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권성의 이름값.
“오기린 여러분들께서 찾아뵙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살수문을 처리하고 도착한 호정문은 역시 상중이었다.
이 가운데 호정문주가 버선발로 나와 반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문주님, 저는······.”
남궁호가 나서 일행을 소개하는 가운데 호정문주의 뜨거운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전형문에서도 불과 하루 만에 첩자를 잡았다지? 백리안이라면 최고 장로님을 해한 놈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당중월의 작업으로 호정문까지 오는 짧은 시간 동안 백리안이라는 별호가 붙어 버렸다.
허안공자야 내가 얻은 게 아니다 보니 별 감흥이 없었고, 신농재림도 조명식 의원만 부르는 거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백리안이 뭐람?’
괜히 남사스럽고 머쓱했다.
호정문주가 원하는 바를 아니 나도 능력을 사용했다.
‘태극분열심법으로 일단 상단전을 열고, 능력에 집중하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사그라들고 마음이, 생각이,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상단전이 커지면서 능력의 위력이나 활용 폭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랐다.
천라지망과 살수와의 싸움도 능력 성장에 도움이 됐다.
탐색을 마친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없어. 여긴 텄네.’
호정문에는 14인객의 첩자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철수를 한 것인지 그들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몇몇 호정문주에게 반감이 있는 자들은 있었으나, 하나 같이 최고 장로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었다.
‘이미 발을 뺀 건가?’
아미파도 전형문처럼 속가제자가 세운 문파였다. 숱한 교류를 통해 아미파의 제자들이 호정문을 오갔다.
남궁호가 마지막으로 호정문과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비울 때 낯익은 이들을 마주했다.
“최근 당 소협의 이야기가 귀 따갑게 들리더구려. 백리안이라고?”
화산파 출신의 백심당이었다.
그는 사문의 골칫덩이인 백료강을 잡는 데 내가 공헌을 한 터라 그의 심기는 썩 좋지 않았다.
“그저 허명일 뿐이죠.”
나에 대한 인식이 바뀐 뒤 당중월은 아낌없이 지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후계자 수업 중인 당연강도 반대는커녕 열과 성을 다해 돕는 중이었다.
‘천리안보다는 나은 건가?’
명성이 오를수록 주변의 시선이 불편해진다. 자칫 이러다가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음, 적당히 하자.’
나는 슬쩍 뒤에 쭈그린 범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한 그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손이 좀 과했나?’
그의 기를 눌러줄 심산으로 적당히 손을 봐준 것 같은데 흥이 돋아 손속이 과했던 것으로 보였다.
덕분에 범교는 내게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호정문에서도 첩자를 찾았소?”
백심당이 서슴없이 물었다.
‘아, 너희들은 여기까지 와서도 실패했지.’
백료강을 통해 사룡삼봉은 최고 장로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지키지는 못했다.
최고 장로가 어디에 은거했는지조차 호정문의 정보 통제로 알지 못했던 탓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전형문 사건을 해결하고 이름을 드높이고 있으니 배알이 꼴릴 만했다.
“그걸 한두 시진 만에 어떻게 찾는데요?”
내가 반문하자 백심당도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가는 길이었다. 겉보기에 남궁호가 상주인 호정문주와 이야기를 했을 뿐, 나는 그저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야, 당 소협의 명성이 워낙 높으니······.”
백심당이 주위를 둘러보며 구원을 바랐으나 냉담하긴 다른 사룡삼봉도 마찬가지였다.
호정문이 상중인데 그 앞에서 기를 세울 상황이 아니었다.
“백 형,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니지 않소?”
남궁호가 백심당을 나무랐다. 백심당이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물렀다.
나는 남궁호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귓속말했다.
“남궁 형, 저희는 아미파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당 공자, 뭔가 단서를 발견한 건가?”
“아니요. 하지만 지금까지 14인객의 행동을 보아 그들은 자기 문파에 첩자를 두고 있었어요. 전형문이나 호정문이라고 다르지 않겠죠.”
내 말에 남궁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파라고요?”
사룡삼봉 중 혜연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키가 가슴께 오는 소녀였다. 눈을 빛내며 다가온 그녀가 물기 어린 시선으로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이건?’
마음을 읽을 필요도 없이 속내가 훤히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
혜연은 아미파에 도착하자마자 장문인과 독대했다.
옥빛이 감도는 차를 홀짝이며 혜연은 잔뜩 긴장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잔소리를 할까?’
한때 하늘과도 같은 장문인이었지만, 문을 나서 강호 생활을 맛본 혜연에게 아미파의 장문인은 현진 사태는 꼬장꼬장한 늙은이였다.
“최근 14인객으로 무림이 시끄럽더구나.”
현진 사태가 모른 척 혜연에게 물어왔다.
그녀가 혜연이 사룡삼봉의 일원으로 호정문을 찾은 일을 현진 사태가 모를 리 없었다.
혜연이 잔뜩이 긴장한 채 침을 꼴깍 삼켰다.
‘호정문의 일로 꾸지람인가? 하지만 나한테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는걸.’
호정문에서는 최고 장로가 거주하는 위치나 연관된 사람 등 그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혜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속으로 꿍얼거릴 때 현진 사태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 당문의 막내 공자는 어떤 사람이더냐?”
꾸지람을 들을까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현진은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후기지수를 언급했다.
혜연이 보기에 현진 사태도 강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당연우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혜연이 당연우를 떠올렸다. 호정문에서 아미파까지 안내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러니까······ 당 공자는 잘 생겼지.’
그를 떠올리자 혜연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혜연이 아미파에서 보이지 않던 소녀다운 모습을 보이자 현진 사태도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머리가 그렇게 좋다지?”
“그게 아니더라도 눈치가 엄청나게 빠른 것 같아요. 마치 제 마음을 읽는 것처럼······.”
불과 며칠 정도 동행을 했을 뿐이었지만, 당연우는 마치 입 안의 혀처럼 사람을 대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배려했다.
이를 누구보다 느낀 건 사룡삼봉 중 삼봉이었다.
‘가끔 범 소협이랑 이야기할 때는 눈치 없는 척을 하긴 하지만.’
혜연이 미소를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개방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개방의 후기지수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당 공자가 그를 짓밟아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그 인내심 부족한 범교가 섣불리 손을 쓰지 않는 설명되지 않았다.
“흐음, 그렇다면 무공도 제법 뛰어나다고 봐야겠지.”
현진 사태가 더는 혜연에게 당연우에 대한 정보를 들을 것 없다고 판단하자 그녀를 물렸다.
조금 뒤 수려한 외모의 소년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소년과 청년 사이의 묘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아이였다.
혜연이 그리 발갛게 얼굴을 붉히는 것도 이해가 될 정도로의 미모였다.
‘외모도 뛰어나도 마음도 알아주는 남자라······ 여자깨나 울리겠군.’
당연우를 보면 아비인 당중월을 떠올리면 도무지 그 자식이라고는 상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당중월은 당연우 나이 때 이미 소가주로 재능을 뽐내고 있었다. 당시 그는 더없이 차갑고 잔인한 남자였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당연우는 마치 그림에 그린 듯한 모습으로 인사했다.
현진 사태도 그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래, 14인객의 끄나풀을 잡으러 왔다고?”
본래 구파와 오대세가의 인재였던 그들은 자기 사람들을 남기고 문파를 떠났다.
당시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그게 시간이 지나 뿌리 깊게 남아 구파와 오대세가를 괴롭히고 있었다.
“예,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으려 합니다.”
당연우가 뛰어난 지모로 14인객의 객주들을 하나둘 잡으면서 무림에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최근에 14인객의 천라지망과 살수문을 무너트리면서 백리안이라는 별호까지 생겼다.
십 대에, 그것도 강호초출이 별호를 갖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림맹에서도, 당문에서도 협조를 부탁하더군.”
양측에서 이미 연락이 왔다.
무림맹에서는 맹주가 직접 서한으로 협조 공문을 보냈다.
무림에서 권성이 가지는 이름값을 생각하면 현진 사태도 무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당연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장문인께선 협박······받고 계신 거죠?”
그 말에 현진 사태의 얼굴에는 그늘이 짙게 내려앉았다.
“눈치가 빠른 게 아니었군.”
그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상대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었다.
현진 사태는 조용히 기를 끌어 올려 주위의 소리를 차단했다.
주위를 그녀의 기로 억눌렀건만 당연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중월, 그자가 만든 인형만은 아니란 건가?’
“아버지의 성격을 생각하면 자식이라도 능력이 없다면 투자하실 분이 아니시죠.”
“······눈치도 빠르고.”
현진 사태가 차갑게 웃으며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
‘아미파는 이미 14인객의 수중에 떨어졌어.’
혜연과 사룡삼봉을 따라 방문한 아미파는 다른 문파에서는 볼 수 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정원사나, 잡일꾼, 시종, 오가는 상인까지 14인객의 숨결이 깊게 닿은 이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런 가운데 장문인 현진 사태의 호출이 이어졌다.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혜연이 나온 뒤 나는 그녀의 뒤를 이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들어서 마주한 현진 사태는 절정에 이른 고수였다.
간단히 예를 차리고 그녀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현진 사태가 건넨 차를 마시며 그녀의 기억을 차근히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약점을 14인객이 찾아 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숨겨둔 자식이 있었네?’
그녀가 강호행 중 짧은 인연 속에 만든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14인객 수중에 있단 말이지?’
“장문인께선 협박······받고 계신 거죠?”
나는 그녀의 기억을 읽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옷자락이 펄럭이더니 공기가 무거워졌다.
몸을 짓누르는 그녀의 기운에 나는 무림맹주를 떠올렸다.
‘권성에 비하면······ 하잘것없네.’
그리고 이것이 위협이 아닌 숨은 귀를 염려해 소리를 차단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어서 긴장하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게 아니었군.”
「당문의 정보력이 이 정도였나?」
위협은 현진 사태가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내 뒤에 당중월이 있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성격을 생각하면 자식이라도 능력이 없다면 투자하실 분이 아니시죠.”
“······눈치도 빠르고.”
「단순히 쓸만한 인형은 아니야. 하지만 당문의 도움이라······.」
시시각각 변하는 현진 사태의 심정에 나는 조용히 그녀를 지켜봤다.
결국 다시 입을 연 건 그녀였다.
“그래서 내 치부를 공표할 생각인가?”
비구니인 현진 사태에게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간에 손가락질받을 일이었다.
협박으로 동정을 얻기에는 아미파 장문인의 자리는 너무 무거웠다.
“아니면 이번에는 당문이 아미파를 핍박할 생각인가?”
피부 짜릿한 살기가 현진 사태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런 거와 관계없이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야죠.”
나는 그녀의 앞에 어사패를 꺼내 놓으며 말을 이었다.
“무림맹주 직속 어사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아미파는 중앙전장를 담당하는 회계 관련 문도와 중원전서협회와 관계된 정보각 직원의 감사를 불러주세요.”
현진 사태가 어사패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미파와 무림맹은 상호 협력 관계였고, 이런 외부 감사는 무시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한 상태에서 권성의 이름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14인객 놈들,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문제들. 제가 뿌리 뽑아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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