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검으로는 막을 수 없어.
이튿날 나와 오기린은 소문주 강진과 함께 전형문에 들어섰다.
안에는 여전히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고, 제자들은 상복을 입은 채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면 먼저 백 장로부터 찾으면 되겠습니까?”
강진이 물었다. 그의 표정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이미 백석태 장로를 범인으로 생각하는지 문파의 장로임에도 존칭 따윈 붙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문에는 화산파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일단 백 장로님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죠.”
당중일도 같은 객주인 백료강의 정보원이 누군지까진 알지 못했다.
‘어차피 마음을 읽어보면 누군지 아는걸.’
그런 마음으로 만난 백석태 장로는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화산파에서도 장로와 같은 배분이었지만, 자파에서 마땅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전형문에 내려온 인물이었다.
“그래, 소문주께서 어쩐 일로 이렇게 노구를 찾았는가?”
그의 시선이 강진에 이어 우리 오기린까지 쭉 훑었다.
「젊은 나이에 그 기세가 범상치 않구나······ 어제 오기린이 방문했더랬지?」
백석태가 단번에 우리 정체를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포권을 취했다.
우리보다 두 배분은 높은 선배가 예를 보이자 우리도 엉거주춤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궁세가의 호라고 합니다.”
남궁호가 대표로 나서서 인사를 했고 백석태는 살갑게 응대했다.
“전형문의 장로 백석태요.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전대 문주님을 위해 이렇게 찾아주다니······ 이들도 고생이 많구나.」
희게 웃는 그의 얼굴과 속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의 기억을 들춰 살폈다.
‘이 자는 백료강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백료강이 화산파를 나오기 전에 이미 전형문의 장로였어.
또 그는 전대 문주와도 친분이 있었기에 장로로 올 수 있었다.
남궁호가 인사를 핑계로 백석태에게서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고, 백석태는 성실하게 한참이나 어린 후배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았다.
나는 강진에게 고개를 저어 그에게 의문점이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강진은 여전히 백석태 장로에게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고 있었다.
‘쯧! 범인을 한시라도 빨리 잡고 싶은 마음 때문인가?’
복수의 칼날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예리한 칼날은 대상이 아닌 자도 서슴지 않고 벨 우려가 있었다.
“아버지, 손님 오셨습니까?”
그때 중년의 사내가 방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백석태를 따라 전형문을 찾은 백세훈이었다. 그는 화산파를 상징하는 매화가 새겨진 무복을 입고 있었다.
「오기린이 여길 무슨 일이지? 백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야겠어.」
그의 작은 눈이 짧은 순간 오기린을 살피곤 빛을 뿜었다.
아버지인 백석태조차 눈치채지 못한 변화였다.
‘저놈이구나.’
나는 씩 웃으며 강진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 슬쩍 손가락으로 백세훈을 가리켰다.
강진의 벌게진 눈이 백세훈으로 돌아갔다.
“지난해 화산파에서 파견 온 백 무사입니다.”
눈빛과 다르게 목소리는 태연히 짝이 없었다.
강진의 소개에 자연스럽게 백세훈과 인사를 나눴다.
남궁호의 눈짓에 팽기웅이 백세훈에게 달라붙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그는 후배된 입장에서 자신을 낮춤과 동시에 조언을 구했다.
“저희 집안이 도가 전문이기는 하지만 많은 이들이 검을 들지 않았습니까? 특히 화산파의 검은 매섭기 그지없더라고요. 사룡삼봉 중에도 매화검이 있는데······.”
“하하! 아무리 그래도 내 사질을 팔 수 있겠는가.”
남궁호를 돌아보니 그 역시 백석태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럼 장로님께선 전형문에서는 무공 지도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음, 그렇지. 화산파의 무공을 가르칠 순 없지만, 그래도 나도 강호에서 구른 세월이 있으니 제자들에게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닐 것이야.”
모용경준은 그들과 한 걸음 떨어져서 조용히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오기린 안에서도 나름 역할이 나뉘어 있구나.’
그렇다면 나는 제갈민이 했을 일을 하면 될 것이다.
팽기웅과 대화를 이어가는 백세훈의 기억을 들췄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백료강과 연락을 하는지, 어떻게 그를 만나고 14인객의 일원으로 활동했는지 면밀하게 살폈다.
***
“오기린만 왔을까? 아니야. 그 밖에도 무림맹에서 사람을 보냈겠지.”
백세훈이 방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호선을 그리던 그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어서 백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야겠어.”
그가 주위를 슬쩍 둘러보곤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전형문 밖으로 나온 그가 찾은 곳은 중앙전장 목천지부였다.
“백 무사님, 또 오셨네요. 이번에도 송금이신가요?”
젊은 여성 창구 직원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음, 언제나처럼 속달로 부탁하네.”
“참, 장거리 연애도 힘드시겠어요. 그래도 저도 이렇게 돈 부쳐주는 연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창구 직원이 몽롱한 표정을 짓는 것과 다르게 손은 빠르게 송금 전표를 작성하고 처리했다.
백세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생길 걸세.”
“그래요? 그러면 사람 좀 소개해주세요.”
창구 직원이 달려들었지만 백세훈은 침착하게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꼬집었다.
암어로 이야기하자는 신호였다.
이를 본 창구 직원도 엄지로 입꼬리를 살짝 닦아냈다.
이어 백세훈이 손가락을 탁자를 부드럽게 치며 입을 열었다.
“전형문에 제가 아는 지인이 있는데 얼마 전에 강아지 다섯 마리를 집에 들였더군요. 개는 좋아하십니까?”
그가 탁자 위에 엽(獵) 자를 그렸다.
“어머, 귀엽겠네요. 그래서요?”
창구 직원이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다른 개는 없나요?”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녀석인데 괜찮겠습니까?”
백세훈의 말에 창구 직원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이를 끝으로 백세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세훈이 떠나자 창구 직원도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 나 잠깐 꽃 따고 올게.”
“네, 언니.”
그녀가 자기 자리에 ‘자리 비움’ 팻말을 올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뒷문으로 나온 그녀가 간 곳은 화장실이 아니라 중원 전서 협회였다.
‘오기린이 왔다고?’
화산파의 동료들에게는 이미 송금을 통해 전언을 보냈다.
그녀가 찾는 이는 백료강으로 그는 전형문에 남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시간이 없어. 길어지면 동료가 똥 누러 간 줄 알 테니까.”
쌀쌀맞은 태도로 직원을 물리고 그녀는 대뜸 지부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백발이 성성한 중년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자가 백 사부님을 뵙습니다.”
그녀가 백료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전서협회 목천 지부를 살폈다.
이 층 규모의 작은 건물은 안에 들지도 않았는데도 새똥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이었다.
“당 공자, 여기가 흉수를 찾을 단서가 있는 곳인가?”
함께 따라온 남궁호가 물었다.
그 밖에도 다른 기린들과 강진도 함께였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석태 장로가 백료강을 따르기에는 나이도 시기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마침 백세훈이라는 놈이 보이데요?”
나는 마음을 읽어 범인을 찾은 뒤에 그럴싸한 추리를 만들었다.
“그놈이 우리를 보자마자 찾은 곳이 전장이에요. 거기서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아마 암어로 이야기를 나눈 거겠죠?”
나는 백세훈에서 시작된 꼬리가 중앙전장 목천지부, 중원 전서협회 목천지부까지 이어지는 길을 설명했다.
“그래, 이들이 14인객의 주구구나!”
남궁호는 뒤늦게 이해한 척 맞장구를 쳤다.
머릿속을 살펴보니 그 과정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맞아요. 그리고 남궁 형, 이전에 남궁세가가 14인객에 공격을 받았을 때 중앙전장이나 중원 전서협회와 관련된 이가 없었나요?”
남궁호가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고민했다.
세가의 일을 섣불리 밝혀도 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쪽은 전서협회였구나.’
나는 남궁호의 기억을 통해 결과를 확인했다.
“당문에서는 중앙전장 사천지부장이 연루됐어요. 그 돼지 새끼가 작은형을 충동질해서 분란을 만들었죠.”
“······그랬군.”
남궁호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강진에게 돌렸다.
“소문주께서는 문주님께 알려 백세훈 처리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오기린 여러분께서는?”
강진이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물었다.
나는 전서협회 목천지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형문은 배신자를, 저희는 대가리를 잡아야죠.”
“저희 전형문도······.”
강진이 복수심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이제부터는 저희 일입니다.”
나는 단칼에 그의 말을 잘랐다. 공이 문제가 아니라 안전이 문제였다.
안에 백료강이 있다면 무공실력이 처지는 강진을 보호하면서 싸울 수 없었다.
강진이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 남궁호가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는 큰 피를 보며 객주 한 놈을 잡았고, 당문에서는 가주의 직계가 납치됐지.”
그가 당연해를 언급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우리가, 당문이 다 손보고 싶어요. 그럴 수도 있었지만······ 저희가 많이 양보한 거예요.”
14인객을 제대로 캐낸 건 전부 내 공이었다. 내가 정보를 감춘다면 오대세가나 전형문이나 이전처럼 헛물만 켜다가 끝날 공산이 컸다.
강진이 뚫어지게 나를 노려보더니 끝내 마음을 다잡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배신자부터 먼저 처리하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본진을 칠 때는 무림맹에서도 요청문을 보낼 거예요.”
강진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남궁호가 그런 강진의 뒤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 안에 14인객의 끄나풀이 있단 말이냐?”
차마 강진 앞에서는 말하지 못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여전히 그는 반신반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세훈에 중앙전장의 창구 직원, 그리고 전서협회 안에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있겠죠. 적어도 일개 직원이 아닌 상급자가.”
나는 창구 직원이 보고를 한 모습을 보고 그리 판단했다.
“당문에서는 중앙전장 사천지부장이 적극적으로 움직였어요.”
“······남궁세가에서는 전서협회 안휘 지부장이었지.”
“그러면 섬서성에는 화산파 인근에 지부장 중 하나가 그들의 끄나풀이 아닐까요?”
남궁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니더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14인객 같은 비밀 결사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정보와 돈······ 중앙전장과 중원 전서협회를 쥐고 있는 곳이 14인객이란 말인가?”
“모르죠. 그건 무림맹이나 오대세가 어르신들이 직접 캐낼 문제고요.”
「아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맹과 세가에 보고를 해야겠군.」
남궁호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나는 전서협회에서 나오는 창구 직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궁 형은 저 자의 뒤를 쫓아주세요.”
“일개 끄나풀이 아닐까?”
“그래도 단서는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백세훈을 전형문이 잡으니 저자는 우리 중 누군가는 잡아야죠.”
내 말에 남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팽기웅과 모용경준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전서협회를 찾아보죠.”
***
“소란스럽군.”
백발이 성성한 중년 사내가 지부장 탁자에 발을 올린 채 말했다.
그는 지루한 듯 문을 박차고 들어선 당연우와 팽기웅, 모용경준을 바라봤다.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을 앞두고도 여유작작한 모습이었다.
“음, 오대세가의 애송이들인가?”
그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검을 뽑는 순간 분위기가 일변했다.
“당가 놈의 뒤처리를 해야 하는 건 아니꼽지만······ 뭐 후학의 검을 견식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 않은 거고.”
느린 말투에서 끈적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당연우가 품에서 주섬주섬 어린이 손바닥만 한 쇠공을 꺼냈다.
“음? 당문의 암기란 말이지? 그간 기회가 없었다만 한 번쯤 상대해보고 싶었어.”
백료강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나 당연우는 곧장 쇠공을 던지지 않고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혈루검법을 창안했다고 들었는데요?”
“하하! 내 명성이 어린 후배들의 귀에까지 들어간 건가? 양지 활동을 지양한 지 십 년이 넘었거늘······.”
백료강은 풋내기들을 앞둬서인지 기분 좋게 당연우의 물음에 답했다.
“결국 검은 사람을 어떻게 잘 베냐. 그런 기술이거든. 그래서 화산파의 검을 갈고 닦아 좀 더 잘 벨 수 있는 그런 검을 만들었지. 단지 그뿐이야.”
겸손한 척 이야기하지만 백료강의 말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당연우가 고개를 주억거리곤 손에 든 쇠공을 가볍게 던졌다.
“음?”
그 어떤 투법을 사용한 것도, 암기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기에 백료강은 방심했다.
단숨에 검을 들어 검막을 만들었지만 쇠공은 아무런 반응 없이 천천히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발치 앞에 떨어졌다.
“불발인가? 당문도 예전 같지 않아. 하하······!”
당연우가 팽기웅과 모용경준을 잡고 잽싸게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순간 쇠공이 폭발하며 섬광을 뿜어냈다.
그래도 고수답게 백료강이 순식간에 검을 들어 검막을 만들었다.
“흥! 일개 암기 따위로 내 검을 뚫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검객도 검으로 빛과 소리를 막을 방법 따윈 없었다.
막대한 빛과 굉음이 지부장 집무실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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