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전 후 괴물 엔지니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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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動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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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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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정말 나쁜 사람임다.

DUMMY

옥동 아이파크 2차.

울산 최고의 집값을 자랑하는 아파트 단지.

도현이 매수한 집은, 그 중에서도 RR 매물이라 불리는 로얄동, 로얄층이었다.


[김옥지 님께 100,000,000원을 이체 했습니다.]

[김옥지 님께 100,000,000원을 이체 했습니다.]

[김옥지 님께 100,000,000원을 이체 했습니다.]

[김옥지 님께 100,000,000원을 이체 했습니다.]

[김옥지 님께 55,000,000원을 이체 했습니다.]


덜덜덜-

은행 이체 버튼을 누르는 도현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4억 5천 5백만원.

그가 옥동 아이파크를 매수하는데 쓴 금액이었다.

5년 동안 일해서 모은 돈이 7천 만원이었는데.

고작 1년 동안 번 돈으로 울산 최고가 아파트를 매수할 수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축하드립니다."

법무사와 공인중개사의 축하를 받으며 부동산 매수 계약서를 챙겼다.

취득세와 법무사비, 중개 수수료로 천 만원에 가까운 돈을 또 이체하고 나서야 도현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요즘은 OTP만 있으면 1억씩 이체할 수 있구나...."

한 번에 1억 씩, 총 다섯 번. 5억.

처음 OTP를 만들 때 까지만 해도, 이만한 돈을 하루에 이체할 일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막상 돈을 이체하고 나니, 생각보다 기분이 덤덤했다.

".... 지금 쯤 놀이터에 있겠네."

현서에게 한시라도 빨리 새 집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이게 우리 집이라고오?"

새 집에 방문한 현서의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응. 입주 청소 끝나면, 다음 주 부터 우리가 살 집이야."

"짱 넓어!"

"넓다 뿐이겠어? 현서 방도 있다?"

"진짜아아아?"

다람쥐처럼 살이 통통하게 오른 두 뺨이 떨렸다.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도현을 올려다 보는 현서의 모습은, 천사 그 자체였는데.

읏차-

도현은 그런 현서를 안아 들고 창 밖을 바라 보았다. 호텔에서나 봤던 통짜 유리 창 너머로 울산 대공원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살기 좋은 동네.

안전한 동네.

'내가 진짜 여기 살 수 있는 건가.'

그제야 이사를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꿈에나 그리던 옥동의 주민이 된 것이다.




인천 공항.

도현은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즈니스 클래스.

일인 당 왕복 이백 만원이 넘어가는 시트에 몸을 뉘이니, 옆자리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 함다."

뽀꿀람 알라메드.

인도 출신인 그가 도현의 가이드 겸 부사수 역할로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싱숭생숭? 고향에 가는 건데 기분 안 좋아?"

"고향에 가는 게 꼭 기분이 좋을 필요는 없지 않슴까?"

"....... 그건 그렇지."

도현은 대답을 한 후 뽀꿀람을 바라 보았다.

침울한 표정으로 시트에 고개를 묻고 있는 뽀꿀람.

'뭔가 사연이 있나 보네.'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사연 하나 쯤은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때.

"식사 주문 도와 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이 다가와 기내식 메뉴판을 건넸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모델 뺨치는 외모의 여성들.

뽀꿀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헤벌레- 풀어졌다.

'..... 사연은 무슨.'

도현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저는... 비빔빱으로 하겠씀다."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연필의 꽃말이 뭔지 아심까?"

"......네?"

"나, 당씬에게 흑심 품어써."


도현은 청동색 그릇에 담긴 비빔밥을 싹싹 긁어 먹었다.

'한국 항공 기내식은 비빔밥이 짱이라더니..'

게이버 블로그에서 본 리뷰대로, 비빔밥은 근본 그 자체였는데.

이름도 다 외우기 힘든 와인으로 입가심을 한 도현은, 이내 노트북을 켰다.

[Z엔진 리툴링 품종 리스트.]

[품종 별 관세 및 운송료 리스트.]

김원식이 보내 준, 기술 사양서를 리체크 하기 위해서였다.

'최소 억 단위의 계약이 될 거야.'

어쩌면 단위가 더 커질지도 몰랐다.

아니, 최대한 단위를 키우는 게 이득이었다. 얼마 어치를 사오던 간에, 대한민국에서 평균 거래되는 시세보다 싸게 사오기만 하면 60%는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욕심이 나네.'

옥동 아이파크에 머무른 건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괜히 옥동을 울산 최고로 치는 게 아니었다.

편리한 교통.

직주 근접.

무엇보다, 동네 자체에 유해 시설이 없어서 마음 놓고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점까지.

욕심이 났다.

울산도 이럴진데, 부산 대구는 과연 어떨까.

서울은 지하철이 잘 돼 있어서 차를 탈 필요가 없다는데, 정말일까.

나도, 언젠간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그렇듯 '내가 하기 나름'이었다.

'나는 무시당하면서 살았지만..'

내 새끼는 절대 그렇게 키울 수 없어-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는 도현의 두 눈에 독기가 어렸다.


"여기가 첸나이 공함임다."

첸나이 국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보인 건, 개미 떼처럼 우글거리는 인파였다.

뽀꿀람과 비슷한 흑갈색 피부의 인도인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왜.... 쳐다 보는 거지?"

도현이 지나 갈 때마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린다는 점이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기분.

뽀꿀람이 그런 도현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냥 지나 가십쇼."

공항을 빠져 나온 뽀꿀람이 제일 먼저 한 일은.

"श्रीपेरंबदूर से दूरी लगभग 33 किमी है।(스리페람부두르 까지, 거리는 33KM 정도 걸려.)"

릭샤라고 불리는 인도의 택시를 잡는 일이었다.

"2000 रुपये(이천 루피)"

"आप किसे मूर्ख समझते हैं? 500 रुपये. उससे अधिक कुछ नहीं।(누굴 바보로 아나. 500루피. 그 이상은 안돼.)"

"चलो 1000 रुपये में. मुझे भी जीविका चलानी है.(1000 루피에 가자. 나도 먹고 살아야지.)"

"OK"

뭐라 대화를 나누던 뽀꿀람은 이내 쇼부를 마쳤고, 도현에게 타라는 듯 손짓했다.

'뭔가 되게 정신이 없는 느낌이네.'

택시에 타자, 비로소 뽀꿀람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부장 님. 대한민국 하고 분위기가 많이 다르죠?"

"... 좀 그런 경향이 있네요."

"인도라는 나라 자체의 특성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낫씀다."

뽀꿀람은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인도에는 아직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슴다."

"사람을 계급으로 나눈다는 그거?"

"맞씀다. 인도에는 아직 인터넷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슴다."

당시 인도의 인터넷 보급률은 27%였다.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도에서의 일정은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하기는 했는데.."

"양치를 하실 때도 무조건 마트에서 산 물로만 입을 헹구시고, 길거리 음식도 절대 드시면 안됨다."

"알겠어."

도현은 택시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에서 조금 벗어나자, 길 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똥을 싸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 왔다. 충격적인 건, 왼손으로 뒷처리를 한 뒤 아무렇지 않게 땅에 슥슥 닦는다는 점이었다.

'저런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파는 건가.'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문득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감사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리페람부두르.

남인도 첸나이의 서부에 위치한 공업도시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이게 다 자동차 공장이라니.."

인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자동차 공장 밀집 지역이라는 것.

닛싼, 도요타, 포드, gm 등등.

세계적으로 내노라하는 기업들이 이 지역에 자동차 생산공장을 두고 있었다.

12억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 시장이 그만큼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래 차 공장도 있네.'

대한민국의 미래 차 역시 이 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머나먼 타지에서 익숙한 미래 차 로고를 보니 괜히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디보자..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도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름한 창고 같은 공장 앞에 도착했다.

[Motherdaughter Sumi Systems Ltd.]

허름한 공장 만큼이나 허름한 간판.

'여기구나. 보물 단지가 쌓여 있다는 곳이.'

도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금부터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언어도 문화도 다른 외국인을 상대로 필요한 부품들을 최대한 싼 값에 사오는 것이었다.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자신은 있었다.

[품질 확인]

[4레벨 이하 제품의 품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고 분류 과정에서 4레벨이 된 품질 확인 스킬이 있었기 때문!

어려움을 있을 지언정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 했다.

그렇게 공장 안으로 발을 디디려는데.

텁-

뽀꿀람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부장 님. 조심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씀다."

"...... 왜?"

"여기 사장, 자이나교 교인인 거 같슴다."

뽀꿀람의 시선은 공장 구석에 고정 되어 있었다.

자그마한 방 안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들과, 황금색 불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자이나교?"

도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사장이 자이나 교인거랑 협상을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란 거지?

"쉽게 생각하면, 인도의 유대인들이라고 생각 하시면 됩니다."

인도의 유대인.

그 한 문장에 자이나교에 대해 확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자이나교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살생을 저지르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금융업이나 교직 같은 직종에서 일할 수 밖에 없었죠."

자이나교의 교리는 불살생(不殺生)을 근간으로 한다.

이 교리가 얼마나 엄격하냐면, 박테리아도 생명이라고 생각하여 우유 조차도 우유 망에 걸러서 마실 정도!

당연히 농업이나 도축업에는 종사할 수 없었고, 주로 금융업이나 교직 같은 지식인 계층에서 일을 해왔다고 한다.

"자이나교인들은 인도 인구의 0.4%에 불과 하지만, 인도 세금의 24%를 내고 있습니다."

".... 아마 무시한 부자라는 거네."

"돈에 미친놈들이라고 할 수 있죠."

돈에 미친놈들.

꿀꺽-

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이번 여행을 너무 쉽게 생각 했나.'


공장 내부 사장실에 도착하니, 살이 두툼하게 오른 인도인 두 명이 보였다.

한 사람은 거만하게 앉아 있었고, 한 사람은 그 사람의 발과 종아리를 마사지하고 있었는데.

"자네들은 누구야?"

"저희는 대한민국에서 온 20세기 테크라고 합니다."

"20세기 테크? 흠... 이리로 않으시게."

그는 뽀꿀람과 뭐라고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도현을 소파 쪽으로 안내 했다.

"반갑습니다. M&D Sumi Systems의 사장, Bhavya Jain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브하바 자인이라고 밝힌 사장이 도현에게 악수를 청했는데.

순간 도현은 살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영어를 쓰네?'

브하바가 생각보다 훨씬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

"원래 인도의 상류층들은 대부분 영어를 쓸 줄 압니다."

".... 아 그래?"

"이 부장 님, 영어 할 줄 아심까?"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는 해두면 다 도움이 되는 구나.'

대학생 시절, 취업 시장에 뛰어들기 전 영어 회화를 공부한 적이 있었기에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한 수준이었다.

“Nice to meet you. I’m Dohyun Lee, manager of 20th Century Tech.(반갑습니다. 20세기 테크, 이도현 부장입니다.)"

브하바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생각보다 영어가 유창 하시군요."

"..... 기본만 하는 수준입니다."

"인도에서는 그 정도면 상당한 수준입니다."

"하하. 그렇군요."

브하바는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그래, 구블 사(社)와 코마츠 사(社)의 스패어 부품들을 공수하기 위해 오셨다고요?"

"네."

"흠.. 이번 주에만 벌써 7번째로군요."

"....... 벌써 6팀이나 왔다 갔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구체적인 업체의 이름은 언급할 수 없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자사의 창고에 들렸습니다."

도현의 표정에 약간의 긴장이 어렸다.

벌써 6팀이나 왔다 갔다는 건, 생각보다 가격 조율이 어려울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부품부터 보시겠습니까?"

"....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브하바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도현을 창고로 인도 했다.

곧 도착한 창고에는 20세기 테크에서 보유한 물량보다 족히 몇 배는 될 법한 양의 부품들이 쌓여 있었다.

"이쪽부터 저쪽 까지가 센서(Sensor)류이고, 저쪽부터는 릴레이(Relay)류들입니다."

".... 꽤나 많군요."

"아, 한 가지 말씀을 안 드린 게 있군요. 저 부품들 중 60%는 이미 앞서 왔다 간 팀들이 가계약을 한 물량들입니다."

"...... 벌써 가계약을 했다고요?"

"네. 다음 주 중으로 해상운송편으로 붙일 예정입니다. 이미 운송료는 그 쪽에서 부담하기로 했고, 관세 관련 서류들도 작성을 마친 상태입니다."

브하바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은 것을 확인한 그는, 유려한 언변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구매를 희망하시는 부품 리스트가 있으시려나요?"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그 부품 리스트를 정리해 온 파일이 있으십니까? 파일을 보고 가격을 협상하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가격 협상이라... 좋죠. 근데 브하바. 혹시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질문은 얼마 든지 환영입니다."

"M&D Sumi Systems은 인도 쪽에서 꽤나 유망한 업체로 알고 있습니다. 닛싼, 도요타, gm 같은 세계적인 기업에 dct 부품을 납품한다고.."

"허허.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저희 M&D 시스템은 인도 정부에서 지정한 공식 DCT 납품 업체로서, 무려 30년의 전통을 자랑하죠."

브하바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인도 정부 공식 지정 업체.

정치계에도 인맥이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다 넘어 온 거 같네.'

브하바는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도현을 바라 보았다.

이미 그의 페이스에 휘말린 듯, 멍한 표정으로 부품들만 살피고 있는 모습.

협상의 기본이 안된 놈이었다.

끊임없이 상대방을 살피며, 약점을 찾아내야 할 자리에서, 애먼 곳에 시선을 빼앗기다니.

'오랜만에 한 탕 할 수 있겠구만.'

앞서 6팀이 왔다 갔다는 것도.

60%는 이미 가계약이 끝난 물품이라는 것도.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전혀 아쉬울 게 없다는 스탠스를 보여주면서 구매자가 조바심이 나게 끔 하는 전략인 것이다.

"요즘은 사기꾼들도 정부에서 업체로 인정을 해주나 봅니다."

그때.

도현의 한 마디가 브하바의 망상을 끊어냈다.

".... 뭐라고요?"

어느새 브하바의 두 미간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겨나 있었다.

사기꾼.

그 단어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MR LEE. 방금 그 말은 지나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불량품을 섞어서 파는 장사치가 사기꾼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사기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

브하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그의 등줄기에는 식은 땀이 미친 듯이 흐르기 시작했는데.

"불량품이라니. 당신이 무슨 말을 하시는 지 모르겠네요."

노회한 상인 답게, 그는 금새 포커페이스로 돌아 왔다.

도현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그걸 증명할 수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작해야 10개 중 한 두개만 불량품이야.'

그때.

어느새 릴레이 열 개를 손에 쥔 도현이 입을 열었다.

"브하바. 저랑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 내기?"

"이 열 개의 릴레이 중, 단 하나라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릴레이가 있다면... 해당 부품들을 한국의 시세대로 매입 하겠습니다."

"....... 뭐라고요?"

브하바의 두 눈에 경악이 어렸다.

한국의 시세라면, 인도보다 최소 10배 이상 비쌌기 때문이다.

"정말입니까?"

"네. 대신.... 만약 열 개 모두 작동을 하지 않는다면, 인도의 현지 중고품 시세대로 저희에게 넘겨 주십시오."

인도 현지의 중고품 시세.

한국에서 24V DC 14PIN 릴레이를 새 제품으로 샀을 때 만 원을 줘야 한다면, 인도의 중고 품 시세는 대략 40 루피(600원)다.

관세에, 운송 비를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차익을 남겨 먹을 수 있다는 뜻.

"그 약속, 확실한 거겠지요?"

져도 본전, 이기면 대박.

브하바 입장에서는 거절 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잠시 뒤.

브하바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는 게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릴레이 열 개 모두!

도현이 빙글빙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어떻게, 다른 부품으로도 테스트 해보시겠습니까?"

"....... 아, 아닙니다. 약속은 약속이니..."

자이나 교인들은 뼛속까지 장사치였지만, 최소한 약속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구별해 낸 겁니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게 하나 있지 않습니까?"

도현이 안색을 굳히자, 브하바가 윗 입술을 앙 깨물었다.

"..... 인정 하겠습니다. 릴레이의 수량을 늘리기 위해 수리 품들을 일부 섞어 놓았습니다."

도현 역시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거래를 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려울 게 없습니다. 여기, 자세히 보시면 릴레이의 접촉 단자 혹은 코일 쪽이 시커멓게 탄 거 보이시죠?"

"...... 설마, 지금 그거 하나만 보고 불량품을 판별해낸 겁니까?"

"네."

도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브하바는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얼빵한 놈인 줄 알았는데..'

아무리 많이 봐도 30살을 넘어 보이지 않는 동양인이 찾아 왔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대로 등을 처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I/O 카드 쪽 부품들도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구블 사 전용 케이블 커넥터들이 꽤 있네요."

".....헉! 그, 그걸 어떻게."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천둥벌거숭이인 줄 알았던 동양인은, 이 바닥에서 구를대로 구른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엔지니어였던 것이다.

"ASI 전용 케이블은 구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만큼 찾는 곳도 별로 없지 않습니까?"

"......"

난데 없이 찾아온 젊은 바이어는 그에게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닳고 닳은 고인물.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동양인에게 말빨로 밀릴 줄은 전혀 예상 못한 브하바였는데.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단종된 부품들을 모으시는 이유가 뭡니까?"

"..... 제가 오기 전에 이미 여섯 팀이나 왔다 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말하지 않던가요?"

".....아, 아니 그건."

"저 많은 부품의 60%나 계약을 했으면서 그것도 물어 보지 않았다는 겁니까?"

"......"

브하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도현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더니 입을 열었다.

"자이나 교인들은 한번 한 약속은 절대 어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 지금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긴 합니다."

자이나 교인들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뽀꿀람에게 전해 들은 말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약속을 하기 전에는 그 어떤 거짓말도 서슴치 않는 족속들이라는 뜻이었다.

"이유를 말씀 드릴 테니, 한 가지 거래를 할 수 있겠습니까."

".... 조건부터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이틀 뒤, 스리페람부두르 공용 물자 보관소에 자사의 부품들이 대량으로 배송될 겁니다."

"20세기 테크의 부품들이요?"

"네. 그 부품들을 당신이 처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브하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부품을 처리하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왜 굳이 한국에서 처리하지 않고 저희에게 맡기는 겁니까?"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비밀입니다."

"..... 알겠습니다."

브하바 역시 굳이 캐묻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20세기에서 단종된 부품들을 모으는 이유는..."

도현은 자신이 인도에 온 이유를 설명 했다.

물론 모든 사실을 상세하게 밝히진 않았고, 적당히 정보만 흘리는 느낌이었다.

".... 그럼, 조만간 다른 한국인들이 이곳에 몰려올 거라는 뜻입니까?"

"아마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요."

"제길... 이럴 줄 알았다면 내기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비로소 금덩이를 돌맹이하고 바꿨다는 걸 깨달은 브하바가 땅을 치며 후회했다. 도현은 그런 그에게 준비한 서류들을 건넸다.

"브하바. 우리 계약서부터 작성합시다."

"......."

"자이나 교인의 신앙심을 믿습니다. 아미타불.."


첸나이 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길.

뽀꿀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도현에게 물었다.

"이 부장 님. 마지막에 그 부탁은 왜 한 검니까?"

한 달 전부터 궁금했던 점이었다.

불량품.

정상 작동을 하지 않는 그 부품들을 왜 버리지 않고, 심지어 깨끗하게 씻어서 보관하고 있는건지.

그 불량품들을 굳이 인도 업체에게 버려달라고 부탁하자, 의문이 극에 달하는 기분이었다.

"뽀꿀람. 오는 길에 택시에서 했던 얘기 했던 거 기억 나? 인도인들의 특성에 대해 말해줬잖아."

"..... 무슨 특성을 말씀하씨는 건지.."

"인도인들은 절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 설마?"

뽀꿀람의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도현이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조만간 경쟁업체들이 인도에 방문할 거야."

"......."

"브하바가 겉보기에는 멀쩡한 부품들을 그냥 버리지는 않을 거 아니야."

브하바는 닳고 닳은 장사꾼이다.

오늘 내기에서 지면서 입은 피해들을, 다른 고객들에게서 메꾸려고 할 게 분명했다.

"이 부장 님은.. 정말 나쁜 사람임다.."

도현을 바라보는 뽀꿀람의 눈빛에 두려움이 어렸다.




"으윽...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학 테크 최원태 이사.

그는 아직도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고작 양치질 한 번 했다고 일 주일을 앓아 누울 줄이야.."

인도에서는 절대 길거리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

현지의 한국인 가이드에게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은 말이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건 그도 원치 않았기에, 길거리 음식은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딱 한 번.

수도 물로 양치질 한 번 했다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직 늦지 않았을 거야."

아직 물갈이의 여파가 모두 가시지 않았지만, 최원태는 서둘러 릭샤를 잡았다.


그럴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 다른 업체가 부품들을 선점 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


"스리페람부두르. 하우 머치."

"음.... 10000 루피."

"왓? 대츠 투 익스펜시브!"

"10000 루피."

만 루피면 한화로 15만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33KM.

한국에서도 5만원이면 충분히 가는 거리인데, 15만원을 달라니!

"....... OK."

하지만 거절하기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족히 20년은 더 돼 보이는 택시를 타고 오프로드를 질주하는 승차감이란..

Motherdaughter Sumi Systems Ltd.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최원태는 억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다소 차질이 있긴 했지만, 결국 부품을 싸게 사면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저 사람이 사장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 입구에 서성이는 인도인이 보였다.

값비싼 장식을 온 몸에 두른, 인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상류층인 듯 했는데.

".... 얼유 코리안?"

인도인 역시 그를 발견하고는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어떻게 안 거지?'

대뜸 한국인이라고 묻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환영함니다. 제가 이 공장의 싸장임다."

바흐바 자인.

그는 새로 찾아온 희생양을 바라보며 함박 웃음을 머금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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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 YM 송기오. +21 24.09.02 32,597 641 16쪽
24 24. 다함께 차차차.(일부 수정) +30 24.09.01 33,543 659 19쪽
23 23. 리더의 자질. +44 24.08.31 33,617 69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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