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동마
‘제안을 한 당 공자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이를 받아들인 맹주님도 정상은 아니야.’
제갈 군사는 손에 든 술잔을 바라봤다.
사파연합은 과연 이 술에 독을 탔을까? 아니면 타지 않았을까?
그의 머릿속에서 수 없이 많은 의심과 고민이 스쳐지나갔다.
철익이 살아있더라면 당연하다는 듯 독을, 그것도 맹독을 넣었을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 모인 무림맹의 실세를 죽일 기회를 놓치지 않을 자였다.
기분파라는 신마라면 그 기분에 따라 움직일 터이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설기와 백절인이라면······ 자기 체면을 생각하겠지.’
제갈 군사가 나서기 좋아하는 하설기를 바라보곤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 자리에서 술을 마신 자는 무공에 자신 있는 무림맹주 권성, 독에 자신이 있는 당가주 당중월 뿐이었다.
제갈 군사가 세번째였다.
당연우와 인연이 있다는 청성과 아미 등의 문파나 사돈 관계를 맺은 남궁세가와 팽가도 섣불리 술잔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들이 그렇게 멀뚱히 있으면 초대한 주인이 무안하지 않겠나? 어서 들게나.”
결국 권성의 재촉이 더해지자 대표단의 다른 인사들도 저마다 술잔이나 음식을 들었다.
구질이 노릇하게 익은 오리고기에 코를 킁킁 거리더니 자기 팔뚝만한 다리를 뜯어 입에 물었다.
“이거 사파 놈들이 돈 좀 번다더니 요리도 제법이구나.”
오리 뒷다리를 쩝쩝 거리면서도 그의 눈은 당연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갈 군사는 쓰게 웃었다.
“구 방주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만, 이 자리에는 당 공자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말을 조심해주시길 바랍니다.”
“······군사도 저 괴물의 편이었지. 내 군사 정도의 안목이라면 맹주처럼 저 아이에게서 다른 걸 보았으리라 생각했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갈 군사가 영문을 몰라 물었다.
구질이 주위를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맹주님께서 저 아이와의 비무에서 살수를 섞어 쓰시더군.”
“그거야······.”
무림맹이 사파연합을 찾아온 이유가 강제로 당연우를 연합에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명분이 그러하다 보니 당연우가 련주에 취임되고 초청장을 직접 보내면서 자연히 흐지부지 되긴 했다.
‘맹주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시고, 또 다른 문파들을 설득했거늘.’
덕분에 당문을 비롯한 당연우와 연관된 문파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헌데 그런 권성이 당연우를 죽이려고 하다니, 제갈 군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구 방주께서 잘 못 보실 리는 없으시겠지요.”
구질은 행색이나 태도는 거지였지만, 십만 방도을 이끄는 개방의 방주였다. 무공은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현역을 뒹구는 사람이라 안목은 뛰어났다.
제갈 군사가 신음을 흘리며 권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당연우를 지켜봤다.
그러고 보니 당연우가 연합에 간 뒤 권성의 행동은 이전과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원치 않으셨던 분이셨는데.’
제갈세가가 불 탔을 때도 군사를 시험했던 인물이었다.
정사가 힘의 균형을 이뤘다지만, 팽배하게 부푼 양측의 힘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다.
이를 막은 게 연합에서는 신마였고, 무림맹에서는 권성이었다.
물밑에서야 피가 튀는 첩보전이 이뤄졌으나, 표면적으로 수십 년 동안 강호의 평화가 이어진 것도 그런 권성과 신마의 기싸움 때문이었다.
‘무림맹과 사파연합의 힘은 크게 차이가 없다. 아니, 세력의 힘을 보면 고수가 많은 무림맹 쪽이 근소하게 우위를 차지할 때가 많았지. 그런데도 맹주님은 전쟁 반대를 고수해왔어.’
단순히 피해가 크다고 검을 뽑지 않아서야 정파의 협객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불의에도 권성은 사건을 키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당연우가 신마에게 끌려가면서 전쟁을 입에 올렸다.
‘맹과 연합의 문제가 아니라면, 신마인가?’
승패를 알 수 없는 고수가 상대라면 누구라도 불편할만 했다.
그러나 권성은 강호 출도 후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패배를 모르던 절대고수였다.
‘신마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안 것이야. 하지만 어떻게?’
제갈 군사의 시선이 신임 련주가 된 당연우로 향했다.
끝모를 마기를 뿜어내는 그의 모습은 이전에 보였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또 무림맹의 인사들과 편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이전 재기넘치는 후기지수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당 공자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는 신마가 넘긴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왜 당 공자를 연합의 주인으로,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것이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권성의 변모와 신마의 목적, 그리고 당연우까지.
그러던 제갈 군사의 시선이 당연우와 시선과 마주했다.
당연우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천장과 기둥에 걸린 거미줄, 그리고 잠긴 문으로 향하면서 이내 다시 제갈 군사로 향했다.
제갈 군사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구질에게 작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구 방주, 어서 이 자리를 떠야겠소.”
“그게 무슨 말인가 군사?”
구질이 신나서 오리 다리를 뜯으려던 손을 멈추며 되물었다.
어찌됐든 초청된 자리였다. 안으로 들지는 못했지만, 문 밖에는 이만여 명의 무림맹 무사들이 눈에 핏줄을 세운 채 서 있었다.
제갈 군사가 입을 꾹 다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이 뻐끔 거렸지만 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전음이었다.
[우리는 포위됐소.]
제갈 군사는 당연우가 보인 시선으로 천라지망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
나는 제갈 군사에게 힌트를 주고는 다시 권성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실력이 급격하게 늘었어. 이제는 후기지수라고는 부를 수 없는, 사파연합의 거두다운 실력을 가지게 됐어.”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 권성의 눈에는 살기가 머물고 있었다.
그는 신마가 몸을 바꿨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오해를 풀어야할 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지 고민했다.
“전임자에게 많은 걸 받았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연합의 주인으로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전쟁을 대비한, 말 그대로 임시 련주일 뿐이니까요.”
사파연합은 사리사욕을 위해 거리낌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구성원의 특성상 거대한 시한폭탄과 같았다.
지금까지 이를 힘으로 억눌렀던 것이 신마였고, 또 무림맹의 존재였다.
“책임은 크고 이득은 적은 자리라서요.”
“만인지상의 자리가 아니던가?”
“맹주님의 자리는 만인의 위에 선 자리입니까?”
“······.”
내 말에 권성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같은 연합체라고는 하지만 무림맹과 사파연합은 그 성격이 크게 달랐다.
무림맹은 각 문파의 대표들의 의결에 따라 움직인다면, 연합은 단순히 신마와 철익이 힘과 협박으로 모은 단체였다.
“······하지만 자네만한 힘이 있다면 신마와 같은 방법으로 연합을 이끌 수 있지 않은가?”
권성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신마가 아닙니다. 폭력으로 연합을 이끌어봐야 충성심을 얻기 어려울 뿐더러, 더 큰 폭력 앞에 무너지기 마련이지요.”
“신마가 아니다라······.”
권성이 미묘한 웃음을 보였다.
‘믿을 생각이 없군.’
그렇다면 권성을 설득하는 방법은 포기해야 했다.
‘가끔은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단 말이지.’
그랬다면 권성이 믿어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나를 처분하겠지.’
권성은 수십 년 동안 강호의 평화를 이룩하는데 지대한 공을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신마와 같은 이유로 자신의 수련을 위해, 불필요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정의로운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신마를 잡기 위해 나를 미끼로 내놓았고, 또 기회가 되자마자 무림맹의 병력을 이끌고 연합을 찾았다.
‘전형적인 위선자야.’
나는 쓰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맹주님과 저는 시간을 내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좋네! 조만간 보지.”
권성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보는 눈이 많아 제 실력을 내질 못했다. 나를 되찾기 위해 무림맹의 병력을 이끌고 왔으니 마음껏 살수를 펼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이 없다면 전력으로 나를 죽일 수 있었다.
「스스로 사지로 들어가다니, 신마답다고 해야 할까? 답지 않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방해자를 제거할 기회를 놓칠 권성이 아니었다. 그가 흔쾌히 수락했다.
“진솔한 이야기인가? 용기가 가상한 걸까? 아니면 무언가 새로운 단서를 얻은 것인가?”
시야가 좁아진 권성을 보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야 뭐, 자신이 있는 거죠.”
‘당신을 잡을.’
권성과 자리를 파하고 아버지 당중월과 사돈인 남궁세가주와의 인사를 마쳤다.
그들은 사지에 놓인 나에 대한 걱정과 마공을 연성한 내 모습에 놀람으로 가득했다.
질문이 쏟아질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당중월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건강해라. 그리고 조만간 집에서 보자꾸나. 며느리들이 목놓아 기다리고 있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몇 마디에 그의 부성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부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독에 중독돼 사경을 헤맬 때도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았던 비정한 아버지였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도 많이 바뀌었어.’
그런 그가 아버지다운 생각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연해와 신마의 사건 이후로 그의 심경이 크게 변한 것이다.
“너무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정 안되겠다 싶으면 집으로 도망칠 거니까요.”
“그래, 그래라. 사파연합이든 신마가 다시 살아 돌아오든 나와 당문은 너를 지켜줄 것이다.”
든든한 아버지의 말에 나는 눈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 삶에서도 느끼지 못한 느낌이었다.
곧 제갈 군사가 은연 중 전음을 날리며 대표단이 취임식장을 떠났다.
개방주 구질이 나에 대한 중상모략을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이었던지라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중월이나 남궁혁, 팽상성 등 나와 관계 있는 이들이 심기가 불편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제 시작이네요.”
하설기가 내게 다가왔다.
“그들이 칼을 뽑아들지 않겠습니까?”
본부 밖에는 이만에 달하는 무림맹 병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설기가 긴장하며 밖으로 나가는 무림맹 대표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 장로님, 준비는요?”
“모두 마쳤소. 그들이 병력을 끌고 돌아온다면 수성을, 지금 바로 발길을 돌린다면 포위섬멸이 가능하오.”
백절인이 찜찜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내 말에 따라 진을 구축하고 기관을 설치해 그 효과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갈 군사가 조금의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대청 안으로 들어온 것도 의문이었고, 갑자기 눈치를 채도 빠져나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썼길래?”
하설기가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부가 마련한 화탄을 그들이 향하는 곳에 설치했소. 일단 진을 작동하면 산세가 무너지면서 무림맹 병력이 갈라질 것이고, 준비해 둔 연합의 용사들이 독화살을 쏠 것이오.”
백절인이 차분히 병력 구성과 절진을 설명했다.
“또 화탄이 터지면 본부를 구성하고 있는 건물의 구조가 바뀌면서, 진이 발동하는데······.”
“무슨 진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소. 그래서 효과는?”
“시간이 촉박한 만큼 피를 부르는 진법은 아니오. 단지······.”
백절인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하설기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단지?”
“건물이 무너지면서 피어오른 흙먼지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피아 구분이 어렵다는 정도요.”
“적을 식별하기 어려운 가운데 원거리 공격을 가한다는 건가?”
“연합이 보유한 독도 같이 살포할 것이니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것이오.”
백절인은 태생이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간계로 적의 수를 줄인다는 것에 썩 편치 않은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실용을 좀더 중시하는 하설기는 화색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 녀석들을 섬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설기의 말에 백절인이 고개를 저었다.
“독과 암기로 그들이 큰 피해를 입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는 우리가 열세. 그들이 재정비를 하면 연합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볼 것이오.”
그렇게 말하면서 백절인은 나를 노려봤다.
“신임 련주님께서 자신한대로 무림맹을 상대할 정도의 방비는 했소. 그러나 이런 준비를 할 정도라면 확실히 무림맹 대표단을 방법도 있지 않았소?”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야 몇 개 더 있었죠.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무림맹의 대표단만 섬멸한다면 앞으로 우리 연합이 더욱 세를 과시······.”
“맞아요. 세를 더 과시하고 더 잘 나갈 수 있겠죠. 하지만 그 뒤에는요? 황실이, 관이 가만히 있을까요? 지금도 호시탐탐 연합을 노리고 있는데요? 무림맹이 있으니까. 그들이 연합을 억제하니까 관이 불필요한 피해를 감수하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 거잖아요.”
나는 백절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하지만 무림맹이라는 방파제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에요.”
관이 직접 나선다면 사파연합은 설 자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도 관의 무력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후일 현대 조직폭력배가 어떻게 박살이 났는지를 생각하면 연합은 생존을 위해 방식을 바꿔야 했다.
정권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힘을 가지거나 아니면, 연합의 사업 기반을 양지로 끌어올려야 했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양쪽의 방법을 모두 강구하는 것이 좋겠지.’
그리고 그들이 양지로 올라서면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민간인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연합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임시로, 짧은 기간 련주 자리를 맡고 있기는 하지만 나름 강호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답니다. 두 장로님께서는 반파된 연합을 가지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더욱 발전하고 커진 연합의 주인이 되시렵니까?”
하설기와 백절인이 서로를 마주봤다.
굳이 듣지 않아도 두 사람의 답은 나와 있었다. 둘 모두 반쪽짜리 연합을 원할 리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를 잘 활용해 연합을 키우는 것이 당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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