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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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작품등록일 :
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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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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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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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DUMMY

눈덮인 험준한 산맥처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건물, 이데아의 사령부 본부는 외관만 봐도 압도적이다. 새 것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단정한 군복과 정복을 입은 장병들이 바쁘게 오다니고 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사주 경계 중인 경비병은 총을 쥔 손만 아니라 침착한 숨마저 멈춘 듯하다.


흔들림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분위기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훈련병 사망 은폐 시도가 밝혀진 이후 수많은 기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회의를 한 결과 나름 변명거리를 찾은 사령부는 정훈국장을 내세워 회견을 열었다.


1 층의 브리핑실에서 온갖 질문이 쏟아지고 있는 이때 장관의 집무실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방문했다.


“굳이 이런 시기에 와야 했나?”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네. 그렇다고 딸의 인생이 망가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잖은가. 친구인 자네가 좀 이해해 주게나.”


언짢은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관의 음성에 그의 친구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입구 근처에 놓인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장관 비서관도 고개를 숙인 채 귀만 쫑긋 세웠다. 이 모든 상황이 못마땅한 집무실의 주인은 탁자를 세게 걷어차며 일어났다.


“아무 능력도 없는 자네의 여식을 군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말이 심하군. 그래도 우리 애가 몸 하나는···”


“체력 시험도 밑바닥을 겉돌아 불합격할 걸 남몰래 손써서 합격시키고 그나마 편한 교육사에 집어넣었는데 이딴 짓을 벌여? 지금 당장 경찰로 이첩하지 않은 거나 감사히 여기게!”


또다시 귀를 찌르는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흥분을 못 이겨 가뿐 숨을 뱉어 내는 장관에게 돌아온 친구의 변명은 아까보다도 가관이었다.


“훈련소 같은 곳에나 박혀 있으니 실적을 세우지 못하잖은가? 그러니 그 아이도 제 딴에는 열심히 해 보려고···”


“개소리! 마음에 안 드는 보직을 받은 것도 자기 실력 탓이지. 그래, 그걸 감안해서 따라잡으려고 노력한 거라 치자. 근데 이딴 짓을 벌이면 무슨 소용이야! 지금 죽은 놈의 동기뿐만 아니라 이미 자대로 전입한 병사까지 난리 치고 있어! 그리고 여길 찾아올 정신이면 네 딸이나 제대로 관리해. 소란이 멎을 때까지 입 닥치고 지내라는 의미에서 숨겼는데 그동안 그놈의 가족한테 합의를 강요했다고!”


“어······ 그게···”


“당장 나가! 그리고 명심해. 만약 우리 관계가 기자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모든 수를 써서 자네 가족에게 복수할 거란걸.”


“거 참, 나약한 젊은이 하나 죽었다고 40 년지기한테 너무하구만. 오늘은 일단 가보겠네.”


혀를 찬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청객이 떠나고 문이 닫히자 사령관은 책상을 내리쳤다.


“지 딸년 때문에 30 년 군 생활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저 새끼가······”


두 남자의 비인간적인 대화를 듣던 비서관은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참고 참았다. 젊은 나이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입대를 결심한 청년은 누군가의 실적을 위해 희생당했는데다가 심지어 그 죽음조차 비하당했다. 한 명은 군의 정점이라고 해도 무방한 사령부 장관이고, 다른 한 명은 훈련병을 죽인 가해자의 부친이다. 믈론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을 폭로할 생각은 없다. 이 방에는 자신밖에 없었으니 소문이 난다면 의심 받을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비서관 그녀조차 장관의 뒷배로 이 자리에 앉았으니 말이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가족과의 시간은 어땠습니까?”


“끔찍했습니다. 조카가 친한 무리들과 사고를 쳤는데 숙부님께서 어쭙잖게 수습하셔서 괜히 기분만 불쾌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를 데리고 와서 잘못이 없다고 난리까지 부렸습니다.”


“힘드셨겠습니다. 그래도 조카이지 않습니까? 한 번만 용서해 주는 게 어떻습니까?”


“반성하지도 않는 조카를 용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어떤 여자와 대화 중인 콘트라 도크트리나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다. 잠시 후 상대는 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어디 가십니까?”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러 갑니다. 그 무리가 들러붙는 것도 걱정이 되고.”


“일이 무사히 풀리길 바랍니다. 다음에 또 차 한 잔 하시죠.”


무뚝뚝한 여자는 인사도 없이 떠나갔지만 콘트라는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누가 보면 조카에게 사고를 치라고 사주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사실 저 여자는 사령부의 정훈국에 배정된 요원이었다. 정보국 역시 사령부 소속이지만 임무의 특수성상 실질적으로는 독립 기관이나 마찬가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 요원은 수상에게 보고한 서류에 이미 기재되어 있었기에 감사에 걸리지 않도록 최대한 돌려 대화했던 것이다.


홀로 남은 콘트라는 홍차를 홀짝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번 사건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확대됐다. 담당자들의 대응은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멍청했다. 방금 보고대로면 사령부의 브리핑 역시 허점이 넘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팔리안 난민의 폭동을 연기하고 이번 일을 조금 더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확실한 증거로 인해 징역형을 앞두고 있는 야당 대표 페카토르 파치누스를 이용해서 정치화한다면 현 내각도 꼬리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위험한 생각이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사령부의 은폐 시도 이후에도 수상이 장관을 해임하지 않았다는 말은 곧 그 꿍꿍이가 있다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진상을 숨기고 있는 사령부를 방패막이로 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콘트라다. 그의 말마따나 군을 비난하는 사람은 넘쳐도 수상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수상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감옥행이 확실한 페카토르를 끌어들이면 양측을 지지하는 신봉자들이 모일 것이고, 다수인 앙겔루스 측이 승리를 거머쥘 게 뻔하다.


하지만 이 또한 콘트라 도크트리나가 노린 것이다. 자신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믿고 있는 대상은 어떻게든 옹호하려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며 고학력자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그는 이 점을 이용해서 ‘학사모 작전'을 세웠다. 믿음이 깨졌을 때 쏟아지는 분노는 상상 이상이다. 더 이상 수상을 따르지 않는 민중은 비인간적으로 그를 뭉갤 것이다. 따라서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뢰에 구멍을 내야 하며 그 전까지는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한다. 뜨거운 홍차를 천천히 그리고 조심히 마치는 것처럼.




그날 밤 중심가의 화려한 바는 회식 중인 회사원, 데이트 중인 커플 등 수많은 손님으로 북적였는데 가장 시끄러운 자리는 대학생들의 테이블이었다. 학교의 이런저런 소문이나 교수에 대한 험담을 나누던 이때 두꺼운 안경을 낀 어수룩한 남자가 가방에서 신문을 꺼냈다.


“너희 오늘 이브닝 포스트 읽었어?”


“선배도 참! 4 시부터 술 먹고 있었는데 신문 읽을 시간이 어딨어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었어요?”


“또 시작됐다. 분위기 깨려고 저러지, 저 자식.”


여러 의미로 일행에게 주목을 받자 신이 났는지 안경은 손에 든 신문을 책상에 올렸다.


“요즘 훈련병이 죽은 걸로 시끄럽잖아. 근데 새로운 소식이 나왔더라고.”


“어휴, 이런 데서 꼭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냅둬. 또 자기만 잘난 척 정치니 사회니 떠벌떠벌거리다 집에 가겠지.”


“다들 너무 하십니다. 괜찮다면 저라도 들어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근데 저 사건은 조금 그렇더라.”


흥미보다 비난의 시선이 많았지만 나름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남자는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사령부의 발표가 실제 증언과 틀린 내용이 너무 많대. 안 그래도 숨기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 많았는데 거의 확정시된 셈이지. 너흰 어떻게 봐?”


“앉아서 본다, 자식아. 분위기 좀 파악하라고 해도 왜 말을 못 알아듣냐!”


“너무 화내지 마. 나도 훈련병 이야기 들어 보니 엄청 불쌍하더라.”


“오빠 봐서 참을게요. 진짜 저 인간 별로다. 재밌게 놀고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 죽은 걸로 난리야. 어차피 군인은 결국 죽을 거 아니야?”


금발의 여자가 양측을 중재하던 남자에게 애교를 부리는 순간 다른 테이블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저 문디 가시나가 뭐라 쳐 씨부리 쌌노?!”


“네······?”


“군대서 억울하게 죽은 아 보고 뭐라꼬?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꼬?”


취기가 잔뜩 오른 중년 남자가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성큼성큼 다가오자 여자는 서둘러 일행의 뒤에 숨었다. 그리고 지금의 화제를 처음 꺼낸 안경의 등을 냅다 떠밀었다. 고꾸라질 뻔한 몸의 균형을 간신히 잡은 그였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군 생활도 안 해 본 학상들이 함부로 말하믄 안 되는기다. 알긋나?!”


“죄,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았음에도 중년은 더욱 더 성을 냈다.


“카고 그딴 찌라시 갔다 치아라. 감히 수상님을 욕하는 걸 왜 믿고 지랄이고.”


“뭐?!”


그의 입이 닫히기도 전에 주변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재미있는 점은 방금까지 나름 안경을 챙겨 주던 친절한 친구의 미간도 찌푸려졌다는 것이다.


“너 그게 정말이야?”


“아니, 그게···”


“진짜 실망이야. 정치에 관심이 많은 만큼 수상님께서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지 알 건데 그런 이상한 기사를 알려 주다니.”


“선배님, 다시는 말 섞지 맙시다.”


“하, 됐어. 얘들아, 그만 가자.”


일행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안경은 계속해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손님들은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대놓고 비난했다. 중년은 성난 손길로 테이블에 놓인 신문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한편 소란 속에서 바텐더는 침묵을 지키며 잔만 비우는 사람들을 세고 있었다.


“열 명 중 두 명 정도인가, 쯧.”


작가의말

여러 사정으로 이제야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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