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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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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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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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23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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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38

DUMMY

이민철은 정3품관들이 선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엎드려서 재배再拜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울음이 치미는 것을 애써 참느라고 목소리가 떨렸다.


"신이...모친상을 당하여...사직단자를 내러...왔습니다."

"..."


숙종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이민철이 사직단자를 내러 왔다. 그것도 모친상이라는 천재지변이나 다름 없는 사유로. 숙종의 짙은 눈동자에서 텅 비어버린 듯한 동공이 비치는 순간, 신료들은 마뜩찮은 눈길로 문간의 이민철을 노려보며 술렁거렸다.


"아니 그걸 들고 올 정신이 있나..."

"그냥 사람 시켜서 승정원에 낼 것이지."

"꼴에 당상관이라 이거지. 관상감 주제에."

"그래도 건너건너 전하의 친인척은 되지 않나. 백강의 서자이면."

"왜들 이러시나. 모친상이라잖나...남의 불행에 같이 걱정해 주진 못할 망정 입방정은..."

"걱정 말게. 저 꺽정이가 같이 걱정해 줄 걸세."

"..."


그러잖아도, 문간 곁에 엎드린 최석정이었다. 쑥덕거림을 들으면서 그는 코끝이 시큰하여 숨을 깊게 들이키고, 또 입가가 알큰한 걸 느끼면서 입술을 굳게 맞물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자신도 생모와 양모를 둘다 잃고 삼년상까지 치렀다. 심장이 뚫리는 그 고통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장 이민철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아픔도 컸다.


이민철은 백강白江 이경여의 서자였다. 서자 신분이지만, 그 고귀한 백강 이경여의 아들이며, 세종대왕의 7대손이기도 했다. 이번에 모친상을 당하였으니 도성을 나가서 본가인 부여로 내려갈 터였다. 백강의 후예들이 모인, 백강白江(백마강) 유역으로.


최석정으로선 함께 소각에서 성혈 탁본을 살피면서 밤낮을 보내던 이가 하루아침에 뚝 떨어져나가게 되었으니, 가슴어림을 베인 것만 같았다. 자신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


최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숙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뻔뻔하게도 자신이 사직단자를 내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뭔가 할 일이 있다는 소명감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도승지가 문간으로 다가가서 이민철에게서 사직단자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숙종에게 공손히 전하였다.


숙종은 손안에 들어온 사직단자를 들여다보고 두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은 감수성이 메마르지 않은 탓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한 채로 숙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쪼록...잘 다녀오시오."

"송구...하옵니다."


왕의 음성이 빗물 먹은 창호지처럼 후들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민철은 감읍하여 눈시울을 붉히면서, 그 자리에서 두번 절하여 하직인사를 올렸다.


최석정은 두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왜 햇살이 이토록 강렬하게 짓쳐들어오는 건지. 이민철이 도로 방갓을 쓰더니 강렬한 햇살 속을 뚫고 편전 밖으로 사라졌다.


"최석정의 상소에 관한 계사들을 모조리 가져와라."


왕은 서안에 이민철의 사직단자를 내려놓고 명하였다. 편전 안을 에워싼 신료들은 모두들 의아하여 고개를 슬그머니 틀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까지 왕이 최석정에 관한 상소를 처리할 때와는 자못 분위기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뭔가 꽉 막혔던 물꼬가 트이는 느낌이었다.


"예 전하."


도승지가 얼떨떨히 답하고는 향안 옆에 시립해 있던 우부승지에게 눈짓했다. 우부승지 역시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왕은 이번에도 수락하지 않을 태세였다. 분명히 불윤이란 두글자가 들리다가 말았다. 하지만 이민철이 사직단자를 내어놓고 가자, 왕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뭔가 최석정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보인 것이었다.


우부승지가 승정원에 다녀와서 소반 위에 상소더미를 수북하게 쌓아서 들고 왔다. 숙종은 어처구니가 없는 눈빛으로 소반 위를 쏘아보았다. 우부승지가 다가오자 도승지가 받아들다가 소반이 기우뚱하며 그만 두루말이 하나를 떨어뜨려버렸다.


"어. 조심 좀 하시지..."


우부승지가 얼른 줏어서 소반 위로 올려두자, 도승지는 짜증스레 소반 위를 흘겨보았다. 지긋지긋하게, 징글징글하게 많은 상소였다. 최석정이 송시열과 김수항을 신구하는 상소를 올린 날이 윤 3월 초여드레, 그리고 오늘은 5월 28일이니...만 석달이 되어가는 참이었다. 그것도 열흘만 채우면 만 석달.


그가 입술을 비죽이며 왕 앞의 서안에 소반을 올려두었다. 한눈에도 곤룡포 흉배를 가릴 만큼 수북한 상소더미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셋..."


열 세건이나 상소가 쌓였다. 숙종은 상소를 세어보곤 서안에 쌓인 3건의 서계도 올려놓고 합쳐 세었다.


"열넷, 열다섯, 열여섯..."

"..."


듣는 신료들의 입도 쩍 벌어졌다. 두달 반을, 무려 열여섯 차례나 왕에게 아뢰어 최석정을 원찬시켜라, 문외출송시켜라 간하였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총 십육계十六啓인가..."

"..."

"망극하옵니다."


십육계라니! 십육계라니! 십육계라니! 신료들이 할 말을 잃은 사이, 최석정이 엷은 미소를 띠고 답하였다. 입안 가득 쓰디쓴 소태를 삼킨 것 같았지만 그는 마른침을 힘겹게 삼키면서 환히 웃었다.


그동안 잘 버텼다 최석정.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을 토닥였다. 왕이 어떤 결정을 내릴 지 너무도 잘 알았다. 천문도 복원은 이민철과 함께 추진하는 일이었다. 이민철과 함께 있어야만 했다. 이제 여막살이를 하러 도성을 나가는 이민철을 따라 자신도 궐을 나가야만 했다.


"최석정을 삭탈관직하여...문외출송한다."


매운 가자미식해를 한입 가득 삼킨 듯한 왕의 옥음을 들으면서, 최석정도 코끝에 매운 기운이 서렸다. 코끝이 찡해왔다.


무려 두달 반이 넘도록, 석달이 되어가도록, 자신을 찍어내려는 신료들을 상대로 왕이 얼마나 힘들게 버텨주었는지를 스스로도 잘 알았다. 첫딸을 잃고, 불과 사흘만에 편전에서, 자신을 원찬시키라는 신료들의 압박도, 문외출송시키라는 간언도 모두 물리치고 버텨왔던 왕이었다. 왕은 지금껏 한계를 넘은 신뢰를 자신에게 보여주었다.


"드디어!"

"어후우!"

"흥...이제야...!"


남인들은 물론 김석주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했다. 더러는 턱관절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웃음을 애써 가렸고, 또 더러는 대놓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활짝 웃었다.


"참으로 영명하신 결정이시옵니다."

"드디어 황극의 법을 되찾으셨나이다."


석달 묵은, 아니 삼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처럼, 앓던 이가 쏙 빠진 것처럼 마냥 통쾌해 하는 남인들의 눈길이 최석정에겐 온통 가시덤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로선 소각에 널브러진 성혈 탁본들을 미처 정리도 못한 채로 바로 궐문을 나서고, 또 성문을 나서야 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이제 그 청단령은 입을 일이 없으니 나한테나 빌려주시게나."


우의정 민희의 아들 민취도가 문간에 선 채로 최석정을 힐끔 내려보며 이죽거렸다. 최석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삼정승조차도 친지들의 관복을 빌려입거나 빌려주거나 하는 것은 예사였다. 청단령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청단령은 함부로 빌려줄 수 없었다.


"이건 전하께서 하사하신 거라."

"..."


최석정은 민취도의 입가가 실룩이는 것을 보고, 품에서 차곡차곡 접은 장지와 행연을 꺼내어 그 자리에서 열십十자 아홉개를 3행 3열로 나누어 썼다. 어떻게 보면 석삼三자를 쓰고서 또 내천川자를 교차시킨 모양이었고, 또 어떻게 보면 밭전田자의 각획들이 뻗어나간 모양이었다.


十十十

十十十

十十十


"뭐하는 짓인가?"

"..."

"십십십, 십십십, 십십십, 구십?"


민취도가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최석정은 굳이 답할 마음이 없었다. 아예 간단한 글도 일필휘지로 덧붙여놓았다.


그는 붓을 손에서 놓고 그 자리에서 숙종에게 고개를 조아려 정중하게 큰절을 한번, 두번...재배再拜를 올렸다. 코끝이 시큰했다.


"..."


숙종은 목울대가 금세 부어올랐는지 목젖이 출렁거릴 정도로 힘겹게 침을 삼켰다. 동시에 두명의 신하를 떠나보내게 생겼다. 아니, 그 전엔 허목이었던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허목이야말로 정말로 영영 떠나보내는 것이었고, 이민철과 최석정은 언제라도 때가 되면 다시 불러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당장 손가락을 잃은 것처럼 쓰라렸다.


숙종은 두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최석정을 지켜보았다. 주섬주섬 붓과 행연을 챙겨서 품속에 넣고, 그대로 자신이 있던 자리에 괴상한 글을 남겨두고, 최석정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간으로 걸어나갔다. 편전에 잇닿은 줄행랑이 그 앞에 펼쳐졌다.


저렇게 어깨가 좁았던가. 저리도 말랐던가. 저다지도 홀쭉했던가. 객지생활을 버틸 수나 있을까나.


구겨진 옷자락을 손바닥으로 착착 펴는 뒷모습이 숙종의 동공에 틀어박히는데, 마침 문간에서 민취도가 최석정에게 빈정대었다.


"저 요상한 건 뭔가?"

"..."

"뭐냐니깐!"


최석정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어 옆얼굴만 보이고 답하였다.


"한번 풀어보시오."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닐세."

"..."


민취도는 움찔해선 눈길을 돌리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최석정은 피식 웃으며 유심히 민취도를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똑바로 하여 눈앞에 펼쳐진 줄행랑을 쳐다보았다.


"아쉽군요. 십육계啓...이왕이면 스무번을 더하여, 삼십육계三十六啓를 채웠으면 좋았을 것을..."

"저, 저..."


문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듣고 눈썹이 꿈틀했다. 이미 최석정은 의연하게 행각사이로 걸어나가는 참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남인이었다. 열여섯번도 끔찍하게 지겨운데,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한데, 스무번을 더해서 삼십육계를 채웠으면 좋았을 것이라니. 그 자리에서 신료들이 술렁거리면서 귓속말로 최석정의 말을 묻고 또 전하였다.


"뭐라는 거요?"

"스무번을 더해서 삼십육계를 채웠으면 좋았을 거라나 뭐라나."

"허! 뻔뻔한 놈 같으니! 삼십육계!"

"우리가 지깐 거 때문에 삼십육계나 올려야 한다는 거야 뭐야!"


발끈해서 민희, 권대운, 윤휴, 홍우원이 행각 쪽을 돌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 순간 왕의 서늘한 옥음이 그들의 목줄기를 후려쳤다.


"십육계 줄행랑! 삼십육계 줄행랑! 못 알아듣겠는가?"

"..."

"최석정은 십육계啓만에 저 줄행랑을 아주 떠나는 심정을 삼십육계三十六計 줄행랑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머리가 굳은 그대들에겐 너무 어려운 희언戱言(말장난)인가?"


숙종이 눈앞에 펼쳐진 줄행랑을, 그 신도를 걸어가는 최석정의 뒷모습을 직시하며, 날선 눈웃음으로 말하였다.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이제들 속이 시원한가? 하고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희희낙락하는 얼굴들을 보니 묻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로 신물이 났다. 자웅난변이란 말이 다시금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인이나, 남인이나...색깔이 다른 정당 소속은 아예 발도 디밀지 못하게 하려고 필사적인 꼬락서니가 이제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


신료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잇새에 고기찌꺼기라도 낀 것처럼 입주위가 실룩였다.


머리가 굳었다니...왕의 독설이 너무 지나쳤다. 그래도 자신들이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하니 왕보다 나이도 조부, 증조부뻘인데. 집에 가면 다들 주상만한 아들이나 손주, 심지어는 증손주까지 있는 마당에.


"황공하옵니다 전하...신들은 비록 늙긴 하였사오나...머리가 굳지는..."

"흥, 최석정이 내고 간 문제를 풀어내면, 그대들의 머리가 굳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겠소."


숙종은 차갑게 응수했다. 이민철과 최석정을 한꺼번에 눈앞에서 떠나보낸 사실에 심기가 심히 불편했다. 기어이 최석정을 찍어내곤 히히덕 웃는 모습을 보니 비위가 뒤틀려 무슨 말이든 여과 없이 그대로 내뱉고 싶어졌다.


"하오나 너무나 해괴한 수수께끼 같은 것이오라..."


최석정이 있던 자리에서 종이를 집어든 민취도가 두눈이 어지러이 흔들리며 어물어물 답하였다. 채 말도 잇지 못한 채로. 당장 어탑 가까이에 꿇어엎드린 아비가 인상을 쓰며 눈총을 보냈지만 그는 정말로 풀어낼 수가 없었다.


"이리 가져오거라."


민희가 껄끄러운 음성으로 짜증스럽게 민취도에게 손짓했다. 민취도는 채 먹물이 마르지 않은 손안의 종이를 난처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내려다보곤, 손바닥에 먹물이 묻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정신 없이 가져왔다.


"대체 어떤 문제기에..."


짜증스레 받아들고 종이를 들여다본 민희의 눈가가 꿈틀댔다. 십육계니 삼십육계니 말장난을 쳐놓던 최석정이, 또 웬 희한한 숫자장난을 쳐놓은 모양이었다.


민희는 한순간 울혈이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보다 스무살은 어린 아들이 풀어내지 못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받아들고 보니 눈앞이 한순간에 침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쉰 초입에 들어선 도승지 이하진은 민희 부자를 언짢은 기색으로 쳐다보곤, 치미는 한숨을 입밖으로 내뱉지 않고 코로 겨우 흘려내고 민희 앞으로 다가들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도 한번 보지요."

"자네가 본다고 알겠나."


민희는 도승지를 흘겨보곤 쪽지를 그 무릎 위로 툭 내던졌다. 도승지는 입꼬리를 슬몃 비틀어올리고 집어들었다. 하지만 기세좋게 종이를 펼쳐들자마자, 그 역시도 점점 눈앞이 침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왕의 옥음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알아보겠는가?"

"...."

"일단 큰 소리로 읽어보라."

"예? 예..."


도승지 이하진은 좌중을 둘러보며 어느새 입안 가득 고여버린 쓴침을 겨우 넘기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열십十자를 세개씩 세줄씩 쓴 모양이옵니다."

"뭐라? 열십자만?"

"예. 그 아래, 적힌 문장은 삼삼십자작, 사십오자용, 오자각득팔십오수, 구궁공득칠백팔십오수로...서른세자로 만들고, 사십오자로 부리고, 다섯자로 각각 팔십오八十五 수를 얻고, 아홉궁, 아홉집은 모두 합쳐 칠백육십오七百六十五를 얻는다...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이하진이 낭랑하게 낭독하자, 신료들은 더러는 그 자리에서 손가락으로 박석 바닥에 그려보기도 하고, 또 더러는 품에서 행연과 붓, 접은 종이를 꺼내어 그대로 받아썼다. 그리고는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뭐지?"


숙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상 적고 보니 숙종은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十十十

十十十

十十十


三十三子作

四十五子用

五子各得八十五數

九宮共得七百六十五數


한번 보니 단순한데, 두번세번 보니 복잡했다. 최석정이 그간 곧잘 마방진을 풀어내고, 또 지어낸 것을 익히 아는 터라, 그저 마방진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마방진이라곤 그저 밭전田자 형태의 모서리마다 숫자 9개를 배치한, 혹은 입구口와 우물정井자를 합친 것 같은 형태의 칸칸에 숫자 9개를 배치한, 기초적인 정전도井田圖가 고작이었다.


十자구궁진?


숙종은 十자의 중앙에 평소 최석정이 즐겨쓰던 낙서洛書의 배열을 적어보았다.


四九二

三五七

八一六


그런데 써놓고 보니 또 밭전田자의 바깥 모서리가 비었다. 삼십삼자에서 아홉자를 채우니 역시나 스물네자가 비었다...총 서른세개의 자릿수를 채워서 풀어보라는 문제였다.


"이건 또 뭐야, 다섯자로 팔십오 수를 얻는다?"

"숫자 다섯개를 더하면 85가 된다."

"아홉궁으로 칠백팔십오 수를 얻는다?"

"아홉궁을 모두 합치면 765가 된다?"


민희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갸웃할 때마다 김석주가 제깍제깍 뜻을 해석했다. 민희가 짜증스럽게 김석주를 돌아보았다.


"누가 그걸 모르나!"

"혹여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봐서요."


김석주가 뻔뻔한 눈웃음을 지었다. 민희는 아예 속이 느글느글하다 못해 부글부글 끓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최석정이 적어놓은 수수께끼를 풀어보려 정신을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록 자꾸만 장벽에 부딪혔다.


"에잉, 누가 최명길 손주 아니랄까봐! 조잡한 숫자놀음은..."

"주역의 심오한 원리가 숨은 마방진이라면?"


민희가 짜증이 울컥 나서 푸념을 하다가 숙종의 핀잔에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주역이라면 비웃을 수도 없었다.


숫자놀음을 좋아했던 최명길이 세상을 떴을 때가, 자신이 서른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최명길이 청국에서 온갖 산학 관련 서책들을 들여온 것을 그도 아는 터라 자신도 모르게 최명길이란 이름을 들먹인 것이었다.


조손이 대를 이어 여러 신하들을 희롱하고 농락하는 느낌에 기분이 가히 좋지 않았다.


"풀어낸 자가 있는가?"


숙종이 고요히 물었다. 그 음성이 모두의 등골이며 식도까지 얼음물처럼 훑어내렸다. 제 아무리 두눈을 깜빡이고, 또 더욱 힘을 주어 들여다봐도, 그저 알쏭달쏭할 뿐,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마방진 중에서도 구궁진 같사온데..."


겉보기엔 너무도 간단하고 단순한데. 도승지 이하진이 당혹스런 음성으로 머뭇머뭇 대답했다.


"하오나, 이런 십자구궁진은...처음 보옵니다. 양휘산법에도, 산법통종에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양휘산법? 산법통종?"

"그게...양휘산법은 중국 남송 때의 양휘가 저술한 책이옵고, 산법통종은 명말의 정대위가 저술한 책으로...둘다 천하의 마방진을 총망라하여..."


대답하던 이하진의 음성이 콱 잠겼다. 자신도 산법 책은 들추어보았다. 집에 있는 열아홉살 난 아들 잠潛이 평소에 온갖 예학과 경학에 통달한 데다 잡서들까지 두루 섭렵하는 참이었다. 너무 재주가 드높아서, 그 덕성이 얕을까 저어되어, 앞으로 10년은 대과를 보지 말라고 못박아둬야 할 정도로.


하지만 집에 가서 아들한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사람 피를 거꾸로 돌게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풀 수 없다, 이건가?"

"..."


숙종의 물음에 도승지 이하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황화방에 웅크린 잠룡潛龍같은 내 아들, 잠潛이라면 풀어내지 않을까...그는 최석정의 재주에 온몸의 신경이 뾰족히 곤두서고, 또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저 대를 이은 자신의 아들에게 기대를 걸어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디에도 없는 마방진, 구궁진이라 이건가?"

"..."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마방진은 처음 보았다. 겉보기엔 단순한 구궁진인데 정말로 머리가 굳었는지 풀어낼 수가 없었다. 작고한 윤선도나, 와병 중인 허목이라면 풀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나마 송시열보다는 트인 윤휴라면 풀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윤휴마저도 입을 꾹 닫고 십자구궁진을 쏘아볼 뿐이었다. 단시간내에 풀어내진 못할 것임을 이미 눈치챈 탓인지, 그는 붓도 잡지 않았다. 윤휴마저도 처음 보는 마방진이었기에.


모두가 침묵한 채로 조용한 걸 보니, 이 자리에 풀어내긴 커녕 눈대중으로도 귀동냥으로도, 저 구궁진을 아는 자가 없는 건 분명했다.


"그 두 책에 없다 하여, 천하에 없다고는 말할 수 없사옵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그대들은 모른다?"


집요하게 따져 묻는 숙종의 음성에, 이하진은 순식간에 온몸에 머리털이 다 빠지고 잇몸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었다. 섣불리 답했다간 같은 남인들의 공적이 될 판이었다. 이미 지금의 대답 만으로도 눈총이 따갑게 박히는 참이었다.


"그대들이 내쫓은 존재가 어떤 인재인지, 이제는 좀 알겠군?"

"..."

"파좌. 그거, 이리 주고, 이만 나가들 보라."


도승지 이하진에게 최석정의 문제를 내어놓고 가라고 턱짓으로 말하는 숙종의 음성은 마냥 서늘했다. 어쩔 수 없이 최석정을 축출한 지금은, 남인들의 자존심이나마 최대한 축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틀어 가슴에 켜켜이 쌓인 한숨을 내쉬고, 또 내쉬었다. 자신이 앉은 옥좌 옆에 놓인 좌등座燈(안에 초나 등을 넣어 밝히는 용도로 목재로 만든 미닫이장)이 숙종의 눈꼬리에 살며시 걸렸다.


이렇게 보니, 이 좌등 역시 지난날 중궁이 만들었던 초롱처럼 ㅗ자와 ㅠ자가 절묘하게 겹쳐진 듯한 모양새였다. 결국은 언문은 곧 천문...그 구조가 우물井 속에서 동서남북十을 점하고 하늘을 보는 의미였던가...


"여기...있사옵니다."

"나가보라."

"예 전하."


최석정이 직접 쓴 걸 도승지가 올려두고 힘없이 나서는 순간 숙종은 다시 손을 뻗어 와락 움켜쥐었다.


몇시진은 갈증에 시달리던 사람처럼, 허겁지겁 마방진을 살펴보고, 숙종은 다시 좌등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번갈아 쳐다보니 구궁진에 숨은 그림이 갑자기 우물정井자와 열십十자로 분리되어 눈앞에 둥둥 떠올랐다. 그리고는 다시 포개졌다.


설마...이거...?


숙종이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신료들은 모두 나가버리고 없었다. 왕이 아직 편전에 있는데 누구 마음대로 감히 편전을 나갔냐고 탓해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축객령을 내린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찾는 사람을 불러올 사람 조차, 지금은 편전에 없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재산루로 돌아온 김석주 역시, 그저 맥빠진 눈빛으로 김석하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제 아무리 총명한 김석하라 해도, 딱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으니...바로 간단한 덧셈도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기껏 최석정의 수수께끼를 펼쳐놓았더니, 한껏 계산을 틀려놓아서 틀린 곳 투성이였다.


"다섯개씩 더해서 85, 아홉궁씩 더하여 765..."


수수께끼의 요지는 파악했어도, 마방진의 중심인 밭전田자의 자리에 낙서의 배열을 채워넣었어도, 김석하는 산가지며, 수판이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계산을 꼭 중간에서 틀려버리는 게 문제였다.


"돌탱아! 14에다 2, 33을 더했는데 어떻게48이냐? 49지!"

"아, 그런가요?"


피식 웃는 김석하를 보고 김석주는 입술이 파르르, 주먹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하마터면 김석하의 머리를 쥐어박으려고, 그 정수리까지 주먹이 날아갔다가, 그 직전에서 멈춘 채였다.


"야 이놈아! 네놈은 정말, 우리 청풍김문의 수치스런 수치數恥구나!"

"대과에 계산 문제 안나오니, 상관 없다 하신 것은 형님이십니다."

"그래도 이놈아, 이 간단한 건, 이 간단한 건 좀 틀리지 말아야지 않느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신의 족제를 차마 주먹으로 쥐어박지도 못하고서, 그렇다고 김석주는 주먹을 치우지도 못하고, 그저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그러게 생면부지도 아니시면서 왜 굳이 저한테 마방진을 들고 오십니까? 절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그러게 내가 미쳤나 보다. 에이으!"

"..."


김석주는 홧김에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벌떡 일어서선 재산루를 몇바퀴고 서성였다. 그 뒷모습을 김석하는 힐끗 쳐다보고는 얼른 품에서 보자기를 펼쳐서 짐을 쌌다. 김석주는 등뒤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홱 돌아보았다.


"뭐...하는 게냐?"

"이 마방진을 만든 사람이 꺽정이 나으리라면서요. 하여 쫓아가서 스승으로 모시렵니다."

"메이야? 야 이놈아! 너 지금 그놈 따라가겠다는 게냐?"

"진작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거든요."

"아니 이놈이! 내가 기껏 쫓아내었..."


김석주는 화를 버럭 내다 말고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김석하라고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자신도 조가석을 수행해서 최석정의 집을 찾았을 때 어느 정도 눈치를 챈 터였다. 게다가 삼사가 두차례나 연명상소를 올려서 최석정을 성토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형님께는 충분히 배웠으니, 가서 더 배워오겠습니다."

"야 이놈아! 그놈이 널 받아줄 것 같으냐?"


김석주가 노엽고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어림 없는 소리였다. 최석정 그놈은 처음부터 자신을 벌레보듯 쳐다보았다. 겉이 시꺼멓으니 속도 시꺼멓다고, 겉이 뒤룩뒤룩하니 속도 뒤룩뒤룩하다고, 그렇게 경멸하듯 쳐다보는 걸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딴 놈한테 가버리겠다니...


"야 이놈아, 너더러 청풍김문의 수치스런 수치라고 욕 좀 했기로서니..."


그때였다. 재산루 밖에서 사내도 계집도 아닌 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내라기엔 가늘고, 계집이라기엔 굵은, 하지만 젊고 쾌활한 음성이었다.


"계십니까?"


옥신각신 실랑이를 하던 김석주와 김석하는, 재산루 난간으로 상체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하필이면 김두광이었다. 누구를 찾아왔는지, 김석주와 김석하는 어쩐지 껄끄러운 시선으로 두광을 내려다보며, 각자 손가락으로 상대방을 가리켜 보았다.


형님?

아우?


어쩐지 꺼리는 기색을 읽은 김두광이 씨익 웃어보였다. 아무 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이름 석자를 발음하는 그의 입술이 마침내 활짝 벌어졌다.



"소생은 어찌하여..."


졸지에 소각으로 불려온 김석하는 왕의 서안에 놓인 한장의 종이에 입가가 쓰디쓰게 실룩였다. 하필이면 서안에 놓인 것은 천문도도 아닌, 정전도井田圖였다. 그것도 자신이 이리로 불려오기 전에 무려 한시진이나 붙들고 씨름했던, 그 마방진을.


제발.


김석하는 속으로 간절히 고개를 저었으나, 왕은 서안 위로 손을 가져가더니, 곧장 김석하의 무릎맡으로 종이를 툭 던졌다. 그러자 문간에 있던 두광이 얼른 석하의 무릎 앞으로 펼쳐놓았다.


"이건..."

"아까 낮에 사부가 편전에 내어놓고 간, 간단한 마방진 문제다. 이걸 풀어내면 너를 받아주겠다."

"예?"

"그러라고 사부도 이 문제를 내놓고 간 것이다."

"..."


김석하는 입안의 쓴침을 꼴깍 삼켰다. 이미 재산루에서 충분히 씨름을 하고 온 터라, 도저히 풀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왕도 혹시나 하여 자신에게 기회를 주려고 낸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은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풀 수 없는 문제였다.


"송구하오나..굳게 걸린 마방간馬房間(마구간) 빗장은 풀 수 있어도, 이 마방진은 소생으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못 풉니다만."

"뭐라?"


숙종은 너무도 쉽게 자기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김석하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풀 수 없다는 대답은 오늘 처음 들었다. 무릇 똑똑한 자들은 지기 싫은 마음에서도 그리 쉽게 인정하지 않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여기 오기 전에 김석하 역시 질리도록 문제를 붙들고 고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몇날며칠 더 고민하면 모를까, 벌써 포기한다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못난 자기비하 따위 들어줄 마음도 없었다.


"해 보지도 않고 포기를 하다니? 사부가, 내가 기회를 주겠다는데? 어떻게 해보지도 않고?"


사부의 안목이 옳았나보다 생각하며 숙종이 까칠한 음성으로 따지고 들자, 김석하는 쓴웃음으로 답하였다.


"해 보았사옵니다. 여기 오기 전에."

"외숙이 보여줬나?"

"예, 병판대감에게 청풍김문의 수치羞恥스런 수치數癡라는 말까지 듣고 왔습니다."

"수치羞恥스런 수치數癡?"


김석하는 차마 제 입으로 말하기도 민망하여 잠시 뜸을 들이고서 답하였다.


"계산이...안됩니다."

"하! 어이가 없군. 계산이 안돼?"

"망극하옵니다."


숙종은 할 말을 잃었다. 보다 보다 이런 해괴한 놈은 처음이었다. 천문역학에 능통하려면 계산에 능숙해야 한다. 이민철이 첫눈에 인정할 정도로 천문역학지식을 갖춘 놈이, 계산이 안되다니.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보라. 내 눈앞에서 당장."


숙종은 불꽃이 튀는 눈동자로 잡아먹을 듯 석하를 노려보며 명하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해보지도 않고 못한다는 말은 용납이 되질 않았다. 당장 서안을 김석하의 앞으로 밀쳤다.


김석하는 긴장되어 목젖이 꿈틀거릴 정도로 마른침을 삼키고 서안 위 지필묵을 바라보았다. 이왕 여러 사람한테 당한 망신이니, 왕 앞에서 한번 더 당하면 어떤가 싶었다. 그는 두눈 질끈 감고 붓을 잡았다. 그리고는 십자구궁진 요체대로, 점의 교차지점마다 낙서의 아홉수를 적어보았다.


四九二

三五七

八一六


숙종의 두눈이 반짝였다. 이미 그 요체가 주역의 낙서洛書인 것도 알아차렸다니. 아주 맹탕은 아니란 얘기였다. 그럼 그렇지. 이민철의 눈에 든 놈이 그렇게 바보일 리도 없었다. 숙종은 김석하의 붓끝에 더욱 신경을 집중했다.


뜻밖에도 김석하는 조금씩 헤매면서도 한치의 계산실수 없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술술 풀어나갔다. 푸는 김석하조차 의아해서 계속 두눈을 깜빡일 정도였다.


"어? 왜 이렇게 잘 되지?"

"..."


숙종은 기가 막혀서 김석하를 노려보았다. 수치스런 수치라느니, 계산이 안된다느니,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나불나불 밝히던 놈이, 정작 실수 없이 척척 구궁진을 풀어내다니.


"잘 푸는구나."

"..."

"나를 놀렸겠다?"

"아니...정말로, 계산이 안되는 고질병이 있사온데...이상하다...꼭 귀신..."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김석하는 자기도 얼떨떨한 얼굴로 왕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숙종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마저 풀어보아라."

"예...에..."


왜 이렇게 잘 풀리지? 김석하는 갑자기 머리의 모근들에 모두 불이 붙은 기분이었다. 제 입으로 계산이 안 된다고 해놓고서, 이렇게 계산이 잘 되다니.


내가 왜 이러지?


헤매지도 않고 마음껏 문제를 풀어낼 수가 있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각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그의 미간에 숙종의 접부채가 콕 와닿았다.


"집중! 문제나 풀거라."

"저 혹시..."

"풀거라."

"예 전하..."


본의 아니게 왕을 속인 기분이 되어, 석하는 멋쩍고 머쓱하여 또 눈치를 보다가, 한숨을 내뿜고는 마저 구궁진을 풀어나갔다. 서른 세개의 수를 모두 자리에 채워놓고, 그는 혹시나 싶어서 다시 검산을 해보았다.


그런데,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이렇게 계산이 잘 될 리가 없는데도, 결국은 다 풀어내고 말았다. 김석하 스스로도 뭔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아니, 귀신에 홀리면 이렇게 잘 풀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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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으로 적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라 도표를 아라비아숫자로 올립니다.)


그는 두눈을 깜빡이다, 왕의 살벌한 눈길을 느끼고 움찔해서 어깨를 움츠리곤, 머뭇머뭇 붓을 놓았다. 그리고는 서안 옆에 선 김두광을 힐끔 쳐다보고, 자신이 풀어낸 종이를 건네었다.


"여기...다 풀었습니다."

"정말, 이걸..."


두광도 입이 쩍 벌어져서 김석하를 쳐다보았다. 편전 안에서도 신료들이 엄두도 못낸 문제를, 최석정은 지어내고, 김석하는 풀어냈다? 좀전까지 계산이 안된다던 김석하가? 힐끔 왕을 쳐다보니, 왕 역시도 기가 막혀 최석정을 노려보는 참이었다.


"엄살이 과하군? 아까는 계산이 안된다더니...제일 못한다는 계산을 이리 잘하니, 석하 네가 못하는 건 하나도 없겠구나?"


숙종이 노려보며 하는 말에 석하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전하...혹시 여기 미수공의 친필이나 그림이 있습니까?"

"미수공의 친필? 그림?"


되묻는 숙종이나, 옆에서 보는 두광이나 멈칫했다. 갑자기 왜 묻는진 몰라도, 어쩐지 뜨끔한 눈치였다. 석하는 분위기가 달라지는 느낌에 직감했다. 김석하의 눈가가 실룩였다.


"있군요. 역시나."

"그건 왜 묻느냐?"

"소생은...미수공의 글씨, 특히 그림이 있으면 계산이 좀 되는 체질이라..."

"체질? 듣다듣다 별 희한한 소릴 다 듣는구나."

"송구...하옵니다. 이 얘기는 비밀로 해주시옵소서..."

"비밀?"

"소생이...서인인지라...미수공은..."


김석하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숙종은 그런 김석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혀끝으로 계속 입술을 축이는 것만 봐도, 아무래도 정말로 남부끄러운 비밀인 모양이었다. 하긴, 서인인 김석하가 미수 허목의 작품이 있어야 글이 잘 써진다니...서인들이 이런 얘길 들으면 반응이 어떨 지 가히 짐작이 되었다.


"알았으니 네가 푼 것을 갖고, 최석정을 따라가라. 아마도 봉안역에서 이민철과 합류할 것이다."

"아...알겠습니다."


김석하가 물러가고, 숙종은 어쩐지 가슴이 휑한 느낌으로, 소각 안을 둘러보았다. 이민철과 최석정이 작업하던 성혈탁본들만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온몸에서 기운이 썰물처럼 좍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숙종의 안색이 더욱 핼쑥해졌다.


어쩐지 미련이 남은 눈길로 숙종은 소각을 나섰다. 두광이 비밀문을 닫는 동안, 그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떼어, 걸음발 아래 밟히는 흙의 느낌에 현기증을 느꼈다.


아무도 없다...


그는 괜히 팔을 뻗어 연보라빛 불두화 덤불 틈새를 헤쳐보았다. 일전에 저 흰 불두화 덤불 틈새를 해치고, 잘 되어가냐고 자신이 물었을 때, 화들짝 놀라서 성혈 모사본을 망쳤던 이민철의 놀란 얼굴이, 그 옆에서 빙그레 웃던 최석정의 환한 얼굴이 새삼스레 그리웠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그때처럼 새하얗게 첫봉오리를 펼친 불두화가 아닌, 어느덧 연보라빛으로 끝물이 들어버린 불두화였다.


숙종은 온몸에서 기운이 탁 풀린 채로, 터벅터벅 통명전으로 돌아왔다. 두광이 쫄레쫄레 뒤따르며 뭐라 이런저런 얘길 하는 것도 같았지만, 귓구멍이 꽉 막혔는지, 그대로 귓등으로 흘러나갔다. 극소수에게만 공개된 비밀장소인 탓에, 별감들이 드는 남여도 타지 못하고서 직접 두발로 걸어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더욱 고단하기만 했다.


그렇게 그가 통명전 대청마루에 올라서자, 그 붉은 곤룡포에서 어느덧 연보라빛으로 변해버린 불두화 봉오리가 아무도 모르게 툭 떨어졌다. 지금껏 온힘을 다해 최석정을 지키려던 그의 의지처럼.


지금쯤 사부가 성문을 나섰으려나...


작가의말

1. 소설에 쓴 최석정의 구궁진은 실제로 최석정이 만들어낸 마방진입니다. 이름이 낙서오구도입니다. 저런 게 좀 되지요. 정승들을 파리목숨으로 여긴 숙종이 여덟번이나 영의정을 시킬 정도로 믿었던 대신이기도 하지만, 전세계에 유례 없는 마방진들을 만들어낸, 자랑스런 조선의 수학자이기도 하고, 언문의 구조를 분석하여 후대에 남긴, 그리하여 지금의 휴대폰 천지인 자판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음운학자이기도 하고, 숙종조 천문을 지원하고 세종조의 천문작품들을 복원 및 개발시킨 천문학자이기도 합니다. 


2. 낙서오구도를 우물정과 열십자로 분리하여 메세지를 넣은 것은 제 상상입니다.


3. 소설 속 이민철이 상을 당한 건 실제로 비슷한 시기입니다. 인터넷에는 광주목사로 발령받아서 병 때문에 사직했다고만 되어있지만 실록에는 저 시기에 이민철이 상중이라 그를 분러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 논의한 기록이 있습니다.


4. 조선시대에 허목은 신선 비슷하게 공경을 받았습니다. 허목이 쓴 글씨로 비석을 세워두어 풍랑도 잠잠해졌다 하여 3백년간이나 보존되어 왔을 정도입니다. 물론 서인들에겐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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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3.10.23 08:21
    No. 1

    오...역시 전...주역에 천문, 언문 얘기 나올때가 젤 재미나더라는 ㅎㅎ
    석하 같은 체질 저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림 있으면 코딩 잘되게....어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24 00:27
    No. 2

    오랜만에 뵙네요. 주역, 천문, 언문 얘기를 더 좋아하시다니...ㅎㅎ 쓸맛이 나네요. 근데 저는 저 부분에 취약해서 공부하고 연구하느라고 머리 다 빠진다는...ㅠㅠ...그리고 여기 설정에서 석하 체질은 무시무시해서 부러워하실 필요가 없....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0.23 09:44
    No. 3

    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역사지식이 얇디얇다는 것을 몸소 체험합니다

    즐겁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24 00:27
    No. 4

    저도 이 소설을 쓰면 쓸 수록 고생합니다. 공부하면서 쓰느라구요. 댓글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0.23 11:20
    No. 5

    저도 역사, 주역, 천문, 우리글 지식이 얇지만
    사자버거님 처럼 우리글, 주역, 천문 이야기가 나오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열 십자 아홉개가 우물 정자 중앙에 열 십인걸 작가님의 훈수 이후에야 알아차리기는 했지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0.24 00:29
    No. 6

    저는 머리에서 쥐나도록 무진장 공부하면서 쓰는 중입니다. 천지인 때도 끝나면 라이트한 현대물 쓰겠다고 별렀는데, 지금 또 벼르게 되네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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