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우리에겐 당연우가 필요해.
성의문은 늘 사람이 들끓었다.
병을 치료받고자 환자들이 줄지어 섰고, 또 그들 가족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고자 따라나섰다.
성의문주 나명한의 시선이 길게 늘어선 인파를 바라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신교의 의술에 의지하는 이가 이리 많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의 시선이 일장로로 향했다.
전대 성의문주인 그는 성의문 운영에서 한발 물러서 수라마교 운영에 전념하고 있었다.
“착각하지 말게나. 삼장로. 성의문은 본교를 가리는 껍데기일 뿐이야.”
일장로의 일침에 수라마교 삼장로 나명한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거야 저도 알고 있죠. 하지만 이들이 결국 본교의 교인이 될 거란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의문의 모든 치료제에는 향정신성 약물이 첨가돼 있었다.
이는 수라마교의 오랜 연구 끝에 탄생한 것으로 현재까지 그 어떤 세력에서도 눈치채지 못한 마약이었다.
아편 등 일반적인 마약과 다르게 독성은 아주 미약했지만 확실하게 중독되는 그런 독이었다.
“모두 신의 품으로 간 동지들 덕분이라네.”
일장로가 술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성의문의 의술 저변에는 수라마교가 벌인 인체실험의 결과였다.
일장로가 동지라 말했지만 동의를 받아 진행된 실험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며, 그 대부분은 가족을 인질로 잡는 등의 협박에 의한 것들이었다.
‘마인은 용납받지 못하는 것이 현 강호의 추세니까.’
목구멍을 적시는 술맛이 달콤했다.
“그건 그렇고 최근 저희 뒤를 캐는 놈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문주의 집무실에는 일장로와 삼장로 단둘뿐이었다.
다른 육장로는 갑자기 나타난 외적과의 싸움으로 직접 전선에 나가 있었다.
“사장로와 칠장로가 명을 달리했지. 하지만 그놈들도 성하진 않았을 거야.”
옥빛이 감도는 술잔에는 삼장로의 얼굴이 담겼다.
그가 옅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들, ‘회’라고 하더군. 수는 많지 않지만······ 강하다.”
일장로가 정의회를 언급했다.
이미 팔장로 중 두 명의 장로가 당했다.
“무림맹일까요?”
“사파연합이거나 우리와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이라면 몰라도······ 무림맹이나 정파의 무인들은 아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요?”
일장로가 술잔을 슬쩍 보다가 단숨에 들이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위장까지 흘러내렸다.
“크으······ 그들이 마인이니까.”
세상천지에 마인이 수라마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마인은 정·사할 것 없이 배척받는 존재였다.
다만 이윤에 따라 사파연합은 마인을 이용할 주변머리가 있었지만, 정파는 마인의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집단이었다.
“그러면 저는 문의 정보를 사파연합 쪽으로 기울여 보죠.”
“아니네. 자네가 알아볼 일은 청명해의 흔적을 쫓는 걸세.”
일장로의 말에 삼장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흔적이 묘연합니다. 14인객에 몸을 숨겼을 때는 그나마 작은 흔적이라도 보였는데 지금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삼장로가 말끝을 흐렸다.
교주를 다시 모시기 위해서는 혈마의 진전을 이은 이가 필요했다.
혈마, 수라마인의 완성은 수라마교의 백 년 숙원이었다.
‘그분의 유지만 찾아낼 수 있다면 일성일마 위에 수라가 올라설 수 있거늘.’
청명해의 흔적을 놓친 일장로와 삼장로가 길게 탄식했다.
***
포달랍궁과 무림맹의 사절을 한 자리에 모았다.
무림맹 사절은 포달랍궁의 거래를 막기 위해 찾아온 거라 찝찝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반면 포달랍궁에서 온 노승은 만면에 미소를 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당가의 연우라고 합니다.”
나는 먼저 두 사절에게 인사부터 하고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저희 온수 장판 구매와 관련해 이렇게 직접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미소로 두 사람에게 악의가 없음을 밝히고 자리에 앉았다.
두 사절 중 물건을 원하는 포달랍궁 쪽부터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포달랍궁은 양강지공을 익히는 무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온수 장판의 선전 문구 중 열양공을 익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있더군요.”
노승은 서장 출신이었지만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했다.
그가 붉은 가사를 입고 머리를 빡빡 밀지 않았더라면 포달랍궁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실제로 저희 당문에서 열양공을 익히시는 분이 계셨고,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혹 책을 잡힐까 싶어 먼저 나는 홍보에 문제가 없음을 못 박았다.
당경훈은 당문에서 특이하게 장법으로 이름을 날린 고수였다.
그리고 그가 배운 화독공은 화기를 머금은 독공으로 열양공의 일종이었다.
“허위, 또는 과대광고라 생각해 말한 게 아닙니다. 저희 쪽에도 죄송하지만 물건을 입수해 시험을 거쳤고 확실히 효과를 봤으니까요.”
노승이 슬쩍 무림맹 사절을 보더니 용건부터 꺼냈다.
“그래서 저희 궁에서는 그쪽에서 만든 온수 장판을 전량 매수를 하려 합니다. 가격은 제시하는 대로 내지요.”
과연 서장의 지배자다운 배포였다.
나는 시선을 무림맹 사절 쪽으로 돌렸다.
그는 할 말이 많은지 입을 달싹였다.
“아무래도 저희가 귀궁에서 원하는 만큼의 수량을 전부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장인의 손길이 필요한 물건고 또 장인들의 수는 한정돼 있으니까요.”
온수 장판의 원리는 간단했고 구조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철암당 장인 정도의 실력이 없다면 장판 밑에 온수를 돌릴 관을 만들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문에서도 양산에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온돌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텐데?’
열양공에 바닥이 따뜻해야 한다면 온수 장판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온돌 쪽이 화력이나 제작 방식이나 손이 훨씬 덜 탔다.
‘장판을 휴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을 꾹 숨긴 채 말을 계속했다.
“아시다시피 한정된 수량에서 어느 한쪽에만 파는 건 아무래도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그 먼 곳에서 찾아오셨으니 귀궁에는 최대한 배려를 하겠습니다.”
서장에서 찾아온 손님에게는 예로 대했고 무림맹에서 온 불청객에게도 똑같이 응대했다.
“무림맹에서도 같은 수량의 온수 장판을 납품하죠.”
“그게······.”
사절이 노승의 눈치를 봤다.
사절의 무공이 강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호위무사 없이 홀로 사천을 방문했다.
‘무공에는 자신이 있는 거겠지.’
얼굴과는 다르게 가사 밑에는 고된 수련으로 단련된 몸이 숨겨져 있었다.
더불어 태양혈은 우뚝 솟았으며 기세를 숨기지도 않았다.
‘포달랍궁 고수의 의견에 어떻게 반박하려나?’
나는 무림맹을 거래 현장에 초대해 책임을 전가할 생각이었다.
사절이 아무런 말을 못 하면 이번 거래는 무림맹이 묵인한 셈이고, 거래에 반대한다면 포달랍궁과 직접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당문이 그사이에 낄 필요는 없지.’
그리고 내 의도를 알았는지 무림맹 사절도 분위기에 맞춰 웃고는 있었지만. 속내는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우릴 당사자 앞에 세운다고? 정말 당문 놈들은 경우가 없군.」
그의 속내를 읽은 나는 시선을 피했다.
‘알빠냐?’
포달랍궁 사절도 무림맹 사절과 함께 자리한 이유를 파악하고 있었다.
「본 궁의 행사를 방해하려는 건가? 허허, 해볼 테면 보시게나.」
포달랍궁은 무림맹에 있어서 잠재적인 적인 동시에 잠재적 아군이기도 했다.
다른 새외 세력의 침략 등에서 그들이 힘을 보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무림맹에서 온 사절도 섣불리 반대하는 것보다 말을 아꼈다.
“다만 무림맹에서 우려하고 있습니다. 귀궁의 무력 증강이 중원 침략의 발판이 되는 것이 아닌지 말이죠.”
“아니, 그건······ 험험!”
내가 대놓고 이야기하자 무림맹 사절이 헛기침하며 눈치를 줬다.
노승도 내 말에 대답하기 어려운 듯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그는 온수 장판 거래 책임자로 왔을 뿐, 중원 침략과 같은 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건 통보입니다.”
양측 사절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북해빙궁에도 귀궁과 같은 양의 장판을 판매할 것이며, 남만독곡에는 의료기술 제공, 해남파에도 그에 준하는 기술이나 물품을 보낼 겁니다.”
이에 무림맹 사절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포달랍궁만이 아닌 다른 새외 세력에도 지원을 하다니요!”
북해빙궁과 남만독곡, 해남파는 포달랍궁과 비견되는 새외 세력이었다.
일컬어 흔히들 새외사존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사파연합을 견제하듯 그들의 힘이 비슷하면 서로를 견제할 테니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겁니다. 먼저 나서는 놈은 우리든 사파연합이든 확실히 박살 낼 테니까요.”
새외의 맹주들은 각 지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지만, 무림맹과 사파연합에 비하면 몇 수 떨어졌다.
단일 세력으로 상대하기에는 무림맹과 사파연합은 너무 거대한 힘이었다.
“허허, 그거야······.”
“말했듯이 이건 통보입니다. 귀궁에서 제안을 거절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저흰 그대로 다른 새외 세력에도 같은 제안을 하고 지원할 뿐입니다.”
“뭐, 뭣?”
이번엔 포달랍궁에서 온 사절이 당황하며 말을 버벅였다.
나는 딱 잘라 말하고 무림맹 사절을 향해 눈치를 줬다.
‘내가 왜 댁들을 이 자리에 불렀는데?’
별다른 의미 없는 신호였지만 포달랍궁에서 온 사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미소를 지우고 심각한 표정으로 무림맹 사절을 노려봤다.
「무림맹의 입김이라 이건가? 표면적으로 반대는 하지 않으나, 다른 곳에도 힘을 실어 준다라······ 약은 수군.」
포달랍궁에서 온 사절이 이를 빠득 갈았다.
***
“피해가······ 너무 커.”
주상열이 상처 입은 회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그도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적과 자신의 피로 흠뻑 젖은 모습이었다.
“수라마교는 오랫동안 몸을 숨기고 힘을 키워왔습니다. 급조한 저희가 상대하기에는 쉽지 않죠.”
금민재의 얼굴을 쓴 당연해가 쓰게 웃으며 주상열을 위로했다.
하지만 오십 명에 불과한 회원들은 하나하나가 잃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무공은 둘째치고 단지 정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마공을 익힐만한 인재는 강호 무림에서 찾기 어려웠다.
“결국 사람이 부족하군요.”
당연해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은 당연우가 어디서 끌어오는지 정의회의 자금은 풍족했다.
중원 전서협회에 파고든 회원들은 많은 양의 정보를 꾸준히 보내왔다. 이 정보는 무림, 상계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소식을 전해왔다.
‘하지만 놈들과 직접 싸울 이들이 부족해.’
주상열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그래, 시간도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당가타로 향했다.
백리안이라면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 연우라면 반드시 묘수를 내겠지.’
당연해는 이미 당연우에게 크게 패한 이후로 자신보다 한두 수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가주 후계자 경쟁전에서도 한 방 먹었지만, 14인객을 무너트리고, 정의회까지 준비한 것까지 보니 경쟁심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럼 그의 지모를 빌려볼까요?”
“······괜찮겠나?”
당연해, 당연우 형제간 문제를 아는 주상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해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지금은 제 자랑스러운 막내동생인걸요.”
***
포달랍궁과 무림맹 사이에서 이견을 조율하는 것으로 온수 장판 문제는 일단락됐다.
덕분에 당연강이 눈을 빛내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 건 물론이거니와 미래전략회의 인재들에게 존경 어린 시선을 받았다.
‘아마 난 일의 저주를 받았을 거야.’
편히 쉬려고 개발한 매트리스와 온수 장판, 감칠맛 조미료가 업무로 돌아왔다.
전세든 현세든 어딜 가도 일이 줄어들지 않았다.
일거리가 몰릴 때면 피가 차갑게 식었다. 과로로 삶을 마감한 이전 삶의 기억이 상기됐기 때문이다.
“백리안의 묘안이 필요해.”
당연강의 일을 처리하니 이번에는 당연해가 방을 찾았다.
자존심 강한 그가 부탁하고자 나를 찾을 줄은 몰랐다.
‘싫다고 할까?’
나는 당연해의 기억을 훑어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했다.
수라마교와의 전쟁이 일공일방 격전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일 년도 되지 않아 수라마교와 호각을 벌이는 건 대단한 일인데?’
정의회는 풍부한 자본과 정보력, 그리고 마공을 바탕을 가졌지만, 급조한 조직이었다.
그런 곳이 백 년이 넘게 무림에 암약하던 수라마교와 맞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주상열과 당연해의 능력이 뛰어나단 반증이었다.
“회의 일인가요? 그건 주 회주님이나 형님에게 전적으로 맡겼을 텐데요?”
“네가 회의 독립을 위해 간섭하지 않는 건 잘 알고 있다. 이제 회원들은 다들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떠넘긴 건데요?’
나의 평화를 위해 수라마교와 싸울 힘이 필요했다.
정의회는 이를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수라마교가 정의회 때문에 허튼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데 말이지.’
괜히 무림 전복 작전 같은 걸 시작했다가 전쟁통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당연해나 주상열은 지금과 같은 교착 상태가 아니라 확실한 승리를 원했다.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리길 원하시는데요?”
“사람 문제다. 회원 모집이 쉽지 않아······.”
나는 그의 기억을 통해 정의회의 문제점을 읽고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14인객은 구파와 오대세가의 인맥을 통해 후보자를 발굴하고, 전서협회의 정보력으로 신상을 파악했지. 그 뒤에야 가입을 유도했고.’
결국 인맥을 통한 선발이었다.
정의회의 현 회원들도 주상열을 따라왔으니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모집공고를 내죠.”
“회는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조직이 아니지 않더냐. 그들의 무공은······.”
당연해가 끝까지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정의회의 회원들이 마공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서서 해결해도 의미가 없어. 문제가 생기면 또 의지하려 들 테지······.’
나는 당연해의 머릿속을 훑었다.
그 안에는 나를 향한 인정과 경외가 담겨 있었다. 그 저변에는 패배감이 깊게 자리했다.
‘인재 교육기관을 만들어 볼까?’
도제식 제도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강호에는 인재를 길러낼 마땅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나는 전생에서 출입처로 있었던 인재개발원을 떠올렸다.
‘인재개발원 구조가 어땠더라?’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전생의 기억을 되짚었다.
- 작가의말
토·일 연재가 꼬이는 바람에 월요일에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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