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때다!(수정)
“······그러면 지금부터 합격자를 발표하겠다.”
운길서당 동시 준비반은 어느 때보다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군가 침을 꿀떡 넘겼다.
‘합격했네.’
강사의 마음을 읽어 이미 동시 결과를 안 나는 주섬주섬 짐을 정리했다.
동시 준비반도 오늘로 끝이었다.
“이제 과시 준비반으로 이동하는 건가?”
내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동시 준비반 학생들은 격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합격에 눈물짓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아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음······ 이거 괜히 미안하네.’
나는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 덕분에 마땅히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았다.
강사와 시험관의 생각은 물론, 같이 시험을 보는 응시생들의 문제에 대한 해석까지 참고했다.
이래서야 시험에서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리를 비우려던 때 강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결과지와 나를 번갈아 봤다.
그러더니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당연우, 동시······ 장원.”
강사의 발표에 강의실 안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수강생들이 실의와 질투, 경악이 섞인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말도 안 돼. 주먹질이나 하는 놈이 어떻게!?」
「수업 시간 내내 졸던 놈이 왜 장원?」
「아무리 동시라고 해도 쉽지 않거늘······.」
최근 만화루 투자사업으로 정신 없던 터라 수업 태도가 좋지 않았다.
덕분에 수업 내내 강사나 다른 수강생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왔다.
이어 강사가 마지막 합격자까지 부른 뒤에야 강의실 안은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이야, 이거 눈치 보이네. 어서 빠져나가자.’
나는 재빠르게 짐을 정리하고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면서도 다른 수강생을 밀어내고 과시까지 봐야하나 의문이 들었다.
‘아니, 어차피 서당을 다니는 건 형의 안심을 위한 거잖아? 그냥 원래대로 장수생으로 놀고 먹어야겠다.’
관리가 될 것이 아니니 굳이 시험 결과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마음 먹고 나서야 조금쯤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자네가 당연우인가?”
과시 준비반을 신청하고 강사와 강의 시간을 확인하던 차였다.
서당의 운영 사무실에 낯익은 중년인이 나를 반겼다.
‘석 훈장이 왜?’
본래 훈장실에 있어야 할 석관웅이 운영 사무실에 있는 건 이례적이었다.
나는 그의 표층 심리를 살펴 용건을 확인했다.
「이 녀석을 데려가면 혹 당문의 무사들이 나온다고 해도 쉽게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금영루와 동백루를 치는데 나를 데려가시겠다?’
당가타에서 당문의 이름은 절대적이었다.
운길서당의 대외적인 명성으로도 부족하진 않았지만, 마침 당문 출신인 내가 서당을 다니니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뭐, 어차피 금영루와 동백루는 이번 기회에 정리할 생각이었으니까. 같이 가는 게 나쁜 건 아닌데······’
당가타 뒷골목의 중심은 홍등가였다.
작디작은 곳이지만 홍등가 특성상 규모와 다르게 많은 돈이 굴러다녔다.
금영루와 동백루가 무너지면 홍등가 전체를 독점하기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가 당연우가 맞는데 누구시죠?”
생각을 정리한 내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이게 소문난 당문의 막내 공자인가?’
백룡회주의 눈이 당연우를 훑었다.
백룡회는 사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암살조직답게 당문에 대한 소문에 민감했다.
‘빼어난 의술로도 정평이 났지만, 당연해를 쫓아낼 정도로 머리 회전이 빠르다지?’
그래 봐야 열다섯, 이제 열여섯이 되는 소년이라고 무시할 수 없었다.
당한 건 못 참는 당문 사람의 성격상 열다섯이고 열 살이고 죽을 때까지 원한을 잊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벌써 제 형을 폐인으로 만들고 옥에 처넣을 정도니 뭐.’
신이 나 콧바람까지 부는 석관웅 훈장은 자기가 누굴 데려왔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거 당 공자님 아니십니까?”
백룡회주가 속내와 다르게 당연우를 반겼다.
당연우가 그를 힐끗 보더니 피식 실소했다.
“사파 새끼가 아는 척은.”
“뭐, 뭣!”
백룡회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황한 건 당연우를 데려온 석관웅도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 당 공자 이게 무슨 무례인가?”
“훈장님, 함께 가자고 하셔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런 잡졸과 만나자는 이야기였습니까?”
당연우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 아니 그게······.”
석관웅이 당황해 말끝을 흐렸다.
그도 금패에 눈이 어두워 나섰지만, 생각해보니 명망 높은 그가 암살조직과 함께 가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거······ 실수했군.’
석관웅은 그동안 겉으로 드러난 운길서당의 훈장과 이면의 중개사 역할을 철저하게 분리했었다.
그런데 최근 만화루 투자사업에 뛰어들면서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전이었다면 백룡회주와 함께 대로를 걷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당 공자, 최근 당가타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는 걸 아는가?”
“불미스러운 일이요?”
당연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석관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좋은 일을 하는 선량한 상인을 같은 업종의 무리가 핍박하고 있다더군.”
“흠······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저야 학회나 서당 갈 때 빼고는 집을 잘 나가지 않으니 당가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니까요.”
“그래, 그래서 내 훈계를 하려 하는데 마침, 여기 계신 백룡회주님께서 도움을 주겠다고 하시더군요.”
“이 사파 새끼가요?”
당연우는 자신보다 서너 배는 족히 더 살았을 백룡회주에게 손가락질했다.
백룡회주는 그런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속으로 삭였다.
암살자의 기본 소양은 인내심이었다. 그는 소년의 철없는 몇 마디에 화를 낼 사람이 아니었다.
당장에 당연우에게 손찌검이라도 했다가 당문이 옳다구나 하고 추살령을 내릴 게 뻔했다.
‘내 당가 새끼들을 언젠가 소금에 절여 주겠어.’
백룡회주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괜히 분위기가 나빠지자 석관웅이 슬쩍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렇다네. 내 백룡회주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네. 하지만 그의 평소 행실 이전에 앞으로 할 선행을 더 존중해야 하지 않은가?”
“뭐, 훈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더는 뭐라 할 순 없겠네요.”
당연우는 불만이 가득하지만 석관웅의 얼굴을 봐 참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제야 석관웅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당 공자가 그리 알아주니 고맙군.”
“아뇨, 좋은 일 하러 가신다면서요. 어서 가죠.”
“그래그래, 어서 가지.”
당연우가 석관웅과 함께 걷다가 고개를 홱 돌려 백룡회주를 돌아봤다.
“댁은 좀 떨어져서 걷지? 냄새나니까.”
뿌드득!
백룡회주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
‘귀식대법은 자기 자신을 가사 상태로 만드는 건가?’
나는 당가타로 가는 동안 백룡회주의 머릿속을 살펴 살수들의 무공을 알아봤다.
암기술은 볼 만한 게 없었으나, 경공과 은신술은 예상외로 쓸만했다.
‘그래도 사천에서 손꼽히는 살수집단인가?’
이제 보니 백룡회주의 평소 발걸음도 소리가 나질 않았다.
신발 밑창에 두꺼운 천을 깔아 소리를 죽인 탓도 있었지만, 걸음에도 백룡회의 경공인 환야신법의 묘리가 담긴 것이었다.
‘검술은 필요 없겠고.’
백룡회의 검은 오로지 일격필살만을 의도한 검술이었다.
그 때문에 검술 자체만 보자면 14인객에서 나온 강달의 탐명검이 훨씬 더 뛰어났다.
‘경공은 쓸 만한데?’
환야신법은 도주용과 은신용 두 가지 방법이 담긴 경공술이다.
백룡회를 사천에서 손꼽히는 살수문파로 올라서게 할 정도로 상승무공이었다.
‘음, 천둔대법은 귀식대법을 포함한 은신술 전반이 담겨 있는 건가?’
무공이라기보다는 백룡회 살수들의 기술서에 가까웠다.
오랜 세월 암살조직을 운영해 온 백룡회만의 비법이었다.
‘이렇게 하는 건가?’
백룡회주의 깨달음을 모두 확인한 뒤 직접 시험에 나섰다.
처음에는 백룡회주의 걸음을 따라 했고, 이어 느린 호흡으로 아주 천천히 기척을 지워나갔다.
「당 공자가 중독으로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그러기엔 너무 정갈한 걸음걸인 걸?」
그의 생각을 읽어 가며 그의 무공을 조금씩 습득해 갔다.
「당문에서는 경공보다 은신술부터 가르치나? 어째 제대로 배웠어.」
「우리 애들이 보고 배웠으면 할 정도로 걸음에 소리도 없고 중심도 완벽해.」
「어?! 어째 걸음걸이가 우리 환야신법과 비슷한 걸음 같은데······.」
백룡회주의 시선이 조금씩 의심으로 물들 무렵 나는 입을 열었다.
“훈장님, 제가 오늘 급한 용건이 있었던 걸 깜빡했네요. 이거 어쩌죠?”
“아니, 뭐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석관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험이긴 하지만······ 뭐, 일단 우리가 어떤 이유로 당가타에 가는 건 당문에서도 알게 됐으니 된 건가?」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훈장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재빠르게 자리를 떠나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는 환야신법의 구결을 따라 전력으로 질주했다.
환야신법의 도주용 구결은 내공을 아낌없이 사용해 최대한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만화루로 들어온 나는 당장 장인원부터 찾았다.
“공자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요?”
내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만화루를 찾자, 장인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 있다가 운길서당 석 훈장과 백룡회주가 회원등급 변경하러 올 거야.”
두 사람이라면 빈틈없이 금영루주와 동백루주에게서 금패를 빼앗을 것이 분명했다.
“사람을 시켜 변경하도록 해. 절대 얼굴을 보이지 말고. 이 일은 만화루가 아닌 모두 금민재가 벌인 일이니까.”
“명령하신 대로 회원 유치에 제가 직접 나서지는 않고 있습니다.”
장인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변경하는 순간 지금까지 받은 투자금, 세탁으로 맡긴 돈들 전부 현금화 해 둬.”
사흘 뒤, 장인원의 연락에 만화루를 다시 찾았다.
“공자님, 모아오라고 하셔서 모으긴 했는데요······.”
장인원이 너무 큰 액수에 수전증이라도 생긴 듯 손을 부르르 떨었다.
집무실 한가운데에는 금괴 수백 덩이가 쌓여 있었다.
지금까지 회원들이 모은 투자금과 세탁을 위해 보낸 금액이었다.
이를 모두 황금으로 바꾸니 그 양이 200관(약 750kg)에 달했다.
“이거 용돈벌이는 됐네······라고 말하기엔 좀 큰 액수지?”
“아니, 누가 이런 거금을 용돈이라고 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장인원의 눈에서 황금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도 휘황찬란한 금괴를 보며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이렇게 금괴로 바꾸신 이유는 제가 생각하는 그건가요?”
“응, 이젠 털어내야지. 회원도 생각보다 많이 모였고 이자나 세탁했다고 내는 돈들 감당하는 것도 힘들어졌으니까.”
회원들을 무분별하게 받았다면 이에 배는 더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사파나 그와 관련된 이들로 가려 받은 탓에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러니 이제 수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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