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새글

백G
작품등록일 :
2023.07.10 20:20
최근연재일 :
2024.09.23 21:57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457
추천수 :
6
글자수 :
266,333

작성
24.08.12 21:25
조회
5
추천
0
글자
13쪽

52화

DUMMY

내각에 대한 불신율이 20 %까지 증가했다는 보고를 받은 칼비티움 라쿠스의 얼굴에서는 만족이 아닌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살벌한 분위기에 불안해진 부하들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칼비티움은 보고서를 책상에 내던졌다.


“한 달.”


“잘못 들었습니다?”


“한 달 내로 40 %까지 끌어올리라고 전해.”


“그게···”


“불가능하지 않냐는 헛소리를 할 거면 썩 꺼지고. 목숨을 건 상황에 그런 썩은 정신머리는 필요 없네.”


“······ 즉시 전달하겠습니다.”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가장 앞에 선 여자는 상급자의 싸늘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다급히 경례를 하고 자리를 비웠다. 아니꼬운 감정을 풀고 싶었던 정보국장은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그 끝에 불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불청객 때문이다.


“잠시 대화 가능하나요?”


“물론이지, 푸파스 팀장.”


푸파스라고 불린 남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간을 찡그리며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그는 푸파스 라쿠나스, 수상이 보낸 감사원을 총괄하는 감사 팀장이었다. 지금은 정보국장의 비서관이란 위장 직함을 달고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녀서 국내의 불만이 자자했다.


“오늘은 어떻던가? 소득은 있었는지?”


“꼬투리 잡을 게 없더군요. 마치 누가 다 지운 거마냥.”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상대의 발언에 칼비티움은 피식 웃었다.


감사원이 정보국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연락 암구호를 변경한 것 이외에는 딱히 없었고, 이는 도리어 업무에 지장을 일으켰기에 요원들 사이에서 많은 말이 나왔다. 성과라고는 일체 내지 못하는 감사원들이 못마땅한 칼비티움은 소리 죽여 혀를 찼다. 기본적으로 감사를 하다 보면 아주 작은 실수라도 나오기 마련이다. 오히려 문제점을 찾지 못한다면 계획적으로 은폐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 게 뻔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런 멍청이들을 보낸 친구가 원망스러운 국장이었다.


“부하들이 너무 성실하게 일한 탓이 아닌가 싶군. 그래도 실수 하나 없을 리는 없지. 한번 잘 찾아보게나.”


“물론이죠. 일단 모든 부서의 문서 열람 권한을 주세요.”


“알겠네. 밑에다 그렇게 전하지. 돈을 만지는 부서라면 숫자 하나쯤은 틀렸을 거야.”


“지금 문제는 돈이 아니라고 보는데요.”


최대한 호의적인 대응에도 푸파스는 빈정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행에도 칼비티움은 붙잡거나 화내지 않았다. 대신 라이터의 불길과 주인의 입김을 기다리는 중인 담배를 다시 물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데드라인이 다가오고 있군. 여러모로 말이야.”




한편 비밀 벙커의 공모부장 콘트라 도크트리나는 손을 바삐 놀리며 동시에 불가능에 가까운 국장의 지시를 하달받았다. 그의 부담을 덜어줄 수는 없어도 다른 쪽으로나 마나 돕고 싶었던 아르마 릴렉타는 차와 음식을 가져와 손님을 대접했다.


“앙겔루스의 불신율을 높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지시가 없었고?”


“딱히 없었고 해당 지시를 반드시 이번 달 내로 완수하라 하셨습니다. 힘든 일이라고 말씀드리려 했지만···”


“들으실 분이 아니지.”


가벼운 공감이 나름 위로가 됐는지 여자는 조금은 얼굴을 피며 복잡한 감정을 한숨에 담아 토해 냈다.


“목숨이 달린 일임을 강조하셨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역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진행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야. 하지만 하라면 해야지, 어쩌겠어.”


시선도 주지 않으며 보고서를 확인하는 콘트라를 본 요원은 죄송한 마음이 담긴 경례를 하고서 벙커를 떠났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아르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평소대로, 평소와 똑같습니다.”


“어려운 임무를 받았나 봐요.”


아직 홍차에 입을 대지도 않았음에도 씁쓸한 미소를 지은 콘트라는 찻잔을 들며 아르마와 시선을 교환했다. 호수가 담긴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조그나맣게라도 기운이 생기는 마냥.


“어쩌겠습니까? 이번 작전의 성공 유무에 우리의 목숨이 달린 것을.”


“그렇긴 하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거기다 실장님과 다른 동료들을 되찾으려면 국장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콘트라의 이야기를 곱씹던 아르마는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태껏,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가족한테 돌아갈 거죠?”


“당연··· 합니다.”


순간 방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아르마는 저 남자와 헤어져야만 하는 결말을 원망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콘트라는 당연한 대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멈칫한 이유를 고민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찻잔이 뱉어 내는 김은 점차 옅어져만 간다.




다음 주에도 훈련병 사망 사건은 식지 않고 논란을 이어 나갔다. 기자로 활동 중인 요원은 가해자의 부친이 사령부 장관의 절친한 친구이며, 두 사람은 은폐 시도가 밝혀진 이후 여러 차례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장관이 방문하지 말라고 누누이 경고했음에도 귀담아듣지 않은 친구는 결국 다른 기자들에게도 붙들렸다. 여기서 자신은 딸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고 성을 냈지만, 그의 딸이 다른 부모의 아들을 죽였는데 누가 누구의 자식을 지키냐는 비난만 더해질 뿐이었다.


계속해서 반발이 커지자 정보국은 수상이 언론 보도를 허용한 이유를 추리했다. 이대로 가면 사령부를 비롯한 내각의 불신율이 높아질 텐데 말이다. 하지만 앙겔루스에게는 이번 사태를 해결할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수상은 정보국장을 호출했다.


“요즘 자주 뵙는 것 같습니다, 각하.”


“좋은 일이지, 국장. 자네가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지 않나? 적어도 누구와는 달리.”


“질책을 받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습니다.”


“양심에 찔리는 게 있나 보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앙겔루스는 이내 표정을 고치고 본제를 꺼냈다.


“보좌관의 감사 결과 금번의 문제 상황은 사령부 측의 책임이라고 판단했네.”


“혹시 근거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아디우토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수상 보좌관은 일말의 지체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훈련소에서 문제를 일으킨 간부의 부모와 사령부 장관이 친분이 있다는 건 정보국도 알 겁니다.”


“물론입니다. 그 외에도 장성은 물론 고위층과 연줄이 닿아 있는 장병은 모두 관리 중입니다.”


“정보국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훈련병에게 가혹 행위를 저지른 간부의 부친이 언론과 만난 모양입니다. 이번 사태가 수면 위로 드러날 경우 얻는 이익이 전혀 없는 당사자와 그 가족이 굳이 사건을 언급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한 문제 파악을 위해 지금 사령부의 감사원들이 최초 접촉 시점을 확인 중이고, 현 상황을 방관한 책임을 물어 사령부 장관을 해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칼비티움은 표정을 관리하며 질문을 던졌다.


“마치 사령부에 모든 덤터기를 씌우고 발을 빼겠다는 의미로 들립니다만.”


“딱히 대답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현명하신 정보국장께서는 선처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도 얼굴 하나 변하지 않는 아디우토르를 본 칼비티움은 만족스러웠다. 때로는 기분 나쁜 능구렁이지만 아군인 이상 누구보다 든든한 친구니 말이다.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우리 사이에. 자네의 추측이 맞다네, 정보국장.”


“최선의 판단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적을 찾는 중이지 않습니까? 이 상황을 아는 장관을 해임하면 오히려 마이너스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듭니다. 물론 수상 각하의 뜻에 반할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이대로 가면 여론이 심히 악화될 걸세. 어쩔 수 없으니 사령부는 이쯤에서 빠지고, 범인 색출은 정보국이 전담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보도하면 되겠습니까?”


“눈치가 빨라서 편하군. 일단 훈련병 사망 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사령부 선에서 끝내게. 괜히 정부까지 끌고 들어오지 않도록. 사령부 장관의 경우, 직무 유기로 조사할 예정이라고도 덧붙여.”


앙겔루스의 단호한 말투에 칼비티움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장관은 각하의 후배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엄중 처벌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치에서 인연은 분명 소중하지. 허나 정권 자체가 달린 문제에서 누구 하나 살리겠다고 마음 약하게 굴면 쓰나. 그리고 뒷일은 걱정 말게. 장관에게는 적당히 마무리한다고 슬며시 전달할 게야. 어차피 녀석도 다른 일이 터지면 바로 조용해질 거란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옆에서 듣던 아디우토르는 적당히 마무리한단 말에 구역질이 났다.


이데아의 헌법은 삼권 분립을 천명한다. 행정권을 쥔 수상이 사법과 입법에 손을 뻗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앙겔루스 디아볼리는 뛰어난 정치 수완으로 수차례의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왔고, 이를 통해 여당의 수뇌부를 장악한 상태였기에 입법권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사법권 마찬가지다. 유능한 판사라도 막강한 권력과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앙겔루스를 대적하지 못한다.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짖었던 법관들은 뇌물 수수 또는 이적 행위 등 과거의 오점이 밝혀져 법봉을 내려놓았고 몰매를 맞으며 조용한 시골이나 머나먼 외국으로 떠났다.


국가의 기틀인 헌법을 무시하는 남자의 환멸스러운 모습은 역겹기 그지없다. 동시에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태도는 오만하지만 동시에 거역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디우토르는 구토를 참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앙겔루스에게 저항했던 법관들 역시 저 남자 못지 않게 더러웠다. 물론 진정으로 이데아를 위했던 일부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그저 권력을 쥐고 싶었던 위선자였다. 그러니까 아디우토르는 유일하게 올바르다고 생각한 자신 스스로가 이 나라의 정상에 서기로 한 것이다.


“국빈 방문 시기에 사건이 발생하자 문책이 두려웠던 가해자와 이에 대한 감사를 피하려던 사령부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은폐를 시도했다. 여기서 피해자의 가족을 입막음하며 확실하게 묻으려던 가해자의 부친이 도리어 정보를 유출했고 기사가 보도되었다. 모든 정황을 확인한 정부는 장관 및 책임자들을 해임 및 고발 조치한다. 앙겔루스 디아볼리 수상은 그간 많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느꼈을 피해자 가족을 만나 위로하고, 최대한의 보상을 약속할 것이다. 한편 국가 안보를 위해 사령부 장관직을 오래 비울 수 없으므로 금주 내에 새로운 적임자를 물색해서 임명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여기까지 수정할 내용이 있습니까?”


“나쁘지 않군. 어떤가, 아디우토르?”


“······ 고칠 점은 없어 보입니다.”


칼비티움은 한순간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아디우토르를 보며 눈을 흘겼다. 친구의 비난을 외면한 수상 보좌관은 헛기침하며 편지 봉투를 건넸다.


“이건 뭡니까?”


“복귀 통지서입니다. 이 시간부로 두 개의 기관에 파견된 모든 감사원은 귀환할 예정입니다··· 만 정보국은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이전보다 우수한 인원이 필요해 보이므로 한 명만 따로 배치하려고 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상관없습니다.”




수상 집무실에서의 모의가 끝난 후 아디우토르는 관저의 지하로 향했다. 앙겔루스가 좋아하는 와인을 모아 둔 창고의 문을 열자 병째로 술을 마시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몸은 어때?”


“최악이다, 썩을 놈아.”


“그렇게 아픈데도 술을 마시다니 강하다고 해야 할지, 약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걱정인지 조롱인지 모를 아디우토르의 말을 무시한 여자는 빈 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아아, 말했던 대로 정보국에 파견할 거야.”


“드디어 그놈을 만날 수 있겠네.”


상자 위에 벌렁 드러누운 여자를 뒤로한 채 입구로 향하던 아디우토르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췄다.


“조심해. 칼이 널 못 알아볼 리 없으니까.”


그러자 날카롭고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할퀴었다.


“너나 조심해. 내 칼은 그 녀석 다음에 네놈에게 향할 거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말없이 창고를 나섰다. 어두운 복도에는 구둣발 소리만 울려 퍼진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6 56화 NEW 4시간 전 0 0 11쪽
55 55화 24.09.03 5 0 11쪽
54 54화 24.08.27 4 0 10쪽
53 53화 24.08.19 3 0 10쪽
» 52화 24.08.12 6 0 13쪽
51 51화 24.07.29 5 0 10쪽
50 50화 24.06.24 4 0 10쪽
49 49화 24.06.19 5 0 10쪽
48 48화 24.06.18 4 0 10쪽
47 47화 24.06.17 5 0 11쪽
46 46화 24.06.04 8 0 10쪽
45 45화 24.05.27 6 0 11쪽
44 44화 24.05.20 7 0 9쪽
43 43화 24.05.13 7 0 9쪽
42 42화 24.05.06 7 0 10쪽
41 41화 24.05.01 6 0 9쪽
40 40화 24.04.22 8 0 10쪽
39 39화 24.04.15 7 0 10쪽
38 38화 24.04.08 6 0 10쪽
37 37화 24.04.02 6 0 10쪽
36 36화 24.03.25 6 0 10쪽
35 35화 24.03.18 6 0 10쪽
34 34화 24.03.12 7 0 10쪽
33 33화 24.03.04 6 0 10쪽
32 32화 24.02.26 8 0 9쪽
31 31화 24.02.12 6 0 10쪽
30 30화 24.02.05 7 0 11쪽
29 29화 24.01.29 7 0 9쪽
28 28화 24.01.22 7 0 10쪽
27 27화 24.01.15 9 0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