심신을 둥글게, 또 바르게 하셔야 종묘사직이 평안할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오시면, 이만 물러가도 되옵니까?"


해평 윤씨가 물러가고 나서, 진홍은 고요히 허공을 응시했다. 꿀 찌꺼기로 만든다던 납촉이 점차 닳아 없어지고, 불이 사르르 꺼졌다. 진홍은 어둠에 잠긴 채로 가만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허견 때문에 바깥 나들이도 더 힘들어졌다...? 혹여 모난 생각이 들거든 심신을 둥글게, 또 바르게 해야 종묘사직이 평안해진다?



조모 해평 윤씨도 자세한 언급은 회피했다. 그저 넌지시 언질을 주고 갔을 뿐이었다. 장지문 너머로 봉이와 상아가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벌써 주무셨나?"

"이렇게 일찍 주무실 리가 없는데..."

"하지만 불을 끄셨잖아."

"꺼진 게 아니구?"

"그럼 우리를 부르셔야지...너무 조용하시잖아..."

"서책이라도 보다가 잠드셨나..."

"우희야! 너 자리끼 갖다드렸니?"

"아니요? 아직요..."

"빨리 갖다놓아...벌써 잠드신 것 같아..."


하지만 진홍은 그저 입을 다문 채로 어둠 속을 바라볼 뿐이었다. 허견 때문이라...보통 여인들이 길에서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세상이 험하다느니, 다니기 무섭다드니 하는 말을 하곤 한다. 아마도 허견이 길에서 여인들을 욕보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진홍은 골똘히 조보의 내용을 궁리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조보의 내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시어미 대비 김씨의 입을 통해서 듣는 방법, 몸 사리는 봉이와 상아를 따로따로 불러서 경쟁을 시켜 조보의 내용을 알아오게 하는 방법, 또한 친정식구들을 통해 소식을 듣는 방법, 지아비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


장지문이 열리고 우희가 자리끼를 챙겨서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문갑 위에 자리끼를 놓으면서 돌아보니 금침 위에 중궁이 없었다.


어?


그 순간 우희의 손이 갑자기 따사롭고 보드라운 손에 붙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또 다른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우희야, 나다. 나야..."

"마..."

"그래그래, 나야."

"..."

"조보 좀 구해다오. 최근 한달 사이의 조보로."


우희는 중궁의 말랑하고 포근한 가슴이 정수리에 닿는 것을 느끼면서, 두눈을 멀뚱거렸다. 갑자기 조보는 왜 이리 은밀하게 찾으시는 걸까? 이상했다. 봉이 항아님과 상아 항아님을 놔두고 왜 나한테?



"너희 스물두명에게 묻노니..."


환한 정오의 봄볕이 문틈으로 스며드는 경연청에서 숙종은 신료들과 주강晝講에 전념하다 잠시 염증을 느꼈다. 손안의 서전書傳 구절이 왠지 눈앞에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내쉰 한숨 탓이었다.


咨汝二十有二人


"근래의 수령은 당상은 임기를 3년, 당하는 임기를 6년으로 정하여 봄가을로 출척黜陟하는데도 탐람이 그치지 않는 것은 전최殿最(포폄, 고과)가 엄격하지 못한 소치다."

"..."


허적은 어린 왕의 탄식에 가슴이 뜨끔했다. 구중궁궐에 갇힌 왕이 지방수령들의 부정부패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느낌이었다. 누구를 겨냥하고 하는 말인가. 이민철과 최석정이 있던 부여,그 부여현감을 기찰하던 충청감사, 그 윗선인 자신까지 흉중에 품고 하는 말인가?


하지만 이내 왕은 계속해서 눈길을 책속에 두었다. 허적도 왕이 언급한 탐람이니, 전최니 하는 말을 더는 염두하지 않고 서전을 탐독했다. 헌데 오음육률을 주석한 부분에서 또 왕은 뜬금없이 탄식했다.


"오늘의 음악은 너무 촉급하다. 어떻게 하면 음률을 잘 아는 자를 불러서 고칠 수 있겠는가?"

"..."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왕이 칠순 노인네나 할 법한 소리를 해댄다. 허적의 눈밑이 실룩였다. 하지만 오정위와 홍우원은 그저 감탄하여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전하께선 음률까지 아시옵니까? 안 그래도 윤휴도 오늘날의 음악이 촉급하다 말한 적이 있사옵니다."

"각도 감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음률을 잘 아는 자를 찾도록 하시옵소서."

"경들은 모르는가?"

"..."

"음악이고 천문이고 죄다 흐지부지...폐지되었구나."


숙종은 조용히 탄식했다. 김만중과 최석정이란 이름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제라도 둘다 불러서 곁에 두고 싶었다.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천문과 음악을 아쉬워하는 왕을 보고 내심 감탄하던 허적은 이내 왕의 속내를 읽고 미간을 슬며시 찌푸리며 오정위와 홍우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입을 닫아 왕에게 쓸모를 의심받느니 하나라도 주워섬기라는 신호였다.


"전하, 안명로란 자가 측후測候에 능하나이다."

"최만열이란 자도 천문을 잘 아옵니다."


오정위와 홍우원이 서둘러 사뢰자 김석주는 조용히 냉소했다. 안명로든 최만열이든 둘 다 허적의 이웃, 아니 밀객이었다. 중궁의 지난 회임 때도 복선군의 궁방과 허적의 집을 오가며 복중태아가 공주라 예언했던 자들...


누가 모를 줄 알고?


김석주는 저들이 자신의 눈과 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비웃었다. 자신이 어심만 틀어쥐면 언제고 쓸어버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언제나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어려워도, 죽이는 일은 쉬운 탓에.


주강이 끝나고 극도로 지친 몸을 남여에 싣는 왕의 모습을 김석주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아직은 칼자루를 쥘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칼은 그에게 없었다.


숙종은 통명전 평평한 지붕이 눈에 들어오자 빙그레 웃었다. 언제나 저 용마루 없는 지붕을 보면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노곤한 몸을 뜨끈한 동온돌에 녹이고, 중궁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 보드라운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발이 삐었느냐? 빨리 좀 가거라!"


그렇게 별감들을 독촉하여 한달음에 통명전에 당도한 숙종은 동온돌로 들어서자마자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서안 위에 쌓인 조보더미라니.


"두광아, 이 조보는 네가 갖다놓았느냐?"

"네?"


장지문 앞을 지키는 두광에게 물었더니 오히려 되묻는다. 숙종은 장지문 좌우에 시립한 상궁들과 나인들이 답하겠거니 생각하며 더욱 낭랑히 물었다.


"너도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


나인들이 쭈볏쭈볏 서온돌을 쳐다보며 두광에게 고갯짓을 했다. 두광은 의아히 서온돌을 보았다. 설마. 전하께서 서온돌엔 일절 조보를 들이지도, 조보에 나온 사건은 입도 벙긋 못하도록 단속하셨는데, 오히려 서온돌에서 동온돌로 조보를 갖다놓다니? 그럴 리가...


두광이 도무지 눈치를 채지 못하자, 나인 하나가 자신의 가슴어림을 손날로 툭툭 쳐서 가리켜 보였다.


요만한 애라고...중전마마께오서 이뻐 하시는...


하지만 두광으로선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뭐? 누구? 누군데?"

"..."


나인이 답답해 하며 재차 손짓발짓으로 신호했다. 이젠 제 가슴을 가리키는 건지 두들기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 말로 해. 말로!"


이젠 두광이 답답해서 제 가슴을 쿵쿵 쳤다. 도대체 왜 말을 못하고 제 가슴만 가리키고 두들기는 건지.


"나다."


갑자기 들려온 부드러운 옥음이 두광의 가슴을 스쳤다. 두광은 귀를 의심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까지 볼 것도 없이, 다홍빛 당의가 눈에 들어왔다. 은사로 수놓은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중전마마...?"


작가의말

1. 해평 윤씨가 실제로 규범이란 책을 쓰긴 하였는데,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 직접 읽어보진 못하였고, 기사나 논평에서 한두줄씩 언급된 걸 보고 상상으로 유추하여 다루었습니다.


2. 신사임당이 산수화를 그린 일 때문에 송시열이 좀 예민했었다 합니다. 소세양에 대해 분개하여 백헌 이경석에게 서찰을 보내어 하소연한 것도 실화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2.25 09:57
    No. 1

    오늘은 진홍이가 쥔공^^
    정말 여인네는 숨쉬기조차 힘든 시기였나봅니다
    고려때가 조선때보다 여인들의 활동이 자유로웠다던데...
    유교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유독 외골수로 빠진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쩝~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29 02:50
    No. 2

    진홍이가 반가우셨군요. 그나마 친정 제사도 챙기고, 또 서로 돌아가며 제사를 모신 집들도 많았는데 후기가 문제였죠. 송시열이 예를 바로 세웠다지만, 저는 계녀서 관한 글을 읽고 치를 떨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2.25 16:30
    No. 3

    유학 중에서도 유독 주자학,
    그걸 또 한번 더 틀어서 조선시대의 여인들과 민초들에게 적용시킨
    그 시대의 양반들...
    그 족쇄가 아직까지도 이 땅에서 버티고 있고
    그 잔재가 사람들의 머리속에 틀어박혀있는게 참 안타깝습니다.
    전통은 그대로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악습으로 틀어지는 것들은 폐기시키고, 좋은 것들은 발전시키는 것도 후대의 역할인데 말이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29 02:56
    No. 4

    그쵸. 전 주자학이 원망스러운데, 오히려 정조도 송시열을 송자로 떠받들었다 하니, 지배층에게 쓸모 있는 점도 있었으려나...고민하는 참입니다. 주자학의 잔재는 싫지만요.

    찬성: 1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해의 그림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4 해의 그림자 163 +5 14.02.03 2,361 33 38쪽
163 해의 그림자 162 +5 14.01.30 2,158 34 37쪽
162 해의 그림자 161 +4 14.01.26 2,162 26 40쪽
161 해의 그림자 160 +6 14.01.22 2,411 35 38쪽
160 해의 그림자 159 +5 14.01.18 2,205 31 40쪽
159 해의 그림자 158 +7 14.01.14 2,524 33 39쪽
158 해의 그림자 157 +4 14.01.10 2,097 33 38쪽
157 해의 그림자 156 +4 14.01.06 2,460 30 37쪽
156 해의 그림자 155 +7 14.01.02 3,414 32 38쪽
155 해의 그림자 154 +6 13.12.29 2,490 40 38쪽
» 해의 그림자 153 +4 13.12.25 3,129 35 39쪽
153 해의 그림자 152 +4 13.12.22 2,492 43 35쪽
152 해의 그림자 151 +6 13.12.17 3,967 102 37쪽
151 해의 그림자 150 +5 13.12.13 2,122 36 38쪽
150 해의 그림자 149 +6 13.12.09 1,971 30 38쪽
149 해의 그림자 148 +6 13.12.04 2,107 34 36쪽
148 해의 그림자 147 +8 13.11.29 1,968 35 37쪽
147 해의 그림자 146 +10 13.11.25 2,624 30 37쪽
146 해의 그림자 145 +11 13.11.21 2,295 30 33쪽
145 해의 그림자 144 +5 13.11.16 2,287 33 34쪽
144 해의 그림자 143 +5 13.11.12 2,680 32 31쪽
143 해의 그림자 142 +8 13.11.07 3,089 32 24쪽
142 해의 그림자 141 +6 13.11.05 1,872 37 39쪽
141 해의 그림자 140 +6 13.10.30 2,350 61 38쪽
140 해의 그림자 139 +6 13.10.26 1,974 41 33쪽
139 해의 그림자 138 +6 13.10.23 3,545 33 34쪽
138 해의 그림자 137 +6 13.10.20 3,222 41 34쪽
137 해의 그림자 136 +8 13.10.18 2,101 37 36쪽
136 해의 그림자 135 +8 13.10.13 3,191 36 36쪽
135 해의 그림자 134 +10 13.10.10 2,332 34 3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