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무혈입성.
나는 황당해 하는 표정의 장로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연합이 비록 무림맹과 적대관계라 하지만 무의미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내가 원하는 바를 밝혔다.
어디선가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장로님들은 인명피해보다는 무림맹과의 전쟁에서 입을 손해를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파가 사파인 것은 도덕적인 관념이나 법보다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 사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익이 비단 금전적인 부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릴 여자, 노예 등도 그 안에 들었다.
“무림맹과 전면전을 펼쳤을 때 일어나는 피해를 생각하면, 운이 좋다고 해도 이 자리에 삼분의 일도 남지 않겠지요.”
나는 하설기와 백절인 외 약소 파벌이나 파벌 안에서도 무공이 약한 장로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설기와 백절인으로 향했다.
“저야 안면이 있는 사람이 많다 보니, 련주라더라도 죽지는 않을 겁니다. 사상검증이나 뭐, 최악의 경우는 단전이 깨지기는 하겠죠. 그래도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손가락을 들어 용시문의 기로애 장로를 가리켰다.
“기 장로님의 아드님께서는 아미파와 원한이 있지요? 아미파는 제자를 겁간했던 마두를 잊지 않을 겁니다.”
기 장로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덕분에 그와 용시문는 십 년이 넘게 아미파에 시달렸다.
다음 가리킨 사람은 주구로파의 임 장로였다. 그는 적발의 거구의 사내로 강력한 열강장력으로 이름을 날린 사파의 고수였다.
“소림사는 40년 전 스승을 죽이고 비급을 훔친 제자를 아직도 찾고 있습니다. 사형제가 40년이 지났다고, 나이가 들어 임 장로의 외양이 바뀌었다고······ 그 얼굴을 잊을까요?”
임 장로가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나는 시간을 들여 장로회에 참석한 장로들의 기억 속을 뒤져 무림맹과의 원한 관계를 밝혔다.
사파연합이 오랫동안 무림맹과 대립하면서 간부들 대부분이 구파일방, 오대세와 원한 관계로 얽혀 있었다.
다만 그들이 연합에 소속돼 있기에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나는 반복해서 우리라고 강조했다. 소속감을 위해서였다.
장로들의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낀 뒤에 하설기와 백절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 장로님과 백 장로님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건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연합 양대 파벌의 수장이었다. 무림맹에서 후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죽여야할 인물이었다.
내 말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하설기와 백절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이가 련주님 뿐이군요.”
나야 현 당문주의 적자였다. 무림맹이 연합체라는 걸 생각하면 이제 갓 련주로 추대된 나를 당문과 척을 지면서까지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내게 신세진 문파들까지 고려하면 무림맹의 손에 죽을 일은 없었다.
“그렇죠. 제갈 군사의 첩자 노릇까지 했으니 제가 죽을 일이 있겠습니까?”
“아니, 그걸 이 자리에서 그리 당당히······.”
나는 하설기의 생각을 잃고 먼저 선수를 쳤다.
두 사람이 권성을 맞이하고자 나를 바지 련주로 내몬 것일 뿐. 지금처럼 회의를 주도하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내가 회의에 참석한 장로들을 말 몇 마디에 흔드니 두 사람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두 분, 아니 이 자리에 계신 장로님들이 무엇을 걱정하시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연합을 배신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거겠지요?”
이전에도 제갈 군사의 첩자 노릇을 했고, 련주가 된 이후에 무림맹을 공격하지 말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목젖까지 무림맹의 칼이 다가온 가운데 련주로서는 결사 항전을 해도 부족할 판이었다.
“우려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됩니다만.”
나는 몸속 가득한 마기를 끌어올렸다. 신마의 깨달음을 흡수하면서 내공이 마기로 바뀌었다. 이어 그의 깨달음을 완전히 체득하면서 몸이 완전히 마기에 적응해 버렸다.
몸밖으로 넘실 흘러나오는 마기를 마주한 하설기와 백절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건 련주님의······.」
「련주님 못지 않은 마기라······ 이래서야 련주님이 떠난 이유를 알겠어.」
신마 본연의 힘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겠으나, 하설기나 백절인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힘이었다.
양 파벌을 대표하는 두 고수가 입을 다물자 다른 장로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전 련주님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는지라, 집에 돌아가더라도 몸 성히 가긴 어렵겠죠.”
내 말에 하설기와 백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파연합을 대표하는 하설기나 백절인보다 더욱 강맹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마공은 정파에서 금기시 되는 무공입니다.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무림맹이나 저희 가문에서 저를 어떻게 처리할 지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요.”
마공을 없애기 위해 단전을 깨부수든 마기가 드러나지 않도록 감금하든 밖으로 이야기가 새지 않도록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이는 살아도 무인으로는 산 것이 아니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혼인 전 썩 편치 않았던 강호행을 해봤기에 연합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무림인인 연합의 간부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거야······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겠군.”
하설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곧바로 맞장구쳤다.
“맞아요. 무인으로서는 말이죠.”
***
사파연합 절강성 본부 인근에는 2만여 명의 무림맹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지휘부 임시 천막에는 무림맹주 권성과 제갈 군사가 자리했다.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제갈 군사가 권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두 사람 앞에는 사신이 찾아와 초청장을 건넸다. 화려한 금실이 붙은 초청장 안에는 새로운 련주 취임에 찾아와준 무림맹 인사에 대한 감사 인사가 담겨 있었다.
권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녀석, 이렇게 빠져나가려는 거냐?’
초청장은 권성과 군사 외에도 연합에 쳐들어온 무림맹의 각 대표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들 중에는 신임 련주가 된 당연우의 가문은 물론 신세를 진 문파도 있었다.
“보다시피 피를 보기 싫다는 거겠지.”
“그렇게 보이기는 합니다만······.”
제갈 군사가 말 끝을 흐렸다.
무림맹이 병력을 이끌고 연합을 찾은 명분은 당연우의 납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연합의 주인이 되었으니 같은 이유로 명분으로 내세우기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대기에는 전쟁을 벌이기에는 약했다.
제갈 군사가 이를 인지하고 물었다.
“맹주님, 이를 어떻게 합니까?”
권성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어쩌긴 그들이 직접 문을 열어준다니 가야지.”
그의 목적은 몸을 갈아탄 신마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당연우의 추살이 목적이다 보니 명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제갈 군사가 권성을 빤히 보며 그의 심중을 파악하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대표들께도 이야기를 전달하겠습니다.”
그가 읍을 하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천막 안 홀로 남은 권성이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신마 놈도 내 의중을 파악했으니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하겠지.’
신마가 권성의 의도를 알아도 소용 없었다. 이미 무림맹의 무사들이 사련 본부에 포위망을 구성했다.
아직 완전히 자신의 힘을 회복하지 못한 그가 빠져나갈 구멍 따윈 없었다.
‘어찌됐든 연합에서 나와 무림맹 손에만 들어온다면······.’
권성의 눈에서 순간 빛을 뿜어냈다.
그것은 신마의 것과 무척이나 유사한 핏빛 살기였다.
“반드시 죽인다.”
권성의 주름진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다.
한편 연합은 련주 취임식과 무림맹 초청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사파연합의 새로운 주인이 취임하는 것이니 허투루 할 수 없었다. 무림맹의 대표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던지라 더욱 그러했다.
하설기은 취임식 지위를 진두지휘하면서도 얼굴에 새겨진 그늘이 떠나질 않았다.
‘실수했어······ 그를 련주에 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당연우의 무공을 잘못봤다. 겨우 몇 개월 신마에게 무공 지도를 받았다 한들 제아무리 천재라도 한계가 분명했다.
허나 당연우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나 기운은 전 련주 못지 않았다.
‘신마가 모든 내공을 전수한 걸까?’
신마의 내공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몇날며칠을 싸워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
그가 단신으로 하룻밤 사이 다섯 문파가 연합을 맺은 오맹련을 무너트린 것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연합의 양대 간부인 하설기와 백절인이 압도될 정도였으니, 내공을 모두 전수받았다는 쪽이라 생각됐다.
‘그 아이에게 힘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리를 줬는데, 아니었어.’
당연우를 바지 련주로 올리고, 실권은 하설기, 백절인이 양분할 생각이었다.
그는 무림맹과의 전쟁에서 임시적으로 만든 권성 막이였다.
‘이번 일로 정보각 놈들도 완전히 신임 련주에게 갔고······.’
하설기와 백절인 사이를 오가던 정보각의 부장들도 장로회 이후 더는 전서구를 날리지 않았다.
완전히 신임 련주, 당연우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도 절대고수의 깨달음마저 모두 흡수하지는 못했을 터. 거기에 방법이 있을 것이야.’
“하 장로님, 준비는 잘 되어 가나요?”
하설기가 그렇게 미래를 도모하는 가운데 당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뜻 들으면 전과 다르지 않은 음색이었다.
그러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마기는 예전 신마를 보는 것 같았다.
‘이제는 마기를 숨기지도 않는군.’
젊은 청년의 등장만으로도 취임식이 진행될 넓은 대청이 꽉 차는 것만 같았다.
과거 신마가 그랬다. 그 앞에만 서도 숨이 턱 막히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본색을 드러낸 당연우에게서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 전임 련주보다는 조금이지만 부담감이 적어.’
그렇게 생각하며 하설기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련주님께서는 무림맹이 취임식에서 칼을 뽑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뽑겠죠. 하지만 모두 뽑지는 않을 거에요. 무림맹의 중하급 무사들도 피를 보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게 무슨······?”
“하 장로님께서 취임식 및 무림맹 대표단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백 장로님도 포위진을 구성하고 있거든요.”
하설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진법에는 무림맹에서도 정평이 난 인물이 있었다.
“제갈 군사의 눈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군익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맹 안에서는 각 대표를 정치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면, 전선에서는 신묘한 진을 구성해 소수로 다수의 적을 격파하는 지장이었다.
또 예전부터 제갈세가는 부족한 무력을 기기괴괴한 진법으로 보태는 세가였다.
“제가 기관진법에 대해서는 공부를 조금 했어요.”
“아니, 련주님께서 명문세가 출신이다 보니 공부를 하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갈 군사는 그 일에 전문가입니다. 조금 공부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설기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허술한 작전이 제갈 군사의 눈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연우가 피식 실소했다.
“제갈 군사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죠. 그가 아는 진은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아는 기관진식을 그가 모두 알고 있는 건 아니죠.”
그가 자신감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제갈 군사가 진의 전문가라고요? 아니요. 그는 공부를 오래했고 자주 접했을 뿐. 여전히 입문자 수준에 머물고 있어요.”
당연우가 너무 당당하게 말하자 하설기가 되물었다.
“그러면 련주님께서는 군익을 얕잡아 볼 정도로 진법 공부를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당문의 기관 제조 능력은 사천을 넘어 강호 전체에 정평이 났다.
그리고 기관을 더욱 효율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진법의 힘이 필수였다.
오랫동안 진법가와 함께 일을 해왔던 사천당문에서 진법 공부를 게을리 할 리 없었다.
사천제일, 또는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명사가 당문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당연우도 실제로 마주한 바 있었다.
그리고 과거 당문의 암제가 열을 올렸던 것이 기관진식이었다.
“물론이죠. 적어도 사천제일쯤은 되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당연우가 아주 자신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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