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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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작품등록일 :
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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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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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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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DUMMY

아메리고에 잠복한 이데아의 요원들은 본국의 지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모든 흔적을 지웠다. 알코즈 또한 상대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신속히 발을 빼고 언론의 해명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난처하게 된 쪽은 괜히 이번 일에 개입한 아메리고의 재계와 정계였다. 알코즈 국영 회사의 거대한 자본을 탐내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보관하고 있던 비밀 계약서를 탈취 당한 기업의 경영진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새로운 발판을 마련해 각자의 목적을 이루려던 두 정치인은 살아남기 위해 해명을 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스캔들로 시선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사방이 적인 피기 스톤스와 루치아노 바렐라로선 포위망을 탈출하기 힘들었다.


대통령 앤드류 머레이는 이 틈을 타 영부인의 비리를 무마시켰다. 동시에 그동안 참아 왔던 내각 교체를 단숨에 진행했다. 군 생활을 함께했던 선후배들로 포진,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국정 운영을 가능케 한 것이다. 경제, 외교, 산업 등 각종 분야의 수장 자리에 장성 출신을 임명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국회의 반대가 있었지만 앤드류는 군대에도 재정과 외교 보직이 있다며 일관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군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는 쉬쉬하며 꼬리를 자를 뿐이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야당 의원들은 가만히 있어서 안 된다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여당의 무조건적인 지지, 루치아노 바렐라 계파의 이슈, 야당 자체도 이전 정권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는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물은 싱 와튼이 들인 이상한 시민 단체였다. 수상하리만치 엄청난 머릿수와 자금력을 가졌음에도 상당수의 의원들은 그들의 존재를 묵과했다. 심지어 종교적인 부분에서는 마엘리교에 버금갈 정도로 보수적인 리다이트식 교육을 받고 자란 사우르 안디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윗물이 오염됐는데 아랫물이 맑을 리가 없다. 더욱이 아메리고처럼 혐오란 둑에 가로막혀 갈등이 배출되지 못하는 사회라면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 재계는 재계대로, 정계는 정계대로 위에 서려고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국민은 국민대로 빈부, 성별, 세대, 인종, 학력 등 온갖 부정을 배설한다. 타인을 깎아내리면 자신이 우월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서로가 함께 쇠락하는 길임을 모른다.


그렇게 혐오에 찌든 아메리고를 바르타니아 왕국이 침공하는 건 몇 년 후의 이야기다. 아메리고군의 총구가 바르타니아군이 아닌 같은 아메리고인을 향했다는 것 또한.




“이상이 아메리고에서 발생한 상황 및 대처한 조치입니다. 시급했던지라 각하께 보고드리지 못한 점 다시 한번 죄송스럽습니다.”


“흐음······”


웬일로 깍듯한 정보국장 칼비티움 라쿠스에게 못마땅하다는 눈길을 보내던 수상 앙겔루스 디아볼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네. 어쨌건 우리 이데아가 이득을 본 거 아닌가? 거기다 정보국이 찾은 증거 덕분에 빈 제마가 세운 계획도 어긋났고. 다만···”


“바르타니아 왕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각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이 끊긴 앙겔루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안이 사안인 것도 있겠지만 자신의 보좌관 아디우토르 데키무스를 향한 신임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뭐라고 하나?”


“아메리고에 대해 논의하고 싶답니다. 아무래도 이번 건에 대한 게 아닌가 합니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처리하자고. 어차피 여기서부턴 방관하는 게 최선일 테니. 정보국장은 다음 회의 때 보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각하.”


경례를 한 뒤 집무실에서 나온 칼비티움은 입가가 씰룩거리는 걸 애써 참으며 담배를 꺼냈다. 베란다로 나가 불을 붙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보국장님.”


“보좌관님만하겠습니까.”


“저야 수상 각하의 옆에서 거들면 끝인데요?”


“겸손하십니다.”


대리석로 만들어진 재떨이에 찬찬히 살펴본 칼비티움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제대로 보고하셨음 합니다. 각하께서도 신뢰하는 부하를 굳이 감사하고 싶진 않으실 겁니다.”


“걱정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바쁜데 굳이 스케줄을 비우게 만드신 건 감사하지 않습니다만.”


어느 순간부터 두 남자 사이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양끝에서 당긴 실처럼 팽팽해진 분위기는 묘한 긴장감을 형성했다. 이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직원들은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어 서로에게 떠넘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칼비티움과 아디우토르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요청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움브라를 대체할 기관을 만들기로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보국 내에 관할 부서를 두면 어떤지 건의했었는데 결론이 났는지 궁금합니다.”



“각하께서 판단하실 문제니 제가 뭐라할 수 없습니다. 다음 회의 때 이야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디우토르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칼비티움은 인상을 쓰면서 재떨이에 담배를 짓이겼다. 순간 바람이 불어와 타다 만 담뱃가루가 낙엽처럼 날아갔다. 대리석이 더러워진 게 불만스러운지 가죽 장갑을 꺼내 툭툭 털어낸 아디우토르는 말없이 베란다를 떠났다. 그리고 방금까지 담뱃가루가 있던 자리에는 여러 번 접힌 종이쪽지가 놓여져 있었다.




비밀 벙커로 돌아온 콘트라 도크트리나는 본격적인 국내 공작을 위해 각 부서에 하달할 지령서를 작성하는 중이다. 이미 국내 도처에 배치된 정보국의 요원들은 지시만 떨어지면 언제라도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확실한 건수만 있다면 지지율이 하락하는 데는 한 달이면 충분하다. 정보국이 신경 써야 할 건 현 정부가 막을 수 없는 시점까지 감시망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만약 하나라도 틀어진다면 관련자는 모조리 숙청될 것이다.


솔직히 콘트라의 입장에선 그편이 나았다. 움브라의 동료들을 해한 칼비티움과 그의 부하들이 심판 받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보국은 지금의 사태를 예상이라도 한 듯이 자신의 가족들을 인질로 붙잡고 있다. 거기다 수상이 원수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도 하다. 결국 일단은 앙겔루스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데에 집중한 콘트라다.


“다녀왔어요.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요.”


열린 문 너머에 서 있는 아르마 렐릭타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콘트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가 할 말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어느 정도 함께 지내면서 아르마에 대해 알게 된 콘트라는 서류를 잠시 내려놓고 의자를 돌렸다.


“아마레는요?”


“그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콘트라의 마지막 동료가 탄광에 보내졌다고 해요.”


“마지막 동료······?”


고개를 끄덕인 아르마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어째선지 살짝 올라간 그녀의 입가가 영악하게 느껴지는 콘트라였다.


“누구더라, 포에나라던가?”


한때 정을 통했던 콘트라로선 간만에 듣는 포에나 쿠아이스티오의 소식이 편할 리가 없다. 거기다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 굳이 그녀를 거론하는 아르마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상대는 자신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군요.”


“차갑네요.”


“지금은 수상의 실각이 우선입니다.”


“가족이 잘 지내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는 사람이 할 소린 아니네요.”


피식 웃은 아르마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콘트라와 시선을 교환했다. 살인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 눈동자에 거북해진 거짓된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대화의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단 걸 확신한 여자는 소리내어 웃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남자는 그렇게 욕구에 약한가요?”


“인간은 누구나 욕구에 약한 법입니다. 그것을 이겨 내기 위해···”


대답하기 위해 움직이던 입은 희고 차가운 손가락에 의해 막혔다. 구차한 변명은 듣기 싫다고 말한 아르마는 미간을 좁혔다.


“콘트라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근데 여자 한 명이랑 잤다가 이 꼴이 됐죠. 제가 알아보기론 외국에서도 비슷한 함정이 있었는데 잘 버텼다고 하던데 왜 그랬을까 궁금해요.”


이야기를 계속 듣던 콘트라는 짜증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건 아르마를 향한 분노가 아닌 자신을 향한 증오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부서 회식을 무사히 마쳤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까지 올 이유가 전무하단 말이다.


“훈계하는 것입니까?”


“제가 뭐라고 그래요. 사람 죽이는 것만 배운 주제 누굴 가르친다고.”


“그럼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까도 말했잖아요. 궁금하다고요.”


이번엔 손을 들어 검지로 콘트라의 이마를 꼭 찍은 아르마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있잖아요. 살인밖에 모르는 저라도 재밌는 사랑을 해 보고 싶거든요. 그래서 그쪽같이 대단한 사람조차 욕망에 진 이유가 궁금해요.”


한때는 무서운 적이었지만 지금은 든든한 동료인 아르마 렐릭타의 차가운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복숭아처럼 살짝 붉어진 볼은 부끄럼보단 피에 물들어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콘트라 도크트리나의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다. 마치 포에나 쿠아이스티오와 맺어져선 안 될 인연이 닿았을 때처럼.


남자의 떨리는 손이 미동도 않는 여자의 볼로 향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며 불청객이 들어섰다.


“콘트라, 당장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 망할 수상 놈이 움직이기 전에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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