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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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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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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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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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7년의 밤 (3)

DUMMY

“그 손, 왜 그래요?”

“···별일 아니다.”


검랑의 손에 감긴 붕대를 게슴츠레 노려보던 제갈민은 더 추궁하기를 그만뒀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한 소협의 수련 중에는 끼어들지 말라면서요?”

“···.”


잠시 입을 다물고 제갈민을 바라보던 검랑은 이내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았다.


“네 말이 맞더군.”

“제 말이 맞아요? 뭐가요?”

“탐랑은 지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의 안에는 그 어떤 동기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죽지 못해 살아남았을 뿐··· 시체나 다를 바 없지. 도저히, 탐랑의 역할을─ 그 운명을 짊어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제갈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또 자해했나요?”

“그래. 자기 머리통을 부술 셈인지, 이마가 찢어지도록 머리를 땅에 찧어대더군.”


제갈민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은요?”

“일단은 수혈을 짚어두었다. 한동안은 깨지 않겠지만··· 깨어나면 어찌 될지 모르겠군.”

“···.”


제갈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탐랑이 복수심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

“당장은 좌절감을 크게 느끼고 있지만··· 언젠가는 복수심이 좌절과 슬픔보다 더 커지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결국 지금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동기가 되리라고 여겼다.”


제갈민은 고개를 들어 검랑을 쳐다보았다. 묵묵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검랑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탐랑의 가슴 속은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다.”

“···!”


한 소협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밥도 곧잘 먹고, 반향정위도 빠르게 익혔으며 수련도 빠지지 않았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한 소협은─


“한 소협은··· 이전부터 그랬어요. 고집쟁이에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미 탓에, 늘 억지를 부리지만··· 실은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려고 그렇게 강한 척을 해왔지요.”

“···그 이유를 알고 있나?”

“이유는 많지만···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던 기억이 가장 큰 이유일 거예요.”


검랑은 입을 다물고 제갈민을 쳐다보았다. 가면 탓에,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놀란 기색은 분명했다.


“한 소협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한현보에서 길러진 노비였으니까요. 노비라는 이유로 한현보의 제자들에게 괴롭힘도 많이 당했다고 했고. 한 소협에게 한 소가주님은··· 단순히 무공을 알려준 은인 정도가 아니에요. 그렇게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 누이인 한현보의 꼬마 아가씨도···.”

“···잠깐.”


검랑은 가면의 이마 부분을 짚고서 제갈민의 말을 멈춰 세웠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탐랑이··· 한현보에 버려진 아이였고, 노비다? 그럼, 왜 한씨 성을 쓰고 있지?”


제갈민은 지금까지 이곳에서 자신이 한 번도 득구의 본명을 불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게··· 말하자면 긴데, 한 소협의 본명은 ‘득구(得救)’예요. 성씨는 따로 없고요. 그래서 한 소가주님의 성씨를 따라서···.”

“···듣지 못했다.”


검랑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칼집을 틀어쥐었다.


까드득!


나무로 된 칼집에 금이 가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동천···! 나를 속이다니!”


격분한 검랑의 모습에 제갈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한 소협에게 ‘시우십결’을 가르칠 정도로 수련한··· ‘여 고수’. 당신, 설마···!”


당금 천하에 ‘시우십결’을 수련한 이는 오직 다섯 사람뿐이다. 도중에 수련을 포기해버린 하남제현을 제외하고, 천검과 한 소가주 그리고 한 소협만이 그 검기(劍技)를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


하남제현의 사매이자, 천검의 사저인─


“···.”


검랑은 무언가를 체념한 듯, 가면을 묶은 끈을 풀었다. 그리고 가면을 벗었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과 턱만으로도 짐작은 가능했지만, 그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빼어난 미모였다.


무엇보다도 눈처럼 새하얀 피부 탓에, 그녀의 얼굴에서는 마치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제갈민은 자신이 떠올린 묘사가,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말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였더라? 아, 어물전 방 씨 아저씨.


“은설···!”


검랑은 들고 있던 가면을 탁자에 내려놓고, 잠시 회한에 찬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눈을 돌려 제갈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를 어찌 알지?”



* * *



득구는 악몽을 꾸었다. 악몽 속에서 득구는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치 어물전에 널린 생선들처럼.


꿈속에서 득구는 비빔소면의 고명으로 올라가는 비린 생선처럼 해체당하고, 다시 조립되었다.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팔이 있어야 할 곳에 머리가 붙고 머리가 있어야할 곳에 다리가 붙은 기괴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 득구를 진여송이 와서 비웃었다. 놈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입을 쩍 벌리고 꺽꺽,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고, 온갖 모욕을 해댔다.


득구는 진여송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거나, 꿈속의 진여송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다만, 그간 진여송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진여송은 툭하면 득구에게 침을 뱉었다. 득구가 가까이에 오면 냄새가 난다는 이유였다. 그야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 자연히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진여송은 그런 사정은 고려하지 않았다.


기분 나쁜 일이지만, 이건 그래도 참을만한 일이었다. 그야, 진여송은 득구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현보에서 일하는 다른 노비들이나, 외원에서 지내는 무사들까지도 대부분 쾨쾨한 냄새가 나기 마련이었다. 여벌의 옷을 몇 벌이나 구비 할 만큼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진여송은 그들 모두에게 평등하게 침을 뱉었다.


가주님의 조카이자, 소가주의 혈육이며 광동진가의 적손인 진여송에게 그런 사소한 일로 뭐라 따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랬던 진여송이 본격적으로 득구를 미워하고 적대시하게 된 것은, 가주님의 심부름으로 연무장에 있는 설총을 부르러 갔을 때의 일이 있고부터였다.


그때 설총은 기마보도 제대로 서지 못하는 얼간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다.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 무가(武家)의 제자로 들어온 주제에, 기마보를 오래 서면 다리가 아프고 쥐가 나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징징대는 도련님들이 너무 많았다.


태어난 후로 그때까지 찻잔보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본 일이 없었던 진여송도 그중 하나였다.


설총은 그때 자신을 부르러 나타난 득구를 보고, 묘책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설총은 득구에게 기마보를 서라 명령한 다음, 제자들에게 제안했다. 만약 득구보다 오랫동안 기마보를 버티는 이가 있다면, 앞으로의 모든 체력단련에서 열외로 치겠다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홉 살의 노비 소년을 우습게 본 제자들은 모두가 그 제안에 동의했다. 뜬금없이 기마보를 서게 된 득구는 불평했지만,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여주겠다는 이야기에 홀랑 넘어가고 말았다.


물론, 그날 득구보다 더 오래 기마보를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솔직한 이야기로, 득구는 억울했다. 그야, 득구는 딱히 오래 버틴 게 아니었으니까. 한 시진은 무슨, 한 식경(약 30분) 정도 버텼을까?


득구로서는 땀이 좀 날까 싶은 정도였을 때, 죄 나가떨어져 버린 걸 뭐 어쩌겠는가?


물론, 쓸데없이 입방정을 놀리긴 했다.


이런 약골 도련님들이 무과에 붙어서 국방을 책임진다니 나라의 미래가 안 보인다─라든가, 오랑캐 놈들이 참 좋아하겠다─라든가.


악의는 없었다.


단지, 노비들이나 외원 무사들이 뒤에서 시시덕거리며 주고받는 농담을 저 도련님들 앞에서 대놓고 했을 뿐이다. 저들이 득구에게 대놓고 침을 뱉고, 온갖 멸시와 조롱을 대놓고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아직 열 살도 안 된 치기 어린 소년이 으레 할 법한, 조금은 싸가지 없는 장난.


그날 저녁, 득구는 처음으로 뒷간에서 똥물을 맞았다.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진여송을 주축으로 한 제자들의 괴롭힘은 득구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득구의 주변에 있다면 그게 누구든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송 여사가 겁간당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단지 다른 여사들보다 조금 더 득구를 잘 챙겨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놈들은 송 여사가 기절할 때까지 때린 다음 겁탈까지 해버렸다.


송 여사의 참혹한 몰골을 보게 된 득구는, 홍위윤이 아가씨를 몰래 꼬드겨 데려갔을 때 저지르려 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단지, 짓궂은 농담을 한마디··· 아니 두 마디 했을 뿐인데.


그냥 남들보다 조금 눈치 없이 행동했을 뿐인데, 이런 일들이 벌어져도 되는가?


결국 참다못해 폭발한 득구는 진여송을 찾아갔다. 그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괴롭힐 거면 나만 괴롭히면 되잖아!! 내가 미운 거잖아!! 도대체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이 지랄 염병을 떨 생각인데?!”


라고 묻는 득구에게, 진여송은 절대 잊을 수 없는 표정으로 절대 잊을 수 없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네가 죽을 때까지, 너를 아끼는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거다.”

“···왜?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것이 감히 노비 주제에, 광동진가의 적손인 나 진여송을 능멸한 대가다. 이게 너의 지옥이고, 나 진여송의 판결이다.”


마치 위대한 판관이라도 된 것 같은 얼굴로, 진여송은 그렇게 말했다.


기껏해야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든가, 기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겨 맞으라는 등의 요구조건을 생각했던 득구로서는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득구는 깨달았다.


어떤 인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홍위윤이 그랬고,

진여송도 그렇지만···


득구 자신 또한, 그렇다는 것을.


어쩌면,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가 날 버리고 떠나버린 것도─


내가 재앙의 씨앗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몇 가지는 확실히 인상에 남아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이후로 자신과 어머니가 편하고 행복하게 지낸 일이 없었다는 것 말이다.


항상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힘들었다.


매번 어딘가로 쫓기듯 돌아다녀야 했고, 결국 거지 소굴에까지 들어가서 살아야 했다.


심지어 그 거지 소굴에서조차 환영받을 수 없었다. 거기서 어머니는 어떤 남자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었고, 기어코 그 거지들에게조차 쫓겨나 도망쳐야 했었다.


그래, 그랬다.

그랬던 거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한현보에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리라.


득구 자신과 함께 지낸다면, 결코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을 테니까.


“···그래, 좋아.”

“뭐가 좋다는 것이지? 네게는 호오(好惡)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너는,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이 천한 노비 놈아.”

“너희가 바라는 재앙이 되어줄게. 내가··· 미친개가 되어줄게.”


득구는 진여송을 때려눕혔다. 진여송이 기절할 때까지 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울고불고,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어도 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때, 득구는 진짜로 ‘미친개’가 될 생각이었다.


앞으로의 일이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른다. 그리고 계속 모르고 살자. 그래, 그저 흐르는 대로 그냥 살자. 좆같은 새끼 하나쯤 뒤져도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좆같은 세상이니까.


그렇게 돌을 집어들고, 진여송의 대가리를 완전히 깨버리려는 때였다.


“···안 된다.”


그런 득구의 손을 잡아 말린 것은, 설총이었다.


“···난, 네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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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 87화. 회기서문(回其西門) (2) 24.08.06 126 2 15쪽
296 87화. 회기서문(回其西門) (1) 24.08.05 129 1 13쪽
295 86화. 자각(自覺) (4) 24.08.02 135 1 14쪽
294 86화. 자각(自覺) (3) +2 24.08.01 127 2 13쪽
293 86화. 자각(自覺) (2) 24.07.31 128 2 14쪽
292 86화. 자각(自覺) (1) 24.07.30 141 3 14쪽
291 85화. 불비불명(不飛不鳴) (2) 24.07.29 116 1 14쪽
290 85화. 불비불명(不飛不鳴) (1) 24.07.26 137 1 12쪽
289 84화. 7년의 밤 (7) +1 24.07.25 132 2 16쪽
288 84화. 7년의 밤 (6) 24.07.24 144 2 13쪽
287 84화. 7년의 밤 (5) 24.07.22 118 2 16쪽
286 84화. 7년의 밤 (4) 24.07.19 144 2 15쪽
» 84화. 7년의 밤 (3) 24.07.18 122 1 12쪽
284 84화. 7년의 밤 (2) 24.07.17 144 2 14쪽
283 84화. 7년의 밤 (1) 24.07.16 122 3 14쪽
282 83화. BAD END. (4) +2 24.07.09 161 3 14쪽
281 83화. BAD END. (3) 24.07.08 125 3 13쪽
280 83화. BAD END. (2) 24.07.05 142 1 14쪽
279 83화. BAD END. (1) +2 24.07.04 143 4 14쪽
278 82화. 유산(遺産) (4) 24.07.03 134 2 15쪽
277 82화. 유산(遺産) (3) +2 24.07.02 142 4 14쪽
276 82화. 유산(遺産) (2) 24.07.01 148 3 12쪽
275 82화. 유산(遺産) (1) 24.06.28 149 3 13쪽
274 81화. 운명이 부르는 소리 (4) 24.06.27 150 2 15쪽
273 81화. 운명이 부르는 소리 (3) 24.06.26 136 2 13쪽
272 81화. 운명이 부르는 소리 (2) 24.06.25 135 3 15쪽
271 81화. 운명이 부르는 소리 (1) 24.06.24 160 3 14쪽
270 80화. 꽃무리 모두 진 겨울에야, 매화꽃은 홀로 곱게 피어난다. (3) 24.06.21 14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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