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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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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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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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52

DUMMY

차옥은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옮겨졌다. 그녀는 당장 똑바로 앉아있을 기운도 없었지만, 죽을 작정으로 곡기를 끊었다. 간수들이 넣어주는 식사도, 친정식구들이 넣어주는 사식도, 모조리 한입도 대지 않은 채로 입을 꾹 닫았다. 이미 몇날며칠을 겁간을 당한 터라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어미가 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어깨를 치면서 흐느꼈다.


"먹어 이것아...먹어야 살지..."

"..."


차옥이 말없이 고개만 옆으로 틀었다. 살기 싫다는 뜻이었다. 박씨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쇠창살을 꽉 움켜쥐었다.


"이것아! 먹고 힘을 내야 허견 그놈을 찢어죽이지..."


어제도 식구들은 똑같은 말을 했었다. 세상이 끝나버린 차옥에겐 아무 힘도 없는 말을. 하지만 그 한마디 말에, 감방 맞은편 구석에 기대어 앉아있던 계집이 스르르 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보았다. 눈꺼풀도 제대로 못 들던 계집이 눈동자엔 뾰족한 빛이 번뜩였다. 허견이란 이름 두 글자에 너무도 예민하게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흥, 흑흥, 흑흥...


도대체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미친 웃음소리라니. 손목에 차꼬를 차고서, 피투성이 손가락을 덜덜 떨며, 자신을 가리켜 웃는 계집이라니...


설마 당신이...?


어이 없게도, 그 순간 차옥과 예형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한사람은 허견에게 배신당해서 오히려 간통죄로 끌려왔다던 본처였고, 또 한사람은 허견에 능욕당한 피해자였다. 기가 막힌 조우에 두 사람은 피 토하고 싶은 심정으로 웃음과 울음을 꺼어이꺼어이 토해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문초를 당하러 가더니, 돌아오질 않는다...어느틈에 사식도 치운 채로, 그녀가 있던 흔적은 남김 없이 치워진다...허견에게 맞선 여인들의 운명은 이렇게나 가혹한가?


차옥은 캄캄하던 옥사의 창문 틈새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어둠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미 아침이 밝았는데, 여전히 계집은 돌아오질 않았다. 차옥은 느낄 수 있었다. 예형이 이젠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을.



"말 안장을 얹은 준마를 타고 차옥을 납치해간 자를, 추문하지 못하였습니다."


구일은 아침이 밝기 무섭게 동온돌로 찾아와서 숙종에게 고하였다. 편전으로 들기 위해 의관을 정제하던 숙종은 구일의 보고에 잠시 발이 동온돌에 묶인 상황이 성가셨다.


"그래서, 영상대감의 집을 수색할 수 있게 윤허해 달라?"


왕이 차갑게 되묻는 말에, 구일은 자신이 왕에게 주청드리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냥 허견을 잡을 요량에 다른 생각은 못했다. 왕에게 아뢰어 영상의 노비만 끌어내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일국의 재상, 그것도 수반인 영의정의 집을 섣불리 수색하도록 왕이 윤허할 리가 없었다. 대신에 대한 예우도 아니었다. 윤허하고 싶어도 윤허할 수가 없었다.


"순기는 확실한가? 영상은 노비안을 확인해 보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이...준기인 것 같기도 하고..."


구일은 구차하게 대답을 얼버무렸다. 고작 차옥의 치마폭에 다 굳어가는 피로 적힌 언문 두글자를 보고 영의정 허적의 집으로찾아간 터라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어쩐지 자신도 허적의 집에서 그 비슷한 이름을 들은 것 같아서 나섰는데, 그래선지 괜히 꼬리를 말게 되는 것이었다. 너무 성급했다. 노비안 먼저 확인하고 나설 것을.


"하...이리 궁색해서야..."


숙종은 짤막한 헛웃음이 나왔다. 이래서야 더더욱 윤허할 수가 없다. 구일은 단순히 칼질만 손에 익은 자가 아니었다. 성균관 유생의 몸으로 무예를 익혀 궁성을 수호하는 무장이 된 신여철과 똑같이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엄연히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데다, 공신의 적장자로 품계까지 오른 신분인데도, 다시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문관과 무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자였다.


그런 자가 이렇게 비루하게 종범의 신병도 확보를 못해놓고, 심지어는 그 가의인可疑人(의심이 가는 사람, 용의자)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영의정 허적의 집을 수색하게 윤허해 달라니.


"상대가 누구인지 잊었는가?"


왕의 힐난 어린 시선을 읽었는지, 구일 역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더욱 고개만 조아렸다. 어둑어둑한 저녁에 벌어진 사건이라, 없는 목격자나 증거를 얻어내기란 그 흔한 김서방 찾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섣불리 들쑤실 수 없는 영의정 허적과 그 아들 허견이었다. 양반의 집을 수색하려고 해도 왕의 재가가 필요한 마당에,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영상대감의 집에서 노비를 끌어낼 수는 없었다.


- 우리 홍씨 집안한테 따지려고 불렀어? 따지긴 뭘 따져? 우리가 따져야지! 그놈이 납치해서 욕보인 계집들만 수십, 수백이야! 참다 못해 우리가 따지러 간 건데!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던 홍씨의 음성이 숙종은 귓가에 지금도 선했다. 귓속에 틀어박힌 돌부스러기도 이렇게 아플 수는 없었다. 정말로 수십, 수백일까? 남구만도 윤휴가 일천 그루나 금송을 베었다더니, 수백에 불과했다. 수백도 결코 작은 수효는 아니지만, 앞서 일천이라 바람을 넣은 덕분에, 그 바람이 빠진 지금은 신료들이 하찮게 여겨서 두둔하는 참이었다. 허견이 욕보인 여인들이 수백이 아니어도, 수십이라면...그것 역시 끔찍한 일.


숙종은 통명전 담장을 넘어 서온돌까지 들렸을 지도 모르는, 홍씨의 고함을 곱씹었다. 중궁이 서온돌 안에서 홍씨의 말을 듣지는 않았는지, 들었다면 어찌해야 하는지. 어깨죽지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이 크게 나왔다.


중궁은 몰라야 한다.


그는 생각에 잠겨 주먹을 불끈 쥐고 서안을 두들기다가는, 다시 열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중궁의 산달을 계산했다.


10월 하순 또는 11월 초순...


이번이 세번째 회임인 만큼 차질을 빚어서는 안되었다. 첫 회임 때 상한 생선인가 전복인가를 잘못 먹고 조산을 해버리는 바람에 아기가 병약하게 태어나서 끝내 요절한 일이나, 두번째 회임 때 자신에게 해수咳嗽, 아니 자수子嗽가 옮아서 고생하다 우물물을 잘못 마신 죄로 소산을 해버린 일이나,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겐 그저 중궁의 문제로만 볼 터였다.


숙종은 초조히 눈빛이 흔들리며, 다시금 열손가락을 접었다. 지금은 춘삼월. 산달까지 일곱달이 남은 지금은, 허적이든 허견이든 섣불리 심증 만으로 내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해가 저물고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자, 방갓에 흑단령 차림의 이민철이 대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야트막한 평정건에 녹단령 차림의 관상감 서리들이 수레로 수거를 운반하며 낑낑대고 가는 길이라,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하게 패였다.


워낙 수레도 크고, 수레에 태운 수거가 커다란 탓에, 날씨가 궂은데도 궁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저게 뭐데? 물레야?"

"물레가 저렇게 크겠니?"

"요상하게 생겼는데?"

"물수레 처음 봐? 물수레! 물 끌어올리는 수레!"

"물수레?"


수백의 궁녀와 내관들이 더러는 빨랫감이 가득 든 광주리를 안아들고, 또 더러는 발밑으로 치렁치렁 땅에 끌리는 치맛자락과 씨름하고, 또 더러는 코흘리개 생각시들의 코에서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아주며, 길목 좌우로 늘어서서 지켜보는 판국이었다. 이민철은 등골에서 진땀이 흘렀다.


그는 등뒤로 관상감 서리로 변장하여 바짝 뒤따르는 최석정에게 소근거렸다.


"눈이 너무 많으이. 이러다 자네 정체 탄로나겠으이."

"설마요. 날이 어두우니 눈도 어두울 겝니다."

"태평한 소리 한다. 차라리 수염 깎고 내시로 변장하여 뒤따르라니깐."

"그럼 너무 잘 생겨져서 더 쳐다본대도요."

"잘났다 정말...내가 말을 말지..."


이민철은 진저리를 치며 도로 앞만 보며 걸어갔다. 금군으로 변장한 김체건과 김석하도 몸서리를 치며 뒤따르는 참이었다. 잘난 외모를 스스로 너무도 잘 아는 최석정에게 슬그머니 겁이라도 주고 싶었는지, 체건이 슬그머니 등허리에 찬 환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최석정은 체건의 손아귀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수를 내어 함께 애련지로 들라는 것이 방목교에 매달려 있던 흰천에 적힌 왕의 전교였다. 이민철은 마지 못해 최석정을 관상감 서리가 쓰는 뿔없는 평정건平頂巾에 녹단령 차림으로 뒤따르게 하였다. 그나마 일부러 비 오는 날로 정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최대한 피하여서. 덕분에 지금껏 최석정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지만, 애련지가 가까워지자, 최석정은 자기 묘자리를 알아보는 사람처럼 얼굴이 굳어졌다.


수거를 시험하는 자리인 만큼, 애련지엔 한달전 도승지에 제수된 윤심과 부제학 겸 관상감 제조 민종도가 뒤따른 상태였다. 하필이면 허견 다음으로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민종도라니. 한발짝, 또 한발짝, 질척거리는 흙을 밟으며 민종도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최석정은 하마터면 그대로 미끄러질 뻔하였다.


"저런!"


민종도가 놀라 소리치며 최석정에게로 다가들었다. 부축할 셈이었는지 최석정에게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이민철은 더욱 기겁했다.


"괜찮습니다."

"누가 자네한테 물어봤는가?"


민종도는 이민철이 입은 흑단령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 알량한 재주로 상중에도 불려와서 왕의 앞에 서는 이민철이 아니꼬웠다. 더욱 그의 속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눈 앞에 선 저 천한 중인이 자신과 똑같은 정3품이란 사실이었다. 물론 같은 품계라도 문관과 잡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의 차이는 지대했다.


하지만 민종도의 속을 가장 불편하게 한 건 이민철의 신분이 아니라, 출신이었다. 그 주변의 형제들은 물론, 친우들까지도 서인에 속하였으니.


"왜 이제 오는가? 우리 두광이 팔 떨어질 뻔 하였거늘."


숙종은 나무 그늘에서 두광이 씌워주는 우산 아래에서 비를 피하다가, 이민철 일행을 보고서야 앞으로 다가섰다. 민종도가 이민철 일행과 말을 섞는 것이 어째 불안하였다. 법규대로 최석정을 도성 안으로는 발길도 들이지 못하게 해야 했지만, 당장 최석정이란 존재가 그에게 필요했다. 지금은 그저 민종도가 최석정을 보지 못하도록 최대한 눈길을 잡아두는 편이 나았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빗길에 수레를 몰고 오는 것이 워낙 힘이 들어..."

"알았으니, 그 수거로 시범이나 보이라."


숙종이 손짓하자, 이민철은 등뒤의 또 다른 서리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버드나무 앞에 수거를 내려놓더니, 양 옆의 손잡이를 한사람씩 맡아서 잡고 돌리기 시작했다. 워낙 덩치가 있는 탓에, 아무리 건장한 사내들이라 해도 한손으로 수거 손잡이를 돌리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긴 버들가지가 하나둘씩 물레 틈새로 끼여 더욱 애를 먹었다.


"뭣들 하는 건가? 오늘 점심, 저녁 다 굶었나?"


이민철은 역정이 났다. 김석하와 김지남이 할 때는 몰랐는데, 오히려 관상감 서리들이 손잡이를 잡고 보니, 도무지 성에 차질 않았다. 가난한 백성은 수레를 만들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던 최석정의 말이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홱 돌아보았다. 하지만 최석정도 여봐란 듯 우쭐대긴 커녕 시름에 젖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


민종도는 인상을 쓰고 이민철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아까부터 이민철 뒤의 서리 놈이 괜히 신경이 쓰이는 참이었다. 날이 어두운데다 비 때문에 나무그늘에 몸을 피하고 보니 눈앞이 답답했다. 그는 시야를 가린 느릅나무 가지를 짜증스레 옆으로 치웠다.


"자네, 자네! 같이 돌리게!"


마침 이민철이 또 다른 관상감 서리와 함께 최석정을 지목하는 바람에, 최석정이 민종도의 시선을 벗어나 수거로 다가들었다.


하지만 졸지에 어울리지도 않게 힘을 쓰게 된 최석정이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이미 안면근육이 경직된 상태였다. 머리만 쓰다가 팔을 쓰려니 온몸의 신경들이 순식간에 비명을 질러대었다. 차라리 개천은 물이라도 흐르지, 똑같은 수심이어도 물살이 없어서 더 힘에 부쳤다. 꾹 참아보려 해도 잇새로 신음이 비명처럼 튕겨져 올랐다. 그런 최석정을 탓하듯이 맞은편 서리가 두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둘이서 젖먹던 힘까지 짜내도 수레바퀴는 요지부동이었다.


"저, 저...저렇게 부실해서야..."


숙종이 탄식하곤 이내 최석정 뒤에 시립한 석하와 체건에게 눈짓했다.


"너희들이 해보거라."

"예 전하."


석하와 체건이 다가오자, 최석정은 뻘쭘히 손잡이를 내주고 뒤로 물러섰다. 비실대긴 마찬가지였던 주제에 서리놈이 최석정을 보며 입을 실룩였다. 최석정은 얼굴이 벌개져서 빈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최석정이 잡았던 손잡이는 체건이, 맞은편 서리가 잡았던 손잡이는 석하가 잡았다. 그들은 이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별 어려움 없이 쓱쓱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레바퀴를 타고 오른 물길이 기나긴 귀대를 지나 물받이에 고였다.


"어...제법 성능이 좋습니다. 조선 팔도의 어느 수거를 봐도 이 정도는 아니옵니다. 다른 수거에 비해 크기도 작고, 한번에 퍼올리는 물도 적은데, 그 대신 물도 덜 새고, 인력에 비하여 견인력도 강한 것이...오히려 하루에 물을 1묘畝(240보의 너비)는 훌쩍 넘길 것 같사옵니다."


"..."


도승지 윤심이 감탄하여 숙종에게 아뢰었다. 서인 계열인 이민철이 탐탁지 않을텐데도, 탄복하여 하는 말이었다. 관상감 제조인 민종도는 곁에서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저 지금 도승지 임기가 다했으니 자신이 도승지가 되면 좀더 색깔을 선명히 하겠다고 벼를 뿐이었다.


"세종조에 만든 물수레는 인부 일백이 끌어올려도 하루 꼬박 겨우 1묘를 물을 대었을 뿐이옵니다. 당시 물수레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저 물수레는 인부 둘이서 돌렸으니, 만 하루에 인부 스물이면 되지요. 훨씬 효율적이옵니다."


"..."


윤심이 계속해서 칭찬하는 말에, 이민철은 자못 뿌듯한 표정이 되어 최석정을 돌아보았지만, 최석정은 사뭇 마뜩찮은 얼굴이었다.


저 둘이 일당백一當百인 걸 모르셔서 하는 말씀.


물론 세종조의 물수레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다보니 일백명씩이나 물수레를 돌릴 필요는 없었다. 그 절반인 4, 50의 수효도 필요하지 않았다. 한두시진 물을 대려면 장정 대여섯명, 하루종일 물을 대려면 장정 서른 내외의 인부가 필요했다.


하지만 서른 내외의 인력을 하루 종일 대어 2묘라...권세가 뿐만이 아니라 영세민 역시 효과를 보려면 더 작게 만들어야 했다. 애초에 세종이 물수레를 조선 팔도에 보급하려 하였을 때 김종서가 반대했던 이유를 좀 더 염두했어야 했다.


本國土性麤疎,

泉水汚下,

雖百倍其功,

一日所灌,

不過一畝,

而功輟則滲漏,

臣親見其狀


본국은 흙이 듬성듬성하고,

물이 얕아서

일백명이 공을 들여서

하루 꼬박 물을 대도,

고작 1묘를 넘지 못하고,

물수레를 그치면 물이 새어버리는데,

신이 직접 그 형상을 보았습니다.


김종서가 일찌감치 고개를 젓고, 그래도 세종이 포기 않고 달려들었다가 한참 만에 두손을 들고 말았던 일이었다. 결코 똑같은 우를 범해선 안되었다. 뭔가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했다.


하지만 하필 민종도가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마당에 섣불리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아뢸 수도 없었다. 최석정으로선 그저 은밀히 고개를 가로젓는 게 고작이었다. 숙종은 최석정의 회의적인 반응을 곁눈질로 살피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더 세부적인 단점을 보완하여 추후 다시 논하도록 하라."


왕의 결정에 도승지 윤심은 두눈이 화등잔 만 해져서 황급히 아뢰었다.


"전하, 이 정도면 충분히 백성들에게 통할 것이온데..."

"민초들에게도 통할 거다?"

"..."


백성이란 말을 민초로 바꾸어 되묻는 왕의 질문에, 윤심도, 민종도도, 이민철도 누구 하나 섣불리 답하지 못하였다. 윤심이 가만히 수거를 쳐다보다가 다시 의견을 내놓았다.


"차라리 족답足踏식으로 바꾸는 것이...하오면 통할 것이옵니다."

"족답식?"

"예 전하. 발로 밟아서 물을 자아올리도록 하면..."

"..."


숙종이 힐끗 석하를 돌아보았다. 김석하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서로 맞댄 바퀴 양쪽에 이어붙인, 저 손잡이는 밟을 래야 밟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직접 수레바퀴에 올라타서 바퀴둘레를 밟아야 했다.


"해보겠느냐?"

"예 전하..."


석하는 전립을 눌러쓰곤, 그 자리에서 흑혜와 버선을 벗었다.


"거, 신을 벗을 것 까지야..."


숙종은 손을 내저으면서도 석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주변의 온갖 초롱과 조족등, 횃불 덕분인지 그가 버선을 벗는 순간, 왼발바닥에 새겨진 우물정井자가 희미하게 비쳤다.


"..."


숙종의 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허목을 진료했던 백광현이 돌아와서 은밀히 고했던 얘기가 쏜살같이 뇌리를 스쳐갔다. 허목은 나막신 바닥도 우물정井, 발바닥도 우물정井이라 하였던가...김석하의 발바닥에도 우물정井자가 새겨져 있다니 괴이했다. 혹여 발바닥에 문신을 새긴 건가.


숙종이 힐끗 체건을 쳐다보았지만, 체건의 표정은 그저 무신경했다. 그런 체건을 향해 숙종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여전히 체건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최석정의 눈치도 살폈지만, 부여에서 김석하와 함께 반년 넘게 지내고도 발바닥의 문신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석하는 전립을 푹 눌러쓰고 수레바퀴 위로 훌쩍 올라섰다. 그의 맨발이 닿자마자 바퀴가 아래로 돌아가며 석하를 튕겨냈다. 하지만 석하는 그 즉시 수레바퀴의 물레단을 잡고 날렵하게 위로 올라섰다.


"저, 저래서야..."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모두 우려 섞인 눈초리로 석하를 지켜보았다. 수레바퀴를 밟아 돌리면서 잡고 버틸 만한 손잡이가 아니었다. 돌리기 위한 구조인 탓에 그저 손잡이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을 해야 했다. 하지만, 김석하는 팔을 뻗어 버들가지를 휘어감더니 이내 절묘하게 두발로 균형을 잡고서 제자리를 맴도는 수레바퀴 위를 걸었다. 마치 평지를 걷듯이 너무도 수월하게.


"뭐야...뭐 저런 놈이 다 있어?."

"..."


민종도의 관심은 이내 최석정에게서 김석하로 옮겨갔다. 얼굴빛이 허옇기라도 하면 저녁 어스름 속에서도 얼굴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을, 얼굴빛이 거무스름하다보니 어디가 코고 입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저 달걀귀신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불에 구운 듯한 얼굴을.


"내 이민철에게 수거에 관해 물어볼 것이 많으니, 경들은 이만 물러가라."

"네?"


윤심과 민종도는 의아한 눈빛으로 왕을 쳐다보았다. 허견의 사건에 신경이 쏠린 민종도야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기에 달가운 하교였다. 반면에 수거에 관심이 많은 윤심으로선 함께 남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왕의 도끼눈이 이렇게 말했다.


자리 좀 비키란 말이다.


윤심의 눈길이 흘끗 최석정의 얼굴에 닿았다. 왕이 조금 전에 저 관상감 서리와 눈짓을 주고 받는 것을 보았다. 이민철이 만든 수거에 낙점하려다, 저자의 눈치를 보고 보류했다. 그만큼 왕이 존중하는 인재일 터였다. 중앙관청 서리인 양 녹단령에 평정건까지 걸치고 선, 그 실체는 문외출송된 죄인인 최석정은.


"..."


윤심의 입꼬리가 웃음을 애써 참느라 물결쳤다. 지난날 시제사건 때 존경각에 갇혀 쓰러진 덕분에 홀로 처벌을 면한 최석정이었다.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박태보와 오도일에게 놀아나서, 아니 같은 남인들에게 떠밀려서, 덩달아서 귀양을 다녀왔다. 차라리 산증에 걸린 최석정을 부러워하며.


그런 만큼 최석정이라면 두눈 감고도 찾아낼 수 있었다. 곁에 고개를 조아리고 서선 어서 애련지를 나설 생각 뿐인 민종도의 옆구리를 조용히 찔러 귀띔하려던 윤심의 검지가 멈칫했다. 전하께서 은밀히 부르실 정도라면...


이놈이 수거를 좀 아는 건가? 그런 건가?


그는 겉눈썹을 꿈틀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도, 왜도, 두 오랑캐 나라가 모두 수거를 익숙하게 다루는 마당에, 그 사이에 낀 우리 조선만 수거를 다루지 못한다. 토질이 나빠서인지, 기질이 나빠서인지. 태종도, 세종도, 대대로 두손 들고 그 이후로 3백년이 되도록 역대 왕들이 모두 체념한 덕분에. 그래서 가뭄이 들면 백성들이 벼와 보리가 시들시들 말라죽는 것을 지켜보며 또한 시름시름 굶어죽는다.


윤심은 수거 만큼은 꼭 조선이 손에 넣고 길들여야 하는 적토마처럼 느껴졌다. 수거 만큼은, 꼭 조선팔도 곳곳을 누비는 가마보다 더 많게 더 널리 퍼뜨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쥐새끼처럼 숨어든 얼굴 하나쯤은 살포시 눈감아줄 수도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민종도가 서둘러 애련지를 나서고, 윤심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최석정을 쳐다보며 물러나자, 체건이 관상감 서리 일행에 숨어 슬그머니 뒤를 밟았다. 혹시라도 윤심이 입을 허투루 놀리나 지켜보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애련지 일대엔 왕과 최석정, 이민철, 김석하만 남았다.


"더 작게, 더 많이, 더 길게 만들어라?"


왕이 묻는 말에 최석정이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단순히 수거만 크고 힘이 좋아야 하는 게 아니라, 물을 대는 귀대도 길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을 더 멀리까지 댈 수가 있습니다."

"그게 되겠는가?"


왕의 눈길이 이번엔 이민철을 향하였다. 이민철의 얼굴은 이미 팔자주름이 깊어질 만큼 난색이 짙었다.


"하오나 나무로 굴대와 귀대를 만드는 판국에...더 길게는 무리이옵니다."

"허면, 쇠로 하면 가능한가?"

"당장 주화를 발행하는데도 주석이 턱없이 모자라다 하옵니다. 우리 조선은 주석이 나질 않다보니 왜에서 수입해야 하는지라...그만한 주석도 얻지 못하는데다, 그만한 길이로 다듬지도 못합니다."

"..."


숙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역대 성군들도 두손두발 들었을 정도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아무 소득 없이 후대에 실패를 물려주는 못난 열성조들 중 한사람으로 어진(왕의 초상)을 남길 지도 몰랐다.


"5년 더 주겠소. 그 안에 하는 데까지 해보시오."

"..."


5년 더? 천문도도 시키셔 놓고? 이민철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5년이면 사람이 변하는 법이었다. 5년이면, 깨알같은 글자도 술술 읽던 동료도 한순간에 눈이 침침해지고, 개미허리가 낭창낭창 한팔에 감기던 아내도 한순간에 두팔에 아름드리 고목이 되어버리고, 가파른 자비락도 거뜬히 오르내리던 친형도 한순간에 무릎이 진무르는 것을. 해도 너무 한다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이민철의 존재는 왕의 안중에서 사판을 훑듯 지워져버렸다. 왕은 바로 최석정을 돌아보며 물었다.


"조보는 보시오?"

"허견의 일 말입니까?"

"사부의 은사가 또 사고를 쳤소."

"사고는 허견이 쳤지요."


최석정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응수했다. 숙종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저 머나먼 거제로 옮겨져서도 송시열이 조보를 읽는 마당에, 도성 문턱 아래의 최석정이 읽지 못할 리가 없다.


"중전마마께선...아십니까?"


머뭇머뭇 최석정이 묻는 말에 숙종의 두눈이 돌이 되어 쿵 떨어져 내렸다. 부쩍 동요하는 왕의 눈빛에 최석정은 입을 다문 채로 한숨을 삼키려다, 오히려 입술을 빨았다.


"중전은, 모르오."

"..."


왕의 한숨어린 대답에 최석정은 결국 다문 입술 새로 한숨을 흘려내었다. 이 일은 여기 있는 이민철도, 또 여기 없는 김지남도, 백광현도 아는 일이었다. 짧은 순간 그들의 뇌리엔 광통교에서의 기억이 허견의 얼굴로, 그 겸인의 얼굴로, 또 순라꾼의 얼굴로 저마다 떠올랐다.


- 됐다. 말을 말자. 내 어찌 너희 같이 천한 것들과 말을 나눌 수가 있겠느냐. 내 밀화 한알이라도 빠졌으면 네년들을 끌어다가 지옥 구경을 시켜줄 것이야.

- 네년들이 작은 나으리의 밀화를 훔쳐간 계집들이렷다.

- 여기 계신 허견 나으리의 밀화가 없어졌으니, 수색에 협조를 해주셔야겠습니다.

- 물론 유명하신 분이시긴 하오나..이번 사건은 나라에서도 엄히 단속하는 도난사건이오니, 실례되오나 이 계집들을 두시고 그냥 가던 길 가심이..

- 뭘 모르나 본데, 이 아이가 내 밀화를 줍는 걸 본 증인들이 있네.

- 이제 물증도 있겠다, 증인도 있겠다..이 도둑년들을 좌포청에 넘기는 일만 남았군요.

- 그래봤자, 밀화 한알이 더 비는데. 나머지 한알이 없으니 저 계집들을 데려갈 생각이네.


하필이면, 숙종은 누구보다 기억력이 좋았다. 평소 어미가 통명전 뒤의 우물물로 머리를 차갑게 식혀준 탓인지, 그가 즐겨 먹는 검은콩과 민어찜 같은 음식들이 도움이 된 탓인지, 날 때부터 어미의 유별난 기억력을 물려받은 탓인지는 몰라도, 세상 누구보다 집요한 기억력을 가졌다. 그는 입안의 질긴 고기를 씹고 또 씹듯이, 그날의 기억을 곱씹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두광, 석하와 체건은 허견의 일에 중궁이 거론되자, 의혹어린 눈빛으로 허공을 찔렀다. 이럴 때 두눈을 멀뚱거리면서 눈치를 보기엔, 석하는 너무도 머리가 좋았다.


이미 대비 김씨가 김석주에게 색장나인을 통해 밀지를 보내어, 중궁이 궐 밖에 잠행을 나왔을 때 혹시 허견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순라꾼들을 들쑤셔 보라고 신신당부한 뒤였다. 지금 대비 김씨는 허견을 잡겠다고 눈이 벌개져서, 중궁전에 은밀히 사람을 심어두고, 또 병조의 경수소마다 사람을 보내어 탐문하는 참이었다.


"..."


석하는 귀찮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눈길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른봄의 하늘은 여전히 답답했다. 그저 솜털 같은 구름이 눈에 보일락 말락하는 는개를 뿌릴 뿐이었다.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안 보이고, 안 들린다...그런 그의 귀에 때 아닌 징소리가 고막을 후려치며 파고들었다.


지이이이이이이이이잉...


소리에도 꼬리가 있는지, 징소리는 그치지 않고 허공을 헤엄치며 석하의 귀를 들쑤셨다. 징소리라니. 석하는 바짝 긴장하여 왕의 용안을 흘끔 곁눈으로 살폈다. 누구보다 청각이 예민한 만큼, 아예 몸서리를 치며 귀를 막는 왕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그것이..."


여태 등뒤에서 묵묵히 우산을 들고 수행하던 두광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왕의 눈치를 보았다. 숙종은 얼떨결에 묻다시피 하였지만, 이미 소리의 정체를 감지했다. 일전에도 들었던 소리였다. 아비의 억울함을 상주했던, 서종태의 징소리였다. 그리고 얼마 전에 아들 유철을 위해 하소연을 했던 유의걸의 징소리였다.


"격쟁이구나."

"..."

"이번엔 또 누구란 말이냐?"

"..."


숙종은 소리를 좇아서 바로 편전 앞으로 향하였다.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단이긴 하나, 차비문差備門, 특히 편전 앞 선정문까지 올 수 있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누군가 손을 써줘야만 가능했다. 이번엔 또 누군지 징을 울린 자의 면면을 봐야만 하였다.


그렇게 숙종의 거친 걸음이 편전 앞에 이르자, 이미 형조판서 이관징을 비롯해서 병조판서 김석주까지 서리와 나장들을 거느리고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의금부 나장들이나 입고 쓰는 더그레와 깔때기까지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왕의 행차에, 이미 선정문 앞에 벌떼처럼 모여있던 관료, 아전, 내관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서 선정문 좌우로 물러났다. 그러자 비단 도포를 입고 무릎을 꿇은 채로 한손엔 쟁반같은 징을, 또 한손엔 들고 채를 쥔 젊은 흑립의 사내가 움찔하여 두눈을 깜빡였다.


"무엄하다! 어디 감히 전하의 용안을 보느냐?"


형조판서 이관징의 질타에 사내는 또 움찔하며 황망히 고개를 땅에 박았다.


"소, 송구하옵니다! 사, 살려주시옵소서!"

"..."


숙종은 물끄러미 사내를 쳐다보았다. 부유한 차림새에 아예 수염도 없는 자였다. 한눈에도 이제 겨우 스물이나 되었을까. 이차옥의 나이가 열여덟, 열아홉이라던가...그 나이와 비슷한 사내를 보니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어찌하여 격쟁을 하였느냐?"


숙종은 사내를 쏘아보며 차갑게 물었다. 이 정도 요란한 징소리면, 필시 후원을 산책하든, 방안에서 차를 마시든, 혹은 책을 보든, 중궁이 어디서 무얼 하든 놓치지 않고 들었을 법했다. 소란을 일으킨 사내가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전하, 소인은 역관 서효남의 아들 서억만이라 하옵니다. 이번에 납치사건으로 조사받는 이차옥의 남편이 되옵니다."

"그런데?"


숙종은 놀라지 않았다. 납치당한 아내의 일에 남편이 수수방관하는 것도 아니 될 말이었다. 헌데 서억만은 채를 든 손을 덜덜 떨며, 마치 더러운 가래를 뱉듯 입속의 말을 빠르게 말해치웠다.


"소인의 아내는 납치된 일이 없사옵니다."


순간 편전 앞이 한순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많은 이들이 저마다 귀를 의심하거나, 왕의 반응을 살피느라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숙종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서억만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까딱 기울어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처음 한마디가 힘들지, 한번 목구멍으로 뻗어나온 말은 두마디, 세마디 술술 흘러나오기 마련이었다.


"말 그대로이옵니다. 제 아내 이차옥은 납치된 일이 없사옵고, 정절을 잃은 적도 없사옵니다."

"뭐라?"

"저희가 쫓아낸 일도 없사옵니다."

"그 말은..."

"멀쩡히 소인의 집에서 잘 지내는 아내를, 포도청에서 꾀어내어 거짓고변을 시킨 것입니다."

"..."

"사실이옵니다 전하, 믿어주시옵소서."


서억만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거듭 조아렸다. 숙종은 혹여 자신의 뒤를 따라왔나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갓을 쓴 이민철과 서리로 변장한 최석정, 그리고 금군으로 변장한 김체건과 석하도 모두 이미 뒤따른 채였다. 그들도 황당하고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다.



서억만의 격쟁 이후, 이차옥에게 사식을 넣어주던 친정부모, 식솔들도 줄줄이 의금부에 갇혀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허견은 의금부 옥사를 제집 안방 드나들듯 하며 의금부 나장들에게 오히려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물! 물 좀 가져와!"

"예, 정자 나으리!"


허견이 손끝을 까딱하면 냉큼 간수가 달려와서 물을 대령하는가 하면, 나장도 불려왔다.


"이리, 이리..."


허견이 철창 안에서 손짓을 하자, 나장들은 머리를 바짝 가까이 대었지만, 머리에 쓴 검고 기다란 깔때기가 철창에 걸려서 더는 가까이 닿지 않았다.


"아...벗어!"

"예에."


나장이 머리에 쓴 깔때기를 벗고 머리를 바짝 철창에 붙이자, 허견이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잡아뺐다 놨다, 하면서 거드름을 피웠다.


"입이 심심한데."

"육포라도 갖다드릴까요?"

"난 오징어가 좋은데."

"예에?"

"우리 집에 좀 다녀와."

"그건 좀..."


나장이 난처한 얼굴을 짓자, 허견은 힐끔 눈을 굴려 나장이 입은 옥색철릭, 그 위로 걸친 흑광목 재질의 소매 없는 더그레號衣, 또 그 위로 두른 어깨에 검은 바탕에 흰 격자무늬가 쳐져서 바둑판처럼 생긴 흑반비까지, 일명 까치등거리 차림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그의 양 손에 든 깔때기와 붉은 방망이까지 곁눈을 주었다.


"됐고! 옷이나 좀 빌려줘!"

"옷을요?"

"어."

"옷은 왜요?"

"코에 바람 좀 넣으려고."

"..."


이 개또라이가! 나장은 속으로 허견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거야 상전을 모시는 기분이라고 간수들이 투덜투덜하더니, 자신이 겪어보니 그 고충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하필 여기 의금부는 판의금 오시수, 지의금 목내선, 동지부사 이하진, 정유악까지 모조리 남인 천지였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최대한 허견의 편의를 봐주라고 하였으니 감히 면전에서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나장은 찍소리도 못하고 허견에게 옷을 벗어주고 나장이 대신 옥사에 들어갔다.


허견은 유유히 옥색철릭을 입고, 흑반비를 어깨에 걸치고, 머리에 깔때기를 쓰고도 모자라서 붉은 방망이까지 손에 쥐고 어기적어기적 의금부를 나섰다. 간수들과 나장들이 두눈을 멀뚱거리면서 허견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제지하는 자가 없었다. 당장 국청 마당에서 차옥을 심문하던 판의금 오시수와 지의금 목내선이 빤히 허견을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으니, 더욱 그를 잡아세울 엄두가 나질 않은 터였다.


허견이 의금부를 나섰다가 돌아온 한시진 동안, 그가 무얼 하고 돌아다녔는지를 묻는 자도 없었다. 양반들도 벌벌 떤다는 그 의금부인데도, 그저 나갈 때처럼 들어올 때도 허견은 너무도 자유로웠다. 그는 느긋하게 동헌으로 들어가서 동지부사 정유악과 판의금 오시수를 만나서 쑥덕거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두손을 비비면서 동헌을 나왔다.


"우리는 왜 잡아오는 것이오?"


두어시진 후에 차옥의 고모부인 이시정과 외숙 박찬영이 나장들에게 끌려와서 또 다른 감방에 갇혔다. 그들은 차례로 국청 마당으로 불려가고 도로 감방으로 끌려왔다 . 이번엔 또 차옥 아비의 동료인 훈련원 습독관 조선趙璿에, 포도청 서원 이수방까지 불려들어왔다.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서 박찬영은 자신의 양어깨를 감싸안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엉뚱하게도 포도청에서 심문할 때 허견의 죄상을 받아적거나, 듣거나 한 사람들이 모조리 불려온 상태였다. 이시정이 두번째 심문을 위해 불려나간 사이, 박찬영의 눈앞에 뾰족한 깔때기와 더그레 차림의 나장이 눈에 들어왔다.


"또요? 난 모른다지 않..."


더그레만 쳐다보며 짜증스레 항의하던 박찬영의 눈에 갑자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모르긴 뭘 몰라. 아는대로 답해야지."

"정, 정..."


박찬영은 그 자리에서 입이 얼어붙고 목이 콱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세시진 전엔 자신의 집에 출몰을 하더니, 지금은 또 자신의 감방 앞에 출몰하여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얼굴이라니...수염이 적어서 나이가 서른 전후로 보이는 저 얼굴을 보니 가슴이 뻐근했다.


"나 알지?"

"..."

"혹시 모를까봐 말해주지. 나, 허견일세. 허견."

"나으리..."

"..."


허견은 박찬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하여 창살 앞으로 불렀다. 박찬영은 이미 벽에 기대어 잠든 조선의 눈치를 보며 창살로 바짝 다가앉았다.


"왜 아까 그 공초에 저놈 이름을 적어놓지 않았나?"

"..."


허견이 눈짓으로 가리킨 조선을 보고 박찬영은 온몸에 소름이 쪽 끼쳤다. 이미 허견은 자유롭게 의금부를 드나들 수도 있고, 심지어는 공초 내용까지 읽고, 혹은 듣고 할 수가 있었다. 의금부가 제집 안방이 되어버린 허견인데 어찌 버틸 수가 있을까.


"내 이미 판의금께 부탁해 놓았다. 두번째 문초 때도 저놈 이름이 나오지 않으면, 네놈을 매우 쳐서 단매에 죽이라고."

"..."

"잘 알아들었겠지?"


허견은 나직이 속삭이곤, 오른손을 뻗어 박찬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박찬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작가의말

1. 이민철의 수거, 즉 수차는 도면이나 기록 자체가 별로 없어서,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상상으로 보완한 모습입니다.


2. 차옥 사건 자체가 워낙 여러 사람 잡아먹은 사건이라, 실록과 연려실기술 등을 참고하여 쓰는 중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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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2.22 17:27
    No. 1

    체건이 등장하면 엄청 반가울것 같았는데 저렇게 무뚝뚝해져서 그저 그런 느낌이 듭니다;;;
    허견은 요즘 시각으로 봐도 감투쓴 양아치로 밖에는 해석이 안되네요.
    이민철의 수거 도면은 일본이나 프랑스나 영국이나 미국 박물관 어디쯤에 숨어있지 않을까 하고 망상을 펼쳐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29 02:46
    No. 2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행태는 비슷한 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근데 허견은 확실히 심한 듯...이민철 관련해서 그의 작품들이 전해지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저도 일본 어디쯤 있으려나 상상한 적은 있지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2.22 17:39
    No. 3

    유권무죄인가요?
    예나 지금이나...쩝!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2.29 02:47
    No. 4

    그러게요. 예나 지금이나 권세로 덮는 일이 많지요. 선조 때 임해군도 극악무도 했더군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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