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림자 전쟁.
50여 평의 회의살에는 십여 명의 염라상회의 회원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정교하게 매를 조각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힘은 돈이지.”
하얀 매의 가면을 쓴 노인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속살이 비치는 붉은 옷을 입은 여성이 농으로 답했다.
“황금검이야 말로 천하제일이죠.”
그녀가 탱글탱글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이는 염라상회 회원들이 모두 공통으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황금으로는 나라님 자리도 살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이념이자, 자존심이었다.
“그래, 하지만 그 검은 휘두를 때마다 약해지지. 따라서 신중히 휘둘러야지.”
회주는 회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들은 강호경제인연합에서 모인 이들로 말 한마디에 만 냥은 우습게 움직이는 상인들이었다.
“무림맹의 중앙전장 감사는 월권행위라 이에 대한 논제는 연합에서도 이야기했었지.”
중앙전장에 14인객이 숨어들었다는 건 그들에게 중요치 않았다.
상회도 그렇지만 전장에는 많은 사람이 얽혀 있었다.
중앙전장쯤 되면 14인객뿐만 아니라 무림맹이나 사파연합의 세작도 숨어 있을 것이다.
“무림맹은 14인객을 핑계로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 것뿐이에요. 더불어 사파연합의 출납기록도 확인해보고 싶었던 거고요.”
중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중앙전장은 무림맹은 물론이거니와 사파연합도 사용하는 거대 전장이었다.
돈의 흐름을 알면 사파연합의 내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무림맹에서는 간악하게도 나이 어린 허안공자를 전면에 내세워 일을 처리하더군요.”
“백리안, 그런 허명까지 쥐여주면서 말이지.”
당연우가 최근 몇 년 동안 갑작스럽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끊임없이 의료기술과 상회를 놀라게 할 신제품을 개발하고, 암약한 14인객을 들춰내는 등의 일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독왕이 벌인 판에 무림맹이 발을 담갔다······ 정도가 아닐까요?”
사정을 모르는 외부에서야 백리안의 명성이 온전히 당연우의 천재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문의 내부 정보를 쥔 사람이라면 당연우가 허안공자라 불리며 천시받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버림패인 삼공자를 활용했다가 대박이 난 거겠지.’
당연우가 보인 신기술은 당문이 그간 공개하지 않은 기술들을 선보인 것일 뿐이고, 14인객 사건은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것이 염라상회의 평가였다.
그나마 무공이 제갈민 못지않다는 것이 꾸며지지 않은 당연우의 본 실력일 것이다.
“연합에서는 기부금 축소로 압박을 넣은 것 같습니다. 저희는······.”
“지원하는 중소문파들의 입을 모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 무림맹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여론이니까.”
회주의 말에 회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창문에서 전서구가 쏟아져 내렸다.
회주는 물론 각 회원이 쥐고 있는 정보통이 급보를 보낸 것이다.
“이건······.”
회의 중에 급보를 받고 자리를 비운 회원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뭔가가 온 일은 드물었다.
회주가 서찰을 훑고는 이를 까득 물었다.
“수라마교가 우릴 향해 이를 드러냈다. 멍청한 놈들!”
회원들 역시 같은 내용의 서찰을 보고는 눈에 불을 켰다.
***
“강시를 만들기 위한 필수 재료라 하면 역시 시체겠죠. 성의문에서 사망한 환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확인해 주세요.”
당문 감사대는 성의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객잔을 통째로 빌렸다.
나는 먼저 인원을 나눠 일부는 성의문에서 압류한 서류 분석을 맡겼고, 일부는 성의문의 문도들을 취조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방부제. 썩은 시체로 강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방부제 또한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 그걸 확인한 뒤에 필요 이상으로 사들인 약재를 살피면 어느 정도 강시 원료를 산출할 수 있을 거예요.”
그들이 이중장부라도 만들지 않는 이상 이 정도만으로 강시 제조의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기간에 장부를 조작할 시간은 없었으니까.’
호남성을 호령하는 성의문이 외부 감사를 받을 거라고는 성의문도 수라마교도 생각지 못했다.
급하게 마인들을 빼고 그들의 흔적을 지웠다지만, 수십 년에 걸친 기록들을 지워낼 수는 없었다.
“특히 그 부분은 거래 상대에게도 수량이 맞는지 확인 부탁드려요. 시간이나 인력이 부족하면 무림맹에 요청을 부탁해도 되고요.”
이어 탁자 위에 맹주가 준 어사패를 올려두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성의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해 주세요.”
감사대원들의 시선이 탁자 위로 모였다.
「성의문이 당문의 걸림돌이랬나? 당 공자가 성의문을 제대로 잡을 생각이군.」
「성의문의 누명을 벗기고자 이리 노력하다니······.」
「백리안은 성의문 구린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감사대에 파견된 사룡삼봉과 오기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갔다.
나는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했다. 그들이 어떤 오해를 하고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자, 그러면 성의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일을 시작하죠.”
나명한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터라 문제점을 끄집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흘도 지나지 않아 먼저 강시 제조를 위한 약재가 드러났다.
“연우의 말대로 거래 장부를 찾았더니 필요 이상으로······ 아니, 좀 과할 정도로 방부제용 약재 거래가 이뤄졌더군.”
감사 총괄이라는 자리를 맡은 조명식이 말했다.
“양귀비에 학령초······ 의문에서 흔히 쓰이지 않는 독초가 상당수 거래된 것도 확인했어. 성의문이 강시를 제조했건 하지 않았건 회피하기 어려운 일이지.”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성의문이 숨겨둔 이중장부도 찾았다. 이제 성의문 뒤에 마교가 있는지는 중요치 않게 됐어.”
성의문 내부 조사를 맡은 남궁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사대의 결과를 정리했다.
강시 제조 정황은 포착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성의문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수라마교의 존재까지 밝힐 필요는 없었다.
현 지휘부에 대한 신뢰만 무너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리해 공표하죠. 무림맹과 관의 입을 빌리면 될까요?”
나는 조명식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번 감사대의 대표를 맡은 자는 조명식이었다.
당문이나 무림맹이 직접 나서는 것보다 전문성이나 공신력 등을 고려하면 사천제일의원이 나서는 것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내 말에 조명식이 보고서를 살폈다.
「강시 제조란 말이지······.」
의원으로서 죽은 자를 고이 보내는 것이 도리다.
죽은 자를 강시로 만드는 건 망자에 대한 예우는커녕 최악의 방식으로 욕보이는 것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조명식이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일을 세상에 널리 공표해야겠소.”
그런 조명식의 모습에 평소 제자 자랑에 촐랑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호남성 곳곳에 방이 붙었다.
방에는 그동안 성의문이 의료 봉사로 덮었던 악행들이 낱낱이 공개됐다.
아래에 감사대에 참여한 인사들의 이름과 함께 관과 무림맹주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성의문 앞 사람들이 방을 보고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퉷! 의심이 가기는 했어. 무상으로 봉사는 무슨······ 뒤가 구린 놈들.”
“그러게 뒤에서는 인체실험을 하고 그랬다며? 성의문? 마의문이겠지.”
“개 같은 새끼들.”
그들은 침을 뱉으며 성의문을 욕했다.
죽립을 깊게 눌러쓴 사내가 그런 사람들을 살폈다.
‘백 년 성세가 하루아침에 무너졌구나.’
나명한이 조용히 성의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의문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하루가 멀다고 들려왔는데 이젠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다.
호남의료학회에서는 성의문을 제명하겠다고 성명을 냈고, 중원 약재상 연합에서도 거래를 중단했다.
인산인해를 이뤘던 성의문도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조 의원은, 당문에서는 도대체 왜?!’
나명한은 이 같은 결과를 감사 결과를 낸 당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술 제휴 계약을 체결한 뒤 당문은 적지 않은 기금을 지원했으며, 의술도 아낌없이 제공했다.
짧은 시간 동안 당문이 투자한 금액은 성의문을 하나 더 세울 수 있는 규모였다.
‘아니······ 성의문을 죽이기 위한 투자였던가?’
성의문이 당문에 위협이 된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마외도가 아닌 명문 정파였다.
당문이 아무리 손속이 잔혹하다고 하더라도 도의를 어기는 일은 극도로 꺼렸다.
이는 그들이 쓰는 주무공이 독과 암기였던 만큼 대외적인 시선에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들이 뭘 원했든 이제 성의문은 끝이야······.”
나명한이 울적한 표정으로 성의문에 들어섰다.
그렇게 들어선 문주 집무실에는 당연우와 조명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 의원님이 어찌?”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방문에 나명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우가 입을 열었다.
“성의문 인수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네?”
나명한의 시선이 당연우로 향했다.
당연우가 미리 준비한 듯한 장의 서류를 꺼내 건넸다.
나명한이 멍청히 받아 보니 성의문 인수 계약서였다.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당문은 성의문을 잡아먹기 위해 왔다!’
그런 나명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연우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현 성의문 지휘부를 향한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수십 년 동안 호남 의료계를 지탱한 성의문을 그대로 둘 수도 없을 터.”
당연우가 손가락으로 계약서의 공란을 가리켰다.
“원하는 바를 적으시지요. 대가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이어 그가 나명한의 손에 붓을 쥐여줬다.
굳은살이 올올히 박인 손은 단단하기가 강철과도 같았다.
‘고수다!’
나명한은 그 손에서 수라마교의 마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을 느꼈다.
나명한이 당연우와 눈을 마주했다.
무저갱이란 것이 있다면 이런 걸까?
그는 당연우의 눈 속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와 어둠을 볼 수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나명한이 고양이를 만난 쥐마냥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당연우가 꽉 쥐지도 않았는데 괜스레 그가 잡았던 손을 문질렀다.
마치 수갑을 찬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문주님.”
당연우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계약서를 내밀었다.
“문주님······ 성의문을 이대로 저들에게 홀라당 넘기는 겁니까?”
나명한이 짐을 정리할 때 수하가 다가와 물었다.
수라마교에서는 일개 마인이었지만 성의문에서는 장로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나명한이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떠날 때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더 큰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감사대에서는 정확하게 우리의 뒤를 잡지 못했어.”
나명한은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감사대가 지적한 부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재의 흐름이었다. 명확하게 수라마교와 연결 고리를 찾지 못했다.
명확한 증거를 발견했다면 당연우는 계약서가 아닌 칼을 들이밀었을 것이다.
‘게다가 막을 수도 없겠지.’
나명한은 성의문 출신이었지만 한편으로 수라마교의 교인으로 남 부럽지 않은 무공 실력을 갖췄다.
그러나 자신의 반도 살지 않은 것 같은 당연우에게 넘지 못할 벽을 느꼈다.
“실례하겠습니다.”
밖에서 당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명한이 대답하기 전에 그가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수하가 무어라 이야기하기 전에 나명한이 나서 그를 제지했다.
“더 볼 일이 남아 있습니까?”
당연우는 나명한의 수하를 쓱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겠지. 마교 사람이니까.”
나명한 보다 수하가 먼저 반응했다.
찰나에 혁대에서 연검을 뽑아 든 그는 단숨에 당연우와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
검이 닿지 않았다.
기를 머금은 검이 쭉 뻗었지만, 정확히 당연우 목 앞에서 멈춰 섰다.
수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흑색으로 물들었다.
“독!”
“극독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연우가 나명한의 수하를 편히 눕히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야기할 게 더 있죠?”
나명한이 머뭇거릴 때 당연우는 태연히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앞에 앉았다.
“일단······ 수라마교의 주인이 될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리고 그의 입에서 웃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명한이 쓰러진 수하와 당연우를 번갈아 돌아봤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 공자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이오?”
이미 정체를 들킨 상황에서 나명한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실력은 차치하더라도 당연우를 죽여 입을 막는 건 최악이었다.
당문은 복수를 잊지 않는다.
“무림의 평화······ 그리고 제 삶의 평온이지요.”
- 작가의말
늦어 죄송합니다.
본래 예정한 ‘그림자 전쟁’ 챕터는 강호에 암약하는 세력들(염라서당-청정경서당-수라마교-정의회) 전체를 상대하는 당연우의 이야기였습니다.그러나 하나하나 상대하기에는 글이 늘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수정 작업에 들어갔습니다.해당 내용이 중후반 터닝포인트가 되는 부분과 연관된 내용이라 시놉 작업에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습니다.짧게나마 공지를 남겼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죄송합니다.단언컨대 완결까지 연중은 없습니다.※ 위 내용은 공지에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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