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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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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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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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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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DUMMY

칼비티움이 떠난 후에도 술을 계속 마시던 빈 제마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귀빈실에서 나오자 마침 입구를 순찰하고 있던 근위 대장 키아브가 경례를 올렸다.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전하.”


“전하?”


“소신의 잘못에 황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폐하.”


키아브의 입에서 나온 호칭이 바뀌자 그제서야 빈 제마는 미간에 주름을 풀었다.


“야참을 준비하라고 전해. 고기가 듬뿍 든 스프로.”


“예, 미리 언질을 두겠습니다. 일단 3 호차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너희는 계단에 불미스러운 게 없는지 확인하도록.”


근위 대장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십여 명의 근위병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수색하면서 동시에 길을 열었다. 본인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수족들을 보자 빈 제마의 입가는 미세하게나마 올라가 있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데아에서의 험난한 하루에 메말랐던 감정이 되살았다. 앙겔루스 수상에게 수모를 당했다. 칼비티움이란 남자는 꽤나 흥미로운 제안을 가져오긴 했지만 그래도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첩보 장관과 비슷한 역할인데다 실질적인 서열은 그보다도 낮은 고작 정보국장 따위가 맞먹으려 했으니 말이다.


“나크는 어디에 있나, 키아브?”


“첩보 장관은 주차장에서 대기 중입니다.”


“이쪽으로 오라 해.”


“즉시 3 호차로 부르겠습니다. 하바브, 장관님께 다녀오도록.”


하바브란 남자가 쏜살같이 달려나가자 그 뒤를 따라 여유롭게 걸어나가는 빈 제마다. 이제서야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얼굴이다. 그는 드디어 취기가 가셨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답이 아니다. 불안한 요소가 사라진데다가 약효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아가 꾸민 교묘한 이중 함정은 예민하기 유명한 알코즈의 왕세자조차 시야조차 흐릴 정도다. 애초에 그 누가 국제 문제를 일으킬 각오를 하면서까지 국빈에게 미친 짓을 저지를까? 이게 바로 앙겔루스 디아볼리가 이데아의 정상에 올라선 이유이자 이데아를 열강의 반열에 올린 원동력인 것이다.




키아브가 손수 관용차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이미 나크 사드가 타고 있다. 평시라면 예의에 어긋난 일이지만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근위병의 도움을 받아 뒷좌석에 올라탄 빈 제마는 바로 팔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사기를 꺼내 팔에 꽂는 나크 사드다.


“설마 놈들이 수작을 부리지는 않았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호텔에 대기하고 있을 의료진에게 혈액 샘플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러지. 뭐든 확실한게 좋아. 거기다 상대는 믿음을 주기 힘든 이데아 놈들이야.”


알코올 솜으로 바늘 자국을 누르며 나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오늘 하루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콘트라 도크트리나를 만나 협박을 당했다. 그리고 아디우토르 데키무스와 조우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에 대해 까다로운 상관에게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첩보 장관은 결국 입을 열기로 했다.


“오늘 이데아 측에서 접촉을 해 왔습니다.”


“내가 아니라 자네한테?”


“투 트랙으로 나갈 생각인가 봅니다.”


“귀찮은 놈들이야. 하여튼 뭐라고 하던가?”


“그게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나크는 말을 이었다.


“둘 다 폐하의 부친이 한 약속을 거론했습니다.”


“흠······ 맘에 안 드는군.”


“그런데 둘의 말이 달랐습니다.”


“다르다니?”


빈 제마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당연한 일이다. 투 트랙 자체는 불쾌하더라도 상대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부분이기에 확실해야 함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하루에 두 번씩이나 접촉했고, 거기다 만난 이들의 말이 서로 달랐다는 걸 납득할 국가는 없을 것이다.


“처음 만난 자는 팔리아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싸가지 없는 새끼들······ 잠깐, 그런데 말이 다르다고?”


“예, 그렇습니다. 연회장에서 만난 자는 오히려 팔리아에 군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녹지 지대를 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오히려 더욱 더 납득하기 힘든 빈 제마다. 말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거기다 두 선택지가 가져오는 결과물 역시 완전히 다르다. 이는 이데아가 팔리아에서 가져갈 수 있는 이익 또한 극단적으로 바뀌게 된다. 정치적인 계산 하나만큼은 빠르기로 소문난 빈 제마조차 판단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데아에게 어떤 대답을 보내 주면 되겠습니까?


“일단 기다려 봐. 계산이 되지 않아서 어지럽군. 오늘 너무 많이 마셨나.”


“아직 순방 기간은 남아 있으니 천천히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이틀 내로 답을 정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빈 제마는 문득 궁금하게 생긴다.


“그 쥐새끼 두 마리는 누구지?”


“처음 만난 사람은 우리나라에 주재했던 외교관이자 현재는 특수 기관의 공작원으로 일하고 있는 콘트라 도크트리나, 연회장에서 만난 사람은 수상 보좌관 아디우토르 데키무스입니다.”


순간 아무리 술에 취해도, 약물로 불안해도 흔들리기만 했던 왕세자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데키무스라면 설마···”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 콘트라 데키무스의 부친입니다.”




이후 알코즈의 손님들은 이데아에서 순탄한 일정을 보냈다. 말이 선진 행정 연수지, 실제로는 관광이 따로 없었다. 한가로이 이데아의 바다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데아 정부가 제공한 진귀한 음식을 맛보며 국민의 혈세로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물론 이때도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그렇게 이틀은 금방 흘러 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왕세자는 배웅하러 나온 수상 보좌관에게 이데아를 위한 선물을 대사에게 전달해 두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아디우토르는 눈치 없는 남자가 아니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그 선물은 수상이 아닌 수상 보좌관인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으니까.


전용기에 오른 나크 사드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부관은 무슨 걱정이 있냐고 묻는다.


“이데아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르는 편은 아닙니다.”


“난 치가 떨릴 만치 알아. 나라의 외관만 아름답지, 인간들 마음은 얼마나 썩었는지도!”


나크의 외침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부관은 서둘러 눈치를 살핀 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을 다시 시작한다.


“이번 일도 이해할 수 없어. 저들은 독재를 욕하지. 우리가 왕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다고 욕해.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누구보다 독재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어, 쯧.”


“어쩌겠습니까? 결국 위에 오르지 못해 혁명을 벌여 왕의 목을 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알코즈에서도 위로 오르고 싶은 자들이 있다면 저들처럼 되겠군.”


“너무 과한 말씀이십니다. 설마 누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겠습니까? 차라리 각하께서 왕좌를 오르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시는 게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부관은 농담이라는 듯이 가볍게 웃으며 다음 장소로 안내했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크의 눈빛은 마냥 가볍지 않다.


“내가 알코즈의 왕이 된다라······”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상황이다. 알코즈의 태어난 모든 이들은 마엘리의 신인 뤠와 그의 사도인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 율법에서 정한 절대적인 규율이다. 빈 제마가 말대로 마엘리교는 그들만의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사실 알코즈의 신분 간의 간극을 지킨 건 철저한 교리만이 아니다. 본인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유지 계층의 이기적인 태도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나크와 같은 유지들은 국왕 주변에서 요직을 차지하며 평민들을 짓밟는 삶에 만족했다. 자신의 발 아래에 있는 자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막았다. 이는 왕족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었다.


나크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교육을 받으며 자란 지방 유지다. 거기다 변방 출신임에도 중앙으로 불러 준 빈 제마에게 큰 두려움과 함께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이 옥좌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바로 마음이 바뀌는 나크 사드다.


희열에 찬 미소를 짓는 상관을 훔쳐본 부관은 남몰래 한숨을 지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군. 이런 걸 보면 이데아가 나아 보여. 명목상이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긴 하니.”


그렇게 중얼거린 부관은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서는 앳된 이데아의 여성 공무원들이 짧은 옷을 입고 자유로이 일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원하는 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여동생이 괜스레 불쌍하게 느껴지는 알코즈인이다.


물론 그녀를 위해 특별히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다. 율법에 어긋나기에, 국법에 어긋나기에, 그리고 가문과 자신의 안위에 해가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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