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전 후 괴물 엔지니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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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動心)
작품등록일 :
2024.07.2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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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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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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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8. 누구 마음대로 인정 합니까.

DUMMY

아침 8시.

후욱-후욱-

도현은 아침 댓바람 부터 헬스 장에 방문해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나 더!"

"므..므흐흑.."

"하나 더 할 수 있습니다! 라스트 하나!"

"끄아아악!"


텅-!


벤치 프레스.

정자세로 누워서 일자 바를 위 아래로 움직이는 운동이었다.

봉 무게 20KG, 양쪽에 5KG짜리 바벨 두개.

도현이 다루고 있는 무게는 도합 30KG였는데.

정하연.

도현의 담당 PT를 맡은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런 도현을 바라보았다.

'.... 헬스를 태어나서 처음 해보나 보네.'

30KG.

성인 남성이라면 충분히 들 수 있는 무게였다. 20번 30번 씩 하는 건 다른 얘기겠지만, 8회 정도는 충분히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으허억- 으허억-

하지만 30KG 벤치 프레스를 8회 씩 5세트를 반복한 도현은 짐승 처럼 거칠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약골.

도현은 그 한 단어로 표현이 가능한 존재였다.


'..... 그래도 2.5KG 늘었네.'

한편, 벤치 프레스를 모두 마친 도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25KG에도 허덕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30KG도 가능해진 것이다.

'사람들이 왜 헬스를 하는 지 알겠네.'

윤창호의 추천으로 시작한 헬스는 꽤 재밌었다.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근육이 붙는 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서, 혼자 도를 닦는 느낌으로 진행 하는 것도 가능하다. 흡사 RPG 게임을 하는 듯한 기분.

"회원 님. 그래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게 보이시네요."

물론 지금은 자세를 교정 받느라 PT를 진행하는 중이었지만.

"그런가요? 하하."

도현은 멋쩍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하연.

그녀는 대회에서 몇 번이나 우승을 차지 했을 정도로 실력 있는 트레이너였다.

그런 실력자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 트레이너요?

물론 처음엔 여자 트레이너라는 말에 경계심을 가지기도 했었지만.

- 반갑습니다. 회원 님.

정하연의 몸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조막만한 얼굴과 대비되는 우람한 삼두근.

날다람쥐를 연상 시키는 광활한 광배.

아마존의 재규어를 떠올리게 하는 대퇴사두 라인까지.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도현보다 훨씬 몸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회원 님. 바로 다음 운동으로 가시죠."


그리고 그런 좋은 몸은 쉽게 만들어 지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정하연의 운동 스타일은 무척이나 빡빡했다.

"자, 잠시만.. 1분만 쉬었다가.."

도현이 울부짖었지만, 정하연은 얄짤이 없었다.

트레이너 정하연은 녹초가 된 도현을 다음 머신으로 끌고 갔다.

"지금 가슴 펌핑 좋으시거든요? 무게 하나 낮춰 드릴테니까 바로 다음 운동 들어가실게요."

"......."

그날.

도현은 갓 태어난 기린처럼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운동을 진행 해야만 했다.




회사에 도착하고 난 뒤.

도현의 달라진 모습을 눈치 챈 몇몇 인원들이 아는 체를 해왔다.

"오, 이 부장 운동 해요?"

"하하. 아직 얼마 안됐습니다. 이제 PT 5회차에요."

"오오. 운동을 시작했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거지. 언제 한 번 헬스장이나 한 번 같이 가요. 서로 보조 해주자고요."

"....."

도현은 윤창호의 우람한 대흉근을 바라보았다.

'같이 가면 안될 거 같은데.'

남성 호르몬이 너무 많이 나와서 머리가 빠지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는데.

도현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대답했다.

"하하.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가시죠."

"좋습니다. 아, 그건 그렇고 도하영 부장한테 연락 왔어요?"

".... 너무 많이 와서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였다.

도하영 부장. 처음엔 시크하게 메일을 보내 온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질척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기부 도하영 부장입니다. 혹시 120번 프로그램에서 23400번 블록에 M88 명령어를 삭제 하셨던데..]

[공기부 도 부장입니다. #1031 PMC 인터페이스 신호를 전달 받는 과정에서, PLC 조건 문으로..]

[도 부장입니다. Z블록 FF 17번 홀 가공 프로그램에서..]


이런 메일들이 끝없이 쌓여 있었다.

"... 원래 도 부장이 그런 스타일이 아닌데.."

"그래요?"

"근데 이 부장 정도 실력이면 질척거릴 수도 있겠네요. 누군가 자기 위에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니."

도현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눈 앞의 시스템 창을 확인 했다.


- 편입 가능한 인원.

1. 도하영(65)


누군가 자기 위에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것 치곤 신뢰도가 너무 높지 않나.

지난 몇 주 사이에 도하영의 신뢰도는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도 릴레이 보드 생산은 잘 진행 되고 있어요?"

"네, 차질 없이 진행 되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 부장 없으면 안 돌아 갈 것 같더니. 이제는 팀원들이 꽤나 숙달 됐나 보네요?"

"아무래도 시간이 약인 거 같습니다."

시간이 약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 십인장(十人將) 지정할 수 있습니다(신뢰도 80 이상)

* 십인장(十人將) 존재 시, 사용자가 없어도 능력치 증가 50% 적용.


십인장.

다함께 차차차 스킬에 새로 추가된 기능이 아니었다면, 지금 물량을 뽑아 내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을 게 분명 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사기적으로 변할 거야.'


릴레이 보드의 순수익의 40%를 인센티브로 받고 있었다.

이제는 최종 품질 검수만 맡고 있는 도현이었기에, 그야말로 놀면서 돈 버는 기분이었는데.

'요즘 유행하는 게임을 하는 느낌이네.'

방치형 게임을 현실에서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물량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겁니다."

윤창호의 말처럼, 물량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추세였다.

1000대, 1500대.

아마 내년 여름이 되면 물량은 더 늘어나겠지만, 도현은 급하게 생산량을 맞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독보적인 기술.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퀄리티를 제공할 수 있는 건 20세기 테크 뿐이었기 때문이다.


띠리리링-!


윤창호와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갑자기 도현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려 오기 시작 했다.

".... 전화 받았습니다."

김춘식.

릴레이 보드 시공을 하러 출장을 나간 그가 걸어 온 전화였다.

"도현아! 큰일 났다!"

큰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도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오늘 작업 했던 장비, 퍼졌어."

".... 네?"

장비가 퍼졌어-

이제야 춘식의 다급함이 이해가 갔다.

"오늘 작업하신 공정, 단독 장비 공정 아닙니까?"

단독 장비가 퍼졌다는 건, 라인 하나가 통째로 멈춰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맞다. 지금 현장 분위기 X 살벌해. 대의원까지 나와서 우리 째려보고 있다."

"대의원이요?"

순간 이도현의 두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생산 과장도 아니고, 보전 고장도 아니고.


대의원이 째려 보고 있다고?




미래 자동차 노동 조합.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87년, 민주화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던 때로 돌아간다.

직장 내 폭행, 두발 단속, 관리직의 욕설 등등.

미래 그룹 신화라는 밝은 면에 가려진 어두운 직장 문화 개선을 위해 2만 노동자들이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무노조 신화'를 자랑하던 미래 그룹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미래 그룹에 노조는 절대 없다-라는 왕 회장의 말을 증명 하듯, 오너 일가는 직장 폐쇄라는 초강경 대응으로 맞섰는데.


"우리 조합원들의 의지가 거기서 꺾일 줄 알았습니까?"


미래 차 조합원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쟁의 행위를 이어 왔다.


1993년에는 공권력이 투입 될 정도로 노사 갈등이 깊어졌고.

1998년에는 IMF로 인한 경영난으로 정리 해고를 하려고 하자, 37일 파업이라는 초강수로 맞불을 놨다.


그렇게 현재.

[미래 차 조합원들. 평균 임금 9천 만원 달성.]

미래 차 조합원들은 대한민국 상위 3%의 평균 임금을 쟁취 했지만.


'정작 노동자들의 인권은 그대로네.'


미래 차 조합원들을 제외한 다른 노동자들의 인권은, 여전히 변한 게 없었다.


그들이 쟁의 행위의 당위성으로 주장하던 [노동 인권 향상]은, 모두 그들의 주머니를 배불리는데 쓰였던 것이다.


"소 부장. 정말 이러기야?"


이재형.

금속 노조 미래차 지부, V엔진 대의원인 그는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렸다.

V엔진 부장 소진섭.

평소엔 고분고분 하던 그가 오늘 따라 그의 말에 자꾸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달부터 55년생 형님들 퇴직금 정산 시즌인 거 몰라?"

미래 차에는 30년 이상 근무한 정직원들이 많았다.

퇴직금 정산 시즌.

위와 같은 단어가 생겨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직전 3개월 간의 월급을 얼마나 많이 받냐에 따라, 퇴직금이 최소 수 백에서 수 천 만원 까지 차이가 날 수도 있었다.

"아니 이 대의원 님. 요즘 회사 분위기 안 좋아서, 있는 생산 특근도 짤라 먹고 있는 판국이에요. 여기서 비생산 일정을 잡아 달라뇨."

V엔진 부장 소진섭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퉁퉁 쳤다.

비생산 특근.

다르게 말하면 생산 일정이 없는 날에, 예방 보전을 위해 출근을 하는 것을 뜻 했다.

센서 교체 작업이라던지, Chip 청소 작업이라던지.

시업 중에는 안전 때문에 못하지만, 추후에 생산 LOSS를 야기할 수 있는 요소들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 출근을 하는 것이다.

"이 부장. 비생산 특근 한 대가리에 퇴직금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아요?"

소진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속 30년 차 기준으로, 건당 180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속 기간이 길수록 퇴직금 정산 기간에 특근의 값어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소진섭의 말처럼 특근 하나에 200만원 이상의 퇴직금 차이가 발생 하기도 한다는 뜻.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완강하게 나와?"

이재형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흡사 퇴직 직전 조합원의 퇴직금을 한 푼이라도 더 챙겨 주는 것에 목숨이라도 건, 노동 운동가의 표정이었는데.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의 실태를 알고 있는 소진섭은 내심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대의원 선거.

바로 다음 달에 있을 대의원 선거를 대비해, 조합원들에게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려는 속셈이 분명 했다.


'요즘 사무실 사람들이랑 스크린 치러 다닌다던데.'


대의원 자리가 만들어진 건, 현장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유사시에는 노동 조합 지부의 명령을 받고 생산 라인을 중지시킬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조합원들을 위해 쓰여야 할 그 권한을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쓰는 대의원들이 많다는 게 문제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눈앞에 있는 이재형 대의원.


최근 그가 사무실 사람들과 골프를 치러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 했다.

물론 1회에 수십 만원을 호가하는 라운딩 비용을 누가 대 주는지는 뻔할 뻔자였다.


면전에 대고 쌍욕이라도 박아주고 싶었지만, 현실에서 그랬다간 [현장 탄압]이니 뭐니 하며 대자보에 이름이 실릴 게 분명 했다.


"저도 최대한 배려 해드리고 싶습니다. 시기만 맞으면 그깟 비생특 몇 개 달아주는 게 뭐가 어렵게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녹록치 않아요. 사업부장 선에서 생산 특근을 최소화 하라고 엄포를 놓았단 말입니다."

"사업부장이? 그 양반이 도대체 왜?"

소진섭이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이걸 설명해 주고 있어야 하는 거지.'

자신의 처지에 회의감이 들긴 했지만, 화를 낸다고 대의원이 수긍할 것 같지도 않았기에 천천히 설명을 시작 했다.

"하반기 판매 실적이 저조하다는 거, 대의원 님도 아시죠?"

".... 그건 알지. 하지만 그거 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데.. 잘 팔리는 차는 여전히 잘 나가잖아."

"V엔진이 그 잘 팔리는 차에 안 들어가는 엔진인 게 문제죠."

"......."

2500CC 4기통 디젤 엔진.

한 때는 잘 나갔지만, 지금은 가솔린과 하이브리드가 대세였다.

대의원 역시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힘을 얻은 소진섭이 말을 이었다.

"사업부에서 차라리 시업 시간에 TPM(정리정돈 시간) 4시간 잡아 줄 테니까, 그때 미비한 작업 처리 하라고 합니다. 생산에 크리티컬한 타격을 주는 고장에 한해서만 비생산 특근 잡아 주겠다고 엄포를 놨어요."

"크리티컬한 고장이라.."

잠시 고민하던 이재형.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릴레이 보드는? 그거 작업 우리 쪽에서 하면 되잖아?"

"릴레이 보드요?"

"그래. 얼마 전 부터 외부 업체 들어 와서 작업 하고 있던 거. 우리가 작업 하면 돈도 아끼고, 조합원들 불만도 풀어주고. 얼마나 좋아?"

그 말에 소진섭 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거 20세기 테크에서 관할 하고 있는 작업이에요."

".... 20세기 테크가 뭐? 그래봐야 하청 업체 아니야? 제작은 그쪽에서 맡고, 시공만 우리가 맡으면 되잖아? 설마 이 정도도 못해준다는 건 아니겠지?"


20세기에서 하면 한 시간이면 끝낼 작업이었지만, 정직원들이 맡으면 하루 종일 걸릴 게 분명 했다.

한 마디로 농땡이 피우면서 돈 벌어 가겠다는 말이었다.


"..... 안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릴레이 보드는 절대 못 넘깁니다."

소진섭이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변웅석 실장의 신신당부를 떠올린 것이다.

- 20세기, 그 중에서도 이도현 부장한테 밉보일 만한 짓은 절대 하지마!

실장 급 인사의 지시다.

다른 건 다 양보 해도, 릴레이 보드 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조만간 임단협 시즌인 거 알지? 소 부장, 그때 가서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문제는 이재형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V엔진 헤드 V/G 프레스 장비.

생산 팀에서 분류하는 이 장비의 중요도는 매우 높았다.

단독 장비.

병렬 운전을 하지 않았기에, 장비가 1시간 이상 멈춰 서는 순간 라인 전체가 스탑 되기 때문이었다.

"아니, 작업을 어떻게 했길레 장비가 퍼지는 거야!"

보전 팀 기계조 파트장 김학.

그가 신경질적으로 20세기 테크 직원을 나무랐다.

김춘식.

릴레이 보드 시공의 총 책임자인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는데.

"하청 업체에서 사고 쳤어?"

"릴레이 시공 잘못해서 장비를 퍼지게 만들었다는데?"

"아이고. 단독 장비를 그렇게 쉽게 보면 쓰나. 저거 조치 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는데?"

다른 파트장 급 조합원들 역시 팔짱을 끼고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주로 정년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 지긋한 조합원들이었다.

지금 퇴직금 정산 중이거나, 아니면 내 후년 안에 퇴직금 정산을 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이 자신의 권익을 찾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소진섭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고장이 나든 말든 휴대폰을 만지느라 바쁠 조합원들이 이렇듯 모여 있는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이재형 대의원..'

이재형.

그가 릴레이 보드 작업을 빼앗기 위해 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측의 실책을 물고 넘어지는 방식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생산 과장에게 물었다.

"릴레이 보드 설치를 하고 난 직후에 장비가 먹통이 됐다고?"

"네. 다른 장비는 다 괜찮았는데, 유독 이 장비만.."

"제길.. 하필이면 지금 시기에 실수를 해서."

소진섭은 20세기 측 작업자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하필 이재형이 릴레이 보드 작업을 탐내고 있는 시점에 흠을 잡히다니.

"20세기 측 잘못인 거는 확실해?"

"정황상 그렇습니다. 지금 떠 있는 알람이 스핀들 클램프 전류치 이상 알람인데, 기계 조에서 클램프 장력 측정해본 결과 이상이 없었습니다."

스핀들.

소재를 깎기 위해 툴을 고속으로 회전 시키는 부품이었다.

안정적인 작업을 위해서 스핀들이 얼마나 툴을 잘 클램프(물고)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센서가 필요한데.

지금 장비에 떠 있는 알람은, 센서가 감지한 수치가 범위 값을 벗어 났다는 내용이었다.

"클램프 센서 문제일 수도 있잖아?"

이럴 경우 원인은 크게 둘 중 하나다.

클램핑을 담당하는 SOL 밸브의 상태가 문제거나.

아니면 센서가 스핀들의 장력(툴을 물고 있는 힘)을 똑바로 측정하지 못하고 있거나.

"방금 전기조에서 센서를 교체 했습니다."

"..... 그런데도 알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네, 솔 밸브 쪽 문제인 거 같습니다."

소진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센서 문제가 아니라는 건, 솔 밸브 보호용 릴레이 보드를 설치한 20세기 측 과실일 확률이 99%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제길... 이 대의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건데."

이대로 가면 20세기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게 된다. 릴레이 보드 작업을 퇴직자들에게 몰아 주려는 대의원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된다는 뜻.

"내가 이런 작업은 하청 맡기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 않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재형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진섭이 뭐라고 반항해 보았지만.

"지금까지 20세기에서 작업한 공정이 300개가 넘습니다. 고작 한 번 실수 했다고 그렇게 말씀 하시는 건.."

"그 한 번이 너무 크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이재형은 외려 목청을 키우며 장비를 가리켰다.

꽉꽉 들어 차 있는 소재들. 흘러가지 못하는 콘베어.

"저게 다 생산 LOSS입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UPH가 떨어지는 중이고요."

"......"

"시공 하는데 한 시간. 알람 검증하는데 한 시간.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네요. 시공한 릴레이 보드 원복하는데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테니, 총 4시간이나 라인이 멈춘 셈이지 않습니까?"


생산량이니 UPH니 하는 것들은 대의원이 걱정할 사안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단어들을 입에 담는다는 건.

- 이쯤 하고 넘어가지?

최후의 통첩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 했는데.

'제길... 이건 어쩔 수 없겠네.'

소진섭은 결국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

실시간으로 생산 LOSS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시간을 끌 수 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단 릴레이 보드, 원복 합시다."

급한 불 부터 끄고 볼 생각이었다.

협상은 그 뒤에.

하지만 대의원이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리가 없었다.

"지금 20세기 테크 때문에 빵구 난 생산량이 도대체 몇 대야?"

"......."

"이런 업체한테 계속해서 시공을 맡기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 모르겠네. 전문가를 보내도 시원찮은 상황에 왜 모자란 사람들을 보내서 이 사단을 만든 건지.. 오늘 20세기 작업 총 책임자가 누굽니까?"

비난의 화살을 20세기 측으로 돌린 것이다.

장내의 분위기가 한층 심각해진 와중, 김춘식이 축 늘어진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접니다."

"20세기 측 과실로 인해 생산 로스 발생한 점, 인정하시죠?"

이재형이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춘식은 그 눈빛에 절로 몸이 움츠러 드는 느낌을 받았다. 미래 차 V엔진 조합원 137명을 대표하는 대의원이라는 직함에 압도된 것이다.

'..... 제길.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증명을 하고 싶어도.'

생산 로스는 쉽게 인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잘못이 아니라는 걸 증명을 하라고 해도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증명을 시도 해도 바뀌는 게 없다면? 괜히 시간만 끌어서 생산 로스만 늘어나는 결과가 나온다면?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지배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어.'

인정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춘식이 입을 열려던 그 순간.


"누구 마음대로 인정 합니까."


낯선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걸어 들어 왔다.

"이 부장!"

이도현, 춘식의 전화를 받은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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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 안전제일주의. +13 24.09.05 24,571 574 19쪽
27 27. 플렉스 좀 했어요. +18 24.09.04 25,176 549 16쪽
26 26. 완벽한 패배. +18 24.09.03 25,584 569 22쪽
25 25. YM 송기오. +18 24.09.02 26,197 554 16쪽
24 24. 다함께 차차차.(일부 수정) +26 24.09.01 26,997 561 19쪽
23 23. 리더의 자질. +38 24.08.31 27,043 587 19쪽
22 22. 릴레이 보드 제작(2) +16 24.08.30 27,127 555 17쪽
21 21. 릴레이 보드 제작(1) +19 24.08.29 27,875 560 19쪽
20 20. 밥 그릇. +16 24.08.28 28,689 569 19쪽
19 19. 별 미친 놈을 다 봤나. +16 24.08.27 29,065 548 18쪽
18 18. 누군가의 빌런(2) +22 24.08.26 28,511 562 18쪽
17 17. 누군가의 빌런(1) +14 24.08.25 28,757 526 18쪽
16 16. 주사위. +20 24.08.24 29,534 525 20쪽
15 15. 이자까지 쳐서. +43 24.08.23 29,943 545 17쪽
14 14. 이 대리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겁니까. +24 24.08.22 29,929 57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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