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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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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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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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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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46

DUMMY

꼭두새벽에 충청감영 선화당宣化堂(관찰사 집무청)으로 불려온 부여현감은 충청감사의 사나운 눈길에 그저 몸둘 바를 몰라서 두손을 옷자락에 문지르며 눈치만 보았다.


충청감사의 발밑에는 웬 그물이 한데 뭉쳐 있었다. 헌데 충청감사는 턱관절이 우드득거릴 정도로 이를 갈면서 한손에 공문을 들고 두발로 그물을 툭툭 즈려밟았다.


그 순간 부여현감은 두달 전에 충청감사와 함께 심야의 뱃놀이를 하던 것을 떠올리고 말았다.


거룻배 한척 은밀하게 띄워놓고, 청명주 한동이와 육포로 은근하게 술자리를 갖고, 단둘이서, 아니 사공까지 단셋이서 밤낚시를 즐기던 참이었다. 충청감사가 은밀하고도 위험한 제의를 해왔다.


- 영상댁에서 꺽정이를 잡을 그물을 친다는데...자네가 협조를 좀 해야겠어.

- 그물이요?

- 요즘 그자들이 태자방 당집 앞 나무들을 베어간다지? 뭘 만드는지 알아보고, 금송령禁松令을 범한 죄를 씌워 전가사변을 시키게나.

- 전가...사...변이면...

- 잘린 소나무 밑동이 열그루는 필요하겠지.

- 영감...전 좀...이런 일을 안해봐서...

- 걱정 말게나. 그물코가 엉성해도 벼리 쥔 손만 능숙하면, 알아서 그물코를 깁고, 조이고, 당기고 하여 결코 고기를 놓치진 않을 테니.


그때도 충청감사는 그물을 던지며 그런 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물에 걸린 버들치를 방생하곤 참중고기와 꺽정이를 사공에게 건네어 매운탕을 끓이게 하였다. 당연히 부여현감은 충청감사가 또 그물 얘기를 하는가 싶었다.


"이게 뭔지 아는가?"

"일전에 얘기해 주신 그물코와 벼리의 가르침이라면..."


충청감사는 동문서답을 하는 부여현감을 보니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영 미덥지도, 시답지도 않은 작자라고 속으로 욕설이 치밀 정도였다. 그는 손안의 교지를 부여현감의 눈앞에 대고 팔랑거렸다.


"내 발 말고! 내 손을 봐야지! 이거이거! 허...뭔지나 아는가?"

"..."

"수거제작인 이민철을 속히 상경토록 하고, 지체시킨 충청감사 경최를 추고하라는 어명일세."

"..."

"내가 자네 때문에 이게 무슨 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던 충청감사는 발치에 걸리적거리는 그물 감촉에 멈칫했다. 그는 그물에 신경이 쏠리자 발을 얌전히 가누면서 부여현감을 쳐다보았다. 표정이 눈에 띄게 안온해지면서 음성도 은근히 부드러워졌다.


"뱃놀이나 하겠는가?"

"예? 예에..."


부여현감은 자라목이 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니 더 무서웠다. 부여현감은 쭈볏거리면서 금강변으로 충청감사를 따라나섰다. 헌데 이번에도 지난번 거룻배를 몰았던 그 사공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도도하게 흐르는 금강에 자그마한 거룻배 하나 띄워놓고 오붓하게 뱃놀이를 시작했다. 그때처럼 그저 술한동이에다 육포 몇점, 그리고 그물 하나가 고작이었다.


"이번엔 버들치를 잡으려고 해도 안 잡히는구먼. 하루가 다르게 내 낚시 솜씨가 떨어지는 모양이야."

"그물코가 벌어진 것이겠지요."

"원래 헐렁하고 헐거운 그물코였다네. 누구처럼 말이지."


그제야 충청감사가 물고기에 사람을 빗대어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부여현령은 어깨를 움츠렸다.


"면목이..."

"그러니 자네가 책임을 지란 말일세."

"영감...?"

"자네가 이민철을 소나무 도벌의 수범으로 단정하여 섣불리 수거를 압류하고, 또한 조정에는 임의로 보고를 하지 않은 일은 엄연한 잘못이니 말이야."

"영감...?


부여현감은 파리해진 얼굴로 충청감사에게 절박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충청감사는 그저 고개를 차갑게 까딱하여 비웃을 뿐이었다.


"이미 파발을 보냈으이. 느린 보발이 아니라 날랜 기발騎撥로."

"..."

"자네가 해주海州에 계신 자네 늙은 아비를 보러 부여현을 이탈했다, 하여 이 일을 해결하느라고 이민철의 송환이 늦어졌다...그렇게 말이야."

"네?"


부여현감은 기가 막힌 눈빛으로 충청감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충청감사는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마주할 뿐이었다. 그래서 더 치가 떨렸다.


"영감? 애초에 영감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그물코가 엉성해도 벼리를 쥔 손이 노련하면 실수가 없을 거라 하시었습니다. 하여 저는 영감만 믿고..."

"나를 왜 믿나? 내가 벼리를 쥔 손이 아닌데 왜!"

"그건 그렇지만...영상께 말이라도 좀..."

"영상대감의 화를 풀어드리려면 자네가 다 뒤집어쓰는 수 밖에 없으이."

"영감? 정말 이러시깁니까?"

"누가 일을 그따위로 하랬는가?"

"그래서 저만 혼자 다 뒤집어쓰라구요? 이 황중구를 뭘로 보시고..."


따지고 드는 부여현감의 귀로, 충청감사의 목소리가 피도 눈물도 없이 흘러들었다.


"그물코."

"뭐...라구요?"


부여현감은 귀를 의심하고 충청감사를 쳐다보았다. 충청감사는 발치의 그물을 집어들어 좍 벌어진 그물코를 부여현감의 눈앞에 똑바로 보이고선, 힘껏 벼리를 잡아당겼다.


"그것도 삼천코 중에서 겨우 한코. 그러니 어쩌나. 그물코가 삼천코라도 벼리가 으뜸이니...콧구멍이 너무 벌어지면, 벼리를 쥔 손이 조여야지. 이렇게."

"..."


부여현감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파르르 몸서리를 쳤다. 상대는 충청감사, 이미 자신의 온갖 치부를 알 만큼 알 터였다.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으려고 작정하면 얼마든지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이참에 해주에 미리 가 있게나. 오랫동안 못본 아비 얼굴도 보고."

"..."


아비라...부여현감은 까마득히 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정말로 이번에 기회를 줄 때 아비 얼굴이라도 봐야 하나...그런데 뒤에서 차마 뿌리칠 수 없는 말이 그의 온 정신을 휘감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은 뵈어야지. 한번이라도 더."

"..."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부여현감이 배에서 내리는 나서는 뒷모습을 사공이 힐끔 쳐다보곤 이내 충청감사의 눈치를 보았다.


조금은 켕기지만, 충청감사는 늘어진 그물코를 어루만졌다. 다음 낚시를 위해서라도, 늘어진 그물코는 갈아야만 했다.


어쨌든 저들이 만드는 게 수거란 사실을 알았을 때 부여현감이 머리가 있었다면 재빨리 저자들을 다독이고 이 일을 무마해야 했다. 하지만 미적거리다가 일을 키웠으니, 이게 다 부여현감이 자초한 일이라고, 그는 가슴 한구석에 달라붙은 죄책감을 떨쳐냈다.


어차피 죄지은 범인犯人을 잡는 데나 써야할 법의 그물로 애꿎은 범인凡人을 잡으려 들었을 때 이미 잠시 접어둔 양심이었다. 한번 접은 양심, 두번 접는 게 무에 어려우랴. 누구를 잡든 보망補網에만 힘쓸 생각이었다.


그는 사공에게 눈길을 힐끗 던지면서 눈꼬리 끝으로 쳐다보며 넌지시 물어왔다.


"다음엔 또 뭔가? 영상댁 따님의 일이라고?"

"예 대감..."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닌 게야? 소나무 일도, 또 나비 일도 이 모양이니..."

"송구합니다."


사공이 허리를 굽혀 사죄하는 모습에 충청감사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나.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지. 아비는 꺽정이를 삶아먹겠다는데, 아들은 찜 쪄 먹겠다고 나섰으니, 자네만 중간에서 가랑이가 찢어지고 등줄기가 터진 게지."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강변에 담비털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선 허견을 보고 배를 가까이 대었다. 허견은 부채너머로 눈길을 힐끔 던져서 충청감사의 눈치를 보더니, 뒤에서 마름 황씨가 슬그머니 옆구리를 찌르고서야, 담비털 부채를 접고서 넙죽 인사했다.


"여긴 왜 온 겐가?"


충청감사는 살짝 눈을 흘기면서 탓하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눈길이 허견의 손에 쥔 털부채로 향하였다. 한눈에도 탐스러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 털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거, 산달모山獺毛(담비털)인가?"

"아...이건 수달모水獺毛(수달털)입니다만...마음에 드십니까?"


허견은 충청감사가 곁눈질로 자신의 부채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입주변을 실룩거리면서 물었다. 여차하면 이 귀한 털부채를 빼앗기게 생겼다. 충청감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끄러미 부채의 검은털을 내려다보았다.


"아닌데...산달인데..."

"수달이라니까요. 여기 오면서 원달천 주막에서 부채장수한테 산 것인데...거기 일대가 수달이 많다 하여 달천獺川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니 당연히..."

"수달인지, 산달인지, 내가 자네보다 더 잘 알지."

"..."

"하기야 자네가 수달인지, 산달인지 감별하는 눈이 있겠는가?"

"..."

"그리고 그물 치는 법도 영상대감께 더 배워야겠으이. "


허견은 흠칫 헛숨을 들이키곤 코끝으로 한숨을 뿌리깊게 흘려내었다. 아무리 자신이 날고 기어도 아비의 발끝도 못 따라간다는 사실을 자기자신도 너무도 잘 알았다. 호부견자虎父犬子는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늘 자신의 엉성한 그물코를, 잘난 아비는 깁고, 조이고...그렇게 뒷처리를 해왔으니까.



"우리만 놔두고 떠나시다니."

"그러게요."


아침 댓바람부터 호숫가로 나와서 최석정과 김석하는 이민철과 함께 수거를 설치하다 말고 툴툴거렸다. 이민철은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내 새끼 같은 수거도 같이 놔두고 가잖나."

"퍽도 생각해주는 척 하시네요."

"퍽도."


이민철이 변명하는 말은 최석정과 김석하에게 별반 위로가 되질 않았다. 김석하까지 입술을 삐죽이는 것을 보고 이민철은 최석정에게 눈썹을 꿈틀해보이면서 대꾸했다.


"그럼 따라오든지."


물론, 그냥 해본 소리였다. 문외출송 죄인인 최석정은 도성 안으로는 이민철을 따라올 수 없었다. 그런 최석정을 따라다니는 석하 또한 당연히 따라올 수 없었다.


"그럴까요?"

"그러죠 뭐."


그냥 던진 말을 그들이 덥석 물 줄은 몰랐던 이민철은 두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정말 따라오게?"

"도성 밖까지만요."


최석정이 쓴웃음으로 답하였다. 생각해 보니 도성 밖까지만 따라오면 되었다. 따로따로 행동해서. 김석하 역시 최석정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아예 짐을 꾸릴 기세였다.


이민철은 홍만종이 호숫가에서도 여전히 바위에 걸터앉아 백이전을 탐독하고, 심지어는 마음에 드는 문구를 따로 베끼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들은 어찌할텐가?"

"뭐 슬슬 집 생각도 나고..."

"갑자기 오느라 하다 만 일도 매듭지어야 하고..."

"저희야 여기까지 와서 영감님을 안 따라가는 게 이상하죠. 여기 사람들 눈으론."


이민철의 물음에 지남과 만종, 석정이 차례로 답하였다.


"하긴."


이민철은 입맛을 쩝 다시고선 그대로 수거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잡아서 힘껏 돌렸다. 어쩐지 힘에 부치는지 한손으론 살짝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나마 이를 악물고 돌려보았다. 수거는 혼자서 한손으론 운행하기 힘든 것이 문제였다. 얼굴이 벌겋게 되어 용을 쓰는 이민철을 힐끗 보며 최석정이 입을 놀렸다.


"제가 말했지요. 가난한 백성들은 일손이 턱없이 달린다고. 혼자서는 저 무거운 손잡이들을 못 돌리니 차라리 밟아서 굴릴 수 있게 좀더 작게 만들어야 했다니까요."

"그럴 거면 물을 얼마나 자아올리겠나. 찔끔찔끔 병아리 눈물을 받고 말지."

"그렇다고 큼직큼직하게 만들다간 가난한 백성들에겐 그림의 떡처럼 되어버립니다. 보십시오...소규모로 경작하는 백성들이 무슨 힘이 있어 수거를 만들고, 옮기고 하겠습니까?"


하도 최석정이 작게 만들어야 한다고 참견을 하여 당초보다 작게 만들었는데도 여전히 마뜩치가 않은 모양이었다. 더 작게 만들어야 한다니. 하지만 수레바퀴의 단을 28개를 넣자니 이 이상 작게 만드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작게 만들면 물을 끌어올리는 의미도 없었다.


어찌 됐든 자신이 만든 수거가 누군가에게는 이로운 물건이 될 거란 생각 만으로 조금은 뿌듯했는데, 자꾸 백성에겐 도움이 못된다고 하니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가만 보면 자넨 좀 조부하곤 다른 듯 하이..."


이민철은 얄밉게도 바른 소리를 하는 최석정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최명길이 백성의 목숨을 아끼긴 하였지만, 백성의 재산까지 아끼지는 아니했다. 그 한끝 차이로 그는 충신으로도 공신으로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심지어 그를 이해하고 아끼던 친인들마저도 인조의 묘정에 최명길을 배향시키자는 논의가 나왔을 때 소극적이었을 만큼.


"그게 무슨 말입니까?"

"..."

"무슨 말이냐구요."

"그냥 자네가 백성의 입장에 너무 얽매이는 느낌이라 이 말일세. 손끝발끝 까딱하지도 못할 만큼, 죄인처럼."

"..."


최석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민철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최석정은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고, 충혈된 눈으로 이민철을 쳐다보았다. 이민철 역시 자신의 말이 좀 심했나 싶어서 흠칫하곤 얼버무렸다.


"내 말은, 너무 좀스럽게 그러지 말란 얘길세."

"..."


얼버무린답시고, 또 실수로 말이 엇나가서 상대를 자극하는 표현을 쓰고 말았다. 최석정의 눈동자가 깨진 조개껍질 파편처럼 번뜩이는 느낌에 이민철은 또 흠칫했다. 아무리 평소에 싱글벙글 웃고 다니면서 매사 동글동글하게 구는 최석정이라 해도, 숨겨둔 역린 같은 건 있는 법이었다.


"왜들 이러십니까. 두분 모두 평소답지 않으십니다."

"이영감님은 여막살이에 지치실 때도 되었지."

"최나으리도 반년 넘게 객지생활을 하다보니 예민해지신 듯 하이."

"그래도 두분 말이 모두 맞는 것 같으니...좀..."


석하와 만종, 지남도 두 사람을 말리면서 한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했다. 이민철은 최석정의 입장에도 수긍하는 지남의 말에 움찔해서 곁눈질로 최석정을 쳐다보았다.


최석정은 속눈썹까지 뻣뻣해진 채로 허공을 쏘아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자신의 아픈 곳을 이민철이 찌른 셈이었다.


조부 최명길.


엄연히 삼공 육경을 역임하고 조정에 우뚝선 당대 최고의 재상이었는데도, 조선을 보전하기 위하여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고 청과의 실리를 도모했다는 이유로, 끝내 묘정 배향도 되지 못한 이름. 실리보다 의리를 더 따지는 자들이 그 이름을 알아줄 리가 없었다. 알아주는 건 백성들일 뿐. 그래서 더 백성의 편에 서고 싶었다.


하지만 친인들 말마따나, 자신이 너무 백성에 연연하는 것도 있었고, 반년간의 타향살이 끝에 신경이 곤두선 것도 있었다. 지금쯤 아기울음 소리에 잠도 못 자고 몸을 뒤척여야 할 때인데, 오히려 들리지 않는 아기울음 소리에 뒤척이게 되니.


그날밤 최석정은 여막 안의 짚자리에 몸을 뉘고 돌돌 만 짚베개에 머리를 이고 천정을 올려다보며 두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반년간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았다. 단순히 수거를 만드느라 침식寢食도 잊었나 싶었더니, 머리맡의 딱딱한 짚베개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은 탓인가 싶었다.


그나마 여기도 이민철을 따라 떠날 생각을 하니 시간이 물 흐르듯 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였다.


잠도 못 이루고 괜히 팔을 목뒤로 둘러서 이고 두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데 이민철의 음성이 들렸다.


"이 베개를 베게나."


갑자기 눈앞으로 불쑥 나타난 목침에 최석정은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웬 베개? 두눈을 깜빡이고 다시 쳐다보니 모서리를 둥글게 마감하여 삼극三極문양을 넣은 목침이었다.


"그건..."

"내 셋째형님의 베개인데, 오늘 하루만 빌렸으이. 내일 새벽에 길 떠나려면 오늘 푹 자둬야 할 것 같아서."


이민철이 멋쩍게 하는 말에 최석정은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 보는 이민철답지 않게 유난히도 쑥스러움을 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눈앞의 목침은 사대부가답지 않게 태극이 아닌 삼극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더 이질적이었다. 그 뒤로 무슨 좋은 구경 만난듯이 힐끔거리는 홍만종과 김석하, 김지남의 눈빛이 비쳤다.


"뭘 그렇게 보는가? 어서 받지 않고?"

"아...태극이 아니라 삼극이라서..."

"우리 가문이 왕실의 한 갈래라...뭐..."

"아...네..."

"팔 떨어지네."

"베개 떨어지기 전에 받아야지요."


최석정은 피식 웃으면서 베개를 받아들어 가만히 베고 누웠다. 짚보다도 더 딱딱한 베개인데도 오히려 목이 더 편안하니 좋았다. 게다가 누구에게든 아쉬운 소리 잘 못하는 이민철이 모처럼 셋째형한테 염치불구하고 베개를 빌려온 것을 생각하니,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기껏 베개만 띡 주깁니까? 제대로 좀 사과를 하든지."

"화해를 하시려면 화해주가 있어야..."

"허면 자네들이 좀 구해다 주게나."


이민철이 시큰둥히 대꾸하자 김석하와 김지남이 서로 눈짓하더니 도로 여막을 나갔다. 아무래도 둘이 연배가 비슷해서 자주 어울리나 싶었다. 화해주를 가지러 갔으니 금방 오겠거니 하면서도, 어쩐지 최석정은 온몸이 늘어지는 것이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눈꺼풀이 덮였다.


잠시 후에 청명주를 한동이 얻어온 김지남과 김석하가 여막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최석정이 깊이 잠든 뒤였다. 이민철은 느긋하게 수거의 도면을 살피는 참이었고, 홍만종은 그간 적은 기록들을 한장한장 훑어보며 솎아내는 참이었다.


"어? 벌써 주무시네."

"웬 일이시래? 아직 자시도 안되었는데."


조금전 김석하와 김지남의 핀잔을 가슴에 담아둔 이민철이 시큰둥히 대꾸했다.


"기껏 베개를 바꿔주었더니 실컷 잘 기센데."

"그러게요...생각보다 베개가 효과가 좋네요."

"뭐 이왕 얻어온 거, 우리끼리라도 좀 마십시다."

"근데 자넨 술 마시면 더 가위 잘 눌리지 않던가? 귀신이 더 들러붙을텐데?"

"뭐 귀신도 같이 취하라지요..."


그들은 투닥거리면서도 이내 나무로 깎은 술잔을 갖다놓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잠든 최석정이 신기한지, 김석하가 빤히 쳐다보며 한마디 하였다.


"잘 주무시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목침 하나 만들어드릴 걸."

"아 맞다. 자네가 솜씨가 좀 있었지. 특히 칼 쪽으로."

"아...여기서 이러고 있어서...실력이 좀 줄었지요. 아마 돌아가면 체건이한테 오히려 한수 밀릴 지도..."

"아마가 아니라 이미 따라잡혔을 걸세."

"흠흠"


알싸한 술향기가 감도는 여막 안은 어느덧 푸릇푸릇한 새벽공기가 감돌았다. 이러다가 길을 떠날 수나 있을지. 새벽 첫닭이 울면 길을 떠나려던 것이, 그냥 동이 트면 떠나는 것으로 말이 바뀌었다. 그들은 술기운에 얼굴이 살짝 붉어지고서야 서로의 허벅지를 베고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최석정과 이민철 일행은 행장을 꾸려 부여현 엿바위골을 나섰다. 아직 상중이라 이민철은 포의에 방갓을 쓰고, 최석정 역시 포의만 갖춰입은데다, 김지남은 아예 다 구겨진 갓과 너덜너덜한 행의를 입은 탓에 누가 봐도 상거지들이었다. 머리를 올린 윤이가 그나마 멀쩡해보였다.


충청감사가 친히 역마驛馬를 다섯필이나 챙겨서 가져온 덕분에, 관직에 몸담았거나, 몸담은 신분임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왕 역마를 챙겨올 것을 인원수대로 챙겨오면 좋을 것을, 한필이 모자랐다.


"사람은 여섯인데, 말은 다섯입니다."


최석정은 씁쓰레히 충청감사를 쳐다보고 말하였다. 충청감사는 홍만종 등 뒤의 윤이를 흘낏 쳐다보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빈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아...일행이 또 한분 계신 것을 모르고..."

"..."


일행의 눈길이 윤이에게 몰렸다. 모두들 난감한 눈빛이었다. 여인을 홀로 뒤처지게 해서 뒤따르게 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젊고 팔팔한 지남이나 석하더러 말을 양보하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다음 달천진達川津에 가서 여분의 역마를 구하게 해야 하나. 하지만 달천진까지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그들의 고민을 대신 정리해 준답시고, 충청감사가 최석정을 콕 집어서 말하였다.


"어차피 자네는 도성에 들어가지 못할 몸이니...여기서 우리랑 같이 오래오래 있게나."

"도성 앞까지는 같이 갈 생각입니다만."

"그래? 헌데 어쩌나...역참에 준비된 말이 딱 이것 뿐이라서..."

"..."


최석정은 눈밑이 실룩거릴 정도로 입맛을 쓰게 다셨다. 어찌 됐든 혼자 부여현에 남을 수는 없었다. 일행 중 김석하라도 물고 늘어져서 뒤따라가야 하나. 그런데 또 생각을 해보니 김석하는 하필이면 배멀미가 문제였다. 머뭇머뭇하는 사이 또 충청감사가 이민철을 보채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지체 말고 가세나. 전하께서 이공李公을 기다리시네. 적어도 내일 오후까진 도착해야할 걸세."

"예에..."


이민철은 난감한 표정으로 최석정을 돌아보았다. 최소한 봉안역까지는 데려가야 했다. 부여현감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나루터에서 부여현 백성들이 길을 오가면서 수근거리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간밤에 야반도주 했다지?"

"웬 야반도주?"

"갑자기 늙은 아버지가 꿈에 보였다나 뭐라나..."

"허이구. 관청 곳간 털어서 내뺀 거 아니구?"

"미쳤지. 미쳤어."


최석정은 백성들이 떠드는 소리에 씁쓰레히 웃음을 지었다. 귀가 뚫린 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여서, 이민철이 불퉁하게 한마디 했다.


"충청감사가 수완이 무서우이. 바로 부여현감은 야반도주하는 걸로 정리해서, 파출시켜버리고, 우리는 더는 일 키우지 말고 상경하게 만들어버리고."

"몸통이 드러나기 전에 꼬리를 자른 거겠지요."

"해주라면...북도 아닙니까? 우리를 북도로 보내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자기가 갔군요. 뭐 속은 후련합니다만..."

"태자방이란 그 요망한 무녀를 장형 일백대로 되갚아주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나중에 소생이 본때를 보여드리지요."


김석하가 등허리의 칼을 손등으로 쓰윽 문지르며 호기롭게 말하자 최석정이 눈을 흘겼다.


"자넨 태자방하고 얽혀서 가위가 도진 주제에."

"..."

"당집 근처로 왔다고 아무나 가위 눌리지도 않는다네."

"흠!"


김석하는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들자, 슬그머니 홍만종의 옆구리를 찔렀다. 당집 근처로 오면 어질병이 심해지는 건 홍만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자신처럼 가위에 눌리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 아닌 만큼 홍만종은 피식 웃어넘길 뿐이었다.


"얼른 가기나 하시지요."

"급할 게 있나. 말도 한필 모자란 마당에."

"다음역이...?"

"달천진입니다."

"달천진엔 역마가 더 있으려나?"

"뭐 달천진까지만 천천히 가도 되겠지."


일행은 말달리기는 커녕 어슬렁어슬렁 거닐었다. 한 사람 낙오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늑장을 부리면서 달천진까지 가는 것이었다. 달천진에는 남는 말이 있겠거니, 하면서 마냥 태평하게 걸었다. 그들이야 급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길모퉁이에서 나타난 충청감사가 씁쓰레히 쳐다보았다. 그 곁에는 담비털로 손잡이를 감싼 부채로 얼굴을 가린 허견이 노비들을 대동하고 서 있었다.


"어쩌겠나?"


충청감사의 물음에 허견은 손가락새로 삐쳐나온 담비털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속았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뒤따라가야지요. 달천진이라고 했던가..."



"여기가 달천達川이 맞지요?"


달천의 모래톱에 이르러, 김지남은 홀린 듯한 눈빛으로 확인하듯 되물었다. 하지만 이민철도, 최석정도, 홍만종도, 김석하도 대답할 생각도 못한 채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는 말이 이런 진풍경을 두고 했던 말이 아닐까. 넓다란 모래들판에 수십마리의 흰 기러기들이 내려앉아 먹이를 찾아 부리를 콕콕 찍어대는 장관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물론 모든 기러기들이 모래톱에 다소곳이 앉아있기만 하지는 않았다. 날개를 활짝 펴고 일행의 머리 위로 낮게 날아들어서는, 지남도 모르는 사이 갓 양태 오른쪽에 붙어있던 밥풀을 콕 찍어먹고 가기도 했다.


"으아!"


지남이 화들짝 놀라서 갓 양태를 감싸쥐고 비명을 질렀다. 이내 기러기가 새침하게 허공 위를 날아가는 모습에 지남은 더욱 홀린 기분이 되었다. 손을 뻗으면 기러기의 발톱이 닿을 듯한 모래톱이라니. 간밤의 술이 덜 깨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달천達川에 왔으니 단맛은 봐야지."

"단맛은 보고 감천甘川을 떠야지."

"치사하게 두분만 단맛을 봤다간 덕천德川이 노합니다."

"달래나 보지 그랬나. 달래강인데."


최석정과 홍만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둔치 아래로 달려들어 물속에 손을 담갔다.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대거리를 하며 물을 후르륵 떠 마시는 모습에, 석하도 질세라 끼여들어 자신도 맨손을 물속에 담갔다.


그런데 뼛속까지 얼어붙는 물의 한기에 술기운이 퍼뜩 달아났다. 이미 술은 한방울도 안 마시고 숙면을 취한 최석정은 상관이 없었지만, 숙취에 찌든 김석하는 술기운이 쑥 내려가다 못해서, 핏기까지 싹 가셨다.


"어흐..."


이민철은 물가에서 최석정과 홍만종, 김석하가 달천의 이름으로 말장난을 한 것을 알아듣고 입맛을 쩝 다셨다. 이곳 달천達川은 감천甘川, 덕천德川, 달천獺川, 달래강 등 별칭이 너무도 많았다. 워낙 아는 게 많은 인사들이라 죽이 척척 맞아서 달천이니, 감천이니, 덕천이니, 달래강이니 떠드는데 갑자기 소외감이 들었다.


"잘들 논다. 강 이름 갖고."

"..."

"쩝, 우린 수달이나 잡아야 하나. 달강獺江인데."

"영감님까지."

"흐흐. 하나 건졌으이."

"저는 할 게 없네요. 이 달천의 이름을 다들 써먹으셔서."


지남이 우거지상을 하고 답하였다. 이민철은 전혀 뜻밖이란 눈빛으로 지남을 돌아보았다.


"어...자네도 이 말장난을 알아들었나?"

"그럼, 모르겠습니까?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인데."

"허면 달래강의 어원은 아는가?"

"..."


지남은 대답 대신 몸서리를 쳤다.


"알긴 아나 보이."

"..."


석하는 투닥거리는 두사람을 보고 피식 웃으며 달천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한두시진 전부터 털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자신들을 뒤따르는 사내 일행을 힐끗 쳐다보았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시꺼먼 털로 손잡이를 감싼 부채라니.


부채는 사대부가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하는 물건이긴 하였지만, 한겨울엔 워낙 손도 시리고 하여 부채를 들고 다니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도 지체 높고 부유한 자들은 저렇게 손잡이를 털가죽으로 감싼 부채를 들고 뽐내듯이 다니긴 하였다.


하지만 눈가에 주름도 많지 않은 자가 저리 귀한 털부채라니. 어쩐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담비털? 수달털? 족제비털? 도대체 저자는 누구고, 왜 자신들을 따라오는지.


"놀고 있네!"


허견은 이를 바드득 갈며 최석정 일행을 쏘아보았다.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속이 뒤틀리고 손이 간지러웠다. 부채 손잡이를 꽉 움켜쥐자, 손에 잡히는 담비털이 우묵한 손아귀를 간지럽혔다. 그는 담비털에 묻은 허연 먼지 같은 것을 툭툭 털었다. 그런데 털다가 왠지 짜증이 나서 계속 털고, 또 털었다. 신경질적으로.


"그만 터셔도 될 것 같은데..."


마름 황씨가 조심스레 건넨 말에 허견은 버럭 화를 냈다.


"뭐가 좀 털려야 될 거 아니야! 이를테면 저놈 숨겨진 별호가 현묵자라든지! 저놈 스승이 정두경이라든지! 저놈이 현묵자만 되어도...난 집에 돌아갈 수 있을텐데! 왜, 왜 일을 이 따위로 해서...왜...!"

"..."


허견의 목소리가 가닥가닥 갈라지고 찢어졌다. 황씨는 할 말을 잃은 채로 또 등뒤의 노비들을 노려보았다. 일을 이따위로 처리할 줄은 몰랐다. 물론 자신들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이게 다, 아가씨를 홍만종이라는 허무맹랑한 맹탕에게 밀어넣은 최석정, 이민철, 김석하, 김지남...저자들 탓이다.


"작은 나으리, 저희들은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소인들은 최석정이 오는 것을 보고 그...나무에다 아가씨를 내려놓고 왔습니다"

"예, 분명히 최석정이 그 아가씨를 먼저 발견을 하고, 당황해서 헛도끼질을 하는 것까지 보고..."

"예 작은 나으리, 이 아이들 말을 들어보니, 분명 최석정에게 똑바로...헌데도..."


황씨가 수하들을 두둔하다 말고 채 말을 잇지 못하였다. 듣는 허견도 더는 들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는 파르르 치가 떨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금세 이가 뿌드득 갈렸다.


"개 새끼들, 내 누이를 감히...서로 미루고, 미루다, 저놈 주둥이에 밀어넣어?"


그래서 더 용서가 되질 않았다. 최석정이고, 이민철이고, 서로 미루고 미루다 저놈 차지가 된 사실이 더 용서가 되질 않았다. 가만둘 수 없었다. 두고볼 수 없었다. 눈앞에서 누이가 홍만종을 돌아보며 하얗게 웃는 얼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등뒤의 황씨를 힐끔 쳐다보며 씹어먹듯 말하였다.


"이민철이 도성으로 들어가고, 도성 밖에 최석정이 남겨지는 즉시, 그 즉시 쳐라."

"예 나으리."

"다 쓸어버려 다."


허견은 한발짝 또 한발짝 최석정 일행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그리고 그런 허견의 뒤를 황씨와 노비들이 한발짝 또 한발짝 조용히 밟았다. 한마디라도 잘못 내뱉았다간 작은 주인의 더러운 성질을 건드릴테니, 그냥 숨죽이고 가는 편이 나았다.


최석정 일행은 달천진에서 역마를 빌리고, 또 원달천의 주막에서 점심을 해결하고서야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미 충청감사가 장계를 올렸으니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하루나절을 꼬박 말을 타고 걸어 석원石院에서 당도해서 하루 묵었다가, 또 김령역 김령원에서 하루 묵었다가, 근처의 장시 구경도 했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월천현月川峴에 이르렀다.


"여기가 월천현...다른말로 달래내고갠데 말일세...우린 엊그제도 달래강을 지나왔는데 말일세..."


이민철은 달래내고개에 발을 딛는 순간 걸쭉하게 음담패설을 하려다 말고, 얼핏 홍만종 뒤의 윤이를 의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출신과 이력을 밝히지 않고, 그저 정혼자를 잃고 청상과부가 되었다며 만종을 따르는 윤이였다. 하지만 눈길이 닿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앞섶을 누르는 희고 고운 손을 보니, 모르긴 해도 어느 규방에서 곱게 자란 처자 같았다. 그런 그녀 앞에서 입에 담을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얘기는 왜..."


홍만종은 인상을 쓰며 두손으로 윤이의 귀를 가만히 막았다. 그는 이 어리디 어리고, 여리디 여린 소녀의 귀에 그런 얘기가 들리는 걸 원치 않았다. 물론 이민철도, 최석정도, 굳이 체신머리도 주변머리도 없이 삿된 얘기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이 고개만 넘으면 신원新院인데...하루 묵어가기엔 시간이 좀 어중간할 것 같으이."

"그럼 쭉 가죠. 최소한 인정 전에 숭례문 안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신원 다음이 한강진漢江津인데. 배를 타긴 좀..."


지남이 지도를 보면서 김석하를 돌아보았다. 누구보다 배멀미가 지독한 김석하였다. 이미 여기까지 오면서 강을 건너고, 내를 건너면서 충분히 실감했다. 겨울에만 놓인다는 달천진 배다리舟橋를 건널 때도, 건너자마자 제 목을 부여잡고 문지르며 다리라 풀려 주저앉았던 장면을 김지남까지 똑똑히 목도한 탓이었다. 그런데 이민철이 일행을 재촉했다.


"더 늦어지면 이번엔 내가 추고를 당할 걸세. 우리가 출발한 걸 충청감사가 벌써 장계를 올렸을 테니."

"허면 신원에서 하루 묵어가는 것이..."

"어차피 늦어질 거 봉..."


이민철은 봉안역으로 가자는 말을 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봉안역 인근의 지평현에 가문의 묘역이 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지평현으로 가서 하루 묵어가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다가 최석정의 눈짓에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저 입맛을 쩝쩝 다시고서 투레질을 하였다.


"거...투레질 좀 하지 마쇼. 여자애가 투레질을 하면 바람이 불고, 사내애가 투레질을 하면 비가 온다는데...아저씨가 투레질을 하면 뭐가 오는 거래요?"

"글쎄..."


이민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이 오려나?"

"설마, 벌써 산버들이 피는 마당에..."


그들은 두리번거리면서 푸릇푸릇한 새눈을 틔우고 희노란 털망울을 피워올린 버드나무 가지사이로 붉은 햇살이 반짝이는 풍광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눈은 호강해도 다리는 호강할 수가 없었다.


석하를 제외하고 모두들 말에서 내려서 말고삐를 쥐고 낑낑대며 언덕을 넘어가야 했으니 고달팠다. 일행들이 말을 타는 기술이라도 좀 좋으면 그대로 거침없이 주파하련만, 김석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형편 없었다. 심지어는 붓으로 나무기둥을 받아내려고 했던 홍만종까지도.


"먼저 가시지요. 영감, 여기 지남이 이 친구를 데리고."


타들어가는 이민철의 속을 읽었는지 최석정이 피식 웃으면서 먼저 말을 건네었다. 이민철은 멀뚱멀뚱 최석정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문외출송 죄인인 최석정과는 한강진에서부터는 떨어져야 할 처지였다. 새로 얻은 첩을 데리고 뒤따르는 홍만종 역시 번거로웠다. 김석하를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최석정은 김지남을 추천했다. 하필이면 고개만 넘을 때면 헤매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을.


이민철은 힐끔 김지남을 돌아보며, 최석정을 쳐다보는데, 최석정이 말없이 눈짓했다. 고개만 넘을 때면 꼭 헤매는 김지남을 데리고 가면...가다가 봉안역으로 길을 잘못 들어도 핑계를 댈 수 있다. 이민철 역시 말귀를 알아듣고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장에 지남의 말 곁으로 바짝 붙어서 말 고삐를 잡았다.


"가세나."

"예? 예...그럼 나중에 어디서..."

"한강진 근처가 나으려나...자네 집이 어디라 했지?"

"서호입니다. 양화진 쪽..."

"양화진..."

"포천은 어떠신지...백강선생 묘역도 있고 석하 이 친구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한데..."

"나중에 정해서 이 친구 앞으로 연락주게나."

"예, 그럼..."


이민철이 지남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지남은 얼떨결에 최석정, 김석하를 비롯해서 홍만종과 그 소실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곤 이민철을 따라 고개를 넘어갔다.


인원 수가 네명으로 줄자, 김석하는 흘끔 홍만종과 윤이를 쳐다보고 최석정과 눈길을 주고 받았다. 부여현에서부터 여태 자신들을 뒤따르는 존재들을 못본 척 참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온몸에서 살기를 모락모락 피워올리면서도 부여현에서 벌써 사흘간 조용히 뒤따른 자들이었다. 아마도 이민철이 어명을 받고 도성에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고, 이민철이 자신들과 떨어지면, 그때 마음 놓고 행동을 개시할 터였다. 특히나 남은 자신들은 품계, 관직도 없는 떨거지일 뿐일테니.


물론 그렇게 방심하고 저들이 몽둥이며, 칼이며 들고 마음껏 달려들기만 기다렸다. 얼마든지 상대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김석하는 품속으로 손을 넣어 촘촘하게 누벼진 호낭胡囊(호주머니)을 더듬었다. 언제든지 암중의 적을 상대할 수 있게 만든 작은 비도가 손끝에 잡히는 감촉을 느끼면서 그는 주변의 수풀에 엎드린 그림자를 향해 속삭였다.


와라.


홍만종 역시 품안에서 붓을 꺼내어 고쳐쥐는 순간이었다. 헌데 어처구니 없게도, 붉은 해그물이 푸릇푸릇하게 새순이 돋은 버들가지에 걸려 반짝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자신들의 머리 위로 웬 그물이 덮쳤다. 주춤하는 순간 두번째 그물이 다시 그들의 머리 위를 다시 덮쳤다. 최석정이 꼼짝도 못하고 버둥거리는 순간 세번째 그물마저 덮쳐서 홍만종과 윤이의 몸에 착 감겼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이거 재밌네."

"무슨..."

"이번 기회에 그물치는 법을 제대로 배웠거든. 한겹, 두겹, 세겹...촘촘히 겹쳐서 덮쳐라."


홍만종의 귓가에 들리는 음성은 너무도 생소했다. 누군지 알 수도 없었다. 몸을 납작하게 말안장 높이로 숙이던 석하의 귓가에 들리는 음성은 한두번쯤 들어봤음직했다. 하지만 석하로선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최석정 역시 자주 들어보았던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의 단 한사람, 윤이만은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


촘촘한 그물 틈새로, 또 한겹씩 겹쳐진 잎새 틈새로 윤이의 동공에 장작개비를 어깨에 두른 채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오라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마름 황씨를 비롯해서 집안에서 힘깨나 쓴다는 머슴들이 장작개비를 들고 벼르고 벼른 눈빛으로 한발한발 좁혀들었다.


작가의말

1. 달래강, 달래내고개 등...지역은 다른데 그 이름에 얽힌 설화는 비슷비슷합니다. 


2. 이 소설에서 제가 다루는 인물 대부분이 남다른 애국심을 가지고 조선역사에 한획 씩 그은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유산을 일제가 훼손하고 빼돌리고 왜곡하여 그 업적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게 아쉽네요. 


3. 홍만종은 한자만 다른 동시대 동명이인 때문에 자료가 얽혀서 가족 관계 변별이 어렵네요. 허견이 누이를 첩으로 준 것만 실록으로 확인이 되어, 그쪽 얘기 위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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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3.11.25 15:13
    No. 1

    설화를 찾아봤더니...이민철이 머뭇거리는 이유가 있었네요 ㅎㅎ..

    우리 선조의 유산들을 잃어버린게 비단.. 일제시대만은 아니라서 더 아쉽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25 22:32
    No. 2

    다 아쉽죠.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소실되고...근데 김지남, 최석정, 이민철, 숙종의 유산을 일제가 약탈하고 훼손한 게 저는 더 속이 쓰리네요. 그것도 잘 지키려고 보존한 걸 구석구석 들쑤셔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1.25 16:51
    No. 3

    등장 인물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는 맛도 좋습니다^^

    즐겁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25 22:35
    No. 4

    옙, 고맙습니다. 인물간 대화 쓰면서 저는 좀 어려워 했는데 재미있게 읽어주셔서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1.25 21:17
    No. 5

    김지남 이라는 인물이 참 알송달송합니다.
    어떨때는 너무 어수룩하고, 어떨때는 해학이 넘치고, 어떨때는 최석정과 비견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네요 =)
    투래질.. 저 대사를 김지남이 한거겠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25 22:41
    No. 6

    저 인물들 중에서 평범한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김지남만 해도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가서, 일행들은 일본에 유학을 전파한다고 자위하는 동안, 일본 조총에 두눈 부릅뜨고 돌아와서, 바로 청국으로 또 사은사 일행으로 따라가서 청국 화약의 비전을 훔쳐배우려고 10년간을 기를 쓴 불굴의 조선인이니...천재들 이야기에 지쳐서라도 차기작은 현대물로 써야겠다고 벼르는 중입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1.25 23:23
    No. 7

    현대물을 쓰실 계획이라니 정말 기대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29 01:44
    No. 8

    에...오히려 짜임새는 역사물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11.26 14:05
    No. 9

    일제...몇 년이나 해먹겠다고 그렇게 디테일 했던 건지....그나저나 달래고개라니, 달래고개라니! 그걸 달래는 쏙 빼고 수달의 달, 그냥 달, 단맛의 달로 음차를 해 놓는다고요? 으음. 유학자들이 뭔 생각으로 이름을 붙이는지 알만 하군요. 음란함은 저들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29 01:48
    No. 10

    김지남이 백두산 국경을 정한 여정기도 일제가 손봤다는 말도 있고, 백두산정계비도 손봤다고 하고, 최석정의 저서들은 일본학자가 헌병대를 앞세워서 강화도 절에 들어와서 탈취해갔고, 숙종의 글들은 많이들 가져갔죠. 50년치곤 너무 디테일해요. 달래강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러다 음운공부도 해야하나...고민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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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해의 그림자 136 +8 13.10.18 2,101 37 36쪽
136 해의 그림자 135 +8 13.10.13 3,191 36 36쪽
135 해의 그림자 134 +10 13.10.10 2,332 34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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