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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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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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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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1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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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73

DUMMY

좋은 아침이었다. 최소한 최석정에겐 음력 4월 초닷새의 아침햇살은 너무도 화창했다. 궐안 담장이며 지붕이며, 싱싱한 푸른 잎새가 턱을 괴고 웃는 듯한 봄날의 기운은 마냥 따뜻했다. 그 싱그러운 아침햇살을 머금고 석정은 금천교를 건너다, 금천교 앞에 모인 신료들을 발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저 싱그럽게 웃었을 뿐인데, 그런 최석정을 돌아보는 신료들의 눈빛은 마치 징그러운 지렁이를 보는 듯하였다. 편전 앞에 늘어선 신료들의 얼굴은 남인들이 아니고 서인들인데도, 최석정을 돌아보는 눈빛만은 똑같았다.


"부응교, 자네 뭐가 그리 좋은가?"

"네?"

"뭐가 그리 좋아서 이런 비상시국에 그리 실실 쪼개고 웃느냐 말일세."

"무슨...일 있습니까?"

"그럼 모르고 웃었던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우의정 정지화가 최석정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석정은 속눈썹이 뻣뻣해지도록 두눈을 크게 뜨고 좌우 분위기를 살폈다. 자신이 그렇게 눈치가 없는 인물은 아닌데, 인맥은 없었다. 조부 최명길의 굴레가 여기저기 옥죄는 바람에 운신의 폭이 좁은 탓이었다. 아무래도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번에 정5품 사헌부 지평持平이 된 오도일을 힐끗 쳐다보니 오도일이 자신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들어 속삭였다. 벌써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석정에게 하대를 하기도 껄끄러워 반존대를 하면서.


"허견이 복선군을 옹립하려 역모를 꾸몄다 하더이다."

"..."


석정의 두눈이 크게 홉떠졌다. 역모라니? 그는 어쩐지 오싹한 오한이 자신의 온몸을 휘감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인달방 일대가 허적이 몰래 심어둔 허적의 눈과 귀이고, 손과 발이며, 칼과 창이었다. 그자들을 움직이면 궁중에 자객을 침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라니? 갑자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역모?


"그게 무슨...허견은 엊그제 귀양을 떠났는데..."

"허견이 귀양을 떠나자마자 고변을 당했으이. 그것도 그 친인인 정원로와 강만철한테."

"..."

"자네는 전하의 측근이라면서 그런 것도 모르나?"

"..."

"정원로야 허견의 압객이고...또 강만철은 허견의 처남이니..."

"친인들이 고변하였으니, 제놈이 빠져나가진 못할 게야."


석정은 신료들의 말이 그저 물위에 뜬 기름방울처럼 고막에 둥둥 뜰 뿐이었다. 몸이 부실해서인지, 고막이 찌잉 울렸다.


정원로? 강만철? 엊그제 허견이 귀양을 떠날 때 친히 배웅까지 왔던 인물들이었다. 밀화가 섞인 갓끈까지 서슴지 않고 금부서리한테 떼어준 자들이었다.


그리 우의가 돈독한 자들이 하루아침에 안면을 몰수하여 허견을 역모로 고변했다니. 아니 역모는 자칫하면 삼족, 아니 구족까지도 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철천지 원수라도 그리 모질고 독하진 못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그자들이 허견의 집앞에서 충장장들과 시선이 얽히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충장장이면 왕의 사람이었다. 왕이 아니어도 재산루에서 양성한 대비전 혹은 김석주의 사람일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배후는...


홍문관으로 향하는 최석정의 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빨라졌다. 진선문 앞을 지나니 행랑으로 정면을 막아놓은 홍문관 각사가 눈에 들어왔다. 석정은 행각문을 지나고, 중문을 지나고, 장승같은 두그루 소나무를 지나 다섯칸짜리 홍문관 옥당玉堂 앞에 이르렀다. 마침 푸른 청단령을 입은 어느 당하관과 함께 나서는 김석주의 비대한 몸집이 한눈에 띄었다.


"..."


김석주가 콧구멍이 벌름거릴 정도로 소리없는 코웃음을 치며, 최석정을 향해 고개를 살짝 까딱해 보였다. 허견은 물론 그 주변에 얼씬대던 날파리 한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야. 그 눈이 그렇게 말했다.


"병판대감..."

"여기선 대제학 대감이라 불러주게."


최석정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끓어오르는 분노 탓에 코끝이 마냥 매웠다. 콧김을 흘러내고도 심장이 마냥 뜨거워졌다. 대비전이라면 몰라도 중전마마가 연루되실 리가 없다. 그리 연꽃처럼 맑은 심성으로 이 혼탁한 음모의 늪에 스스로 빠질 리가 없다. 비록 세번의 회임이 핏물로 변하여 그녀의 온몸에서 갈기갈기 갈라져서 흘러나간다 해도.


"이분이 부응교 최석정이십니까?"


청단령의 당하관이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듯 유심한 눈길과 마주친 순간, 최석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굳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 동년배로 보이는 사내였다. 살짝 광대뼈가 도드라지는 관옥같은 피부며, 쌍커풀이 또렷하게 진 눈매며, 깊은 심기를 감춘 눈동자며, 오만함이 느껴지는 곧은 콧날이며, 한일一자로 다부지게 닫은 입술이며, 그리고 유난히도 큰 귀에 넓은 귓볼까지...왕가의 피가 흐르는 외모였다. 석하와 닮은 듯하면서, 한편으론 또 왕과도 닮은 느낌이라선지...겨우 눈이 마주칠 정도의 짧은 순간인데 시간이 너무도 느리게 흘렀다.


"그래, 자네보다 딱 한살 많은데 저 나이에 벌써 부응교에 올라서...저 잘난 맛에 사는 놈이지."

"..."


석정은 왼쪽눈이 살짝 일그러진 채로 당하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무도 눈에 띄는 귀남자였다. 하지만 조정에선 한번도 눈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전적典籍 이사명이라 합니다."


당하관이 준수한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허리숙여 석정에게 인사했다. 석정의 두눈에 한조각 파편 같은 빛이 반짝였다. 성균관 종6품 전적 이사명이라...그는 가만히 상대의 품계와 관직을 곱씹으며 주의깊은 눈길로 이사명을 쳐다보았다.


"성균관 전적이 홍문관엔 웬일인가?"

"저희 성균관에 워낙 장서가 부족하여, 지원을 부탁드리려 왔지요."


이사명이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고 대꾸했다. 석정은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신도 이사명의 명성이야 귀가 따갑게 들었다. 왕실의 고귀한 혈통이 이어진 백강白江 이경여의 혈손...이민철과 이민서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천재 조카...불과 두달 전까지 성균관 서장의로 있다가 춘당대에서 열린 황감제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사제賜第(왕이 특명으로 과거급제와 똑같은 자격을 내림)의 은혜를 입은 자였다.


"의욕이 매우 넘치는군."

"성균관이야말로 나라의 근간이니..."

"허면 가서 열심히 해 보시게."


석정은 눈도 꿈쩍 않고 말허리를 뚝 잘라버리고는 이사명에게서 눈길을 돌려서 바로 김석주를 쳐다보았다. 성균관 전적이 하필이면 이런 시국에 홍문관으로 찾아와서 김석주를 만나고 간다는 사실이 께름칙 하였다. 김석주가 여론을 움직일 요량으로 성균관의 터줏대감을 불렀다? 정권을 갈아치웠으니 성균관의 여론을 꽉 잡아둬야 정국의 기반이 탄탄하긴 할 터였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일까? 이사명의 눈빛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자들보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았다.


"..."


석정이 이사명을 지그시 쏘아보는데, 등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석정이 돌아보니 두광이었다. 두광은 긴장한 난빛으로 석정을 보고 가만히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께서 최부응교를 찾으십니다."

"알았으이."


최석정은 이사명에 대한 찜찜한 느낌을 접어두고 황망히 걸음을 틀어 양화당으로 향하였다. 마음이 급하였다. 두광은 석정이 대청에 오르도록 방석까지 놓아주곤 장지문을 열어두었다.


"전하, 부응교 최석정 들었나이다."


하지만 왕은 서안 위의 문건에 시선을 못박은 채로 눈길을 들지 않았다. 두광은 장지문을 열어둔 채로 왕의 시선이 석정에게 닿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하지만 석정이 한참을 부복하고 있어도 왕은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왼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한장의 상소를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미동도 없었다. 저 좋은 기억력으로 상소를 외우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참다 못한 석정이 앓는 듯한 목소리로 오른쪽 등허리를 부여잡았다.


"전하..."

"..."

"전하..."

"..."

"전하..."

"그만 부르시오. 귀 찢어질 것 같으니."


숙종이 마침내 손등으로 귓등을 문지르며 답하였다. 석정은 흠칫 놀라 숙종의 손등을 쳐다보았다. 일전의 흉서 사건 때도 이렇게 심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석정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상소로 봉입되었다는 정원로의 고변이었다. 무슨 고변을 비밀리에 하지도 않고 이렇게 백일하에, 또 만천하에 문부백관이 알 만큼 공개적으로 하였다는 건지. 당장 왕이 고변을 읽는 사이에 발 없는 말이 통명전과 양화당 담벼락을 넘어 정원으로, 옥당으로, 대청으로 소문이 파다해진 건지.


정원로와 강만철이 고변을 하였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다. 엊그제 아침만 해도 귀양 떠나는 허견을 배웅나왔던 저들이 오늘 아침엔 역모로 고변했다? 하루이틀만에 변심하고 배신했다? 이상했다. 자신은 이미 허견의 서찰을 물증으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왕에게 상주했고, 왕은 수렴했다. 헌데 곧바로 정원로와 강만철이 고변을 해버렸다.


"전하, 허견의 서찰은 어찌하실..."

"아, 내 이미 사부에게 약속했지 않소. 물증으로 삼지 않겠다고."

"하오시면..."

"그래도 심증으로 삼을 것이오."

"..."


왕의 단언에, 석정은 말문이 턱 막혔다. 물증 대신 심증으로 삼으시겠다니?


"모르고 속아줄 순 없어도, 알고도 속아줄 순 있지."

"전하?"


석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왕은 알고도 속아줄 수 있다고 하였다. 설마 김석주가 거짓 편지로 허견을 역모죄로 음해하려는 것을, 왕이 눈감고서 동조하겠다는 얘기인지. 어심이 바른 길이 아니라 그른 길을 가겠다고 예고한 것인지. 숙종의 목울대에 고정된 석정의 눈길이 흩어지듯 흔들렸다. 왕의 음성이 겨울날 살을 에는 북녘바람 같았다.


"중궁의 세번째 회임마저 잘못되었소. 내 핏줄이 둘이나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었소. 사부와 똑같은 시기에 잉태되었다가 잃어버린 용종까지, 합이 셋이오. 사부의 아내가 홀로 출산을 하는 그날, 중궁은 홀로 눈물을 삭이다가 그저 그날밤 아무도 모르게 미역을 사람을 시켜 그집 담너머로 던져주었소."


석정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태아를 잃은 중궁이 자신의 집 담장너머로 사람을 시켜 아무도 모르게 미역을 던져 주었다? 그 사려깊은 배려에 감격한 게 아니었다. 중궁이 무사히 출산을 했더라면, 아기를 잃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야밤에 몰래 미역을 던져주지 않고, 격식을 갖추어 보냈을 터였다. 신하를 아끼는 왕의 어심을 전하려고, 그 성총을 비추려고 그렇게 손길을 드러냈을 터였다. 태아를 잃은 탓에 아무도 모르게 손길을 감추고서 자신의 처와 아기를 보살폈을 터였다.


하지만 가슴으론 이해해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뼈저린 고통과 분노를 이용하려 드는 김석주 같은 자들에게 이용되어선 안되었다.


"하오나 전하, 김석주는 서찰을 조작했든 왜곡했든, 전하의 성심을 어지럽혔습니다. 정원로의 일도 필시 ..."

"듣기 싫소."


숙종의 음성이 시퍼렇게 날이 선 채로 조용히 허공을 베었다. 석정은 당혹감에 두눈을 깜빡였다.


"전하?"

"내가 사부를 병조에 넣은 이유를 물었지. 하필이면 왜 김석주의 휘하에 넣었냐고. 그리고 지금도 사부를 홍문관에 넣었고, 또한 김석주의 휘하요. 사부는 이미 짐작했겠지만, 혹시 모를까봐 지금 답해주겠소."

"..."


석정은 왕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직감했다. 어쩐지 불길한 구름이 그의 뇌리를 덮었다.


"김익훈...중궁의 숙조부 김익훈이 충청감사 이명익의 과실을 폭로했다가 오히려 고존장告尊長의 율律에 의거해서 파출을 당한 일을 기억하오?"

"그거야 지금도 그일로..."

"감히 상관을 침모한 죄. 그 일로 김익훈은 지금도 조정에 복귀하지 못하는 상황이오. 중궁이 그토록 의지하는 친인척인데도."

"전하..."


석정의 가슴이 바람드는 장지문의 문창지처럼 떨려왔다. 이미 짐작하긴 하였으나, 짐작한 탓에 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무정한 왕은 계속하여 말했다.


"그 고존장의 율에 사부를 묶어서, 김석주의 계획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오."

"..."

"사부는 이제 더는 입도 벙긋할 수 없소. 그 누구에게도 이 일을 발설할 수도 없고, 발고할 수도 없소. 감히 직속하관이 직속상관을 고변할 수는 없으니."

"..."


석정은 숨이 꽉 막혀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왕의 입에서 한마디한마디 나오는 발언마다 모질고 독했다. 자신의 입을 막기 위해 김석주의 밑으로 들여보냈단다. 그러면서 왕의 눈과 귀가 되어 보고 듣고 하란다.


이미 왕은 마음을 정했다. 김석주의 흉계에 올라타실 흉중이다. 모르고 속아줄 수가 없으니, 알고 속아주겠다는 심산으로, 그러면서 최석정 자신에게 진상을 캐게 하고, 또 진상을 덮게 하실 심산으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지실 수 있는 건지. 김석주의 어둠을 싫어하는 자신을 그 그늘에 가두시다니.


"미안하오."


사과를 싫어하는 왕이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과했다. 그런데 그 사과조차 냉혹하고 잔혹했다. 나는 알고도 김석주에게 속을 것이다, 허니 너도 알고도 내게 속아라...그런 의미가 함축된 사과였다. 석정은 떨리는 두손을 움켜쥐었다.


"전하, 판의금 이정영 들었나이다."

"들라 하라."


오시수에 이어 새로 판의금부사에 제수된 이정영이 방안으로 들어서다가 최석정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이미 문간밖에 교리를 대동한 터였다. 하지만 부응교가 벌써 와 있었다. 굳이 따로 동부승지를 대동할 필요도 없었다. 이정영은 최석정을 지나 한걸음 앞에서 공손히 꿇어엎드렸다.


"부르셨나이까."

"추국청을 열고, 문랑問郞(추국청의 기록, 죄인취조 등을 담당하는 임시관직)을 차출하라."


숙종은 서슬퍼런 음성으로 명하였다. 그 눈길은 이정영의 어깨너머로 최석정에게 못박은 채로. 이정영은 가만히 고개를 틀어 최석정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왕이 자신들보다 최석정을 먼저 불렀다. 그리고 추국청 설치 및 문랑의 차출을 명하였다. 설마 싶은 순간, 왕의 옥음이 이어졌다.


"특별히 부응교 최석정도 포함하여."

"..."


최석정의 두눈이 크게 치떠지는 모습이 이정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정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석정을 돌아보았다.


"하오나, 종4품 부응교이온데..."

"아직 정식으로 사은례도 안했으니 정5품인 셈 치시오."

"..."


이정영은 말문이 턱 막혔다. 대답부터 하려고 하였는데 고개를 먼저 조아리고 말았다. 자신이 예조판서로 있을 때도 최석정을 휘하에 데리고 있었다. 추국청의 문사낭청을 차출하는 것은 워낙 화급을 다투는 일인 만큼 삼망이니 하는 절차 없이 의금부에서 정5품 이하의 문관을 차출하여 보고한다. 왕은 의금부에서 올린 명단으로 차하差下(벼슬을 시킴)한다. 간혹 특별히 왕의 특지로 정하기도 한다. 왕은 종4품인 부응교 최석정을 지목했다. 넣으라면 넣어야 한다. 어차피 자신도 남구만과 절친한 사이니, 이왕이면 최석정이 더 손발이 맞을 터였다.



"분부...받들겠나이다."

"..."


석정은 목울대가 꽉 막힌 채로 두눈을 질끈 감았다. 왕이 자신을 문사낭청에 포함시켰다. 자신이 판의금 이정영을 보좌하여 허견과 복선군을 취조하게 생겼다. 축객령을 듣고 양화당을 나서면서도 참담했다. 뭔가가 자신의 눈시울과 목울대를 콕콕 찌르는 기분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양화당을 물러나왔는지, 석정이 정신이 들고 보니 어느덧 너럭바위 앞이었다. 돌부리에 걸려넘어지는 것도 아니고, 너부죽한 너럭바위에 발이 미끄러지는 순간에, 시야가 흔들렸다.


석정은 황급히 몸을 가누었다. 겨우 중심을 잡는데, 여기저기서 생쥐가 두부 갉아먹는 듯한 궁녀들의 웃음소리가 귓등을 간지럽혔다. 정신이 아득하여 나인들의 웃음소리도 신경쓸 겨를이 없는데, 멧돼지가 짖는 듯한 김석주의 웃음소리가 귓등을 후려쳤다.


"푸하하하! 자네 왜 그러나?"

"..."


석정은 망연자실 고개를 들었다. 병조판서 김석주가 양화당도 아닌 통명전 대청마루를 나오는 참이었다. 자신이 양화당에서 왕을 면대하고 나오는 길이니, 석주가 만난 사람이 당연히 왕일 리가 없었다. 석정은 불신어린 눈초리로 동온돌을 돌아보았다가, 서온돌을 돌아보았다.


서온돌의 주인이 김석주를 만났다.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왕이 자신을 양화당에서 마주하는 사이, 중궁은 김석주를 마주했다. 김석주가 중궁에게 고할 일이 뭐가 있다고. 석정의 흔들리는 시선이 김석주의 거뭇한 얼굴을 훑었다.


당신, 설마 중전마마를 끌어들인 건가?


사납게 다그쳐 묻는 듯한 석정의 눈길이 김석주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놈이 정신을 어딘가에 빼놓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이미 최석정은 필요가 없었다. 벌써 최석정보다 더 소중한 인질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이놈은 필요가 없었다.


석정은 김석주의 거뭇한 얼굴에서 언뜻 비치는 흰 눈자위에 이를 악물었다. 홍진에 묻지 않고 고결했던 중궁이 김석주를 만난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중궁은 김석주를 만나선 안되었다. 김석주가 꾸미는 온갖 너저분하고 지저분한 권모술수에 중궁은 얽매여선 안되었다. 석정은 두눈이 붉게 충혈되도록 석주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석주가 이마에 석삼三자로 주름이 깊게 패이도록 눈썹을 치키면서 어르고 을렀다.


"이보게, 자넨 홍문관으로 옮겨서도 내 밑이란 걸 잊은 것 같으이?"

"..."

"눈에서 힘 좀 빼게. 솔직히 나라고 자네 같은 하관을 두고 싶겠나?"

"..."


김석주가 놀리는 말에도, 석정은 두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속눈썹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석정은 김석주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터벅터벅 걷다보니 양화당 마당 앞을 사월의 바람결이 휘감았다. 귀옆으로 살짝 삐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자신의 눈밑이며 코밑을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담장 너머로 뾰족한 솔잎들도 흔들흔들하며 자신의 두눈을 찌르는 것은 착각 탓일까.


금세라도 눈을 찌를 듯한 초록바늘을 올려다 보면서, 석정은 골똘히 생각했다. 통명전 담벼락 앞을 지나가는 오도일이 손을 흔들어보이고, 다시 까치발을 뛰며 손을 흔들어도 아무 것도 두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김석주는 그대로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육조거리의 병조에선 옆에 있는 형조로 자리를 옮겨도 남여를 타고 다녔지만, 궐안에선 그럴 수도 없었다. 걷는 것도 귀찮아서 살이 찌는 김석주에게는 이곳 홍문관에서 저곳 통명전까지는 너무도 멀었다. 중궁전이 다시 회임이라도 한다면야, 그 핑계로 대조전으로 어궁御宮을 옮기기라도 하지. 헌데 벌써 세번째나 회임이 잘못된 중궁이 네번째도 회임이 잘될 수나 있을까.


느릿느릿한 김석주의 걸음이 한순간에 꼬여버렸다. 그는 통명전 협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서, 아직도 협문을 지키는 허후를 흘끗 쳐다보았다.


참으로 용한 놈이었다. 아비가 쫓겨나고, 형이 찍혀나갈 판국에, 꿋꿋하게 통명전 협문을 지키다니. 김석주는 허후를 곁눈질로 살피면서 입꼬리를 비틀어올렸다. 그리고는 입시를 청하여 안으로 들었다.


"영상領相은 아직인가?"


김석주가 양화당에 들자마자 왕이 다그쳐 묻는 말이었다. 김석주는 한순간에 영상이란 호칭에 허적을 떠올렸다. 벌써 몇년동안 줄곧 영상에 있었던 허적인 탓에, 도무지 다른 이름은 적응되질 않았다. 김수항...그 이름을 애써 묶어놓고 석주는 꿇어엎드린 채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아직 영평현永平縣(포천의 다른 지명)에서...와병 중이라..."

"..."


숙종은 미간을 찌푸렸다. 송시열의 제자들은 왜들 하는 짓이 하나같이 똑같은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나머지 서인들은 기왕 잡은 정권을 놓칠세라 하루이틀 만에 사은례도 후딱 해치우고 정식으로 부임하여 남인들에게 칼질을 해대기 바쁜 와중에, 김수항은 포천에서 느긋하게 칭병하고 칩거를 하다니. 왕이 누차 사관을 보내어 전유傳諭(왕의 뜻을 전함)하여 자신들의 체모를 세우겠다는 심산인가.


"가주서 김이현을 보내어 다시금 전유하라."

"예 전하. 그리하겠나이다."

"그리고 부응교 최석정을 다시 부르라."

"예 전하."


숙종은 짜증스레 목을 긁었다. 도승지가 공석이니 이래저래 불편했다. 졸지에 최석정이 또 양화당으로 불려왔다. 도승지가 공석이니 왕이 승정원보다도 최석정을 불러 수시로 교지를 맡기는 탓이었다.


석정은 양화당 앞을 시위하는 금군 하나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반가운 눈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 멈칫해선 금군들의 면면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어떤 날엔 사복시가, 또 어떤 날엔 별군청이, 또 어떤 날엔 내금위가 무작위로 숙직하며 왕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였는데, 이제 보니 왠지 눈에 익은 얼굴도 있었다. 특히 방금 자신을 보고 언뜻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애매모호한 눈웃음을 띠던 스물 언저리의 금군이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하지만 좀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


석정은 한번 더 그 금군을 쳐다보고 한걸음한걸음 후들거리는 다리로 양화당으로 다가섰다. 양화당 안에서는 왕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반겼다. 벌써 두광이 서안까지 갖다놓고 먹을 갈아놓고서는 석정 자신이 들어서자 문간으로 물러나는 참이었다.


"최부응교, 교지를 두장 쓰시오."

"..."

"유상운을 도승지에 명한다. 김만중을 대사간에 명한다."

"..."


이틀도 기다리기 힘든 실정이었다. 왕은 남구만을 도승지로 삼으려던 계획을 접고, 대사간 유상운을 도승지로 이배하고, 김만중을 대사간에 놓았다. 석정은 붓을 잡다 말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 스승 남구만 대신 대사간 유상운을 도승지로 삼고, 그 대신 김만중을 대사간에..."

"처숙의 세치 혀가 대사간엔 적합하지."


혀에 가시라도 돋쳤는지 왕의 옥음도 날이 서 있었다. 김만중이 불편했다. 쇠꼬챙이 같은 혀끝이 불편했다. 안주와 개성 등지로 보냈을 때도 김만중이 뭔가 알아내고도 침묵한 사실도 불편했다. 하지만 중궁을 지키기 위해 단행한 환국이었다. 어쩌면 중궁보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함일 지도 모르지만, 중궁을 지키고 싶은 것은 진심이었다. 그런 만큼 광산김문 일족을 영전시켜야만 했다.


"허견은...어찌 하실 것입니까?"


석정은 유상운을 도승지로 임명하는 교지와, 김만중을 대사간에 명하는 교지를 각각 쓰고선 조심스레 붓을 벼루에 내려놓고 물었다. 이제 고변이 의금부에 접수되었을 뿐이니, 벌써 허견의 처우를 논하기엔 이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 모든 게 왕이든 중궁이든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수도 있었다.


"어쩌긴. 죄가 있으면 죄를 받고, 없으면 받지 않는 거요."


숙종의 대답은 차가웠다. 석정은 손발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어서 청단령자락을 힘껏 움켜잡았다.


허견의 역모라...허적도 아니고 허견의 역모라...


머릿속이 맹렬하게 소용돌이 쳤다. 복선군과 허견이라...이미 허적에 대한 어심이 돌아서자, 이레가 지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허견의 친인들이 한꺼번에 등뒤에서 비수를 꽂았다. 이렇게나 빨리. 세상 인심이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던가. 생판 남도 아니고, 오랜 세월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또는 잠도 자고 했던 친인들일텐데.


허견, 허견, 허견...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고작 교서정자校書正字를 지낸 허견이 역모라...적출도 아닌 서출이 역모를 도모했다? 조선팔도를 주름잡고 휘두르던 영의정 허적이 고작 서자 아들 하나 때문에 역적의 낙인을 찍게 생겼다. 양천허씨 일문이 구족이 멸하게 생겼다.


"허면 허적은 어찌 하실 것입니까?"

"허적의 목숨은 붙여둘 거요."


인정 많은 발언이었다. 대역죄는 구족을 멸하는 마당에, 역적의 아비를 살려두겠다니...하지만 석정의 귀엔 눈곱 만큼도 온기가 없는 음성이었다. 목숨을 붙여두겠다는 말도, 어쩌면 잔인하게 들렸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석정은 양화당을 다시 물러나와 통명전 앞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천담복을 벗은 중궁이 핏빛 당의를 입고 통명전 마당을 거니는 참이었다. 이제는 붓기도 제법 빠져서 멀리서도 한눈에 맵시가 실아있어, 오히려 새빨갛게 일렁이는 불꽃 같았다. 그 뒤로 본방나인 하나가 눈처럼 새하얀 연꽃문양의 단선을 들고 뒤따라는 참이라선지 더욱 색깔이 대비되었다.


"중전마마!"


감히 신료가 중궁을 불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그는 깜빡했다. 스승의 족형 남용익이 사은을 하러 통명전에 들었다가 무심코 중궁의 옥안을 본 죄로 왕에게 노여움을 살 뻔했다는 말도 뇌리에서 지워졌다. 마음이 급했다. 설마 중궁이 이번 허견의 옥사에 관여가 되었는지, 연루가 된 것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


진홍은 흠칫 놀라서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양화당의 너럭바위 옆을 지나서 최석정이 다급히 걸어오는 참이었다. 세월이 무상했다. 자신이 큰 것인지, 최석정이 늙은 것인지. 성균관 입학례 때 당시 동궁이었던 지아비의 막차에서 마주친 것이 엊그제 같은데.


"..."


진홍은 석정을 무심코 쳐다보다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평소에는 신료들과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어떤 청탁이든 받지 않았고, 만나지도 않았다. 언제든 신료들과 밖에서 마주칠 때면 버드나무 가지 아래에서 얼굴을 가렸고, 안에서 마주할 때면 주렴을 치고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을 가릴 수 있을 만한 물건이 등뒤의 연꽃부채 밖엔 없었다. 진홍은 멀뚱히 뒤에 서 있는 봉이의 소매를 잡아당겨 자신의 얼굴을 가리도록 하였다.


"최부응교, 무슨 일이오?"

"..."


최석정은 그 자리에서 코끝에 어린 들숨을 멈췄다. 김석주와 손을 잡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목울대가 꽉 막혀서 소리가 올라오질 않았다. 손끝에 온기가 하나도 남지 않은 채로 석정은 그저 문인석처럼 굳어 있었다. 딱한 처지가 되어버린 채로 고개를 숙인 석정을 진홍은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사흘 전엔가 병판대감이 내게 서찰 한장을 보내왔었소."

"..."


석정은 가슴이 섬뜩하여 두눈을 홉떴다. 차마 물을 수 없는 말을 중궁이 답하려 한다. 심장이 떨릴 지경이었다. 제발, 전하를 위해서라도 중궁이 변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그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힘을 주고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그 서찰을 묻는 것이라면..."

"중전마마!"


갑자기 끼여든 음성이 중궁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진홍은 흠칫 놀라 협문 쪽을 쳐다보았다. 협문쪽에서 김석주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참이었다. 석정도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 게으른 성미의 소유자인 김석주가 이렇게 빨리 걸어오는 것은 처음 보았다. 멧돼지가 그대로 자신을 들이받으러 달려오는 듯 하였다.


"병판대감..."

"옥체 미령하시온데, 어찌 나와 계시옵니까?"

"..."

"이만 들어가시옵소서. 전하께서 심려가 크시옵니다."

"..."


진홍은 김석주의 시꺼먼 낯빛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천천히 통명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목울대가 괜히 아팠다. 어느덧 입속에서 침이 굳어 돌이 된 느낌이었다. 아니, 침을 삼키는데 바늘이 콕콕 목구멍을 찔러들었다. 진홍이 몸을 돌려 통명전으로 한걸음씩 옮기자, 석주는 석정을 쏘아보며 목젖이 출렁거리도록 마른침을 삼켰다.


"자네, 나 좀 보지."


석정은 자신을 매섭게 쳐다보는 석주의 눈빛에 눈꺼풀을 느긋하게 꿈틀거렸다. 쳐다보는 것만도 지긋한 얼굴이었지만, 오히려 시선을 맞부딪혀서 그 속내를 읽어내고 싶었다. 중궁이 자신에게 서찰의 얘기를 하는 것을 가로막은 것이, 그저 중궁의 개입을 남이 알까 두려웠던 건지, 자신이 중궁에게서 뭔가를 알아낼까 두려웠던 건지, 혹은 중궁이 자신에게서 뭔가 알아낼까 두려웠던 건지 궁금했다.


"자네, 중궁을 죽일 셈인가?"


석주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며 말하고선, 따라오라 눈짓하고 앞장서서 통명전 뒤편으로 걸어갔다. 석정은 점점 멀어지는 석주의 뒷모습을 쳐다보곤 실날같은 실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중궁을 죽이는 건 당신이야.


왕에게 고하여 김석주는 물론 김만기도, 김만중도, 김익훈도, 광산김문 일족은 그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단속을 해야지만 중궁을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석정이 한걸음한걸음 석주의 발뒤꿈치를 따라잡자, 앞서가던 석주가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석정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며 한발짝씩 조여들었다.


"뭐가 그리 궁금한가. 내 친절히 답해줌세."

"정말입니까?"

"그래, 그 서찰이 궁금한가? 무슨 서찰인가 궁금한가?"

"그 서찰, 대감의 농간이지요?"

"농간?"

"여수신녀니 임녀니 그리 해괴한 은어를 허견이 만들어 썼을 리가 없습니다."

"아...그거?"


석주는 두눈에 회심의 빛을 번뜩이며 엷은 웃음을 띠었다.


"내가 허견 곁에 몰래 사람을 심어놓고 은어를 흘려주었지. 그것도 모르고 허견은 그 은어를 잘도 덥썩 물어쓴 거고."


석정은 흠칫 놀랐다. 여수신녀란 은어를 김석주가 지어붙였을 법하다고 미리 짐작은 하였으나, 허견 곁에 사람을 심어놓고 미끼처럼 던져주었던 은어라는 사실은 짐작도 못하였다.


"허면 그 서찰이 진짜란 말입니까?"

"진짜지. 물론 진짜지."

"헌데 왜..."

"그저 몇글자를 찢어놓았을 뿐이네."

"역시...?"

"원본엔 전하께 베갯머리 송사를 해대는 요망한 입을 찢어죽일 거라 써놓았지. 허견이. "

"..."


허견답다. 석정은 석주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을 꼬챙이로 꿰인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베갯머리송사라는 말은 곧 중궁을 겨냥한 말이었다. 왕의 베갯머리에 누울 만한 여인은 오직 중궁 뿐이었다. 그 중궁의 입을 찢어죽일 거라 써놓다니. 점잔 빼고 또 우아 빼는 선비들이라면 미사여구만 늘어놓겠지만, 허견은 문필文筆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그 격한 성정이 문제였다.


"하여 중전께서 그 섬섬옥수로 손수 그 글귀를 찢어내셨으이. 전하께 보이기 싫으시다고."

"..."

"어디, 농간이라고 전하께 아뢰어 보게나. 아니 당장 대놓고 서계를 올려 보게나. 판을 더 벌리는 건 내가 원하는 일이니."

"..."

"하지만 중전마마가 이일을 미리 알았다는 게 세상에 밝혀지면, 어찌 될 지 아는가? 허견을 모함한 배후로 지목되겠지?"

"..."

"한마디로 이판사판일세."

"..."


석정은 귓전에 닿는 석주의 입김에 몸서리를 치며, 눈앞에 비치는 연못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연못 위의 작은 널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작고 좁은 돌다리가 눈앞에서 무너지는 듯한 착각에 석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석주가 중궁전을 볼모로 잡았다. 아니 애초부터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중궁께서 남인과 서인 모두의 볼모가 되셨던가.


"다시 말하지만 그 서찰은 가짜가 아니라 진짤세. 그저 서찰을 전하보다 한발 앞서 중궁께서 보신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

"날 들쑤시지 말게. 전하께 생살을 찢는 아픔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으면."


물귀신 같은 허적이 그 시꺼먼 손으로 중궁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현실을 석정은 깨달았다. 석주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치가 떨렸다.


"대감..."

"자네도 지금쯤 알았을테지. 중전마마께서 스스로 암탉이 되어 허적의 제삿상에 뛰어드신 그 일. 스스로 허적과 허견을 격동시켜 그리 격분에 찬 서찰을 쓰게 만드신 걸세."

"..."

"자네도 알지 않나. 그 맑고 밝으신 성품에 공작이 가당키나 하나. 허나, 상대를 격동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지. 어미가 새끼를 안은 모악산, 그 모악산에 새끼를 잃은 어미의 한이 닿았으니..."

"..."

"자넨 역시 나한테 안 되이."

"..."


모악산. 석정은 얼이 빠져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미가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모악산이란 이름이 붙은 산 남쪽에 사축서가 있다. 그 사축서에서 김석주의 손으로, 혹은 김석하의 손으로 건네진 암탉이 허적의 제삿상과 잔칫상에 투하되었다. 세번의 회임이 잘못된 한이 이렇게도 깊은 건가.


하긴 중전마마도 사람이니.


하지만 한발한발 걸음을 내딛을 수록 석정의 생각들은 계속해서 굽이치고 또 굽이쳤다. 그렇다고 중궁의 성심이 변해선 안된다. 중궁마저 김석주의 손바닥에 놀아나선 안 된다. 중궁이 총기를 잃고 김석주에게 휘둘리면, 성상마저 성총을 잃고 휘둘리게 된다.


통명전 협문을 나서려다 말고, 석정은 몸을 홱 돌이켜 통명전 지붕을 돌아보았다. 통명전을 감싼 온갖 수목들 중엔 순결한 꽃이파리를 활짝 편 목련나무도 있었다. 윤달이 없는 올해의 사월 초순이니 곧 꽃잎 주변이 다색茶色으로 변하여 시들어 떨어질 터였다. 벌써 가장자리가 시들시들 시들어가는 꽃잎을 보는 석정을 보면서 석정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켜...드려야겠지.


시들 조짐을 보이는 목련꽃잎을 보는 그 눈동자에 어린 것은 체념이 아니었다. 차라리 투지였다. 석정은 아랫입술을 가만히 씹었다. 중궁의 초심을 지켜 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빈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지켜 드려야만 한다고, 그 맑고 밝은 성품 그대로 중궁의 마음을 지켜야만 한다고, 몇번이고 뇌까리며.



금부도사를 따라 의금부 바깥문으로 다가서는 복선군 이남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사월의 한낮인데도, 자단령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결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의금부 모퉁이마다 한그루, 또 한그루씩 고개를 떨구고 푸른 머리를 드리운 버드나무가 사나운 바람결에 잎을 파르르 떠는 모습보다도 더 비참하게.


그는 앞장서서 걷는 금부도사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미 자신과 어울리던 친인들은 벌써 금부에 갇혀 모진 고문에 시달릴 터였다. 평소 호형호제 하던 정원로가 자신과 허견을 엮어서 고변을 하였다.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소나기에 신을 바꿔 신을 줄은 몰랐다. 아니, 등뒤에 칼을 꽂을 줄은 몰랐다. 어심이 변했다고, 겨우 대엿새만에, 자신의 피를 말리고 씨를 말리겠다고 덤벼들 줄은 몰랐다.


벗이라 믿었던 자가 고작 섭薪(섶의 옛말)에 불과했다니. 불씨만 닿아도 화르륵 불타버려 가까이 두어선 안될 섶이었다니.


평소 고고하던 복선군의 위용이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두려웠다. 한번 들어가면 다신 나오지 못할 금부禁府가 눈앞에 있다니. 그는 문간에서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왕가의 혈통답게 당당한 위엄을 보이려 하였는데도, 막상 공포가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걸음이 더 나아가질 않았다.


"남楠아!"

"형님!"


마침 의금부 앞에서 불안어린 음성이 그를 불러세웠다. 형 복창군 정楨과 아우 복평군 연㮒이 핏기 없는 얼굴로 뒤따른 참이었다. 독毒이 오른 서인들이 아우를 독 안으로 밀어넣었다. 아니, 역모라면 아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도 연좌죄에 걸려서 살아남지 못할 일이었다. 복선군은 형제들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보고서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등허리를 쭉 폈다. 허공에 걸린 그 눈동자도 결연하게 번쩍였다.


나는 왕가의 피다.


복선군은 형과 아우를 돌아보며 여릿하게 미소를 띠었다. 이미 의금부 앞에 세워진 바깥문을 지나왔다. 첫발이 어렵지, 두번째발은 차라리 쉬웠다. 그는 쓴웃음으로 화답하곤 의금부 앞 솟을삼문으로 걸어들어갔다. 무릎과 등허리를 쭉 펴고서 오연한 걸음걸이로. 솟을삼문 안에도 삼도가 뻗어있었다. 신도臣道로 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평생을 어도는 밟아보지도 못하였다. 밟을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내심 밟고 싶긴 하였다. 자신도 모르게 어쩌다 한두번씩 생각을 해보곤 하였다.


주상이 후사 없이 승하하신다면.


왕은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 몸져 눕는 날도 허다했다. 그나마 중궁과 정의情誼가 깊어서 해마다 회임소식이 들리긴 해도 결실이 없었다. 이러다 왕이 붕어하면 보위를 이을 만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이미 형과 아우는 홍수紅袖의 변變에 연루되어 죄인의 멍에를 썼고, 조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왕이 후사 없이 귀천하면, 용상은 자신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보면서도 정작 신도에서 어도로 걸음을 옮길 엄두를 내지도 못하였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삼도를 내려다보고 머뭇거리면서 왼쪽 신도로 걸음을 내딛을 뿐이었다. 감히 밟지도 못하는 어도인데 역모의 덫에 걸려들었다. 그저 한귀퉁이라도 역심逆心을 들켜선 안되는 것을.


"이제야 오셨소 복선군?"


판의금判義禁 이정영이 을씨년한 호두각虎頭閣 그늘 아래 위관석에 앉은 채로 복선군을 쳐다보며 씁쓸히 웃었다. 복선군은 웃음기 가신 얼굴로 이정영을 흘끗 쳐다볼 뿐 암 말도 없었다. 이정영은 흘끗 최석정을 돌아보았다.


종4품인 최석정을 굳이 문랑에 넣어 국청에 참석시킨 왕의 안배가 신경이 쓰였다. 추국을 받고 복선군 이남이 어떤 진술을 하든간에, 왕의 눈과 귀가 되어줄 존재였다. 그런 만큼 최석정은 보이는대로, 보는 대로 추안推案을 기록할 터였다. 이번 사건이 고변이든, 무고이든간에, 최석정의 붓끝에서 서인과 남인의 명운이 갈라질 터였다. 최석정의 붓털조차 불태워버릴 만큼 왕의 진노가 뜨겁지만 않으면.


작가의말

백과사전 검색해 보면 문랑은 종7품 아래의 당하관 중에서 뽑는다고 되어 있지만, 실록을 찾아보면 저 복선군과 허견 사건 때 차출된 문랑들은 종5품이나 정5품이었습니다. 최석정이 부응교 자리에서 문랑으로 차출이 된 것이 특이하긴 한데, 저는 그냥 사은례를 안한 핑계로 왕이 떠맡기는 걸로 상상을...


감잡으신 분들 계시겠지만, 김석주가 슬슬 악역포텐을 터뜨릴 예정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3.13 21:16
    No. 1

    정말 중궁이 그 개를 잡기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힌걸까?
    최석정도 많이 구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17 01:02
    No. 2

    천지인 쓸 때에 비하면, 인물들이 너무 순탄한 게 아닌가...싶기도 합니다만.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3.15 18:44
    No. 3

    바빠서 재미있게 감상만하고 댓글 못달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재탕;;하고 댓글 답니다.
    저는 최석정이 구르든, 김석주가 피를 묻히든, 강아지가 어떻게 되든 그저 재미있게 보는데,
    중궁을 어이하실지 그게 제일 궁금합니다.
    역사라는 제일 큰 미리니름을 어떻게 재해석해 내실지,
    머리가 타오르는 작가님이 눈에 훤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17 01:03
    No. 4

    오늘 흰머리 하나 뽑았습니다. ㅠㅠ 사실 진홍의 엔딩을 머릿속으로 굳혔는데, 이런 댓글 보니 또 살짝 흔들리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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