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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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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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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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2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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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DUMMY

빈 제마는 심드렁한 얼굴로 반응했다. 분명 흥미로운 소재인데도 말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상대는 이데아의 수상이다. 정치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본인이 철저하게 밟힌 늙은 여우의 약점을 그리 쉽게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나라의 권력 다툼 상황이 인지하고 있는 바와 다를 수 있다지만 반대로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


“설마 두려운 겐가?”


“지금 날 도발하는 건가?”


“먼저 물은 건 이쪽인데.”


“하여튼 북반구 놈들은 하나같이 오만하기 짝이 없어.”


“기름 나는 땅에 태어나 부를 누리는 주제 콧대 좀 내리시지그래.”


분위기상 비아냥거리며 여유를 부리는 칼비티움이지만 빈 제마와 척을 질 생각은 없다. 자국의 수상은 어떻게 할 수 있어도 타국의 왕자는 손대기 껄끄러운 존재니 말이다. 무엇보다 저 남자는 자신의 계획에 꼭 필요하다. 이데아의 장기적인 발전도 그렇고, 앞으로 장애물이 될 존재들을 견제해 줘야 한다.


혹시 몰라서 수를 써 두긴 했지만 만약의 경우란 게 있어 경계 중인데 예상외로 상대의 반응은 잠잠하다.


“글쎄, 나에게 내려진 축복은 자원보다 자리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만일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호사를 누리지 못했겠지. 술과 담배처럼 편할 대로 이용하고 있는 율법에 억눌려 살았을 테니 말일세.”


“솔직하군. 언급하기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니 그쪽도 솔직하게 말해 보시지. 늙은 여우 새끼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빈 제마의 제안에 칼비티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나온 대답은 뚱딴지 같기만 하다.


“이데아와 알코즈의 가장 큰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네놈들이 그렇게 숭고하다고 자랑하는 민주주의겠지. 이쪽이 보기엔 머저리 같은 논리에 불과하지만.”


“머저리 같다니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어이가 없군. 그걸 네놈이 모를 리가 있나? 입부터 가리고 말해.”


빈 제마의 지적처럼 칼비티움의 입가는 광대까지 올라가 있다. 미지근해진 날생선에서 올라온 냄새보다 비릿한 웃음이다. 하지만 빈 제마는 딱히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치란 건 어떤 논리를 펼치던 마찬가지. 위정자는 권력을 원하기 마련이고, 결국 승자와 패자는 나누어지는 법. 그 어떤 사회와 시대에서도 이건 변치 않아. 인간은 이타적인 생물이 아니니 말이지.”


“역시 댁은 말이 통해.”


“귀가 닫힌 놈들은 아메리고에 많지 않나? 그쪽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이 많던데. 그놈의 도덕성이 모든 진리라도 되는 것 마냥.”


“아메리고도 아메리고지만 이데아도 만만치 않아. 댁이 비웃는 민주주의, 정확하게는 선거가 정의 다툼이 아니라 표 다툼이란 걸 망각하는 녀석들이 많거든.”


“망각한다고? 너무 좋게 말하는군.”


“역시 촉이 좋아, 왕세자 나리. 사실 개돼지들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지. 이익은 누리고 싶지만 책임은 회피하고 싶으니까, 자신이 올바른 시민인 양 행세하고 싶으니까.”


“그러니 민주주의가 머저리 같다는 게야. 어차피 정치하는 놈들은 모두 똑같잖은가. 누군가의 위에 서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는 것을.”


“정확해. 그래서 난 아메리고에 불화의 씨앗을 뿌려 놨어.”


“그쪽 출신의 이민자들이 만든 범죄 조직을 이용해 루치아노 바렐라가 다음 정권을 잡게 만드는 계획 말인가?”


“이건······ 정보가 너무 빠른데.”


“이쪽 첩보 장관이 사람은 글러 먹어도 능력 하난 좋아. 이데아가 진행 중인 작전은 이미 알고 있네. 일단은 남반구에 개입할 가능성이 높은 사울로 안디오를 낙선시킨다. 팔리아로의 진출로를 위해서.”


칼비티움은 세세한 부분까지 꿰고 있는 빈 제마 때문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아메리고 대선 개입은 자국의 사령부에조차 알리지 않은 기밀이다. 심지어 일부 예민한 사항은 수상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실행에 옮겼다.


“다음으로는 대선 경쟁에 방해가 될 자들을 제거하겠지. 예를 들어 정상이라는 슬로건을 세워 젊은 남자를 주축으로 재기하려고 할 피기 스톤스라던가.”


“글쎄, 피기 스톤스는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데. 애초에 이미 실각하기도 했잖아. 그 친구는 안타까워. 머리는 좋지만 정치적으론 살짝 아쉽던데. 자신의 활동 기반을 쌓기에 앞서 하고 싶은 정치를 우선시하면 금방 도태되지.”


“그 남자의 능력이라면 재기할 수 있네. 하지만 어차피 기반을 쌓아도 소용없을 것이야. 이미 이쪽에서 약을 쳐 놓았으니 언제든 이용하면 그만이지.”


전혀 알지 못한 이야기에 알코즈를 너무 무시했음을 인정한 칼비티움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애초에 상식으로 돌아가지 않는 게 세상사거늘. 더군다나 표로 결정되는 민주주의란 정치 구조는 사람 수가 많고 투표율이 높은 계층을 타겟으로 삼는 게 올바르지.”


“그게 이상에 사로잡힌 자들의 말로지.”


“이상 그 자체인 종교 국가의 수장이 할 소리는 아닌데.”


“종교가 이상적이란 소리는 본질을 모르는 자들이나 할 법한 생각일세. 결국 종교도 사람이 만든 것. 사회를 조직하고 구성원을 조율하기 위한 일종의 체제야. 그렇지 않은가?”


“못 들은 걸로 하겠네. 하지만 우린 이미 대화가 어느 정도 통한 것 같아. 그렇지 않나?”


“그쪽 수상과의 회담은 불쾌했어. 여자의 몸매도 너무 빈약하더군. 하지만 이번 건배는 그나마 괜찮았어.”


“동감이야.”


빈 제마가 끝까지 채운 잔을 들자 칼비티움은 병째로 건배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들이킨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는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상관이 난리를 치거든.”


“정작 그쪽이 말해 준다던 늙은 여우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도 못한 듯한데.”


하필 정곡을 찌른 빈 제마다.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던 칼비티움은 이내 표정을 관리하면 입을 열었다.


“이런······ 나도 조금 취했나?”


“너무 급하게 마시면 그럴 수 있지. 안주도 먹게.”


“윗사람들이 먹던 걸 감히 아랫놈이 먹을 수는 없지.”


“식은 걸 먹기 싫은 건 아니고?”


“그건 부정하지 않겠어. 그나저나 할 이야기부터 하지.”


칼비티움은 빈 제마가 건넨 과일을 입도 안 대고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수상하게 보는 상대를 속이며 태연하게 둘러대는 데 성공한 그는 겨우 한숨 돌렸다.


정보국장인 칼비티움이 귀빈실의 음식에 약이 들어 있는 걸 모를 리가 없다. 물론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하지만 특정 인공 효소와 만나면 극도의 불안감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효소는 아디우토르의 안내를 받아 장관급 인사들과 회동한 자리에서 마신 음료를 통해 섭취했다.


이러한 수단을 쓰지 않았다면 이데아 수상의 협박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극심한 불안감을 느꼈다고 해도 이를 악용할 능력도 필요하다. 그것은 분명히 앙겔루스 디아볼리의 실력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빈 제마는 그저 취해서 실수한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지만.


“아직 확정난 건 아니지만 이데아의 머리가 바뀔 수 있어.”


“흐음.”


“지금 여기도 꽤 복잡한 상황이거든. 누구 씨가 협조한다면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지.”


“도와 달라는 건가?”


“난 누구 씨라고만 말했어.”


잔을 채운 빈 제마는 술에 녹아 가는 얼음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성공 가능성은?”


“반반.”


“애매하군.”


“인생이란 게 그런 거지.”


“외교는 도박이 아니야.”


“하지만 정치는 도박이지 않은가?”


이번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 빈 제마다. 대신 잔에 입을 대고서 술을 홀짝인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닿자 바로 뜨거워진다.


“원하는 건?”


“그건 연회가 끝나면 바로 알 수 있을 걸세.”


“이래서 이데아 놈들은 맘에 안 들어.”


할 말을 마친 칼비티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제마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읊조리듯이 말했다.


“실패하면 내 손에 죽는다. 알아 둬.”




은밀한 대화를 끝내고 귀빈실에서 나온 칼비티움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지 않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불안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아까 정원에서 나크 사드와 만났던 아디우토르 데키무스다.


“성과는 있었나, 칼?”


“왕세자 녀석 날 죽여 버리겠다는데.”


“나쁘지 않군.”


“넌 어떻게 됐지, 아디?”


“걱정 말게. 이제 사냥개는 주인에게 버려질 테니. 우린 주인을 물게끔 만들면 돼.”


아디우토르를 바라보던 칼비티움은 눈을 감았다. 어느새 주머니 속에 들어간 그의 오른손은 담배를 꺼내어 입으로 향했다.


“역시 경험자는 다르군. 자네의 아들도 그렇게 버려졌었지, 아마.”


순간 아디우토르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보다 훨씬 냉랭해진 눈빛은 언제라도 사람을 죽일 것만 같다.


“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경고했을 텐데.”


“스스로도 인륜을 저버린 건 알고 있나 보지.”


아디우토르는 칼비티움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이러한 공기 속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얼른 불이나 붙여 달라고 말하는 칼비티움이다. 그게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서 아디우토르는 결국 웃고 말았다.


“괜찮네. 콘트라는 한 명 더 있으니 말이야.”


상대의 미소를 본 칼비티움은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티를 낼 수 없는 노릇이다. 간만에 느낀 공포를 애써 숨기며 담배 향을 음미했다. 얼마 후면 이데아의 정상이 바뀐다는 꿀에 적셔진 꿈을 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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