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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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작품등록일 :
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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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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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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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DUMMY

처절한 신음의 박자에 맞춘 듯이 천천히 고개를 든 파이니트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고작 이것만으로도 입술이 떨리고, 목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아디우토르는 이미 파이니트가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보냈는지 눈치챈 얼굴이다.


“꺼져. 반동분자와 할 이야기는 없다.”


희미하지만 또렷한 목소리, 모순되었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 생각에 쓴웃음을 짓던 아디우토르는 이내 입가를 고치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최고급 정장에 어울리지 않는 낡고 피로 얼룩진 나무 의자는 어쩐지 그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처음부터 아디우토르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네놈에게는 그리운 장소겠군.”


“아아, 임관 후 첫 근무지니.”


아디우토르는 질문에 답하며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잠시, 아주 잠시지만 어둠을 몰아낸 불빛은 작은 흔적을 남긴 채 사라졌다.


“끊었지 않나?”


“그랬지. 하지만 친구가 이런 꼴인 걸 보니 참을 수 없어.”


밤하늘 구름 같은 희미한 연기를 뿜어낸 아디우토르는 이마를 쓸어넘겼다. 그때 담뱃불 아래로 드러난 그의 눈빛은 어떠한 단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싸늘하다. 눈앞의 먹이를 어떻게 손질할지 고민하는 맹수의 시선이다. 잔혹하다. 눈앞의 인간을 도저히 사람으로 보는 시선이 아니다. 안타깝다. 눈앞의 친구를 이렇게 만든 죄책감으로 물든 시선이다. 그야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내가 네놈을 잘못 봤다. 설마 칼비티움 라쿠스 그놈과 손을 잡고 국가에 반기를 들 줄은······”


“나도 널 잘못 봤어, 파이.”


여자의 차가운 힐난을 자른 남자의 짤막한 대답 뒤엔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파이니트의 얼굴은 아디우토르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참 좋았지. 남녀를 떠나, 빈부를 떠나, 출신을 떠나 한 팀이었어. 조국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잖아.”


“그래서 반동분자가 되었나?”


“이것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야.”


“무슨 소리지?”


다시 연기를 뱉어 낸 아디우토르는 “간만에 피우니 속이 안 좋아.”라며 아직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버리고 구둣발로 짓이겼다. 그 모습을 보던 파이니트는 추억을 떠올렸다. 저자의 군화가 자신의 머리를 짓이겼던 슬프지만 그리운 시간을 말이다.


“훈련이 끝난 뒤에 우리는 각자 보직된 자리로 떠났고, 한참은 서로를 못 볼 줄 알았지. 하지만 나와 너의 재회는 그리 짧지 않았어. 그건 파이도 기억하잖아?”


“분명 그랬지. 네놈이 내 머리를 걷어찬 게 선명히 기억난다.”


무거운 내용과 달리 담담한 말투지만 아디우토르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수상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만 바빴었지. 선거에서 질 것 같으니 국경 근처에 포격을 가하라는 지시를 사령부에 내렸었어. 그럼 사람들이 군사력을 늘리겠다는 정책을 지지할 거라 생각하고.”


“지금 상황과 상관없는 이야기다.”


“있는지 없는지는 들어 보고 판단해 봐.”


그렇게 말한 아디우토르는 ‘시간이 길어지겠다’며 물을 따라 파이니트에게 마시게 했다. 자존심 강한 여자는 입을 다물어 거부하려 했지만 고문에 익숙한 남자는 재갈을 물린 뒤 그 틈으로 액체를 흘려 보냈다.


“하지만 당시 작전 실행을 맡은 포병 대대의 상황실 장교는 상급 부대의 지시를 무시했고, 결국 포격은 무산, 분노한 윗선에선 그 장교를 감옥으로 보냈지. 물론 이미 꼬일 대로 꼬인 작전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결국 수상은 그렇게 지키려던 자리에서 물러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을까?”


“시끄럽다.”


“그리고 그 장교 이름이 뭐였더라······ 아, 파이니트, 파이니트 노비시메였지.”


평소의 근엄한 말투와 분위기가 사라진 채 막 성인이 된 듯한 느낌을 주는 아디우토르는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때 파이니트 노비시메가 끌려온 감옥은 이데아에서 가장 심각한 중범죄자 혹은 정치범을 수용하는 곳이었는데 하필 담당 고문관이 훈련 동기였지. 그 고문관의 이름은 아디우토르 데키무스.”


“짜증날 정도로 신나 보이는군.”


“신나지. 옛 친구와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로망이잖아.”


“그딴 건 모른다.”


“파이는 예전부터 그런 여자였지.”라며 웃은 아디우토르는 다시, 얼마나 많은 이들의 것이 섞였을지 모르는 피투성이 의자에 앉았다.


“당시의 난 겁쟁이였어. 파이처럼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 줄도 모르고, 친구를 위해 계급을 걸 수도 없는.”


파이니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처량한 눈빛으로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눈앞의 남자를 원망하면서도 처량하게 내려보는 시선이다.


“언제 감찰이 있을지 몰라 친구를 때리고, 목을 조르고, 인두로 지지고, 끝끝내 가족을 가지고 협박했지. 하지만 넌 멍청한 수상이 없어져 감옥에서 풀려날 때까지 굴하지 않았어. 그리고 널 괴롭히던 날 용서했고.”


이번에도 파이니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의 옛 친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눈앞의 남자를 더 이상 원망하지 않으며 안타깝게만 내려보는 시선이다.


“그렇지만 이젠 달라. 칼과 함께 일어날 거야. 조국을 좀먹고 있는 더러운 앙겔루스 칼비티움을 몰아내고 이데아를 더 낫게 만들 거라고!”


언제나 평온을 유지하며 수상마저 다독이던 보좌관 아디우토르가 맞는지 의심이 가는 우렁찬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말없이 계속 듣고 있던 파이니트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넌 변하지 않았다. 배운 것도 없고, 여전히 겁쟁이다. 그렇기에 난 널 원망하지 않는다.”


“뭐라고······?”


아디우토르는 당황한 얼굴로 파이니트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현 수상을 따른 것은 그가 최고의 수상이라서가 아니다. 그나마 최선의 수상이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잘 알 텐데. 사람은 누구나 악하고, 약해. 특히 정치에 발을 들인 자는 더더욱. 기억하지 않나? 그 다음 수상은 평화만 외치다 국경 침입을 당했고, 치부가 들킬까 두려워 이 사실을 외부에 숨긴 걸.”


“기억하지. 그걸 고발한 사람도 너잖아, 파이.”


“전임자들을 생각해 보면 앙겔루스 디아볼리는 자신의 탐욕을 채울 뿐, 국정은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아디우토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꽉 깨물었다. 피가 새어 나왔지만 그간 그가 고문한 죄인들이 남긴 흔적 때문인지 딱히 별 맛은 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수상에서 물러난다면 그보다 나은 인물이 나타날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군. 이 두 눈이 틀렸다면.”


“나나 칼은······?”


“음?”


담뱃불 때문인지 얼굴이 빨개진 아디우토르가 질문하자 파이니트는 의아하단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나 칼이 수상이 되면 어떨 것 같냐고.”


“흠······”


잠시 고민하던 파이니트는 길게, 이제껏 그 어떤 때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답하기 어렵다.”


여러 의미를 내포하였단 걸 알아챈 아디우토르는 뒤돌아 출구로 향했다. 피로 녹이 슨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처음으로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아디, 두 가지만 말하고 싶어.”


“뭔가, 파이니트 노비시메 전임 움브라 실장?”


“그때 넌 절대 겁쟁이가 아니었어. 고문을 빙자해 날 죽이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했잖아.”


“미안하지만 그건 오해일세. 그 남자는 겁에 질려 한 여자의 목숨을 거두지 못했을 뿐이니.”


“알았어. 그리고 두 번째 말하고 싶은 건 부탁이야.”


“죄인의 부탁은 들어줄 생각 따윈 없다.”


“내가 죽더라도 딸과 부하들만은 살려 줘. 특히 콘트라를 잘 부탁할게.”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디우토르지만 파이니트의 마지막 말의 끝났을 때는 문고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 때문이 아니다. 그를 동요케하는 건 순수한 질투다.


“자네에게 콘트라 도크트리나는 어떤 존재이기에 그러나?”


“훌륭한 부하지, 너나 칼도 탐낼 만큼, 그때의 우리보다 훨씬. 너도 잘 알잖아?”


“선처를 고려해 보지.”


애매한 대답으로 대화를 마친 아디우토르는 문을 열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은 더 이상 파이니트의 옛 친구가 아닌, 수상 보좌관이 아닌, 반역을 꾀하는 남자일 뿐이었다. 한때나마 누구보다 저 남자를 잘 안다고 자부했던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언제부터 그들의 길이 갈라졌는지를. 그리고 본인은 정녕 올바른가를.




다음 날, 정보국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파이니트의 딸은 거처를 옮겨 아마레 도크트리나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콘트라와 파이니트가 함께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구실 아래 양측은 자연스레 상황을 받아들였다. 특히 남편이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닌지 걱정하던 아마레는 상대가 자신에게 딸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물론 아마레의 친구들은 오히려 이 상황이 비정상이라고 흉을 봤지만.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도 자세히는 몰라. 위에서 내려온 지시란 것만 들었어.”


벙커에서 막 돌아온 아르마는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호위 대상에 눈살을 찌푸렸다. 콘트라의 가족과 파이니트의 딸을 감시하던 분대들도 비슷한 심정이지만 방금 들은 반말이 훨씬 짜증났다. 자존심 강한 경호대로선 개별로 움직이는 아르마는 국장의 신임만 믿고 오만하게 구는 어린 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만 아르마는 그들의 불만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도 지금은 콘트라의 부탁이 더욱 중요했다.


“됐고 이따가 해 지면 저 집에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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