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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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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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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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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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 마법

DUMMY

훈련소에서의 첫날밤.

배식으로 나온 음식을 본 신병들은 깜짝 놀랐다.

버터 향이 나는 고소한 빵과 풍성한 식감의 비프 수프.

함께 곁들어진 싱싱한 과일과 채소는 덤이었다.


“미, 믿을 수 없어.”

“이건 귀족들이나 즐기는 식단 아니야?”


알아보니 입소식이라고 나름 신경 써서 준비한 만찬이라고 했다.

평소에는 이보단 더 빈약하게 나오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거친 곡물을 빻아서 죽으로 먹어왔던 빈민층에게는 충분한 희소식이었다.


“마, 말뚝 박을까?”

“진정해. 일단 그릇부터 비우자.”


함께 자리에 앉은 라일라도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히 굶주리고 살았는지, 눈앞의 만찬을 보고 화색이 돌았다.


“이곳은 천국일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식량 보급이 원활한 걸 제외하면, 최전방은 지옥에 가깝다.

하지만 당장


“죽도록 연병장 뛴 보람이 있었군 그래.”

“야밤에 탈영할까 고민했는데, 생각 좀 더 해봐야겠어.”

“이참에 고생해서 그럴듯한 계급장 좀 달아볼까? 여기선 노력하면 최소한 대우는 받을 수 있어.”


혹독한 훈련으로 기가 질려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역시 만찬을 베푸는 것만큼 병영의 사기를 올리는 확실한 수단은 전무하다.


“그런데 자네는 어디 출신인가? 나는 북서쪽의 탄광 구역에서 왔네만.”

“응? 보면 모르나? 중남부의 곡창지대에서 소작세를 못 내고 붙잡혀왔네.”

“나는 어업지대에서 일하던 선원일세. 밀수에 손을 댔다가 걸려서 이 모양이 됐지.”

“상업에 종사했던 이는 나뿐인가? 인생을 건 도박을 했다가 거하게 말아먹고 이리로 도망쳐왔소.”


주린 배를 채우고 나니 자연스레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대화 주제는 제각각이었다.

성벽 도시는 고대 왕국의 중심지였던 만큼, 광활한 내부 영역을 자랑한다.

다양한 구역의 출신이 존재했고 생업의 종류도 천차만별이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무잔으로 식탁을 세게 내리쳤다.


타악!


일순간 침묵이 이어지며 모두의 눈길이 한쪽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던 붉은 머리칼의 소녀였다.


“참으로 한심하네요. 이런 상황에 여유롭게 잡담이나 하고 있고.”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자신에게 쏠리는 이목에도 굴하지 않고 일갈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왔다.


“휴식시간에 서로 안면 좀 익히는 게 뭐가 문제지, 요조숙녀 님?”


사내의 말대로, 대다수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재미있군.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이야.’


나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를 천천히 훑어봤다.

분명, 아까 신고식에서 훈련 교관에게 보직과 관련한 질문을 했었지.

아마도 견습 마법사의 신분으로 여기 온 것일 터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주위를 겉도는 마력의 순환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언제든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신들은 저 성벽이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마물의 전술은 날이 갈수록 진보하고 있다고요.”


소녀가 상황의 심각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이들이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 성벽에 오를 준비조차 하지 못한 신병들이었다.

불만 섞인 눈초리가 다수를 형성하자, 사내는 의기양양해졌다.


“보아하니 마법사 지망생인 것 같은데, 그렇게 깔보는 시선으로 말하는 건 좋지 않아. 여기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반쯤은 협박성의 발언이었다.

소녀가 아직 어리기도 하고, 마법을 쓰더라도 시전 중에 충분히 제압 가능하다.

흑심이 있는지 혀를 낼름거리는 사내의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보기에 좋지 않군.’


이번 기수엔 조금 질 나쁜 녀석들이 섞여 들어온 것 같다.

아까 오가던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정말로 그러했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해서 지하 감옥 대신 최전방을 선택한 경우가 적지 않다.

놈들이 처음부터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두면, 부대의 기강을 잡기가 어려워질 터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실 건가요?”

“조금만 더 지켜보고.”


보아하니, 적당히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곳을 담당하는 부관으로서 어디까지 선을 넘는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요? 제 몸에 손이라도 댔다간 이걸로 통구이를 만들어드리겠어요.”


소녀가 한손에 현란한 불꽃을 피어올렸다.

그러자 사내는 한 발짝 물러서며 씨익 웃어보인다.


“어이, 진정하라고. 단순한 장난에 흥분할 것까지는 없잖아?”


정말로 공격하면 규율을 어긴 셈이 된다고?

그런 심산으로 소녀의 주위를 맴돌며 농을 부린다.

사내의 모습을 보며 다른 신병들이 키득거렸고, 소녀는 수치심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이런 꼴을 당하자고 여기까지 온 줄···”


고개를 푹 숙인 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결국, 보다 못한 누군가가 나서서 제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봐요, 어린 소녀를 상대로 너무 지나치잖아요!”


순박해 보이는 이미지의 시골 청년이었다.

세상물정 모르고 밭이나 갈다 왔을 것 같은 생김새에 사내는 가소롭단 표정을 지었다.


“응? 뭐가? 내가 하는 행동에 불만이라도 있어? 뒷골목의 불량배 같아?”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

“오호라! 이제 알겠다! 너도 이 숙녀 분하고 친분을 쌓아 보려는 거구나! 그러다 진도 좀 나가면 밤에 몰래 불러서···”

“그만, 거기까지 해라.”


이정도면 되겠다 생각하고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사내는 말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봤다.


“이번엔 또 누구? 여긴 어린애가 왜 이렇게 많···”


나와 눈이 마주친 사내는 투덜거리려다 순간 표정이 경직되었다.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꼈는지 흰자위를 크게 뜬 채로 입을 벌린다.


“허억!”


내가 방금 건 마법의 위력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흑마법으로 유명한 엘카만 가문에서 비밀리에 연구해온 분야.

세간에서는 ‘심상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어떤 마법은 사람의 내면을 파고들지.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아내고 지배할 수 있어.”


소울 웨폰의 구현 원리도 심상 마법과 관련이 있었다.

아무튼, 이 흑마법은 사정상 소란을 피우기 곤란할 때 용이하다.

일차원적인 욕망으로 가득할 뿐인 불량배를 상대로는 심신을 쉽게 구속할 수 있다.


“푸, 풀어줘. 제발.”


사내가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하며 목을 움켜잡았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사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앞으로 또 이런 식의 행동을 하면 그때는 정말로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알겠지?”

“네, 네!”


사내는 더 버티기 어려운지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내가 손을 까딱하며 뒤돌아서자, 그제야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주위의 이목이 너무 집중되었네요.”

“신경 쓸 것 없어.”


나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저녁의 만찬을 천천히 다시 즐기기 시작했다.


* * *


날이 저물었지만, 숙소에 들어가 편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취침시간이 되면 2인1조로 돌아가며 야간 경계근무를 서야 하는 탓이었다.

부관이라는 이유로 열외할 수 있었지만, 라일라만 숙소에 남겨두고 나왔다.

마법사 지망생인 붉은 머리칼의 소녀와 조금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다.


“설마 당신과 같은 조가 될 줄은 몰랐네요.”


붉은색 머리칼의 소녀가 경계진지에 나란히 섰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납탄이 장전된 머스킷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마법사라고 해도, 기본적인 조작법 정도는 알아야 한단 이유로 지급된 것이었다.


“내가 말 상대여서 불만인 거야? 나이차가 그리 많이 나는 편은 아닐 텐데.”

“아, 아니요. 꼭 그런 건 아닌데요···”


소녀는 말끝을 흐렸다.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화제를 조금 돌리기로 했다.


“너는 어느 구역에서 왔어? 보아하니 누군가에게 마법을 배운 것 같던데.”

“제 이름은 카린 에스터리츠. 이곳의 유망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사생아예요.”


분위기를 조금 띄우려 한건데 도리어 무거워졌다.

사생아라.

실은 그녀와 같은 케이스를 많이 봐왔다.


“에스터리츠는 마법사 가문이었나 보네? 너는 그 재능을 물려받은 거고.”

“네, 하지만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기회는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로 오게 되었죠.”


에스터리츠의 성씨를 포기하는 대가로 견습 마법사가 되기 위한 추천서를 받은 것이었다.

민감한 내용이었을 테니 훈련 교관이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법했다.


“그러는 당신은 어쩌다 여기로 오게 되었나요? 외지인이라고 들었는데요.”


이번엔 카린이 질문을 해왔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신분을 감추고 있어서 적당히 돌려서 말할 필요가 있다.


“동료들과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곤란한 일을 당했어.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였지.”

“그런가요? 운이 좋았네요. 성벽 밖은 어디든 마물이 넘쳐난다고 들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잠시 잡담을 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예전에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 아래에서 성벽 너머로 내리앉은 어둠을 바라보며.

잠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소란이 벌어졌다.


“마물의 기습이다!”

“어서 지휘관 님에게 보고해!”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기상 나팔이 불었다.

훈련소로부터 조금 떨어진 성채 진지에서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마물이라고?”

“야밤을 틈타 잠자는 병사들을 공격해오려는 수작이에요.”


속셈이 뻔히 보인다는 듯 카린이 이를 갈았다.

어깨에 맨 머스킷을 진지에 비스듬히 내려놓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마법만으로 녀석들과 상대하려고? 하지만 아직 실력이 능숙하지 못하잖아.”

“납탄 쏘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건 마찬가지예요.”


어설픈 무기에 의지할 바엔 확실한 재능이 있는 마법으로 승부하는 편이 옳다.

그 생각이 옳았기에 나도 머스킷을 내려놨다.


“공격 마법은 얼마나 쓸 줄 알아?”

“그냥 한두 가지 정도요. 어깨 너머로 얼핏 배운 것에 불과하지만요.”


그만하면 충분히 자질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전투 자세를 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더니 거무스레한 무언가가 전방의 시야에 비쳤다.

밤중이라 실루엣이 흐릿하지만 확실한 건 인영은 아니었다.

최전방에서 마주친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면 나머지 가능성은 오직 하나다.


“쉽게 당해줄줄 알고!”


한손을 들어올린 카린이 불꽃송이를 피워올렸다.

이후 폭발음과 함께 마물의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멎는다.


“명중했어요! 봐요!”


카린이 자신의 승리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모습이 동료였던 에리나와 잠시나마 겹쳐보인다.

원소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하프 엘프.

그녀도 이렇게 항상 자신감이 넘쳤었다.


‘하지만 에리나는 방심하지 않았어. 우쭐대면서도 마지막까지 빈틈을 내주지 않았지.’


아무래도 카린에게는 쓰라린 교훈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내게는 현재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마음속으로 한숨을 쉰 후, 나는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확실히 끝을 맺기 전에는 조심하도록 해. 표적을 놓칠 수 있으니까.”

“무슨 소리에요? 분명히 제대로 한 방 먹여줬···”


다시 고개를 돌린 카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쓰러뜨렸다 여긴 마물의 형체가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 대체 어디야?!”


가녀린 목소리로부터 당혹감이 묻어나왔다.

나는 말없이 감각을 곤두세웠다.


‘공격해온 상대의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면 이유는 간단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급습해온다.

녀석은 움직임이 빠른 개체이므로 충분히 가능했다.


“피해!”


지척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나는 순간적으로 카린을 잡아끌었다.

바로 직후, 예리한 발톱이 경계진지의 석면을 박살내버렸다.


콰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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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3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6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7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6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1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20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6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30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1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1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2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1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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