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맛의 근본, 고향의 맛!
“음······ 물이 지나갈 얇은 관을 만들라고?”
정의회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나는 철암당을 찾았다.
한명구가 내 주문에 미간을 좁혔다.
같은 크기의 용수철을 만들기보다 더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러니까 뜨거운 물이 관 안을 지나면서 따뜻하게 하는 원리에요.”
나는 이미 사천의 혹독한 겨울을 두 번이나 맛봤다.
굳이 세 번이나 맛볼 생각은 없었다.
무공의 경지가 한서불침에 이르면 더위나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느 세월에 그 경지에 이를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건 상품화도 할 수 있고.’
앞서 개발한 매트리스는 당연강이 발 벗고 나서 영업 중이었다.
시험 제품을 귀빈들의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고 들었다.
함께 개발한 충격 완화 장치가 달린 마차 역시 호평이었다.
무림인이라고 이동을 경공이나 말로만 다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무공을 익혔더라도 마차로 다녔는데, 충격 완화 장치가 달린 마차는 그 편안함이 이전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현대처럼 포장도로가 많은 것도 아니니.’
이 역시 경험에서 우러나온 발명품이었다.
14인객을 때려잡으러 돌아다닐 때 거지 같은 승차감이 상당히 고역이었다.
“온수가 아니라 직접 열을 전달하는 방식도 생각을 해봤는데, 이건 온도 조절을 못하면 화재의 위험이 있을 것 같거든요.”
달군 쇠가 직접 이불이나 매트리스에 어떤 영향을 줄지 훤했다.
철암당의 장인들이 없었다면 온수 매트가 아니라 온돌로 방향을 틀어 돌침대를 만들 생각이었다.
한명구는 설계도를 보고 한참이나 씨름을 한 뒤 결국 생각을 포기했다.
“공자님께서 제안한 건 대체로 호평이니······ 한 번 도전해 보지.”
내가 제시한 온수 매트는 자연 순환 방식으로 물을 가열하는 압력의 상승을 이용해 얇은 관 안으로 달궈진 물이 장판을 순환하는 방식이었다.
한명구는 고민만큼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설계도를 들고 대장간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헤헤, 올겨울은 따뜻하겠네.”
“막내가 만든 물건이라고?! 그러면 내가 나서야지!”
온수 매트 개발에 신이 난 건 당연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수 매트 첫 시연에서 실제로 꿀잠을 자는 모습을 보여 당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가장 놀란 건 열양공을 익히는 무인의 평가였다.
“이거 온도를 더 높일 수 있나?”
당문에서 열양공을 전공하는 당경훈 장로가 물었다.
나는 매트와 연결된 소형 화로에 연료를 추가했다.
화로에 불길이 확 오르고 온도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당경훈이 잽싸게 매트 위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당문 내 시연이라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연공을 하는 건 상당히 위험했다.
그의 정신 나간 행동에 당문의 장로들이 한숨을 내쉬며 호법을 섰다.
일다경 정도 지난 뒤에 그가 자리에서 펄쩍 일어났다.
“이건 열양공을 익히는 이들에게는 신세계야!”
열양공의 축기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화기를 머금은 영약을 먹거나, 그런 장소에서 운기조식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온수 매트는 영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구하기 쉬웠고, 무엇보다 장소의 제약이 없었다.
“소림이나 화산에도 한 장 팔아볼까요?”
당연강이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열양공으로 가장 유명한 문파는 소림과 화산이었다. 구양신공과 자하신공은 양강의 기운이 바탕인 내공심법이었다.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된다면 가족을 팔아서라도 달려드는 이들이 무림인이었다.
‘돈을 좀······ 많이 벌겠는데?’
이미 매트리스로 큰돈을 벌어본 당연강이었다.
암기나 독 개발로 당문은 늘 빠듯했는데 매트리스 덕분에 당문은 유례없을 풍족함을 누리고 있었다.
“철암당은 모든 작업을 멈추고 신제품 양산에 돌입한다.”
끝내 당중월의 선언이 내려졌다.
***
“최근 막내 공자님께서 입이 짧아지셨어.”
당문의 위장을 책임지는 숙수 임제룡이 당하익 총관을 찾았다.
그는 사천에서도 손꼽히는 요리사로 조명식처럼 그 실력을 인정받아 고용된 인물이었다.
임제룡은 까다로운 당문 사람들의 입맛을 찰떡같이 맞춰 당문 안에서도 평가가 높았다.
특히 재작년 오대세가 회합에서도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해 호평을 이끌었다.
“막내 공자님께서? 흠······ 어디 아프신 건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당연우가 당문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작지 않았다.
그는 가문 밖에서는 백리안으로 명성을 날렸고, 안에서는 신제품 개발로 당문의 곳간을 풍족하게 만들고 있었다.
또 당문의 의술을 몇 단계나 올려놓으면서 당문을 위협하던 성의문도 한 발 양보할 정도가 됐다.
“조 의원님께서 곁에 계시니 큰 걱정은 없지만······.”
임제룡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자신이 만든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을 리는 없을 테니, 몸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당하익이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공자님을 직접 찾아가 뭐가 문제인지 여쭤보는 게 어떤가?”
“음······ 역시 그래야 하나?”
임제룡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자리를 떠났다.
***
최근 들어 입맛이 없었다.
기름지고 자극적인 맛을 차치하더라도 밥을 먹어도 목구멍까지 넘어가질 않았다.
입맛이 떨어지고 고향의 맛이 그리운 걸 보아하니, 향수병이 뒤늦게 찾아온 모양이다.
수라마교는 정의회에게 맡겼고, 정의회는 주상열과 당연해에게 맡겼으니 알아서 잘할 것이라 봤다.
‘둘 다 인재는 인재니까.’
주상열이 21세기에 출범한 신무협이라면 반신반의하겠지만 공장제 무협 주인공 출신은 특별했다.
당연해도 모난 부분이 있어서 그렇지 머리가 비상한 인간이었다.
“할 일을 다 떠넘겨선지 무료하네.”
지금까지 죽자고 달려왔다.
살기 위해 작은형을 무너트리고, 또 작은형을 구하기 위해 14인객과 싸웠다.
이제는 내 평화로운 삶을 위해 정의회도 만들어 수라마교와의 싸움에도 대비했다.
그러니 중국 음식이 입에 들어가질 않았다.
“하긴 물릴 때도 됐지.”
중원에서 산 지 2년이 넘었는데 익숙해지는 것이 물렸다.
14인객을 잡으러 다닐 때 최고급 객잔을 찾아가며 진미를 맛봤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집밥이 생각나는 건가?”
내가 그렇게 온수 매트에 등을 지질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공자님, 저 임제룡입니다.”
당문의 위장을 책임지는 숙수였다.
그가 나를 찾은 이유는 뻔했다. 최근 밥그릇을 비우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들어오세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임제룡을 반겼다.
임제룡이 심각한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공자님 몸에 변고가 생긴 건 아니겠지?」
‘아! 그렇게만 생각하시는 건가? 자기 음식에 자부심이 대단하시네.’
사천에서 일이 위를 다투는 요리사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그가 묻기도 전에 무어라 답할까 고민하다가 차라리 주방에 직접 가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최근 공자님께서······.”
“숙수님 요리가 싫은 건 아닌데, 제가 요즘 머릿속에 막 이것저것 생각나는 게 있어서요. 고민이 깊다 보니 입맛이 없었네요.”
“음······.”
그러나 그건 임제룡이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데 저도 요리를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공자님께서 말입니까?”
“네, 저도 강호행을 하다 보면 야영을 하거나 그러잖아요. 고기 굽는 것도 기술이라고 그거 하나 굽기도 쉽지 않더라고요.”
나는 온몸으로 질긴 고기를 뜯는 모습을 연기했다.
내 재롱에 임제룡이 헛웃음을 흘렸다.
「도련님께선 내 요리가 입맛에 맞지 않으신 거구나······.」
임제룡이 씁쓸하게 웃으며 주방으로 안내했다.
“그러면 제가 한 번 가르쳐 드리지요.”
‘다년간 사천 음식을 먹어본바, 매운 게 문제가 아니야. 마늘을 얼마나 때려 박느냐지.’
그것이 딱 내가 이해하는 한국 음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맛이 아니라는 걸 아는 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한국인의 입맛은 마늘 맛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부족한 게 마늘이 아니었구나.”
귀한 고려 마늘까지 공수했지만, 원하는 맛이 나진 않았다.
‘음, 고향의 맛, 어머니의 맛은 뭐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고민이 이어졌다.
주방에서는 임제룡의 진두지휘 아래 당가 식구들을 먹일 음식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구석에서 그들이 요리를 만드는 것을 뚫어지게 지켜봤다.
‘뭐가 다르긴 다른데······.’
구청 위생과를 따라간 취재를 떠올렸다.
위생은 둘째치고 모든 음식점에 만능 조미료가 있었다. 맛집이라고 예외는 없이,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한 조미료였다.
“어머니의 맛, 고향의 맛! 미······.”
이런 것이야말로 대오각성, 돈오가 아닐까?
나는 바로 주방을 뛰쳐나가 의독당을 찾았다.
“글루탐산을 처음 만든 게 다시마였고······ 아니, 밀에 황산으로 분해한 거였나?”
당중화에게 의독당 연구원을 몇 빌려 맛의 근원을 재연하고자 머리를 굴렸다.
맛의 근본이나 고향의 맛 공장을 취재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다.
그저 내가 원하는 맛이 감칠맛이었다는 것과 그것이 어머니 손맛의 비밀이라는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정확한 기억이 없더라도 문제없지. 여기 의독당의 연구원들은 중원 제일의 제약, 제조의 전문가들이니까.’
정확하게 아는 게 없으니 파편화된 정보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제가 구하는 건 감칠맛이에요. 감칠맛은 다시마나 아니면 사탕수수에서 추출할 수 있죠. 그러니까······.”
의독당의 연구원들은 내 개떡 같은 설명에도 찰떡같이 행동했다.
그들은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당밀액을 발효 및 정제해 글루탐산, 맛의 근본을 손쉽게 찾아냈다.
“막내 공자님, 이런 게 맛있습니까?”
연구원 중 하나가 맛의 근본을 핥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감칠맛만 나는 터라 느끼함과 역겨움, 그 미묘한 사이를 걷는 맛이었다.
“이건 주연이 아닌 조연이에요. 그것도 지상 최강의!”
이해하지 못한 연구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맛의 근본 양산을 부탁하고 바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준비를 마친 주방에는 적막함이 감돌았다.
조리사들은 한 차례 사투를 마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원형 중화식 웍을 잡아 들었다.
‘이런 건 써 본 적이 없는데······ 그냥 냄비처럼 생각해도 되려나?’
요리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자취할 때도 대부분 배달로 끼니를 때웠고, 기자 생활 대부분은 출입처나 취재원과 회식이었다.
‘그 밖에는 초코바나 견과류로 허기를 달랬을 뿐이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전생의 사망 원인이 과로에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먼저 웍에 기름을 두르고 채를 썬 파와 고춧가루를 뿌렸다.
무공을 익혀서일까? 웍의 무게는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고추 파기름을 만든 뒤 자투리 해산물을 털어 넣었다.
매콤한 향기에 눈이 시큰거렸다.
숙주를 비롯한 청경채와 배추 등도 넣어 볶아낸 뒤에 물을 넉넉하게 부었다.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하고 마지막으로 맛의 근본을 한 꼬집, 아니 두세 꼬집 정도 넣자.’
즉석 짬뽕탕의 완성이었다.
“이거 참······ 막내 공자님은 요리도 하실 줄 아셨군요.”
뒤에서 지켜보던 임제룡이 어느새 국자를 가져와 맛을 봤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입맛을 다시는 등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흐허허! 이건 정말이지······ 혁명이군.”
그는 짬뽕탕의 맛보다 새로 개발한 맛의 근본에 관심을 보였다.
임제룡은 자연스럽게 조리사들에게 시식해 보라며 짬뽕탕을 덜어줬다.
‘내 허락도 없이······ 상관은 없다만.’
맛을 보고 전문가인 그들이 더욱 맛 좋은 짬뽕탕을 만들어준다면 불만은 없었다.
임제룡은 자연스럽게 면을 삶아 내게 넘겼다. 완벽한 짬뽕이었다.
“공자는 요리는 할 줄 알지만, 요리사는 아니군.”
새로운 조미료를 발견한 그의 눈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삽시간에 수만 가지의 요리가 맛의 근본에 대입되고 사라졌다.
‘요리의 깨달음이라······ 언젠가 쓰지 않을까?’
둘러대는 말이었지만 여행 중 야영을 할 때도 편리할 것 같았다.
맛의 근본과 임제룡의 깨달음이라면 중원의 설탕 보이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아니, 나는 또 왜 일을 만들어서 하려고 하나? 대신 해줄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특히 내가 만든 걸 열심히 팔아 당문을 풍족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마침 주방 문이 벌컥 열렸다.
“막내가 새로운 요리를 개발했다고?”
매트리스와 온수 매트로 돈맛을 맛본 당연강이 침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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