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돌아온 게 당연해.
늦은 오후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빗발에 땅은 검게 젖어 들었다.
진흙을 짓밟고 두 사내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뱀의 비늘을 연상케 하는 가죽옷을 입은 두 사내는 푸른 도복을 입은 오십 대 중반의 도사와 마주했다.
“하, 이젠 도둑놈 새끼가 우릴 불러?”
키가 작은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투덜댔다.
장년의 사내가 그의 머리를 꾹 누르며 도사, 청명해 앞에 다가갔다.
“청명해, 그간 숨어 살던 녀석이 어찌 이리 모습을 드러냈을까?”
“수라신교······.”
청명해가 두 마인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그는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금천시 인근 비동에서 수라마공과 태극혜검을 훔쳐 배울 수 있었다.
수라마교의 마인과 무당파 고수가 동귀어진한 곳이었다.
‘강해지기만 하면 될 줄 알았지······.’
청명해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기라는 것은 생각보다 숨기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자 무당파의 도사들은 청명해를 의심하고, 결국 마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드러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루한 추격전이 시작됐다. 무당파와 마공의 원주인인 수라마교에게도.
‘그래도 그 경험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지.’
청명해가 짧은 회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바요.”
“하? 뭔 배짱이야?”
키 작은 마인이 이죽거리며 마기를 뿜어냈다.
장년의 마인이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짓누르며 말했다.
“네가 입을 열 때마다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구나······ 일단 그 입부터 찢어버릴까?”
“······.”
키 작은 마인이 합죽이가 됐다.
장년의 마인이 청명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대가는?”
“무림을, 강호의 미래를!”
청명해가 씩 웃으며 답했다.
장년의 마인은 조용히 그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
“금천에 자리한 동굴이라······ 독은 당중일이 남긴 것을, 기관은······ 재활용인가? 이런 건 어디서 찾은 걸까?”
나는 전서협회에서 보낸 정보를 그대로 아미와 청성, 당문에 보냈다.
“어디서 온 겁니까?”
무림맹 사천지부에서 지원 나온 무사, 하석주가 물었다.
그는 이번에 무림맹 무사 스무 명을 이끌고 지원 나왔다.
“무림맹주님 직속 정보원에게서요.”
내가 무림맹주 직속 어사였고 정의회는 내 밑에 있는 조직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맹주 직속이라 말하는 하석주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금천이라고요? 음······.”
하석주가 묘한 표정을 짓자 나는 의문을 보였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뇨, 예전에······ 그러니까 제가 신입이었을 때 혈마비록이란 게 발견된 곳이라고 들어서요.”
하석주가 막 무림맹에 들어왔을 때 백 년 전 절대 고수 혈마의 비급이 발견된 곳이 바로 금천 인근 야산의 동굴이었다.
나는 그가 떠올린 기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속 기연이란 거구나. 14인객 중 누가 거길 털어먹었으려나?’
나는 하석주에게 당연해 구출 작전에 관해 설명했다.
먼저 가까이에 있는 우리가 주위를 살피고 이후 아미, 청성, 당문이 지원을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잠복한 14인객의 무사들 수가 많지 않다면 굳이 다 올 필요는 없지만······.’
기관 장치라면 많은 수보다는 오히려 소수 정예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지원 세력보다 당문의 전문가가 조금 아쉬웠다.
사흘 뒤, 나는 금천 인근 혈마비동에 도착한 우리는 몸을 숨긴 채 주위를 탐색했다.
비동 주위에는 청명해가 고용한 인부들이 작업에 열중이었다.
기관 전문가로 보이는 장년인을 중심으로 그들은 조심히 상자를 나르거나 나무 기둥, 철심 등을 옮기고 있었다.
‘당연해와 당연화를 이곳에 가둔 걸까?’
다행이라면 아직 객주로 보이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14인객에서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고수들이 인부들 사이사이에 숨어 있었다.
‘인부들은 훈련용 기관 장치를 만든다고 알고 있는데······ 살인멸구를 할 생각인가?’
구파와 오대세가의 현 지배 세력에 대해 반감을 보이고 나온 14인객이었으나 본래는 같은 정파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양을 보면 더는 정파라 볼 수 없었다.
“당 공자, 무공을 익힌 사람의 수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림맹에서 파견한 무사들의 수는 적었지만 이들 개개인의 실력은 일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저는 안에 들어가서 작은형이랑 사촌누이가 있는 살펴볼게요.”
“혼자서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하석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투는 되도록 지양할 거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은신술을 보였다. 천라지망에 살수문을 상대하다 보니 이제 수준에 이르렀다.
하석주가 기척을 줄이는 내 수법에 놀란 얼굴을 보이더니 씩 웃었다.
“당 공자는 정말 못 하는 게 없군요.”
비동 안은 기관 장치 설치에 여념이 없었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철암당주 노릇을 해서인지 대충 어떤 원리와 위력을 가졌는지 보였다.
‘아직 진법을 구축하지 않은 게 다행인가?’
이들이 하는 일은 새로운 기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관을 보수하는 것이었다.
부족한 화살이나 화약, 독을 채워 넣고 기름칠을 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나는 조용히 그들 사이를 지나면서 누군가 벗어둔 작업복을 훔쳐 걸쳤다. 나아가 흙먼지로 세수하듯 문질러 얼굴을 가렸다.
‘이 구조면······ 가장 안쪽에 자리했을 것 같은데?’
비동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인부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대신 두 명의 무사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안력을 높여 그들 뒤를 보니 검게 칠한 쇠창살에 당연해와 당연화가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청명해나 객주는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하찮은 무인은 아니네.’
두 무사는 흐트러짐 없이 말뚝을 박은 것처럼 서 있었다. 석상 같은 모습임에도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의 흐름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둔 것이다.
‘머릿속은 어떨······ 큭!’
그들의 표층 심리를 들춰보려던 찰나 두통이 엄습했다.
뜨겁게 달궈진 타르가 끈적하게 뇌에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역겨운 감각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기······ 마인이구나!’
태극분열심공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하단전에서 치고 올라온 기운이 중단을 거쳐 격류를 이루며 상단전에서 꽃 피웠다.
청명해가 그들을 고용한 것도, 그리고 그들의 정체가 수라마교의 마인들인 것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심리 방벽은 무공 실력과는 관계가 없는 걸까?’
정파의 무공이란 그 수준을 높이면서 마음공부도 함께 하게 된다.
그러나 마공은 그것과 관련 없이 순수하게 강해지기 위해서만 무공을 연성했다.
그들이 풍겨내는 위험한 기운과 관련 없이 그들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
그리고 처음 마주한 마공에 흥미가 생겼다.
나는 은신을 풀고 그들 앞으로 나섰다.
두 마인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이어 진득한 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어디서 온 놈이냐!”
키가 작은 마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것이 아닌 쉽게 흥분하는 게 천성인 듯 보였다.
반면 키가 큰 마인은 조용히 마음속에서 내 목을 베고 내장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댁들이 찾는 당문의 막내 공자. 그게 나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검을 뽑았다.
일단 시작은 탐명무형검부터였다.
***
“이거 분위기가 좋지 않군?”
청명해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다시 도착했을 때 피부가 간질거리는 기분을 받았다.
묘한 기시감에 그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봤다.
인부들은 여전했고 그들을 감시하는 14인객의 무사들도 여전했다.
이변은 없었다.
‘기분 탓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수라마교에서 나온 마인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동의 보수는 열흘 안에 끝날 것으로 보였다.
중앙전장의 돈은 무림맹 덕분에 더는 쓸 수 없었지만, 당연우만 포획한다면 되찾거나 다른 물건을 훔칠 수 있었다.
청명해는 자신이 특별하고 선택받은 주인공이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해와 당연화를 지키는 건 수라마교에서 온 마인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여길 알았냐고? 아니면 이들을 어떻게 제압했냐고?”
십 대 후반의 소년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의자에 앉아 길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마인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친 건가? 아니면 배신한 건가?’
청명해는 후자 쪽에 무게를 뒀다.
마공은 일개 고수가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라면 절정에 이른 청명해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전자는 댁들의 정보통제가 이제 온전치 않았던 거고, 후자는 마인들의 수가 단조로웠어. 게다가 상성이 나빴고.”
‘그럴 리가 없다!’
마공은 오로지 강해지고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부처가 되겠다느니, 우화등선하겠다느니 얼토당토않은 목적을 가진 무공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대인 무술이었다.
“허! 그 어린 나이에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구나.”
나이가 어려 얕잡아 봤는데 만만치 않아 보였다.
청명해는 오랜만에 긴장을 하며 검을 뽑았다.
‘운이 좋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었지. 무당의 전설과 혈마와의 싸움에서······.’
“그 회상 길어질 것 같으니까. 짧게 끝내자. 너에게는 그다지 건질 게 없어 보이거든.”
“뭐?”
“댁은 마공도, 무당의 무공도 그럭저럭이다만, 생각보다 화후가 낮아. 무슨 초식을 기술처럼 생각하고 있어?”
당연우의 차가운 시선이 청명해를 훑었다.
“뭐랄까······ 반푼이? 기대했는데 뭐야 이게.”
투덜거리며 휘두른 손에서 은빛 빛줄기가 쏟아졌다.
당중수에 이어 그의 이름을 날리게 된 절기. 추혼비접이었다.
“내공의 양이 많고 기술만 좋은 거 있으면 될 거라고?.”
당연우의 싸늘한 평가가 청명해의 폐부를 들쑤셨다.
“흥! 웃기지 마! 나에게는 무당의 절륜한 방어 초식이······.”
“왜 초식을 익히는데 고된 수련을 왜 하는지 알아? 선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초식을 남겼을 거 같아?”
“그딴 건 몰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외치면서 청명해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추혼비침의 수는 많았지만 세침 하나하나에 담긴 기운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걷어낼 것만 걷어내고 일부는 몸으로 흘린다.’
추혼비접의 무서운 점은 단숨에 셀 수 없이 많은 비침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청명해는 이미 당연우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절기는 추혼비접에, 벽력탄, 그리고 검술 정도였다.
‘무공보다는 기책으로 이겨왔지.’
마인을 제압한 건 의외였지만 그 또한 기발한 발상에서 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청명해는 당연우를 상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라고 생각했다.
그가 검을 뽑기 전까지는.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솜털이 삐죽 서는 느낌은 분명 위기감이었다.
“어?!”
의문을 드러내기도 전에 당연우는 청명해의 지척까지 달라붙었다.
그의 품에서 쏘아진 검이 뱀처럼 요동치며 무수히 많은 잔영을 만들어냈다.
“이, 이건!”
제갈세가의 칠현무형검인가 싶었는데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음습했다.
그러면서도 검은 착실하게 목과 심장, 명치 등 거침없이 급소를 노렸다.
“이렇게 살기 짙은 무공을······.”
청명해가 놀란 틈에 당연우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도 아직 공부가 부족하네. 네놈이 혓바닥을 놀릴 여유가 있는 걸 보니.”
간신히 그의 검을 튕겨냈다 싶었을 때 이미 검의 주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새 당연우는 청명해의 품에 안긴 듯 달라붙어 있었다.
“뭐, 그래도 연습용으론 나쁘지 않았어. 마인들과 다르게.”
당연우의 손끝이 청명해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청명해가 기겁하며 몸을 틀었지만 마치 한 몸이 된 듯 당연해의 신형이 따라붙었다.
“그럼 잘 가라고.”
당연우의 손이 부드럽게 가슴을 파고들어 가슴뼈를 뭉갰다.
청명해는 자기보다 경지가 낮은 당연우에게 패했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나는 피를 털어내며 뒤에 갇힌 당연해와 당연화를 돌아봤다.
당중일이 개발한 산공독과 마비독에 중독됐던 그들은 해독약을 먹고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에구, 가족이란 게 참 뭐랄지······.”
나는 투덜거리며 지원 무사들을 기다렸다.
기껏 준비해둔 아미, 청성, 당문의 힘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다른 객주들도 이제 올 거고······ 이번 기회에 청소한다고 생각하면 손해는 아닌가?”
당연우와 당연화를 동시에 짊어진 채 곳곳에 배치된 14인객의 고수들을 뚫고 나갈 자신은 없었다.
나는 기다리는 김에 청명해의 시체를 뒤적였다.
“청명해는 내 반면교사야. 나도 무공의 깨달음을 훔치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되겠다.”
청명해의 패인은 무공을 무슨 수식처럼 외웠다는 점이었다.
그는 무술을 배웠을 뿐 공부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랬으니 마공에 빠지고 비밀결사에 들어간 거겠지만.’
그의 품을 털어보니 수라마교의 비급이 나왔다.
기억으로 볼 때 경비를 본 마인들에게 바칠 혈마의 무공인 듯 싶었다.
“음, 마공이라······.”
두 마인의 무공은 분명 위력적이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설정한 기준 미달이었다.
그러나 백 년 전 세상을 풍미한 혈마의 무공이라면 조금 다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백 년 전? 탐명마검이 활약했던 게 그때쯤이 아니었나?”
애석하게도 탐명마공에는 운기법이 없었다. 외공만 덩그러니 남아도 검법에 담긴 살의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지만,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긁적이며 혈마비록을 들쳐보다가 뒤척이는 소리에 비급을 품속에 넣었다.
뒤를 돌아보니 당연해가 눈을 뜬 모양이었다.
“작은형 오랜만입니다.”
정신을 차린 그를 향해 나는 미소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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