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장서고의 문을 열게.
“아니, 굳이 시험을 볼 필요가 있을까?”
가주의 집무실을 나선 내 발목을 잡은 건 당연강이었다.
그가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연우야, 잠깐만!”
“뭡니까?”
뚱한 표정으로 답하자 당연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흥분하시긴 했지만, 다 생각이 있어서 하시는 말씀이시다.”
무슨 생각일까 싶어 당연강의 머릿속을 훑었다.
그 전에 당연강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향시에서 결과를 보이면 그에 걸맞은 선물을 하겠다고.”
「당문의 장서고라면 녀석도 흡족하지 않을까?」
‘장서고!’
일전에 당중월과의 대화에서 장서고를 언급한 바 있었다.
당문의 장서고에는 단지 무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독과 약, 그리고 암기 제조까지 다양한 비전이 담긴 말 그대로 당문의 보고였다.
‘언제고 장서고를 들어가보고 싶긴 했는데 말이지.’
분명 도반삼양귀원공처럼 스승을 붙여주는 쪽이 무공을 배우는데 효율적이긴 했다.
하지만 당중수와 당중화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본 당문의 무공이라면 취화비접이나 도반삼양귀원공의 수준만큼은 아니더라도 얻는 게 있을 것이다.
‘보는 눈이 높아졌으니 재밌는 무공을 건질 수도 있을거야.’
“그렇게까지 아버지는 제갈민의 코를 눌러주고 싶은 건가요?”
“제갈민 따위야 아버지는 신경도 쓰지 않지. 그러나 네가 향시에 급제한다면 제갈세가도 못한 일을 하게 된 것이 되지 않겠더냐?”
“그야 제갈민이 글만 읽은 것도 아니잖아요.”
제갈민은 무림세가의 소가주였다. 글에 맞는 무공도 익혀야 했으며, 세가 경영법도 공부해야 했고, 소가주로서의 소양도 갖춰야 했다.
당연강같은 무인의 눈가에 그늘이 새겨질 정도였다.
“하하! 너 역시 공부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지 않더냐. 중수 숙부를 대신해 철암당을 이끌고 있고, 또 나를 돕는 미래전략회도 운영하고 있지.”
‘그야······.’
내가 글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는 건 머릿속에 이미 운길서당의 강사들의 공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과시 정도야 강사들의 실력으로 어찌 해쳐나간다고 하지만 향시까지는 쉽지 않았다.
‘그들이 향시에 급제할 실력이라면 거인이 돼 관리가 됐겠지······.’
관리와 서당의 강사와는 받는 봉급, 권력, 명예 등 얻을 수 있는 것들의 수준이 달랐다.
운길서당이 명문이라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원에 불과했다.
서당의 강사들 중에서는 수업료를 모아 향시에 도전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번에 연이 닿아 황실 학사를 한 분 초청했단다.”
이어진 당연강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뭐, 그러면 간만에 공부 좀 제대로 해 보죠.”
베낄 게 있으면 또 이야기가 달라졌다.
***
마차 한 대가 덜컹거리며 당가타로 들어섰다.
네 마리의 말이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당문에 이르렀다.
‘내가 돈 때문에 찾은 게 아니야. 소문난 그 막내 공자를 보려 한 것뿐.’
전 황실 학사 전여문은 당문을 찾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는 은퇴한 고위 관료로 돈은 남부럽지 않게 있었다.
은퇴 역시 정적들과 싸움에 지쳐 고향인 사천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을 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굳이 당문을 찾은 건 포정사의 부탁 때문이었다.
“당가의 막내 공자가 동시에 이어 과시에 장원을 했다지?”
지난해부터 당연우의 이름이 전여문의 귀를 따갑게 할 정도로 들려왔다.
그는 사천의료학회를 넘어 중원의료학회까지 그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이어 이번 과시에서도 방안(2등), 탐화(3등)과는 압도하며 장원에 올랐다.
“흥! 머리가 좋아 봤자 무림인들 수준에서겠지.”
전여문이 콧방귀를 꼈다.
황실에 드는 이들은 향시는 물론이거니와 전시에 급제해야 들어 올 수 있었다.
중원의 석학 중 으뜸이라 불릴 수 있는, 단 한 꼬집만을 선별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전여문은 공부 잘하는 놈, 머리가 좋은 놈들은 질리도록 봤다.
그들은 평생 칼질이나 하는 무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전 학사님을 봬 영광입니다.”
가주 당중월이 문에서부터 그를 살갑게 맞이했다.
그는 전여문을 막내 아들의 글 선생으로 초청했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황실에 연줄이 남아 있는 그와 친분을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다.
관무불가침이라 하지만 같은 중원인 이상 서로가 칼로 물 베듯 잘라 낼 수는 없었다.
“허허, 내 살면서 이렇게 당문에 발을 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전여문이라 합니다.”
전영문이 불만을 감추고 웃으며 당중월에게 인사했다.
당중월이 십대 중반의 소년의 등을 밀어 소개했다.
“이 아이가 제 막내아들입니다. 글을 워낙 좋아해서 혼자 공부를 하더니 얼마 전 과시에서 결과를 보이더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당가의 연우라고 합니다.”
전여문의 시선이 당연우를 향해 돌아갔다.
눈이 환해질 정도의 미모의 소년이었다. 허나 그보다 투명한 눈동자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현기가 느껴졌다.
‘허, 이놈이 그놈인가? 무림인들이 공부를 해 봐야 얼마나 했다고······.’
날고 긴다는 학사들도 전여문 앞에서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전여문이 당연우를 통해 이 어리석은 당가를 통째로 혼내 줄 생각을 했다.
그리고 딱 열흘 만에 정여문은 손을 들고 당문을 나섰다.
마차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안락했지만 가시방석처럼 불편했다.
전여문이 당연우에게 혼쭐을 내고자 했는데 혼쭐은 정작 맛봤다.
그가 창밖으로 멀어져가는 당문을 바라봤다.
“허! 내 문일지십을 닳도록 봤거늘······.”
전여문이 허탈한 심정으로 당연우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래도 과시를 거친 아이니 기초 학문에서 벗어나 사천성에서는 쉽게 알 수 없는 중앙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렇게 황실의 체제나, 역사, 관리들의 역할 등에 알려 줬더니, 당연우는 엉뚱하게 제도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돈을 쓸데없이 먹고 있는 부서를 짚었고, 효율적인 관리 방안과 대책을 내놓았다.
“마치 수년간 정치판에서 놀아본 놈 같으이······.”
당연우의 놀라운 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전여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그의 묻음에 당연우는 막힘없이 답했다. 또 그가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열여섯 소년의 몸속에 노회한 정치인이 담겨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포정사에게는 뭐라 이야기를 해야 하나······.”
전여문이 부탁을 한 포정사를 떠올렸다.
아마 향시에 급제하면 거인으로 발탁해 쓸 생각으로 보였다.
당문 출신이니 무림과 관련한 일을 맡겨 볼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전여문이 본 당연우는 한낱 실무자로 끝날 사람이 아니었다.
“본인이 야심이 없다 하여 복마전과 같은 정치판에 가만히 두겠는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었다.
능력이 그리 출중하니 그가 관리를 하게 된다면 황실까지 이름을 알리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듯 싶었다.
“전시를 볼 수도 있고······.”
가주가 의욕적으로 당연우에게 과거 시험을 권하는 꼴을 보아하니,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전여문이 거듭 한 숨을 토해 냈다.
“결국 알아낸 건 그의 학식이 나 못지 않다는 것과 실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일 것이란 건가? 나도 한 물 갔군.”
은퇴를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정무 감각이나 인재를 볼 눈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우를 가르쳐 보니 옹이구멍이나 다름 없었다.
전여문의 한숨이 깊어져 갔다.
***
시험장에는 수많은 서생이 모였다.
엄중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은 그들 앞에는 문방사우가 놓여 있었다.
‘분위기가 살벌하네.’
청심환을 무슨 과자처럼 입에 넣는 욱여넣는 이가 있나 하면, 술이라도 마셨는지 얼굴이 벌건 서생도 있었다.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내 번호에 맞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제부터 시험 문제를 발표하겠다!”
시험관이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무공을 익혔는지 시험관의 우렁찬 목소리는 귀에 꽂히듯 들렸다.
“올해 시제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나는 붓을 들었다.
시험관이 들어왔을 때부터 어떤 문제가 나왔는지, 출제자의 의도까지 빤히 읽혔다.
그 의도에 황실 학사에게서 훔친 지식이 얽혔다.
‘생각보다 간단하네.’
나는 붓에 먹을 묻히고 단숨에 화선지 위로 답안을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다! 시제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시험 기간은······ 아니 벌써 제출한다고?”
시험관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에 의의를 도는 수험생이구나. 그래 시험마다 이런 놈이 한둘은 있지. 그런데 오늘은 너무 빠른걸?」
시험관의 생각이 빤히 보였다.
나는 그러든지 말든지 답안을 제출하고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
“이건 뭐지?”
시험이 끝나고 채점을 위해 시험관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이들을 총괄하는 관리관이 한쪽에 모인 시험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시제를 낸 시험관이 손을 들고 말했다.
“시험 포기자의 답안입니다.”
“음? 그래? 올해도 나타난 건가? 쯧, 포기할 거면 왜 시험을 보나?”
“시험장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다든지, 아니면 부모의 등쌀에 억지로 시험을 보러 온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에잉, 배부른 놈들, 그래도 기왕 응시했으면 합격을 노려야지.”
관리관이 투덜거리면서 시험지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답안을 대충 써냈어도 채점을 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업무였다.
그리고 포기자의 답은 대부분 탈락이기에 면밀한 채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제일 편한 일이었다.
‘이건 꽤 괜찮은 해답이 아니던가. 마치 황실 학사의 품격이 느껴지는 듯한데.’
새하얀 백지도 있었지만 몇몇 답안은 답을 적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중 하나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일필휘지로 휘갈긴 답안이었다.
글이 워낙 달필이라 마치 문장이 관리관의 망막을 희롱하는 것만 같았다.
한 장의 그림과도 같은 글자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내용을 접했을 때는 깊이 있는 문장에 탄성이 튀어나왔다.
“허! 이것 참.”
이번 향시의 시제는 무림과 관련해 지방 관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묻는 것이었다.
관무불가침이라 하나, 그건 중앙관리와 무림맹 정도 규모의 일이었다.
예를 들면 일개 도둑놈을 잡는 건 포청의 일이다.
그런데 도둑놈이 무공을 익히면 사파 무림인으로 취급해야 하는가. 무공을 익힌 자가 도둑질을 하면 무림맹이 나서야 하는가.
이 잣대의 애매함 때문에 지방 관리는 완전히 무림과 떨어져 있다고 볼 수 없었다.
때론 무림맹이나 지방 정파와 손을 잡고 합동수사를 곧잘 벌였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아주 명쾌하게 정리했다.
“재밌군. 게다가 먹의 농담으로 보아 단숨에 답을 적어 내린 모양이야. 게다가 문장의 운율도 예사 것이 아니고······ 여기에 얼마나 많은 공부와 고민이 담겨 있을꼬?”
답안지의 글씨는 끝으로 갈수록 흐려졌다.
이는 그가 붓에 먹을 묻히고 처음부터 끝까지 멈춤 없이 답을 적었음을 의미했다.
관리관이 관심을 보이자 다른 시험관들도 다가와 답안을 살폈다.
그리고 당시 시험 감독관으로 당연우의 시험지를 받은 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건 제가 받은 답안지입니다.”
“그래? 그런데 왜 포기자 답안지 쪽에 던져뒀는가? 오랜 고민 끝에 내민 답인거 같군.”
“그게······ 아닙니다. 문제를 다 읽기도 전에 그는 답을 작성해 제출했습니다.”
“뭐라고?”
관리관이 버럭 성을 냈다.
답안지에 담긴 글은 생각 없이 써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시제를 다 읊기도 전에 답을 다 적었다는 것은 문제가 유출됐다는 방증이었다.
“허어! 문제가 유출된 거군. 그래서 이런 답을 작성할 수 있는 거야.”
관리관이 시험관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시제는 매우 엄중하게 보관되고 있다. 내용은 이 자리에 있는 시험관밖에 몰랐다.
시제가 유출됐다면 범인은 이 자리에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부정에 관련된 사람은 최소한 삭탈관직이다. 최악의 경우 사형까지 당할 수 있었다.
시험관들은 시제를 통째로 훔칠 정도로 간이 크지 않았다.
“부정이 아니라면 이거 불세출의 기재라 해도 부족함이 없겠어.”
관리관이 허허 웃으며 답안을 합격 답안이 모인 곳에 올렸다.
항시 긴장감이 가득한 당문의 집무실에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당중월이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돕던 당연강도 잠시 일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토했다.
매일 온종일 의자에 앉은 터라 허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내가 실수했군.”
당중월의 시선이 보고서로 향했다.
당연우, 향시 장원.
보고서에는 일곱 글자만이 담겨 있었다.
“녀석을 처분하려던 판단이 잘못됐어.”
“가주님만이 아니라 당시 연우가 이리 성장할 줄은 아무도 몰랐죠.”
당연강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중월을 위로했다.
그럼에도 당중월은 입맛이 썼다.
그는 독한 마음을 먹고 당연우를 다른 곳에 팔거나 폐기할 생각이었다.
‘무능한 건 막내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당중월의 시선이 당연강으로 향했다.
나약하고 아둔하다고만 여긴 소가주는 불과 몇 개월 만에 업무를 따라갈 만큼 성장했다.
두 아들이 이렇게 장성했으니 당중월도 자신에게 사람 보는 눈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우가 장서고의 무공을 원했다지?”
“녀석, 최근 무공을 배우는 게 재밌나 봐요. 뭐, 한창 빠질 때잖아요?”
당연강이 그런 당연우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래, 그렇지. 그럼 장서고에 들여야겠어.”
“샘나네요. 저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말과는 다르게 당연강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당중월에게 결재서류를 내밀었다. 장서고 출입증이었다.
당중월도 오랜만에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이래서야 우리 막내를 다른 곳에 보낼 수가 없군.”
그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결재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
“그거 아십니까? 당문의 장서고에는 만천화우(滿天花雨)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장서고의 열쇠지기가 끌끌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는 마치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듯이 운을 뗐다.
“삼백 년 전에 암기로 중원을 호령······.”
“암제라 불렸던 조상님이요? 그리고 지금에 와서 만천화우는 과장된 전설이라고 판명됐잖아요.”
만천화우는 수백 년 전 실전된 전설 속의 무공이었다. 이후 만천화우를 복원하고자 철암당에 몸을 던진 당문의 무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제는 선조들이 남긴 허풍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허! 막내 공자님은 꿈이 없구먼.」
열쇠지기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장서고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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