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전 후 대기업이 나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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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動心)
작품등록일 :
2024.07.25 15:07
최근연재일 :
2024.09.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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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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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26. 완벽한 패배.

DUMMY

YM 테크 전기 사무실.

그곳에는 총 30명의 작업자들이 구슬 땀을 흘려 가며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꽤나 넓은 공간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


드르륵-

드르륵-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릴레이 보드 제작 작업이었다.

꽤나 어려운 레벨의 작업이었지만, 직원들의 손놀림에는 거침이 없다. 그만큼 숙련된 기술공들이라는 뜻.


"3인 1조로 작업 하고 있는 건가?"

사장 김동현이 물었다.

송기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저희 인력 풀 안에서는 그쪽이 제일 효율적입니다."

"내가 들은 말인데, 20세기에서는 아예 파트를 나눠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데? 그 방식이 낫지 않을까?"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였다.

20세기에서 분업으로 작업을 하고 있고, 그 덕분에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는 건.

송기오는 그 답지 않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 거지?"

"아, 죄송합니다. 파트를 나눠서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 흠흠. 파트를 나눈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건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가능만 하다면 최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가능만 하다면?"

송기오의 말에 뼈가 있다는 걸 알아 챈 김동현이 되물었다. 송기오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그마한 릴레이 보드 하나에 전선이 몇 개나 들어 가는 지 아십니까?"

".... 몇 개나 들어 가는데?"

"자그마치 200개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총 200개의 배선 과정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 말은... 의미가 없다는 건가?"

"분업이 빛을 발하려면 작업자가 [반복 작업]이라고 느낄 만큼 작업이 단순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200개의 배선 작업을 단순화 하는 건, 적어도 20세기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YM에서도 몇 달은 골 머리를 싸 안아야 가능하고요."

불가능.

송기오가 그 말을 입에 담은 순간 김동현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게 얘기 한다면, 확실하다고 봐야겠군."

"둘 중 하나라고 봐야겠네요. 사장 님이 잘못된 정보를 들으셨거나, 20세기에서 삽질을 하고 있다거나."


송기오가 하얗게 웃었다.


"둘 중 어느 경우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 말은.."

"릴레이 보드 납품 건, 우리 YM 테크에서 독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송기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슷한 시간.

20세기 테크의 전기 작업장은 여전히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둠칫-둠칫-

리듬에 영혼을 맡긴 채로 배선 작업 중인 김춘식.

드르륵-!

드르륵-!

두 눈에 불을 켠 채로 드라이버 질을 하고 있는 공태인까지.


아홉 명의 직원들은 하나 같이 홀린 듯 작업에 열중 하고 있었다. 여유롭되 여유롭지 않은, 사장이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 않을 이상적인 작업 현장.

에어컨을 큰 용량으로 바꿨음에도 실내의 열기가 식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다들 열심히 하시네.'


한편, 도현은 그런 동료들을 보며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현재 적용 중인 능력치.]

º 업무 속도가 20% 증가합니다.

º 업무 능력이 20% 증가합니다.

º 업무 중 체력 소모가 20% 감소합니다.


능력치 20% 증가.

거기에 체력 소모 감소 20%까지 붙었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분명 유의미한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 잠깐만. 분명 20%가 증가 했는데 왜...'


그때.

도현이 이상한 점을 눈치 채고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능력치 증가율은 20%였는데, 생산 속도는 그 두 배인 40%가 늘어났던 것이다.


잠시 동료들을 지켜보던 도현은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둠칫-둠칫-

드륵-드륵-

퉁-!퉁-!


말 한 마디 없이 작업에 열중 중인 동료들. 그들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웃음기가 어려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즐기고 있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시퀀스 팀원들을 하나로 만드느라 고생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들을 일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시스템이 제공하는 능력과 일을 즐기는 분위기가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몇 달 전의 나를 보는 거 같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흘리는 땀 방울이 나와 내 가족들의 풍요로 이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200대, 충분히 가능해.'

지금 추세라면 가능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생산 속도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2시간에 10대 작업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아, 오늘 새로운 사람들 온다고 했었지?'

그때.

도현의 머리 속에 문득 김원식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 2년 이상 경력자들로 10명 뽑아주면, 책임 지고 350대 씩 뽑아 주겠다는 거지?

- 네. 그리고 인센티브 비율을 40%로 늘려 주십시오. 직원들 인센도 당연히 동일한 비율로 올려 주시고요.

- ..... 이 과장 많이 컸네. 이젠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이런 부탁도 하고.

- .....

- 인센 40%, 오케이. 대신 이 과장도 약속 지켜. 추가 인원들은 내일 저녁까지 넣어 줄게.


추가 인원 10명을 받고, 350대를 뽑아 주기로 쇼부를 봤다. 그 대가로 기존에 30%였던 인센티브 비율을 10%를 더 늘리고. 성과에 비례한 보상, 적어도 김원식은 이런 쪽으로 장난을 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누가 올지 궁금하네.'


기왕이면 실력보다는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면 좋을텐데-

도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괜히 분위기를 흐트리는 사람은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없느니만 못했다.

인간관계와 사회성. 도현은 대기업 채용 과정에 왜 인성 평가를 넣는 것인지 이해가 갔다.


벌컥-!


그때.

닫혀 있던 작업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한 건, 전형적인 건설 현장 인부 복장의 남성들이었는데.


"여기가 김 사장이 말한 곳이여?"

"맞는 거 같은디?"

"으따, 까마득한 동상들이네."

"여기 오야지가 누구여?"


구수한 사투리와 함께 존재감을 과시하는 남자들.

순간 도현의 두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나이가...'

최소 50대.

많게는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형님들이었기 때문이다.


"시, 신 교수?"


그때.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노인의 얼굴을 알아 본 김민혁이 고함 치듯 말했다.

춘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치, 친하진 않습니다. 예전에 건설 현장에서 노가다 할 때 본 적은 있는데.. 얼굴만 아는 사이 입니다."

"그래? 근데 신 교수라는 건 무슨 소리야. 아무리 봐도 교수로는 안 보이는데.."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은 다 신 교수라고 부릅니다. 아니, 잠시만.... 설마!"


순간 김민혁이 또 한번 고함을 질렀다.


"김 반장님이랑 정 박사까지?"

"다른 사람들도 아는 사람들이야?"

"제가 있던 현장에서는 꽤나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가 뇌까리듯 중얼거렸다.

"저수지의 개들 크루가 모두 모이다니.."

"뭐, 저수지의 개들? 무슨 영화 이름도 아니고.."


춘식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 거리는 사이, 또다른 일련의 사람들이 작업장 문을 두들겼다.

"안녕하쎼요? 여기가 이씹 쎄기 테크 맞나요?"

뭔가 어눌한 발음.

맑은 눈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외국인 남성들이었는데.

"뽀, 뽀꿀람?"

김민혁은 이번에도 일행 중 한 명을 알아 본 듯 소리를 질렀다.

"민혁!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써?"

"당연하지! 뽀꿀람. 너는 잘 지냈어?"

둘은 꽤 친한 사이인 듯 서로 안부를 물었다.

춘식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김민혁의 옷자락을 잡았다.

"야, 이분들은 정체가 뭔데?"

"뽀꿀람이랑 그 친구들이에요."

"그니까 뽀꿀람이 누구냐고!"

"분전반 설계 및 시공 쪽에선 꽤나 유명한 크루입니다. 저희 쪽에선 뽀꿀람 해적단 크루로 통해요."

김춘식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뽀꿀람 해적단. 저수지의 개들.

만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름들이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착잡한 심경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사람을 빨리 구했다 하더라니.'

도현이 요구한 조건은 간단했다.

2년차 이상 전기 숙련공 10명, 절대 쉽게 구할 수 있는 인력은 아니었는데.

김원식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기에 의아함을 느끼긴 했다. 대기업도 아니고 그많은 인력을 어디서 구해오나 싶었기 때문.

'노가다 하시는 분들을 섭외해 오신 거구나.'

숙련공은 숙련공이다.

김민혁의 말을 미루어 보아 건설 현장에서 수십 년 이상 굴러 먹은 인간들이었으니까.

실력 역시 보장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기가 너무 쎄다는 게 문제지.'

뽀꿀람이 입을 열었다.

"싸장님이 이씹쎄기 오야지에요?"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순진무구한 표정.

'근데 왜 기분이 나쁘지..'

도현은 이유 모를 능욕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만, 이번 작업을 총괄하고 있긴 합니다."

"아, 그러씨구나. 생각보다 젊으씨다."

뽀꿀람이 한 쪽 입꼬리를 묘하게 말아 올렸다. 공손했지만, 은근하게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표정이었는데.

이번엔 신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이도현 과장이라고?"

순간 뿜어져 나오는 담배 쩐내.

두 눈동자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드문드문 보이는 앞니는 스댕으로 뒤덮여 있었다.

도현은 숨이 텁텁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일부러 내색 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혹시 김원식 사장님이 고용하신 거 맞습니까?"

"김원식이? 아아, 인력소장 친구라는 놈 이름이 김원식인가 뭔가 이긴 했지."

"그렇다면 잘 찾아 오신 게 맞는 거 같습니다."

그때, 손수건을 두건처럼 머리에 둘러 멘 50대 남성이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거기 동상! 비리비리 해가지고 PVC 관이나 구부릴 수 있겄어?"

전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PVC관은 어지간한 성인 남성도 아니면 구부리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단순히 힘만 세게 주면 구부러지는 게 아니라 반으로 접히기 일수라서, 전기 시공 업계에서는 일종의 '새내기 기 죽이기'용으로 PVC관을 사용하는데.

뽀꿀람도 한 마디 덧붙였다.

"싸장님 얼굴 곱쌍해요. 옥내 배썬이나 하는 거 같은데.. 피브이씨 관은 못 구부릴 거 같아요. 무리하다가 다쳐."


히죽히죽-

그건 명백한 조롱이었다.


'.... 기선제압을 하고 시작 하겠다는 거네?'


과거 공사 현장에 몇 번 나가 본 경험이 있어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 싸움을 걸어 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유는 없었다.

거칠게 살아온 노가더들에게 서열 정리란 굳이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도현의 시선이 시스템 창에 닿았다.


- 현재 기계 군단 : 8/20.

이건 이미 군단에 편입 시킨 시퀀스 팀원들과 춘식이었고.


- 편입 가능 인원.

1. 전현우(77)

2. 윤창호(73)


편입 가능한 인원에 뽀꿀람 해적단과 저수지의 개들 크루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신뢰도가 부족하다는 뜻.

'.... 당연히 신뢰가 없을 수 밖에 없지.'

처음 봤는데 신뢰도가 50이 넘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도현의 시선이 새로 온 두 크루 인원들에게 닿았다.

딱 봐도 거칠게 살아온 티가 나는 10명의 인부들.

그들은 도현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기 싸움을 걸어 오고 있는 것이다. 도현은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은 환영이지.'

말로 안 된다면,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겸사겸사 신뢰도도 올리고.

도현은 작업장 바닥에 굴러 다니는 PVC 관을 집어 들었다.

"PVC 관이라.."

집중.

엔지니어의 주사위.

두 스킬을 한 번에 활성화 했다.

거기에 시퀀스 스킬의 효과까지 더해지자.

"이렇게 구부리는 게 맞나 모르겠네요."

PVC 관이 플렉시블 관(주름지고 흐물흐물한 관)처럼 휘어졌다. 신 교수와 뽀꿀람의 두 눈에 경악의 기색이 떠오른 것도 비슷한 시기의 일이었다.


"아, 아니 PVC를 맨 손으로 구부린다고?"

"스프링이랑 히터도 없이?"


PVC 관을 구부리기 위해서는 열을 가해야 했다. 스프링에 관을 끼운 뒤, 살살 열을 가하며 모양을 잡으면서 구부리는 것이다.

그런데 도현은 그 일을 맨손으로 했다. 처음 보는 사람 입장에선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뭘 놀라."

하원식이 옅은 웃음을 머금고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인데."

남의 고통은 나의 행복이라.

과거에 이미 도현에게 참교육을 당한 적이 있는 하원식은 지금 상황이 마냥 즐거울 따름이었다.




Y엔진 크랑크 열처리 장비 앞.

송기오와 김동현을 비롯한 YM 테크 사람들은 둥글게 원형을 만든 채로 안전 수칙을 들었다.


"안전작업확인서 꼭 판넬 쪽에 붙여 놓으시고, 활선 작업은 절대 안됩니다."

"네."

"장비 안에 들어갈 일 있으면 꼭 FEED(이송 속도) 제로로 하고 들어 가시고요."

"네."


안전 수칙 전달이 끝나고.

YM 테크 직원들은 3인 1조로 짝을 지어 도열 했다.

송기오는 그런 부하 직원들을 한 번 훑어 봤다가, 이내 팀장들을 호출 했다.

"1팀 장. 2팀 장."

"네!"

"오늘 작업에는 단 하나의 실수도 있으면 안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오늘은 그토록 고대 하던 초품 납품 날짜였다.

Y엔진 측의 마음에 든다면 추가 계약을 할 것이고, 아니라면 초품 분량만 납품하고 계약은 종료 된다.

중요한 자리이니 만큼 송기오 역시 오랜만에 긴장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는데.


".... 저 사람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지나 가는 게 보였다. 순간 말려 올라 가는 송기오의 입꼬리. 한 남자의 얼굴을 알아 본 탓이었다.


"공태인 차장이 온 걸 보면.. 20세기 테크인가."


공태인 차장과는 안면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안면이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공태인은 과거 YM에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퀀스 1 팀장이 다가와 속삭였다.


"오늘 20세기도 릴레이 보드 납품 일정이 잡혀 있었나 봅니다."

".... 김지형 부장이 수를 썼나 보군."

"그런 것 같습니다. 동시에 작업을 시키고, 퀄리티나 단가를 따져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1팀장은 그런 Y엔진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지만, 송기오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았다. 아니,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 했다.


'어차피 실력으로 증명하는 바닥이야.'


전기 쟁이들에게 실력은 곧 돈이다.

발주인에게, 더 나아가서는 고객들에게 얼마 만큼의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신속하게 가져다 줄 수 있는지가 실력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송기오는, 이 바닥에서 정점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20세기 테크는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비교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저기... 외국인 노동자들 아닙니까?"

"아니, 60대 할아버지도 끼어 있는 거 같은데."

"저런 사람들을 데리고 무슨 전기 작업을 한다고."


20세기 측에는 60세 이상의 노인과, 외노자가 섞여 있었다.

한참 절정인 3-40대 기술자들을 고용해도 시원찮은 판국에 저런 판단을 내리다니.

송기오는 혀를 끌끌 찼다.

'김원식 사장이 많이 급하긴 했나 보네.'

이유는 딱 봐도 뻔했다.

계약을 빼앗기기는 싫고, 생산량은 뽑아 내야겠고. 그렇다고 전기 숙련공들을 고용 하자니 사람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인력사무소에 연락을 돌린 거겠지.

'우리 YM을 한참 만만하게 본 거구나.'

송기오는 그 사실 조차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프라이드가 강한 남자가 바로 그였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이런 모욕을 준 사람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최원태와 김차장을 제외하고는.


'맡고 있는 계약까지 모두 뺏어 줄게.'


죄책감은 없었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는 쪽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 뒤.

송기오는 이마에 흐르는 구슬 땀을 닦으며 공장 내부를 둘러 보았다.

슬슬 출근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시업 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1 팀장! 블록 쪽 장비 마무리 됐나?"

"5개 장비 중 4개 마무리 됐습니다."

"2 팀장은?"

"3개 마무리 했습니다. 하나는 거의 막바지입니다."

"좋았어. 지금 페이스 대로만 작업 해. 그럼 시업 전에 끝내고 테스트까지 할 수 있어."


송기오가 1, 2 팀장의 어깨를 두들겼다.

마치 너희들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사기를 올려 주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시간 만에 금일 작업의 70%를 쳐낸 부하직원들이 진심으로 자랑스러웠다.


"20세기는 뭐하고 있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 보니, 전기 판넬에 붙어서 쎄가 빠지게 노가다를 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YM 테크의 저력을 보여 줄 좋은 기회였다.

원청 사무실 사람들에게 눈도장도 찍고, 추가 계약도 따내고.

20세기 테크는 훌륭한 비교 대상이 되어 줄 터였다.


"자, 이제 힘 내서 마무리 하자."

"넵!"


우렁찬 대답과 함께 작업이 재개 되었다.

타공을 하고, 태핑을 내고. 그 홈에 준비한 릴레이 보드를 체결하고.

그렇게 미친 듯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아직 작업하고 있어요?"


Y엔진의 부장, 김지형이었다.

송기오는 작업을 하다 말고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부장 님 오셨습니까. 이제 거의 막바지 입니다. 시업 시작 10분 전 까지는 작업 끝내고, 테스트까지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쯧쯧.... 작업 속도가 이렇게 느려서야.."

"......네?"

송기오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작업 속도가 느리다니?

'현장에서 뛰어본 적이 없어서 감이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타 업체에 비하면 이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였기 때문이다.

송기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억지로 참아냈다. 상대는 원청의 부장. 한 번 쯤은 참아 줄 필요성이 있었다.

"부장 님. 이건 단순한 설치 작업이 아닙니다."

"그럼?"

"기존 I/O에서 솔 밸브로 가는 케이블을 철거하고, 다시 새로 깔아야 하는 작업입니다. 철거와 설치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습니다."

철거와 시공, 두 작업을 함께 해야 한다.

2시간 안에만 끝내도 나름 선방했다고 볼수 있는데, 1시간 10분 만에 마무리 단계를 하고 있는 YM 테크보고 작업 속도가 느리다니!

'원청 부장만 아니었으면 들이 받았다.'

그런데.

당연히 수긍하고 넘어갈 줄 알았던 김지형 부장이 입을 뗐다.

"20세기는 진작에 끝내고 퇴근 했는데?"

"........네?"

멍한 표정으로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성능 테스트까지 끝내고 퇴근 했다고요. 20세기는."

"아, 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뭐, 아무튼 YM 테크의 실력은 잘 봤습니다. 작업 끝나면 가공 과장한테 업무 보고 하고, 퇴근하도록 하세요."

김지형 부장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송기오는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20세기 테크가 작업을 한 장비 쪽 방향이었다.

'그럴리가 없어.'

똑같이 10대 씩 작업을 했다.

YM 테크는 30명이 달라 붙었고, 20세기는 20명이 달라 붙었다. 그것도 노인과 외노자들이 포함된 20명.

그런데 1시간 만에 작업을 끝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뭔가 편법을 쓴 게 분명 해.'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전기 판넬을 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송기오는 입을 떡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이걸 20세기에서 만들었다고?"

칼 같은 배선 각.

자로 잰 듯 일정한 피복 탈피 길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어드레스 코드까지.

그야 말로 완벽에 가까운 릴레이 보드였던 것이다.

송기오는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다른 장비들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는데.

"......"

다른 장비들도 마찬가지였다.

YM 측에서 제작한 보드보다 월등히 뛰어난 퀄리티.

송기오 본인이 직접 만든다면 이 정도 퀄리티로 못 만들 것도 없었지만, 대량 생산은 아예 다른 이야기였다.

완벽한 품질 보다는 생산성에 포커스를 둬야 했기 때문이다.

"이 퀄리티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텐데.."

초품이라고 힘을 준 건가? 아니면 타 지역에서 시퀀스 전문가를 초빙한 건가?

머리 속에서 온갖 의문들이 범람했다.

띠리리링-!

그 의문들은 휴대전화 진동이 울리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예, 사장 님."

YM 테크 사장, 김동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야, 송 과장! 너 오늘 뭐 사고 친 거 있어?"

"네? 사고라뇨."

"Y엔진 부장한테 연락 왔어! 초품 까지만 계약하고, 전속 계약은 힘들 것 같다고!"

"...... 그게 무슨.."

"Y엔진 뿐만이 아니야. V엔진하고 R엔진도 20세기랑 전속 계약 맺겠다고 연락 왔어."

V엔진 R엔진.

두 곳 전부 릴레이 보드의 샘플을 보낸 곳이었다. 마음에 들면 초품 계약 및 시공 제안이 올 것이고, 송기오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 했다. 자신이 직접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샘플을 보냈기 때문이다.

"책임 지고 계약 따낼 수 있다고 했잖아! 송 과장, 감 다 죽은 거야? 이대로면 미리 생산해 놓은 릴레이 보드, 싹 다 길 바닥에 갖다 버려야 할 판국이야!"

그런데도 20세기와 계약을 맺겠다고 연락이 왔다는 건.

"이런 씨X...."

완벽한 그의 패배라는 뜻이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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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9. 유능하다고 했지 않습니까. NEW +19 20시간 전 10,204 431 18쪽
38 38. 누구 마음대로 인정 합니까. +24 24.09.15 14,545 433 20쪽
37 37. 닮았네. +28 24.09.14 16,851 464 19쪽
36 36. 화낙 본사에서 나온 겁니까? +19 24.09.13 18,161 512 22쪽
35 35.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일부수정) +41 24.09.12 19,551 504 18쪽
34 34. 종자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 부장은. +22 24.09.11 20,944 493 19쪽
33 33. 너도 아웃이라고 새끼야. +17 24.09.10 21,585 552 15쪽
32 32. 키워 봅시다. +16 24.09.09 21,218 554 13쪽
31 31. 걱정 하지 마십시오. +16 24.09.08 21,973 547 19쪽
30 30. 급한 사람이 가는 게 맞지 않씀까? +19 24.09.07 22,065 565 22쪽
29 29. 사고 임박. +14 24.09.06 22,184 517 19쪽
28 28. 안전제일주의. +12 24.09.05 22,943 547 19쪽
27 27. 플렉스 좀 했어요. +18 24.09.04 23,530 524 16쪽
» 26. 완벽한 패배. +15 24.09.03 23,963 543 22쪽
25 25. YM 송기오. +18 24.09.02 24,574 523 16쪽
24 24. 다함께 차차차.(일부 수정) +26 24.09.01 25,328 527 19쪽
23 23. 리더의 자질. +37 24.08.31 25,354 556 19쪽
22 22. 릴레이 보드 제작(2) +16 24.08.30 25,484 527 17쪽
21 21. 릴레이 보드 제작(1) +19 24.08.29 26,200 529 19쪽
20 20. 밥 그릇. +16 24.08.28 26,985 537 19쪽
19 19. 별 미친 놈을 다 봤나. +16 24.08.27 27,343 515 18쪽
18 18. 누군가의 빌런(2) +22 24.08.26 26,811 529 18쪽
17 17. 누군가의 빌런(1) +14 24.08.25 27,025 493 18쪽
16 16. 주사위. +19 24.08.24 27,769 494 20쪽
15 15. 이자까지 쳐서. +40 24.08.23 28,160 512 17쪽
14 14. 이 대리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겁니까. +22 24.08.22 28,123 542 14쪽
13 13. 성공의 비결. +29 24.08.22 28,861 519 18쪽
12 12. 개판이네요, 솔직히. +22 24.08.21 29,915 538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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