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오크 군터.(2)
“우웃!”
제드는 깜짝 놀라서 물러났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가슴이 뻥 뚫린 오크가 눈을 뜨고 쳐다보는 건 말도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노예 검투사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
노예들은 다들 두려워하고 있다.
제드처럼 기겁한 게 아니라, 단지 두려워할 뿐이다.
‘오크가 되살아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그게 아니라면 노예 검투사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
“쿠룩!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 일부러 져주는 건 기분 더러운 일이긴 하지만.”
군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에선 여전히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잭!”
“네, 네! 부관리관님!”
군터의 부름을 받은 노예 검투사는 건장한 체격에 창을 쓰는 사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답하는 모습에서, 군터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컵을 가져와라. 쿠루룩!”
“아! 알겠습니다!”
잭은 미친 듯이 달려가더니, 나무로 된 컵을 들고 와 군터에게 두 손으로 바쳤다.
“뭘 하는 거지?”
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컵을 받아 든 군터가 컵을 상처 난 가슴에 대고서, 피를 받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 노예 검투장에, 쿠룩! 얼마나 있었을 것 같아?”
“나야 모르지. 알아야 하는 거냐?”
“굳이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 십 년. 쿠룩! 이 검투장이 생겼을 때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다.”
컵에 피가 가득 차오르기도 전에, 가슴에서 핏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
제드가 눈을 크게 떴다.
창에 관통된 상처가 아무는 현상이 눈으로 확인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오크의 회복 속도가 인간보다 빠르다고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닐 것 같은데··· 트롤도 이렇지 않았어.’
그는 귀족가의 노예로 있으면서, 몬스터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보았던 것은 트롤.
재생력이 몬스터 중에 최고라던 놈이다.
하지만 트롤조차도 군터처럼 눈에 띄게 회복하지 못했다.
“쿠룩! 십 년 동안 수많은 인간 노예를 봤지.”
“그랬겠지.”
“너 같은 놈은 빨리 뒈져 버린다. 쿠룩! 어쩌면 그 개 같은 성질 때문에, 버림받은 것일 수도 있겠어. 인간의 면상이 그 정도면 훌륭한 축에 속할 텐데 말이야.”
“아니, 난 절대로 죽지 않을 거다. 100승을 채우면 자유의 몸이 된다는 얘길 들어버렸거든.”
고개를 흔드는 제드.
노예로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처음부터 노예의 신분이었던 것이 아니기도 했고.
자유를 향한 갈망.
강해지기만 한다면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건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었다.
“쿠룩! 100승? 푸하하하! 꿈도 야무지네, 애송이 주제에. 좋아, 그렇다면 이걸 마셔라.”
“···내가 그걸 왜 마셔야 하는 거지?”
“쿠룩! 네 허약한 몸뚱이로는 다음번 시합에서 뒈질 테니까. 왼쪽 어깨가 망가졌다고 해서, 너를 시합장에 내보내지 않을 거로 생각하나?”
“···”
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현재 불안해하는 것도 그런 부분이었다.
노예가 인간 취급을 받는 건 드문 일이었고, 특히 노예 검투사는 소모품처럼 생각하는 게 보통이었다.
조금 전처럼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다섯 명의 노예를 사자의 노리개로 던졌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걸 마시면 뭐가 달라지지?”
“회복 속도가 빨라지지. 물론 나처럼 되지는 않아. 쿠룩!”
군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싫으면 관두라는 의미였다.
“!”
제드는 다른 노예 검투사들을 살폈다.
두려워하던 놈들이, 어느새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면,
“줘.”
제드가 컵을 받아 들고는 단숨에 쭉 들이켰다.
온기가 남은 군터의 피는 역했다.
“나한테 왜 관심을 두는지 물어봐도 되나?”
핏물을 깨끗이 비운 제드는 컵을 돌려주면서 군터와 시선을 맞췄다.
“쿠룩!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내가 죽은 줄 알고서 눈을 감겨주려던 놈이기도 하지. 그건 여기··· 아니 나의 규칙이다. 저놈들은 하나같이 날 내버려뒀던 놈들이지.”
군터가 슬쩍 다가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상한 규칙인데?”
“쿠룩! 일종의 변덕이다. 너도 10년쯤 이런 곳에서 지내보면 알 거야. 제정신으로 지내긴 어렵지. 쿠루룩! 100승을 채워도 나는 풀려날 수 없기도 하고. 내 손으로 키운 놈이 100승을 채워서 풀려나는 걸 보고 싶기도 하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군터였다.
“키워? 나를?”
“그래, 쿠룩! 이것도 일종의 변덕이지. 운 좋은 줄 알아, 꼬맹이. 쿠루룩! 내가 독한 놈을 좋아하거든.”
군터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부탁한다.”
잠시 고민하던 제드가 고개를 꾸뻑 숙였다.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쿠룩! 내일부터 각오해야 할 거다.”
군터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제드의 뺨을 툭 건드리고서 지나갔다.
제드는 멀어지는 군터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생존율을 높일 수 있다면, 강한 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상대가 오크건 뭐건 상관없다.
군터는 강자니까.
“···”
붕대를 감은 왼쪽 어깨가 간질거린다.
***
제드는 윗옷을 벗은 채로, 방패와 쇼트 소드라 부르는 짧은 검을 들고서 훈련하는 중이다.
노예 검투장에 들어와서 선택한 무기였으며, 사자를 해치울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아예 방패와 쇼트 소드를 주무기로 사용하리라 결정한 것이기도 하다.
자유의 몸이 되고 싶다.
반드시 100승을 채워서 노예 검투장에서 챔피언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한다.
노예 검투장에서 10년이나 살아남았다는 군터에게 키워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마냥 허황된 꿈만은 아닐 거로 믿었다.
하지만,
“···뭐 빠지게 이기면 뭐 하겠냐. 내 이마에 인장 보이지? 이걸 지워주지 않더라. 쿠룩! 뭐라고 했더라? 어차피 자유의 몸이 되어도 몬스터라서 성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죽을 거라나? 시발, 그걸 지들이 왜 걱정해? 너 엠프론 남작령에서 왔다고 했지?”
군터는 훈련을 도와준다기보다는 옆에서 신세 한탄을 하고 있었다.
“헉, 헉··· 그래.”
제드는 방패를 움켜쥔 채로 쇼트 소드를 휘두르면서 대답했다.
사자에게 물렸던 어깨의 상처는 상당히 좋아졌다.
방패를 휘두르는 동작과 같은 큰 동작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쿠룩! 나이도 그렇고 생긴 것도 그렇고, 벌써 폐기당할 놈은 아니던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냐? 뭐, 너와 같이 온 녀석들도 버려지기에는 좀 이르긴 했다만.”
“내가 좀 생기긴 했잖아? 엠프론 남작 놈의 마누라를 꼬셨거든. 거기서 제일 돈이 많은 놈이 그 자식이니까.”
숨을 헐떡이면서 쇼트 소드를 휘두르던 제드가, 힘든 와중에도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쿠룩! 귀족의 여자를? 미쳤군.”
“누군 그러고 싶어서 했겠어? 양아치 새끼들이 시키니까 한 거지. 아무튼, 남작이 어떻게 알았는지 밖에서 만나다가 딱 걸렸지. 그랬더니 감옥에 가두고 매일 같이 고문하다가, 팔아넘기더군.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제드가 전방을 노려보면서 쇼트 소드를 사선으로 올려 베었다.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벌거벗은 상체에 그득한 흉터만 봐도 알겠다.
어쩌면 저런 흉터 때문에, 곱상한 얼굴임에도 강인한 전사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히려 노예 검투장에서 살아가기엔 장점이라고 해야 할까?
저만한 상처를 보고도 함부로 제드를 무시할 만한 놈은 없을 것 같았다.
“쿠룩! 정말 용케 살아남았군. 보통은 사형시키지 않아? 귀족이라면 명예 때문에라도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텐데?”
“사형보다 여기서 검투장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더 끔찍하지 않아? 엠프론 남작이 사형보다 더한 고통을 받다가 죽어버리라고 하더라. 후웁!”
대답하는 제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말을 걸어왔으니까.
“쿠룩! 하긴, 어쩌면 사형당하는 게 더 깔끔할 수도 있겠지. 그나저나 네놈은 참 간이 크구나. 귀족의 마누라를 꼬시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군터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귀족은 명예에 살고 명예 때문에 죽는다는 얘기가 있다.
위험천만한 짓을 한 제드가 즉결 처형당하지 않은 게 용하다.
“헉, 후웁! 말했잖아! 나라고 좋아서 한 짓이겠어? 보스 놈이 성공 못하면 죽인다는데 어쩌겠어? 뒷세계 놈들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면 그런 얘기 못 한다.”
“쿠룩··· 제비족 뭐 그런 거였냐?”
군터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헉! 헉! 고상하게 애인 대행이라는 말도 있다만? 그리고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내가 힘만 있었어도, 보스놈 목을 땄겠지. 씁!”
“쿠룩!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족가의 여자들을 노려? 정말 살아 있는 게 신기하군.”
군터가 혀를 내둘렀다.
심상치 않은 놈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겁 없이 귀족을 건드렸다니···
“말했잖아, 엠프론 남작은 돈이 많아. 보스 자식이 마누라를 꼬셔서 금고 열쇠가 있는 곳을 알아 오라고 시켰거든. 시발, 다시 생각해 봐도 열 받네. 걸리니까 보스 놈이 구해주지도 않더라고, 썅!”
얘기하다가 흥분했는지, 제드가 숨을 헐떡이며 욕을 해댔다.
“쿠룩! 그래서 강해지고 싶은 이유가 놈들한테 복수하고 싶어서냐?!”
“복수는 무슨,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하잖아. 정말 100승을 채운 뒤에라면 모르겠지만. 헉, 헉··· 나도 하나만 물어보자.”
“쿠룩! 얘기해.”
“넌, 헉, 헉··· 어째서 죽지 않지? 오크라도 그 정도 상처면 죽는 게 당연하지 않아?”
제드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방패로 상체를 가리고 쇼트 소드를 휘두르는 훈련은 멈추지 않았다.
어제, 군터가 살아나는 모습에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애써 담담한 척하긴 했지만.
“쿠룩! 여기 내 가슴에 새겨진 타투 보이나?”
군터가 손으로 왼쪽 가슴과 어깨가 만나는 지점에 새겨진 타투를 가리켰다.
전체적으로는 동그란 형태였고,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안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조금 큰 점으로 보일 뿐이었다.
“헉, 헉··· 그게 타투였나?”
“쿠루룩! 위대한 전사만이 받을 수 있는 타투다. 역대 오크 전사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전해지지. 선조들의 영혼이 나를 지켜준다. 쿠룩! 목이 잘리지 않는 한 나는 몇 번이고 살아날 수 있지.”
군터가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헉, 헉! 대단한데? 그런데 어쩌다가 노예가 된 거냐.”
“쿠···룩! 자존심이 상하는 질문이군. 나는 족장의 명령으로 배를 타고 이곳에 오다가 난파당했지. 여기서 대략 이틀거리였던가? 바위산을 넘다가, 붉은 바위에 새겨진 이상한 마법진을 건드렸지.”
“그래서? 헉, 헉···”
제드가 조금은 흥미로워지려는 얘기에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오랫동안 훈련하느라 숨이 턱턱 막혔지만, 그 이상으로 군터의 얘기는 흥미로웠다.
마법이라는 건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제드였으니까.
아니, 한 번 마법을 경험한 적이 있기는 하다.
이마에 마법사가 ‘노예의 인장’을 새기던 그때.
“거기에는 인간의 뼈다귀가 어마어마하게 널렸었지. 헤매고 헤매다가 겨우 빠져나왔을 때는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도 없었어. 그러다가 여기 노예상 놈을 만났지. 당시에는 배가 고파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잡혔지.”
군터는 씁쓸한 얼굴로 이마에 새겨진 ‘노예의 인장’을 더듬었다.
허락 없이 검투장을 벗어나면 머릿속에서 폭발이 일어나 죽는, 저주받은 인장이 바로 그거다.
“얘기가 너무 싱겁잖아! 헉, 헉··· 그리고 나를 키워 준다더니 대체 언제 가르쳐 주는 거냐!”
금방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제드가 쇼트 소드를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군터의 입가에 미소가 깃든 것은 그때였다.
“그거다!”
“···뭐?”
군터가 소리치는 것에 놀란 제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검을 휘두르던 감각! 쿠룩! 절대로 잊지 마라!”
“!?”
“다시! 조금 전처럼 똑같이 해봐!”
어리둥절해하는 제드를 다그치는 군터였다.
“그, 그래!”
제드는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쇼트 소드를 사선으로 그었다.
씨잇!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파공음.
그렇게 힘껏 휘두를 때도 발생하지 않았던 파공음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
제드는 본능적으로 다시 쇼트 소드를 휘둘렀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감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옆에서 귀찮게 말을 걸어대던 군터조차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제드의 집중력이 그만큼 굉장했던 것이기도 하고.
“으아아아! 헉, 헉, 허억, 헉···”
수없이 사선 베기를 수련하던 제드가, 마침내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전력을 다해서 수련한 까닭이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그때,
“쿠룩! 뭔가 감이 좀 오나?”
“···방금 뭐였지?”
숨이 가라앉은 제드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물었다.
“네 녀석은 너무 뻣뻣했어. 몸에서 힘을 빼내야 했지. 쿠룩! 빨리 지치게 하려면 계속 말을 시키는 게 최고였다. 덕분에 잘 해냈잖아. 그렇지?”
“···”
제드가 피식 웃었다.
옆에서 잡소리나 해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니···
“글은 읽을 줄 아나?”
“귀족가의 여자들을 꼬시려면 글은 기본으로 배워야지. 보스한테 처맞아가면서 배웠다.”
당시를 떠올린 제드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쿠룩! 잘 됐군. 받아라. 마법진에 갇혔을 때 얻은 거다. 갑옷을 입은 인간 뼈다귀가 가지고 있던 거다. 나하고는 안 맞더군.”
군터가 아쉽다는 듯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제드의 가슴에 툭 던졌다.
얇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이었는데, 낡아빠진 겉표지에 적힌 제목을 읽은 제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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