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얼마 전에 독일에게 포로로 잡힌 라마누잔의 연구 노트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힐베르트에 의해 검증을 받았다. 힐베르트는 이 연구 노트는 암호와는 상관 없으니 돌려줘도 되고, 라마누잔은 대단한 수학자라고 보고했다. 잡혀 있던 라마누잔이 끌려 나와서 책상 위에 앉았다. 라마누잔이 불안한 눈길로 눈치를 보았다.
‘내 노트는 돌려주겠지?’
그 때 한 독일 장교가 라마누잔의 앞에 앉았다.
“이보게, 자네. 독일을 위해 일할 생각은 없나? 우리는 적군의 암호를 해독할 수학자가 필요하네.”
라마누잔은 자신이 순수한 수학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난 수학을 연구하는 수학자야. 그런데 전쟁을 위해서 연구하라고? 그럴 순 없어!’
라마누잔이 대답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러자 그 장교가 말했다.
“자네가 독일을 위해 연구한다면, 힐베르트 밑에서 평생 교수직을 보장 받고 하고 싶었던 수학을 연구할 수 있을 걸세. 전쟁이 끝나면 인도에 있는 자네 가족을 데려와서 독일에서 같이 살 수도 있을 걸세. 어떤가?”
독일 장교의 말에 라마누잔은 흠칫했다.
‘평생 교수직을 보장 받고 수학을 연구할 수 있다고?’
라마누잔은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영국 수학자들에게 여기저기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 답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라마누잔 일생 일대의 기회였다.
‘하..하지만..’
독일 장교가 말했다.
“천천히 결정하게.”
그 날 라마누잔은 야채로 만든 고급 식사를 대접 받았다. 라마누잔은 채식주의자였기에 영국군에 있을 때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별로 없어서 무척 곤혹을 치뤘기에,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식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독일 장교가 말했다.
“이 제안에 승낙하면 자네를 위하여 모든 편의를 봐 줄 수 있네.”
결국 라마누잔은 독일군의 제안에 승낙했다.
‘이건 모두 수학을 위해서야!’
한편 한스의 전차 부대는 앞으로 타게 될 전차들을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새로 지급된 마크 V 전차는 여기저기 탈출용 해치를 더 뚫어 놓았기에 격파 당했을 때 빠른 탈출에 용이할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한스의 건의대로 하부 장갑 쪽에도 탈출용 해치가 설치되어 있어, 전차가 옆으로 뒤집어졌을 때도 쉽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생공장에서 보수한 이 따끈따끈한 마크 V 전차들에는 대전차 라이플도 설치되어 있었다. 마크 IV 부터는 장갑이 강화되어 먼 거리에서는 대전차 라이플이 별 소용은 없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적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오토바이 병이 둘이나 중대에 들어왔다는 것도 각 소대의 전령 입장에서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프란츠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젠 내가 전령 안 해도 된다! 신호기 색이나 조작하면서 꿀 빨아야지!’
에밋이 두 오토바이 병, 플로리안과 펠릭스에게 물었다.
“자네들 운전 경험은 많은가?”
17세의 플로리안과 펠릭스가 얼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3번 운전해봤습니다!”
“저는 4번 운전해봤습니다!”
기대에 부풀어 있던 전차병들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다. 그래서 플로리안이 자신감 있고 애국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비장하게 말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차병들은 모두 새로 방화복과 가죽 무릎 보호대도 지급받았다. 한스의 전차 중대원들은 새로 지급받은 전차들에 만족스러워하며 아미앵으로 출발했다. 아미앵 철도역은 아주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양측 모두 사활을 다해서 싸우고 있었다. 행군하던 전차 중대가 잠시 멈추고 휴식할 때, 에밋이 중얼거렸다.
“분명 그곳은 지옥이 따로 없을 겁니다.”
바그너가 말했다.
“어디는 지옥 아니었나?”
“내일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악!!”
한참을 행군해가는데, 초짜 오토바이병 플로리안도 제법 자신감이 붙어서, 살짝 속도를 내며 전차들을 앞질러 갔다.
‘전차들은 생각보다 속도가 느리잖아?’
플로리안은 한 눈을 팔며 속도를 내다가 땅 위에 툭 튀어나온 돌맹이에 오토바이 앞 바퀴가 걸렸다.
“으아악!!!”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던 탓에 플로리안은 10m 넘게 앞으로 날라가서 땅에 고꾸라졌다.
“저 멍청한 자식!!”
“이봐!! 괜찮나?”
“아이고..아악···”
다행히 플로리안은 찰과상으로 그쳤지만 전차병들은 점점 새로 들어온 오토바이병들이 못미덥기 시작했다.
‘멍청한 자식..’
한스의 전차 중대가 계속 행군을 하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이번에도 프란츠가 손전등을 비추고 땅을 살피며 앞에서 신호를 보내며 티거를 앞으로 유도했다.
‘젠장..왜 하필 내가 전차 유도야...’
쿠구궁!!콰광!!
깜짝 놀란 프란츠가 뒤를 돌아보았다. 천둥 같은 포격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과 땅이 맞닿은 부분이 번쩍번쩍 붉게 물들었다.
쿠구궁 쿠궁
벤이 중얼거렸다.
“거의 다 왔군..”
쿠광!! 쿠과광!!
누군가 외쳤다.
“빨리 가!!늦겠어!!”
프란츠는 가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고 손전등으로 신호를 보내며 계속 전차 중대를 유도했다. 도착해보니 병사들은 진지 구축을 하고 참호를 파느라 엄청나게 바빠 보였다. 프란츠가 한 보병에게 물었다.
“포격은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
“이틀 됐네!”
쿠구궁!콰광!!
실력 없는 타악기 연주자가 핏빛 교향곡을 연주하듯 포탄은 계속해서 터지며 병사들의 귀를 때렸다. 한스가 쌍안경으로 아미앵을 보니 어둠 속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오른쪽에는 구호소가 있었고 그 안에서는 온갖 비명 소리와 신음 소리가 나고 있었다. 전차병들은 가급적 그 쪽을 바라보지 않고 빨리 지나가고 싶어했는데, 천막이 휙 열리며 옷이 시뻘겋게 피로 물든 위생병이 다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피 냄새에 프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으웩..’
그런데 3소대의 A7V 오딘이 빨리 이 곳을 지나가려고 하다가 약간의 무리수를 두었다. 오딘이 지나가려고 했던 길은 우측이 약간 높게 땅이 솟아 있었다. A7V의 승무원들은 전차가 기울기 시작하자 불안함을 느끼며 손잡이를 세게 잡았다.
“으아악!! 조심해!!”
“그냥 뒤로 가!!”
“미..미끄러진다!!”
“아아악!!!”
쿠과광!!쿠광!!
거대한 오딘이 왼쪽으로 뒤집어졌다.
“오딘!!!”
오딘의 전차병들은 오딘의 하부 장갑에 있는 해치를 통해 잽싸게 밖으로 나왔다. 하부 장갑에 해치를 뚫어 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조종 제대로 못하냐!!”
“니가 해보던가!!”
“조만간 내일 정비 부대가 와서 다시 세워줄 걸세!”
어짜피 도착지까지 얼마 안 남았기에 오딘의 전차병들은 걸어가기로 했다. 오딘의 전차장이 외쳤다.
“물품 모두 챙겨라!!보병 녀석들이 다 훔쳐간다!”
오딘의 전차병들은 탄약, 기관단총, 수류탄, 구급상자 모두 샅샅이 챙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차병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녀석들이 부품 빼가지는 않겠지?’
잠시 뒤, 한스는 지휘소에 불려갔다. 크뤼거 대령이 말했다.
“첩보에 의하면 여기 놈들의 주요 병력이 집결되었다는군! 이번 전투는 쉽지는 않을 걸세! 적군의 전차 병력도 만만치 않네!”
“호..혹시 어느 정도인지..”
“마크 V 전차만 최소 10대 이상이고 마크 C 호넷이라는 신형 전차도 있다더군! 속도가 빠르고 기관총 5정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우리 쪽 보병들을 작살내고 있다고 들었네! 자네들이 쓰는 마크 V 보다는 약간 작네!”
“시가지에서는 작고 빠른 전차가 훨씬 유리할 겁니다. 우리는 휘핏이 한 대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특히 시가지 전투에서는 공격 측 전차가 매우 불리하기 때문에 보병이 먼저 들어간 이후에 제 중대가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크뤼거 대령이 화를 냈다.
“자네 중대는 오토바이 병이 있으니 미리 정찰을 할 수 있지 않나?”
“시가지에서 보병의 사전 정찰 없이 전차 부대가 진입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정찰을 완료한 지점조차도 영국군이 다시 와서 대전차 수류탄을 고층에서 던질 수 있습니다. 전차는 상부 장갑과 궤도가 약점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공격 받으면 격파되거나 기동 불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력 좋은 저격수와 척탄병의 엄호가 필요합니다.”
크뤼거 대령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무지하게 취약하군···차라리 포병 지원이나 해줄 것 이지..”
한스가 말했다.
“그..그리고 연료가 제법 많이 필요합니다.
“뭣이야? 그렇게 쓸모 없는 무기가 연료는 쳐먹는다고?”
한스는 진땀을 빼며 지휘소 밖으로 나왔다. 그 때 프란츠가 한스에게 외쳤다.
“정비 중대가 오딘을 수리하러 왔습니다!”
한스는 프란츠를 따라서 오딘을 보러 갔다. 그런데 오딘의 전차병들이 펄펄 뛰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한 전차병이 오딘의 하부 장갑을 가리켰다. 한스가 외쳤다.
“아니, 여기 있던 해치 어디 갔어?”
“보병 녀석들이 가져갔습니다!”
금속 철판은 보병들에게 있어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녀석이 오딘이 방치되어있는 틈을 타서 하부 해치를 때어내서 가져가버린 것 이었다.
“그 망할 자식들이!!”
정비 중대 덕분에 오딘은 다시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바닥에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임시로 전차병들은 밑에 널빤지를 대기는 했지만, 생각할수록 열 받을 따름이었다. 한스가 말했다.
“이번 전투가 끝나고 재생 공장에서 다시 해치를 달아줄 걸세.”
한편 영국군은 아미앵 주요 거점에서 자리를 잡고 포격에 귀를 막고 벌벌 떨고 있었다.
쿠광!!콰광!!
건물 유리창이 와장창 박살이 나서 사방에 유리 파편이 쏟아졌다. 어떤 건물들은 포탄에 한 쪽 벽면이 완전히 허물어져서 건물 내부 구조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메이슨은 똥오줌을 지리며 귀를 막고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그레이슨이 말했다.
“망할 놈들..이게 며칠 째야..”
고참 병사 잭슨이 말했다.
“이번에 올 독일군은 최정예부대일세.”
그레이슨이 말했다.
“그..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급적 백병전은 피하도록 하게. 방어하는 쪽의 이점을 살려서 최대한 유인한 이후에 몰살하는 전술을 써야 하네.”
메이슨이 말했다.
“롤스로이스 장갑차나 전차 뒤에 바짝 붙으면 되지 않을까요? 기관총으로 제리 놈들을 다 날려버릴 겁니다!”
잭슨이 말했다.
“멍청한 자식..제리놈들은 전차나 장갑차를 제일 먼저 노릴 걸세! 대전차 수류탄에 뒤지기 싫으면 적당히 거리를 두게나!”
그 때, 소대장이 달려왔다.
“제리놈들의 전차 중대가 왔다는 첩보가 있네!”
“그 자식들은 전차 전력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 구닥다리 A7V 몇 대가 전부겠죠.”
“파이퍼 전차 중대라는군..”
“뭐..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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