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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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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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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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26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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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61

DUMMY

김석주는 궐안 후미진 모퉁이를 벗어나오며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시뻘개진 손바닥을 보니 허적이 손아귀에서 버둥거리던 그때 그 손맛이 지금도 생생했다.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그는 협문쪽을 힐끗 곁눈질 했다. 한놈이 보이질 않는다. 대비전과 그 서모를 감히 가로막았다던 그 시건방진 그놈. 협문 옆 담벼락으로 눈길을 흘끔 돌리니 대여섯보 떨어진 지점에서 대비전 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가더이다.


김석주는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는 떡하니 협문 앞을 가로막고 버텼다. 그 금군놈 면상을 제대로 볼 참이었다. 김석주가 시꺼먼 얼굴로 딴청을 부리며 협문을 지키고 섰자, 그 거대한 풍채로 협문이 꽉 차는 듯 하였다.


금군 하나가 두눈을 끔뻑이며 눈치를 보았다. 쳐다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존재감이라니. 청국에서 사신단이 올 때마다 저 모습을 보고 놀라서 딸꾹질을 한다던가...빨리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가질 않는 건지. 조바심이 나는데 마침 허후가 걸어왔다.


허후는 빈 주먹을 불끈 쥐고 걸어오다 흠칫 놀라 멈춰섰다. 아비를 목덜미를 거머쥐고 들어올린 괴물. 사람의 형상을 한 멧돼지인지, 멧돼지의 형상을 한 사람인지. 이 괴물이 아비를 지푸라기 취급하여 심한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이 괴물이, 이 괴물이...


"좋은 눈을 가졌구나."

"..."


갑자기 괴물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허후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굳어졌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허후라 합니다."


허후는 굳은 얼굴로 겨우 답하였다. 대비전 서모 폭행사건이 있은 지도 벌써 달포가 흘렀다. 예형이 죽은 지도 이미 한달이 지났다. 이제 와서 대비전이 자신을 염두하고 그 사촌오라비가 이름을 물어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껄끄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혹 양천허씨더냐?"

"네."


허후는 서슴지 않고 답하였다. 여기서 머뭇대면 오히려 의심만 산다. 허씨는 많다. 양천허씨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허적과 연관지을 리는 없다.


"그래? 그럼 허상국과는 무슨 사이냐?"

"..."


흠칫 놀라 숨을 죽이는 허후를 보며 김석주는 눈썹을 꿈틀했다.


"허목의 조카손주가 무관이라더니, 네놈인가?"

"..."


허목이라니. 고맙게도 헛다리를 짚었다. 허후는 안도의 한숨으로 가슴이 들썩였다.


"아닙니다."

"그래? 난 또..."


김석주는 이내 시들해진 눈빛으로 뒷짐지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허후에게 등을 보인 채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네놈이 누구든 내 눈에 띈 이상...네놈도 내 장기말이 될 것이다.



갓 괴여 익은 술을 갈건으로 받아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 세고 먹으리라

솔바람 건듯 불어 푸른물 건너오니

맑은향 잔에 지고 붉은잎 옷에 진다.


정오의 햇살이 머리꼭대기를 따끈하게 비출 무렵, 광현은 말에 올라타서 침함 대신 술병을 안장에 얹고 느긋하게 콧노래로 정극인이 지었다는 상춘곡賞春曲의 한구절을 흥얼거리며 장통방을 나섰다.


오랜만의 말미였다. 한 달포만 집에서 쉬라면서 왕이 수유를 내줬으니, 마냥 좋았다. 침함을 끼고 다닐 땐 술을 한모금도 대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간 못 마신 술을 원 없이 마셔볼 생각이었다.


헌데 거리에서 벌어지는 온갖 장면들이 그의 시야를 그물처럼 덮쳤다. 도성 안 거리마다 흉인의 용모파기가 나붙은데다, 여기저기 한성부 순라꾼들이며, 형조의 서리들이 행인들을 끌고 가는 참이었다.


"아 이거 왜 이래? 내가 뭘 어쨌다고!"

"글쎄 형조로 가보면 안대도!"

"아니, 이유나 좀 알고..."


잡혀가는 사내들은 한눈에도 키가 훌쩍 큰데다, 수염이 많았다. 저들의 죄라곤, 용모파기와 조금 닮은 죄였다. 어떻게든 형조 서리들의 포승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모습도 딱하였다. 광현은 목에 한숨이 들어차서 눈밑을 실룩거렸다. 이래서야 마음 편히 유람을 다니거나 할 수도 없었다. 이게 무슨 꼴인지.


"거기,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홍단령을 벗고 장통방을 나서자마자 광현의 팔꿈치를 억센 손이 움켜잡았다. 광현은 기가 막힌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형조의 서리가 건들건들거리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참이었다.


"나 말인가?"

"여기 그쪽 말고 누가 있답니까?"

"..."


광현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어처구니가 없다. 졸지에 형조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미 왕이 양화당에서 신료들 앞에서 자신의 얼굴 옆에 용모파기를 갖다붙일 때 알아보긴 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자세히 보면 자신이 훨씬 수염도 적고, 훨씬 준수하게 생긴 것을.


"난 아닐세."

"글쎄, 그런 얘긴 입이 뚫렸으면 누구나 다 하는 얘긴뎁쇼. 호패를 보여주시죠."

"거참..."


허리춤을 더듬던 광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빈손을 움켜쥐며 난처한 얼굴로 서리를 쳐다보았다. 푸른 자벌레처럼 눈치가 기민한 서리인지라 대뜸 눈초리가 차가워졌다.


"호패도 없다? 수상한 자다. 끌고 가라."

"진짜 난 아니라니까! 도성 밖에 단 한시도 나간 일이 없으이."

"아 같이 가자니까! 왜 여러번 말을 시켜?"


서리가 성질을 버럭 내며 광현의 팔을 사납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이내 광현은 온몸의 힘을 확 빼고 자신의 어깨로 서리를 콱 들이받아버렸다. 졸지에 서리가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그 와중에도 광현은 서리의 복부를 팔꿈치로 찍으면서 같이 넘어졌다.


"아이고 나 죽는다! 나 죽는다!"


정작 신음도 못낼 만큼 고통에 겨운 서리보다도, 광현이 더 요란스레 엄살을 부렸다. 일부러 능청을 떠는 모습에, 동료 서리들의 눈초리가 험악해졌다.


"이 양반이 죽고 싶나!"

"저거, 저거 흉인이야 흉인!"

"그래! 보니까 닮았네!"

"수염도 칼로 밀었구만!"


형조 서리들은 물론, 한성부 순라꾼들까지 합세하여 광현을 포위했다. 그들은 각자 손안의 붉은 봉을 고쳐쥐고 광현을 덮칠 기세였다. 졸지에 흉인으로 몰린 광현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이래서 왕이 일부러 수유를 내준 건가 싶었다. 도대체 방안에 콕 틀어박혀 있으라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거리로 나와서 이리 휘젓고 다니라는 뜻이었는지.


그렇게 광현은 졸지에 형조 서리들과 순라꾼들에게 붙들려 육조거리까지 끌려왔다. 하지만 순순히 끌려올 광현도 아니라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진짜! 이놈들이 생사람을 잡네! 나 아니라니까!"

"에이 씹! 확 그 주둥이 꼬매버릴라!"


형조 서리가 험상궂은 얼굴로 광현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광현은 이미 왕도, 신료들도 예견한 일을 자신이 겪는 참이라 주눅이 들진 않았다. 그저, 속에서 열불천불이 일 뿐이었다.


"놔두게! 전하를 모시는 어의영감이니!"


갑자기 들려온 호통에 서리들과 순라꾼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콧마루를 실룩이며 뒤를 돌아보다, 말을 타고 오연하게 굽어보는 허목과 눈길이 마주쳤다.


붉디 붉은 옷자락에 아래 위로 머리를 맞댄 쌍학을 수놓은 흉배를 단 홍단령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흉배에 닿는 은백색의 수염도 비범한 기운을 풍겼다.


헌데 시종 2인이 각각 앞뒤로 말고삐와 말꼬리를 잡고 선 모습이 뫼산山자 같았다. 옷 색깔을 보면 당상관인데, 구종 수를 보면 당하관이라니.


"뉘신지?"

"눈 깔거래이. 판부사 허목대감이시다."


허목의 말고삐를 잡은 구종이 눈을 부랴리며 하는 말에 서리 및 순라꾼들이 모두 납작 엎드렸다. 당상관의 거마를 보면 모두 길에서 엎드려 절해야 하는 법이라, 모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판부사라면 정승자리에서 물러난 거물이나 앉는 자리였다.


헌데 그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든 것은 방금 자신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자 또한 '땡감'도 아니고 '영감'이란 호칭으로 불린 사실이었다. 어의라니, 땅을 짚은 그들의 손가락이 더 움츠러들었다.


"자넨 왜 구종도 없이 그러고 싸돌아다니나! 지금 시국이 어느 땐데!"

"네, 저 흉인 닮았습니다."


허목의 핀잔에 광현도 입맛을 쩝쩝 다시며 되받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는 반가운 웃음으로 물들었다. 연천으로 내려갔던 허목이 육조거리에 나타났다. 이번 흉서사건이 도성 안팎을 발칵 뒤집어놓은 덕분인가.


"헌데 대감께선 어찌..."

"전하께서 부르셨네."


허목이 씁쓰레히 입가를 실룩이며 답하였다. 광현은 이미 짐작을 하였기에 바로 수긍했다. 마침 육조거리엔 이조판서 홍우원, 대사간 권대재부터 헌납 이수경까지, 구종들을 모조리 끌고 마중나온 참이었다.


"대감!"

"아, 자네들..."


허목은 고단한 지 쌍커풀이 겹겹이 쳐진 눈으로 홍우원을 쳐다보았다. 하얗게 세어버린 눈썹이 눈두덩을 덮은 탓에, 시야도 희끄무레했다. 허목은 오다가 자신이 온갖 별꼴을 목도한 탓에 심기가 불편했다. 광현을 흘끗 돌아보고, 허목은 형형하게 번뜩이는 눈초리로 홍우원과 권대재, 이수경을 쏘아보았다.


"자네들 뭐하는 사람들이야!"

"예?"

"도성 안이 어찌 이리...어찌 이래? 이래서야 사람이 다니겠는가?"

"..."

"전하를 모시는 어의까지 흉인으로 지목되어 끌려올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닌가! 자네들은 이 사태를 그냥 두고만 보았는가?"

"면목...없습니다."


권대재가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대쪽같은 성품도 잠시 죽이고 그냥 대의를 따랐다. 하지만 하필이면 오늘 허목이 보는 앞에서 형조 서리들과 순라꾼들이 어의 백광현을 무지막지하게 끌고 오는 장면을 딱 걸렸다. 어의 백광현이 이 지경이면, 이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까지 왔다. 저 꼬장꼬장한 미수공이 보았으니 두고 볼 리도 만무했다. 당장 자신들의 발등에 불호령이 떨어진 터였다.



여기가 어디지?


석정이 며칠 만에 눈을 뜨고 보니 웬 습한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춘사월이라 얇게 누빈 이불만 덮어도 그만인 것을, 두껍게 누빈 솜이불을 덮고 누운 자신이었다. 석정은 두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낯선 방안 풍경이 그의 시야를 들쑤셨다. 어떻게 된 일인지. 방안엔 그저 횃대 하나에 자신의 도포와 갓만 달랑 걸려 있었다. 게다가 그의 품에 있어야 할 면포가 활짝 펼쳐진 채로 그림까지 그려져 걸려 있었다.


소년에게 사기로 했던 두타산 중심봉 그림이, 세번을 접었다 편 구김이 남은 면포에 그려져 있었다. 잘린 선이나 접힌 자국이, 마치 자신이 소년에게 주기로 했던 면포의 구김 자국과 똑같았다. 석정은 흠칫 놀라 품속을 더듬었다. 역시나 없었다. 소년에게 내기로 했던 면포에 그려져 있다니.


석정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물먹은 솜뭉치처럼 마냥 무겁기만 했다. 머리는 묵직하고 목안이 바짝 탔다. 베고 누운 목침은 석하가 자신에게 만들어준 그 목침이었다. 목침을 꺼내어 소년에게 보여주다가 바다에 빠진 기억이 희뿌연 물보라와 함께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목침을 놓칠 않았던 건지.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림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 두타산 그림보다 더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두타산에서 한참 떨어진 곳을 졸졸 흐르는 세금천이며, 그 세금천 위로 지네다리 모양으로 쌓아올린 돌다리까지.


"농교?"


석정은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럴 때가 아닌데. 어쩌다 여기 와 있는지 둘러봐야 하는데. 그래도 지네다리처럼 생긴 돌다리가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도대체 그놈이 왜...석정은 그림을 놔두고서 방문 밖으로 나왔다.


석정은 버선발이 대청마루를 딛자마자, 햇볕이 들어오는 남쪽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초라한 처마 아래 좁게 트인 시야로 온통 안개인지, 는개인지 허공을 가득 메워 여기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석정은 한발한발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자 시야가 점점 트이더니 구름인지, 구릉인지, 낮은 봉우리들이 서로 뒤엉켜서 바다처럼 펼쳐진 장관이 펼쳐졌다.


여긴...


두타산. 소년이 그렸던 두타산 광경 그대로였다. 석정이 반쯤 홀린 기분으로 멀거니 서 있는데, 부엌에서 소년이 흰죽이 담긴 그릇과 수저를 소반에 받쳐들고 나왔다.


"어? 깨어나셨네요?"

"어떻게 된 일인가?"


착 가라앉은 석정의 목소리에 소년은 들뜬 음성으로 놀리듯이 대꾸했다.


"그림은 마음에 드세요?"

"내가 묻는 건, 내가 왜 여기 있냐, 그건데."

"저한테 그림 사셨잖아요. 두타산."

"내가 언제. 말은 똑바로..."


최석정이 따지는데도, 소년은 중간에서 말허리를 뚝 잘라버렸다. 최석정의 오른팔에 걸린 두타산 그림을 펼쳐놓고 흡족해 하면서.


"어쨌든 아저씨가 여기로 고른 셈이죠. 한 반년간 숨어계실 곳으로."

"뭐? 너..."

"앞으로 이 강승윤이 나으리를 모실 겁니다. 우리 형 올 때까지만."


어깨죽지를 건들거리면서 소년이 씨익 웃었다. 석정은 미간을 찌푸리고 소년, 강승윤을 쳐다보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소년의 맹랑함을 떠나서, 자신이 지금 여기 두타산의 초가에 갇힌 사실이 기가 막혔다. 어명일 리도 없고, 도대체 누가 시켜서?


석정은 머릿속이 혼란스런 가운데 대청마루를 내려섰다. 두타산 아래로 발밑이 툭 꺼질 듯이 시야가 탁 트였다. 기암괴석들이 몽환적인 안개에 잠긴 채로, 진한 솔잎 냄새가 코끝을 찔러들었다.


"석하가 온다고?"

"어쩌면."

"그놈이 시켰냐?"

"아닌데."

"그럼..."


석정이 계속해서 물으려는데, 승윤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으르듯이 못박았다.


"전 세번 이상 묻는 걸 싫어하니깐, 세번째, 마지막 질문은 잘 생각해서 하셔야 할 거예요."

"..."


머릿속이 좀 맑아질 법도 한데, 당혹감에 그저 안개에 갇힌 기분이었다. 보슬보슬 흩뿌려진 는개가 눈이며, 코며, 귀로 스며들었다.


"김석주가 시켰나?"


요거 봐라? 석정의 세번째 질문에 승윤의 눈동자가 야릇하게 번뜩였다. 송시열 밑에서 용모파기를 그려주었는데도, 송시열에 앞서 김석주를 먼저 의심하는 것을 보니 통찰력이 보통이 넘었다. 하긴 용모파기에 얽힌 속사정을 꿰뚫어보는 안목도 대단했다.


"뭐...시켰다기 보다는..."


입맛을 쓰게 다시면서 승윤은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시인하는 모습이었다. 석정은 입을 꾹 닫고서 승윤을 쏘아보았다. 세번 이상 묻는 것을 싫어하는 놈이라니, 더는 물어도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너, 그 편비들하고 한통속인 거냐?"

"네번째 질문부턴 대답 안한댔잖아요."


승윤은 피식 웃으면서 대꾸하곤 소반을 대청마루에 내려놓았다.


"죽 다 식었네. 빨리 드세요. 이미 식었지만."

"..."


승윤이 소반을 내려놓으면서 옆얼굴만 보이고서 선심쓰듯 한마디 툭 던졌다.


"궁금할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형 얼굴을 봐서 살려드린 거예요."

"누가 물어봤나."


석정은 심드렁히 대꾸하며 입맛을 쓰게 다셨다. 며칠을 의식을 잃었는지도 승윤이란 놈에게 미처 묻지 못했다. 거제 앞바다에서 정신을 잃고, 계속 혼몽을 겪다가 깨어보니 진천 두타산이라면...모르긴 해도 칠백리가 넘을 터였고, 하루 팔십리씩 꼬박 왔더라도 사나흘은 걸렸을 터였다. 그사이 석하에게 연통을 넣었을테고, 석하가 부랴부랴 달려오면 또 사흘 안엔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석정은 망건당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가만히 쓸어올리면서 두타산 전망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보고 또 보고...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는개도 그치고, 안개도 걷히고, 그러자 두타산의 온갖 기괴한 소나무와 바위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석정은 의아히 두눈을 깜빡였다. 그림으로 볼 때는 마냥 험준해 보였는데, 막상 아래를 굽어보니 그리 높지 않았다. 온통 야트막한 구릉 투성이였다. 방향만 잘 잡고 내려가면 금세 내려갈 것도 같았다.



"네가 그려준 그림보단 훨씬 산이 완만해보이는데?"


"만만해 보인다구요?"



지루했는지 대청마루에 엎드려 뒹굴거리면서 승윤이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되묻는 말에 석정은 안면근육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의 발음이 뭉개지긴 했다. 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들으니 짜증이 일었다. 그 짜증을 남에게 쉽게 퍼붓는 성품도 못되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한번 걸어내려가 보실래요? 내려가기도 힘드실 걸요?"


"그럴 리가."


"그럼 내려가 보시든지."



놈이 비웃는다. 석정은 부아가 치밀었다. 승윤이 가져온 죽을 먼저 먹을 생각도 않고 그는 가만히 발을 뻗어 두타산자락을 걸어내려갔다.


무슨 조화인지, 그가 걸음을 옮기자마자 는개가 점점 굵어지며 이슬비가 되고, 이슬비가 가랑비가 되고, 가랑비가 점점 장대비가 되었다. 순식간에 저고리와 바지가 다 젖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도, 승윤이놈은 따라오질 않았다. 석정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계속해서 걸어내려갔다.


헌데 반시진이 지나자 벌써 다리가 풀렸다. 사흘 남짓 죽만 먹은 탓에 무릎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승윤이놈이 뭘 믿고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건지 이상했다. 이리 부실한 몸으로는 도망가기 어려울 거라 여긴 건지.


생각해 보니 아까 자신의 면포에 그놈이 두타산 절경도 그려놓았겠다, 빈털터리인 자신이 홀로 돌아가긴 무리라고 비웃는 것일 수도 있었다. 왠지 뒤통수에 그놈의 눈길이 달라붙는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승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저 큰바위 얼굴 세개가 이를 씨익 드러내놓고 웃는 기분이 들었다.



확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계속해서 구릉을 걷고 또 걸어 내려가다 보니 기나긴 세금천이 눈앞을 가로질렀다. 이 정도 개천이라면, 널다리든 돌다리든 뭐라도 있어야만 했다. 두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보니, 크고 작은, 푸르고 붉은 돌을 지네다리처럼 쌓아올린 다리가 기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승윤이 그려준 그림에도 있는...


농교籠橋.


고려 초에 임희인지, 임연인지 하는 장군이 쌓았는데 칠백년이 지난 지금도 무너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는 신비의 다리라는 말을 얼핏 스승한테 들은 것도 같았다. 김유신 장군의 부친 김서현 장군이 놓았다는 전설도 있었다. 몸체가 모두 스물여덟칸, 하지만 자질구레한 돌들이 물고기비늘처럼 꿈틀대는 다리라던가...


석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망가려면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저 농교는 훨씬 아래에 있었다. 도망가는 처지에 올라가긴 커녕, 내려가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저 지네다리를 밟아보지도 않고 간다니. 허허실실이니 오히려 아래로 돌아가면 승윤이 그놈의 눈을 따돌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석정은 애써 구실을 갖다붙였다. 눈앞에 천년, 혹은 칠백년을 이어온 농교가 있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석정은 기어이 아래쪽으로 걸어내려갔다. 헌데 생각보다 멀게 느껴졌다. 두타산마루에서 내려다 볼 때는 마냥 가까워보이던 것이, 막상 걸어내려가니 멀기만 했다. 그래도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어갔다. 백곡천과 미호천, 두 물줄기가 만나는 세금천에 농교가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가면...


농교쪽으로 가면 오히려 그놈 눈에 띄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그는 농교로 가서 조심스레 다리 위로 발을 내딛었다. 다리 밑이 워낙 물살이 세어서, 물살이 세면 셀 수록 발밑의 돌들이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이리 꿈틀, 저리 꿈틀하여 그저 아찔했다. 살아있는 지네 위에 올라탄 기분이라 해야 하나...그렇다고 발밑의 돌이 빠지거나 꺼지지도 않는데도, 처음 건너는 느낌은 그저 아슬아슬했다. 어떻게 이런 돌다리가 칠백년이 넘게 무너지지도 않았다는 건지.


그렇게 머릿속이 찌릿찌릿한 느낌으로 한발한발 내딛는데, 지네다리 맞은편에 웬 늘씬한 소년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승윤이 벌써 농교 맞은편에서 이쪽을 비웃듯이 쳐다보는 참이었다. 석정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이 놀라 그대로 몸이 기우뚱했다. 팔다리를 휘저어 겨우 중심을 잡았지만, 더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석정은 스르르 주저앉았다. 발밑의 돌들이 금세라도 우르르 무너질 것 같았더니 뜻 밖에도 단단했다. 게다가 건너기 전까지만 해도 지네다리처럼 보이던 다리가, 지금은 스무마리도 넘는 거북이들이 웅크리고 받쳐주는 오작교烏鵲橋, 아니 귀룡교龜龍橋 같았다.


"뭐하세요?"

"..."

"이 다리가 그 유명한 농교라서...한번 건너보려고."


"..."


"아 농교...일명 지네다리라고도 불리죠."


"..."


"근데 왜 벌써 포기를 하세요? 사내가 말이야."

"..."

"어지러..."


석정은 힘없이 웅얼거리듯 답하였다. 축 늘어진 어깨, 흐느적거리는 팔, 흐물거리는 손가락...그렇게 손끝에 닿는 돌다리의 틈새로 싱싱한 잡초가 만져졌다. 이 돌다리 밑으로 하필이면 물살이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흘러가는 장관이란. 그 물살 때문에 다리 밑의 돌들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승윤은 그런 석정을 놀리듯이 앞으로 다가와서 무릎을 안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놀리듯이 바짝 갖다대었다.


"하긴, 빈속에 도저히 못 건너시겠죠. 머리가 울려서."

"..."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죠? 죽기 전에 이 농교는 건너보셔야 하는데."


"..."

"이게 그 유명한 농다리 농다리 농다리...라죠. 누가 쌓았는지는 몰라도, 홍수가 나도 빙글빙글 돌아가며 끄떡 없는 농다리...장장 7백년을 버텨온 신비의 농다리..."


승윤이 노래를 흥얼거리듯이 늘어놓는 말에, 석정은 대꾸도 없이 그저 하얗게 말라붙은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화공으로 조선팔도를 떠도는 놈이 농교를 안다. 물론 조선팔도를 떠돌다 보면 알 수도 있겠지만, 그 어린 나이에 조선팔도를 돌아다녔으면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석정은 왠지 기분이 더러웠다. 두타산에서부터 미리 내다보고 뒤따라왔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이 이쪽으로 올 걸 예견하고 농교 앞을 지킨 걸까. 목울대가 울렁이는 기분이 괴로워서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탈진해버린 채로 힘없이 눈꺼풀을 깜빡이는 석정을 빤히 쳐다보면서, 승윤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여기 진천을 떠나면 당신은 죽어. 당신이 뭘 아는지는 몰라도, 너무 많이 아는 것 같아. 너무 많이 아는 건 적을 많이 갖는 거지."

"..."

"그러니 석하형이 올 때까지만 가만히 기다리시라고. 석하형이 당신 살릴 생각이 있으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올테니깐."

"뭐?"


석정은 온몸이 흐물흐물한 채로 눈앞도 가물가물했다. 하늘이 호수가 되어 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 강승윤이란 놈은 누구의 사람인지. 송시열인지, 김석주인지, 김석하인지...아니 그 누구의 사람도 아닌 건지.



남산자락에 드높이 솟은 재산루 위층에 올라서서, 김석주는 가만히 남산아래를 굽어보았다. 집집마다 촛불이 사그라들고, 온통 하늘의 무수한 별빛이 쏟아져서 아름다웠다. 사월초파일에만 꽃등으로 수를 놓는 남산이 아니었다. 사시사철 수많은 별들이 남산을 뒤덮는다. 이 아름다운 야경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편비들이 최석정을 처리하려는데, 화공 놈이 끌어안고 바다에 투신했다 합니다."

"화공...화공..."


김석주는 가만히 입안의 감정을 씹고 또 씹듯이 뇌까렸다. 그 음성 또한 억눌려 있었다.


"승윤이...그놈이지요?"


등뒤의 그림자가 머뭇머뭇 물어왔다. 상전에게 섣불리 질문을 해선 안된다는 것쯤은 알지만,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대관절 그놈이 왜..."

"편비들은 같이 죽었다고 믿지만, 전 좀...승윤이놈이라면 충분히..."

"송시열한테 가서 용모파기나 좀 그려주라 하였더니, 쓸 데 없이 나서?"



석주가 컴컴한 허공을 응시하며 씹어먹듯 말하자, 등뒤의 그림자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어놓았다.



"혹시 석하가 미리 손을 써둔 건 아닌지..."

"..."

"석하가 최석정 그자를 몹시 따른다 합니다."

"..."


석주는 두손으로 뒷짐을 진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석하가 최석정을 잘 따른다는 사실을 승윤이 그놈도 알고 나선 것이겠지.


"석하는 어쩌고 있느냐? 몸은 다 나았고?"

"예...요샌 거동도 좀 합니다."

"그래...석하녀석이랑 친한 놈이...승윤이 말고도 또 누가 있지?"

"체건이가 있지요."

"체건이?"

"예, 그냥 두루두루 친하지만 속을 터놓는 건 그 둘...아니 체건이보다는 승윤이가 더 친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정영의 대답에 석주는 볼 안 가득 차오른 한숨을 입가로 흘려내며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남산은 자신의 것이지만, 하늘은 석하의 것이던가, 그리고 천하는 전하의 것이던가...그렇게 김석주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사이 밤은 더욱 이슥해졌다.


"병판대감! 병판대감! 큰일났습니다!"


갑자기 훈련대장은 물론 좌우포청 포도대장들까지 사색이 되어 군병 사, 오십을 이끌고 달려왔다. 김석주는 의아한 얼굴로 재산루 아래를 굽어보았다. 뭔가 또 일이 벌어졌다?


"무슨 일이냐?"

"같이 가보셔야..."


좌포청 포도대장이 말끝을 흐렸다.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김석주의 노화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김석주는 미간을 꿈틀대며 훈련대장 유혁연과 좌우포청 포도대장들을 노려보고 재산루 아래로 내려왔다.


깊은 밤중이라선지, 그 육중한 몸이 계단을 내려오느라 쿵쿵 울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컸다. 세사람은 그저 차갑게 식은 손을 쥐었다 폈다, 맞잡았다 놓았다 하며 안절부절했다.


유혁연의 안내로 김석주가 박정영 등 수하들을 거느리고 돈화문 앞에 이르렀을 땐, 이미 병조정랑이 창백해진 얼굴이 되어 군병 스무명과 함께 돈화문 앞을 지키는 참이었다.


"벼, 병판대감..."


분위기가 정말 요상했다. 병조정랑이 김석주 자신을 보고 입이 벌어져선 마른침을 꼴깍 삼키느라 어깨죽지까지 들썩였다. 김석주는 병조정랑에게서 눈길을 떼어 돈화문을 쳐다보았다. 웬 벽서가 붙어 있었다.


"벽서라?"


이미 강화도에 흉서가 나도는 마당에, 또한 숭례문 앞에도 흉서가 나붙은 마당에, 다시금 돈화문에 벽서가 나붙었다. 헌데도 아무도 그 벽서를 뜯어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판이다. 석주는 아랫입술을 가만히 씹으며 등뒤의 박정영에게 눈짓했다. 박정영이 날랜 동작으로 벽서를 뜯어서 김석주에게 바쳤다. 석주는 가만히 벽서를 펼쳐서 재빠르게 읽어내렸다.


남인은 혼탁하고,

서인은 원망하니

인심은 이반하고,

종사는 위급하다.

강도江島(강화도)에서 계책을 세운

김씨성을 가진 힘쎈 무사가

남산의 큰집에 숨어 있으니

큰 변이 박두하였다.

북부에 사는 선비의 종 거창을 찾아 심문하면

그 진상을 알 수 있으리라.


훈련대장, 좌우포도대장 이하 모두가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것이 김석주의 시야에 잡혔다. 병조정랑마저 숨죽이고 눈치를 보는 참이었다.


"강도에서 계책을 세운..."

"..."

"김씨성을 가진 힘쎈 무사가 남산의 큰집에 숨어 있다..."

"..."

"남산의 큰 집이라...나 말인가?"


김석주는 피식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강도에서 계책을 세운, 그 배후가 자신이라 지목하는 글이었다. 김씨성을 가진 힘쎈 무사...말이 무사이지, 병권을 쥔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남산의 큰집이라니, 누가 봐도 자신이라 고변하는 글이었다.


영상대감,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김석주는 다시금 벽서를 내려다보았다. 강도에서 계책을 세운 김씨성을 가진 힘쎈 무사가 남산의 큰집에 숨어 있다...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정영아, 채비를 하자꾸나. 체건이 놈을 데리고 강화도에나 다녀와야겠다."

"나으리? 지금요?"

"축성현장을 둘러볼 겸...겸사겸사..."


석주는 말끝을 어물쩍 흐리면서 비릿한 비웃음을 지었다. 그런 석주를 보며 정영은 의아히 두눈을 반짝였다. 하필 흉서의 배후로 지목한 벽서가 돈화문에 나붙었는데도, 왜 느긋하게 강화도나 다녀오겠다는 건지. 하지만 누구보다 심기가 깊은 상전이었다. 그 속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시키는대로 따라야만 했다.


"그래. 내가 체건이놈을 데리고 강도에 다녀오는 동안 믿을 만한 놈을 시켜 석하 그놈 뒤를 밟아. 승윤이 그놈이 최석정을 빼돌렸으면, 석하 그놈한테 연락을 취할테니."

"예."


김석주는 고개를 돌려 돈화문을 쳐다보았다. 어전에 나아가 이 벽서를 고해야만 한다. 생각만 해도 가시가 두눈에, 콧구멍에, 입속에 틀어박히는 느낌이었다.


허적이 먼저 선수를 쳤다. 서로 손을 잡은 채로 먼저 뒷통수를 칠 기회만 노리다가, 허적에게 선수를 뺏겼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할 자신도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벽서를 꼬깃하게 움켜쥔 채로 통명전 동온돌로 향했다.


"강도에서 계책을 세운 김씨성을 가진 힘쎈 무사가 남산의 큰집에 숨어 있다..."


숙종은 김석주를 통명전 동온돌에서 독대했다. 양화당에서 입직승지를 불러 함께 면대하려 하였더니 김석주가 화급을 다툰다며 부득이 동온돌에서 알현하겠다 청한 것이었다. 승지들이 쫓아오기 전에 서둘러서. 헌데 벽서에 적힌 글귀가 너무도 위험했다.


"외숙이 강화흉서의 배후요?"


왕이 단도직입으로 파고드는 질문에 김석주는 코끝의 헛숨을 들이켰다. 입안 가득 껄끄러운 모래를 삼킨 느낌이었다.


"어찌 신이 감히 전하께 역심을 품겠나이까?"


석주가 고개를 조아리고 조용히 답하였지만, 왕은 그저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의심 짙은 눈길을 거두지도 않았다.


"하기야 외숙이 역모를 꾸미진 않았겠지."

"믿어주시어 황감하옵니다."

"헌데 강화에서 계책을 세운 김씨성을 가진 힘쎈 무사가 남산 큰집에 숨어있다...내가 알기로 여기에 해당하는 건 겨우 둘...김석하, 김석주...둘중 누구요?"

"전하..."

"그게 누구든 배후가 외숙이라는 소리가 될 터."


이미 이리로 오면서 김석주도 각오한 바였다. 그는 차분하게 응수했다.


"누군가 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자의 소행입니다. 그 벽서에 적힌 거창, 그 주인과 원한관계나 금전관계가 얽힌 자를 우선 찾아보시옵소서."

"그래야겠지. 하지만 외숙은 나서지 마시오."

"예, 잠시 강도에서 축성 현장을 살펴보고 오겠나이다."


벽서 일에 나서지 말고 자중하랬더니 아예 한술 더 떠 나가 있겠다니. 숙종은 의아히 김석주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는 병판, 아니 외숙이 도성을 비우면, 바로 부제학 민점이 옥당 관원들을 이끌고 송시열을 죽이라 나설 터인데? 그동안 저들이 병판에 눌려 참았을 뿐, 병판이 없어지면 바로 고개를 디밀고 나설 거요. 사헌부, 사간원과 똑같이."

"하는 수 없지요."


김석주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신이 강도로 떠나려는 이유를 이미 왕이 눈치챈 듯 싶었다.


며칠 자리를 비운 사이, 홍문관마저 송시열을 죽이라는 상소를 올릴테고, 그럼 왕은 못 이기는 척 송시열의 목숨을 거두면 그만이었다. 그 후에 송시열이 오히려 흉인을 밀고한 인물임이 밝혀지면, 억울하게 송시열을 죽인 죄를 물어 허적의 목숨도 거두고...그것으로 일석이조一石二鳥, 도랑치고 가재잡고, 꿩 먹고 알 먹고...


"그래? 허면 다녀 오시오."


숙종은 김석주를 유독 짙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홍문관을 김석주가 비우면 민점...민점이 홍문관을 이끌고 송시열을 참하라, 내지는 송시열을 도로 불러들여 장 일백을 쳐라...그리 송시열이 죽고 나면 허적이 남고...그렇게 허적만 남겨둘 김석주가 아닌데...


무슨 꿍꿍이요?


김석주는 왕이 눈동자가 유독 짙어진 채로 자신의 뒷통수를 지켜보는 가운데 공손히 일어나서 물러갔다. 마침 왕이 이미 김석주를 독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승지 민종도가 부랴부랴 달려와서 대청 앞에 납작 엎드리고 고개를 쫑긋 세운 터였다.


"다 들으셨소?"

"독대를 막는 것이 우리 승정원의 소임인지라..."

"흥."


김석주는 코웃음을 치고 물러갔다. 자신이 강화도로 떠난다니 좋아 죽는 민종도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물론 그 소식은 조정에 날개 돋친 듯이 전파되어 김석주가 군병을 이끌고 돈의문을 나설 무렵엔 벌써 훈련대장 유혁연이 돈의문 옆에 숨은 채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배웅했다.


"흥, 지금이 기회다 싶겠지?"


석주는 나직하게 혼잣말로 비웃었다. 그 뒤로 정영이 묵묵히 뒤따르는 참이었다. 정영은 의뭉스런 상전의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또 무슨 재미난 일이 벌어지려나 싶어서 기대 어린 두눈을 반짝였다. 그는 등뒤로 또 말 없이 따라오는 체건을 곁눈질로 살피면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다음날로 편전에는 흉서에 대한 온갖 상소들로 넘쳐났다. 괴수 송시열을 죽여라, 살려라...당장 부제학 민점이 홍문관 관원들을 이끌고 올린 상소가 가관이었다.


"곡무호선생토谷無虎先生兎..."


호랑이 없는 굴엔 토끼가 선생노릇 한다더니...숙종은 민점의 등줄기를 흘낏 내려다보았다. 민점은 움찔해서 고개를 들려다 수그렸다. 입술을 달짝이다 말았다. 왕이 자신을 지목한 것도 아닌데 지레 켕겨서 나선다면 망신만 살 일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허적이 슬쩍 고개를 들어 민점을 힐끗 보며 여쭈었다. 홍문관에서 이번에 김석주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잽싸게 올린 연명소를 보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강도에 축성장 이우가 없으니 승장들이 서로 우두머리를 자처한다지. 그야말로 호랑이 없는 굴이 되어 내 병판을 보냈소."

"아, 그런 뜻이옵니까?"


허적이 반문하자 숙종은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차갑게 답했다.


"다른 뜻이 있겠소?"

"..."

"헌데 그간 대제학 김석주가 있던 홍문관은 송시열에 관해선 가만히 침묵을 하더니 김석주가 도성을 비우자마자 입장을 바꿨군?"


숙종의 날카로운 질문에 민점을 비롯한 홍문관 관료들이 할 말을 잃었다. 그간 김석주가 위에서 찍어누르는 통에 연명소를 올리지 못했을 뿐, 열번이고 백번이고 쓰고 싶은 일이었다. 송시열을 참하라...


"전하, 감히 체이부정을 논한 송상민도 송시열의 문하, 또 종통실서를 논한 흉인도 송시열의 문하일 것이옵니다. 역도들의 괴수인 송시열을 참하시옵소서."


허적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던 김석주가 도성을 비운 지금이 적기였다. 송시열의 목을 딸 기회.


"혹여 연관이 있는지, 송시열을 불러다가 매로 다스리고 돌려보내시옵소서. 자고로 민심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을 때는 이미 귀양 간 자라도 다시 불러 장 일백을 치고 돌려보낸 전례가 많사옵니다."


권대운도 곁들이는 말을 들으면서 숙종은 턱을 엄지와 검지, 그 두 손가락샅으로 쓱쓱 문질렀다. 괜히 간지러운 것이, 수염이 나려나 싶었다.


"불윤. 송시열의 목숨은 함부로 거둘 수 없소."


왕의 반대에 허적과 권대운을 비롯한 신료들이 당황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지금 왕이 반대한 것 맞나? 그럴 리가. 꿈에서도 송시열을 죽이고 싶어하는 왕인데. 지금이 송시열의 목숨을 거둘 기회인데. 김석주는 아예 멍석까지 깔라고 자리까지 비켜주었는데. 하지만 아무리 귀를 의심해도 왕의 두눈은 그저 차갑기만 했다.



"전하...?"


"송시열이 이 모든 일의 배후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는가? 증거 없이 그저 심증 만으로 송시열을 불러다가 장형 또는 참형을 집행하라, 그리 한 연후에 송시열이 결백하였다는 정황이 드러나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겠는가? 영상이 지겠는가?"


"..."


"영상이 죽음으로 갚겠다면, 내 지금 얼마든지 송시열에게 죽음을 내리지."


"..."



허적은 서릿발 같은 왕의 눈길 아래 입을 닫았다. 김석주가 자신만만하게 강화도로 떠났다. 왕은 송시열의 목숨을 거두기를 거부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제 와서 불안이란 놈이 자신의 간담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한다. 잘려진 귀퉁이...혹시라도 그게 이번 일에 송시열이 무관하다는 증거가 된다면...



"영명하신 판부이십니다."


"영상...?"



판의금 오시수가 경악하여 허적을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신료들 모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으로 허적을 돌아보았다. 지금이 송시열의 목을 딸 절호의 기회인데, 갑자기 허적이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을 바꿔서 왕의 결정에 승복했다. 아니, 당장 송시열의 뼈를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기세였던 왕이, 하루아침에 송시열의 죄많은 목숨을 붙여두려 한다.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오시수는 허적의 얼굴을 돌아보고, 부제학 민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김석주의 농간이 있다, 확실히...




오늘도 놈은 정오가 되니 자리를 비웠다. 오늘이 최석정 자신이 정신을 차린지 만 사흘이나 지난 날이었다. 그간 산중턱에서 희미하게나마 정오의 종소리가 들릴 때면 승윤이가 자리를 뜨는 터였다.


지금이 바로 금쪽같은 기회다.


석정은 횃대에 걸린 자신의 옷가지며, 그림, 그리고 석하가 만들어준 목침을 허둥지둥 챙기고서 방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나마 그동안 먹어둔 것이 있으니, 사흘전 보다는 다리에 힘이 펄펄 넘쳤다.


석정은 단숨에 두타산자락을 뛰어내려갔다. 놈이 자신을 해칠 의도는 없어보이니 그냥 여기 두타산을, 진천을 뜨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두타산자락을 내려간 석정의 눈앞에 또 다시 돌더미 같은 지네다리가 나타났다. 이 농교가 왜...아니, 내 다리가 왜 또...습관이 무서운 건지,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밟아보고 싶은 건지, 칠백년을 버텨온 돌다리의 저력을 두발로 느껴보고 싶은 건지.


"뭐하세요?"


갑자기 들려온 승윤의 목소리에 석정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농교 저편에서 승윤이 가래로 땅을 짚고 서서 이쪽을 쳐다보는 참이었다. 석정은 굳은 얼굴로 애써 웃으면서 답하였다.


"어, 꼭 한번 밟아보고 싶은 다리라서. 칠백년도 넘은 다리잖나."

"아...도망치려는 게 아니구요?"



승윤의 시선이 석정의 팔에 걸린 포의와 그림, 그리고 손에 들린 목침에 쏠렸다. 목침까지 챙기고서 그저 다리를 건너보려 한다는 말을 둘러대다니. 세살 먹은 아이도 속지 않을 뻔한 거짓말이었다.



"도망치려 하였으면 내가 뭐하러 이 아래로 왔겠나."

"도망치기 전에 꼭 한번 건너보고 싶으셨겠죠."

"아니라니까..."


석정이 부인하는데, 맞은편에서 승윤이 돌 하나를 가래 끝으로 툭 밀어냈다. 석정은 분노로 두눈을 지릅떴다.


"너...이게 어떤 다린데..."

"뭐, 뭐요..."

"네 이놈...너..."

"계속 건너와 보시든지."

"너, 너 이놈..."

"그냥 얌전히 저 산자락에 죽어, 아니 숨어계시라구요. 내가 아저씨 빼돌린 거 우리 멧돼지가 알면 골치아파지는데."

"뭐?"


석정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되물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한발 내딛은 것을 보고 승윤은 다시 창끝으로 돌 하나를 툭 건드렸다.



"나으리 한 발짝에, 돌 하나씩."

"..."


그 한마디에 석정은 다리에 쥐가 나기라도 한 듯 얼어붙었다. 자신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돌을 하나씩 치워버리겠다는 말이 그저 가증스러웠다. 자신의 두발을 지네다리 위에서 한발짝도 떼지 못하게 만들 만큼.


"..."


석정이 그 자리에 걸음이 못박혀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승윤은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달아나고 싶을 텐데도, 다리가 훼손될까 저어되어 그냥 자포자기하고 꼼짝도 않다니. 승윤은 웃음을 삼키며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협박이 통한다. 그래서 더 이 사람은 믿을 수가 있다. 구하길 잘했다. 승윤은 자신이 치워놓은 돌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석정 모르게 소맷자락에 그려둔 돌다리의 그림을 내려다 보았다. 이 다리가 어떤 다린데 훼손할까. 하지만 석정을 제 발로 이 진천을 못 떠나게 만들려면 이 정도 협박은 해줘야만 했다. 지금 조정은 송시열과 허적, 김석주와 허목까지 모두가 끼여들어 한바탕 회오리가 부는 판국이기에.


"통通!"



갑자기 석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정은 두눈을 크게 뜨고 눈앞을 쳐다보았다. 뭐? 통? 뭔 통? 이놈이 여기가 무슨 성균관인 줄 아나. 싱그럽게, 하지만 석정의 눈엔 징그럽게 석하가 웃으면서 바람결에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농교 위를 걸어왔다. 그리고 석정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저희 귀문龜門의 손님이 되셨습니다."


작가의말

실제로 또 다른 벽서가 궐문에 나붙었고, 강화도에서 계책을 세운 김씨성을 가진 힘쎈 무사가 남산 큰집에 숨어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벽서가 김석주를 지목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스토리 전개상 김석주를 가리키는 걸로 전개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1.26 09:22
    No. 1

    고단수의 정치가들...
    권모술수라는것도 어지간한 머리로는 하기 어려울듯 싶습니다
    '천지인'을 봐야 허는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1.30 15:54
    No. 2

    그러게요. 권모술수를 다루느라 쓰는 저만 힘듭니다. 천지인은..보신 거 아닌가요? ^^; 귀문 얘기에 바로 천지인을 떠올리신 건가 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1.26 15:41
    No. 3

    조정 권력자들의 권모술수에 작가님의 머리가 아프시겠습니다.
    저야 읽는 재미가 있어서 좋지만요 =)

    귀문이 천지인에 나오는건지 아닌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 ㅠㅠ
    찾아보러 가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1.30 15:55
    No. 4

    네, 머리가 하얗게 타는 것 같습니다. ㅠㅠ

    귀문은 천지인에 나오는 게 맞습니다만. 근거지는 진천이 아닙니다. 아직 귀문이 자세히 나오지 않을 때라...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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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해의 그림자 153 +4 13.12.25 3,128 35 39쪽
153 해의 그림자 152 +4 13.12.22 2,491 43 35쪽
152 해의 그림자 151 +6 13.12.17 3,966 102 37쪽
151 해의 그림자 150 +5 13.12.13 2,122 36 38쪽
150 해의 그림자 149 +6 13.12.09 1,971 30 38쪽
149 해의 그림자 148 +6 13.12.04 2,107 34 36쪽
148 해의 그림자 147 +8 13.11.29 1,968 35 37쪽
147 해의 그림자 146 +10 13.11.25 2,623 30 37쪽
146 해의 그림자 145 +11 13.11.21 2,295 30 33쪽
145 해의 그림자 144 +5 13.11.16 2,287 33 34쪽
144 해의 그림자 143 +5 13.11.12 2,680 32 31쪽
143 해의 그림자 142 +8 13.11.07 3,089 32 24쪽
142 해의 그림자 141 +6 13.11.05 1,872 37 39쪽
141 해의 그림자 140 +6 13.10.30 2,350 61 38쪽
140 해의 그림자 139 +6 13.10.26 1,973 41 33쪽
139 해의 그림자 138 +6 13.10.23 3,544 33 34쪽
138 해의 그림자 137 +6 13.10.20 3,222 41 34쪽
137 해의 그림자 136 +8 13.10.18 2,101 37 36쪽
136 해의 그림자 135 +8 13.10.13 3,191 36 36쪽
135 해의 그림자 134 +10 13.10.10 2,332 34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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