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실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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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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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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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DUMMY

111. 진정한 번개


장미십자회 스페인 지부장 오셀로의 무기인, 바스크 신화 속 자연의 신, ‘바사자운’의 양날 톱.

그 능력인 공포의 비명 ‘패닉’은 신들마저 공포에 질려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권능이었다.


세상을 불지옥으로 만들 듯했던 티폰마저 그 비명소리에 전의를 상실하고 주저앉은 순간,

장미십자회 일행들은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체사레가 성녀 바바라의 성유물이 들어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꼭 쥐고 주문을 외우자,

티폰의 아가리 속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불꽃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던 중, 갑자기 티폰의 가슴팍에 새빨간 창 한 자루가 날아들어 깊숙히 박혔다.

체사레와 오셀로가 창을 던진 장본인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배를 탄 대머리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골든 하인드 호를 끌고 온 드레이크 선장은 티폰 앞에 서 있는 체사레와 오셀로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크하하하! 기사단 애송이와 스페인 깜둥이 자식이로구만!”

“깜둥이라니, 그건 인종 차별 발언입니다만”

“크헤헤! 그래, 깜둥이든 애송이든 잘 싸우기만 하면 상관없지! 전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말투는 거칠었지만, 함께 싸우게 될 체사레와 오셀로에 대한 호감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골든 하인드 호에서 훌쩍 뛰어내린 드레이크 선장은 곧장 티폰에게 달려들어서 붉은 창을 뽑아내더니, 그 자리에 그대로 두 번째 창을 찔러넣었다.


“크하하하! 이 구렁이 새끼, 이걸 꽂았으니 이제는 다시 재생하진 못할거다!”


드레이크 선장이 찔러넣은 두 번째 창은 마나난 막 리르의 노란 색 창, ‘게 비어’.

이 창은 상처입은 짐승의 회복을 막는 권능이 있는 무기였다.

티폰은 ‘게 비어’에 의해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입고 고통에 울부짖었다.


드레이크 선장에 이어서, 티폰에게 달려들어 후속타를 입히는 것은 아테나였다.

아테나의 창은 티폰의 비늘을 뚫어 낼 수 없었지만, 아테나의 진짜 무기는 다른 쪽이었다.


전쟁의 여신을 상징하는 신물, 신의 방패 아이기스가 티폰의 비늘에 부딪힐 때마다,

그동안 대지의 뱀 신의 힘을 흡수해 회복한 석화의 권능,

원래의 신화에서는 메두사의 머리가 달려있던 아이기스의 능력이 티폰의 몸 일부를 석화시켰다.


장미십자회의 각 지부에서 모인 토벌대가 티폰을 완전히 압도한 지금,

티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것은 시현의 역할이었다.


그리스 신화 속, 티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던 신들의 왕 제우스.

그 신화 속 티포노마키아의 서사를 따라 티폰에게 마지막 번개를 떨어트리기 위해 아스트라페를 겨누자,

티폰 또한 마지막 힘을 다해 흉악한 아가리에서 번개를 쏘아낼 준비를 했다.


죽을 힘을 다해 쏘아내는 티폰의 번개와 시현의 손에서 발사된 아스트라페의 벼락이 부딪히는 순간,

땅을 뒤흔드는 충격과 함께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쿠르르릉!


일행들은 눈이 멀 것만 같은 새하얀 섬광에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고 두 번개가 맞부딪히는 싸움의 결과를 눈에 담기 위해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흔들리던 땅이 잠잠해지고, 눈 앞을 가리던 섬광이 걷히자 마주하게 된 광경은,

새카맣게 그을린 시현이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었다.

상처입은 시현의 모습에 놀란 베아트리체와 아일라는 시현을 향해 뛰어갔다.


““시현아!””


그러나 시현은 손을 들어 자신이 무사함을 알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시현의 시선은 자신이 번개를 쏘아낸 표적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티폰은 시현의 공격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분명히 번개는 왕의 무기라고 하지 않았나! 왕이라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눈 아래에 둘 수 있는 오만함이 있어야 한다. 모두를 짓밟고 군림하기는 커녕 다른 이의 명령에 따를 뿐인 네놈은 번개를 휘두를 자격이 없다!”


시현과 티폰의 번개 대결은 결국 시현의 패배로 끝이 났다.

시현이 쏘아내는 번개는 이상하게도 티폰을 상대로 할 때에는 제 힘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티폰의 말처럼 아스트라페의 사용자인 시현이 자격이 없기 때문인가?

진정한 번개의 주인은 모든 존재 위에 군림하는 왕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흔들리는 시현의 마음을 다잡아 주는 것은 예상 외의 인물이었다.


“야! 저 딴 개소리 신경 쓸 필요 없어! 왕이 모두를 짓밟고 군림하는 독재자라고?!”


수많은 신의 권능이 뒤섞여 산과 바다를 파괴하는 전쟁터에 끼어든 유일한 일반인.

위험을 피해 골든 하인드 호에 남아서 이 싸움을 지켜볼 뿐이었던 비탈레가,

시현의 패배를 보고 갑판 위로 뛰어올라와 고함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비탈레의 말은 시현의 정신을 번뜩 차리게 했다.


“나는 아버지가 물려준 조직을 배신자에게 빼앗길 뻔했던 반푼이 두목이지만!

너의 도움 덕분에 다시 그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어!

그래서 더더욱 확신할 수 있어. 너는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걸 말이야!

너에게는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포용력도 있어!

그리고 나도 있잖아!”


그쯤 되자 시현도 슬슬 비탈레가 무언가 폭탄 발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비탈레는 멈추지 않고 폭탄 발언을 내뱉어버렸다.


“나랑 결혼하면 우리 조직의 왕이 되는 거나 다름없잖아! 너는 충분히 자격이 있어!

저 못생긴 구렁이 괴물의 아가리에 벼락을 쑤셔박아버려!!!!”


할 말을 마친 비탈레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비탈레의 뜨거운 청혼을 받은 시현은 왕은 고사하고, 대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티폰과의 목숨을 건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베아트리체와 아일라의 차가운 눈빛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비탈레의 폭탄 발언 덕분에 시현은 비로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티폰이 말했던 번개를 휘두를 자격,

그것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무리의 가장 앞에 서는 이의 것이라는 것을.


진정한 지도자는 떠받들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이끄는 사람이다.


티폰과의 전투 중, 시현은 단 한 번도 주도적으로 의견을 냈던 적이 없었다.

지난 모든 사건들에서, 아테나의 도움 없이는 아무런 능력도 없었던 시현이

제우스의 번개를 손에 쥐었다고 해서 뭐 그리 달라질 게 있나 싶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다.

이 번개, 왕의 증표를 들게 된 순간부터는,

시현은 전장의 가장 앞에서 적을 가장 먼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그 동안 멀찍이서 번개를 쏘아내며 원거리 공격만 해 왔던 시현은

이제서야 비로소 이 무기, 아스트라페의 진짜 용도를 알 수 있었다.


바닥에 꿇려진 무릎을 들고,

온 힘을 다해 바닥을 박차며,

자연스레 벌어지는 입으로 고함소리를 내보냈다.


눈 앞에 서 있는 거대한 폭풍의 신, 티폰을 향해 달려가

제우스의 번개, 아스트라페를 양 손으로 붙잡고 내리찍었다.


티폰 또한 그에 맞서 번개를 내뿜었지만,

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공격이 자신의 마지막 공격이라는 것을,


독재자에 맞서 왕좌를 빼앗는 반역의 신격을 지닌 티폰을 앞질러 왕좌를 차지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뒤집으려는 반란군, 반역자가 아닌,

무리를 이끌고자 하는 지도자.

눈 앞에 있는 새파랗게 젊은 영웅이라는 것을


시현이 휘두른 아스트라페의 번개와 티폰의 번개가 다시 한 번 부딪히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 폭발의 범위 안에는 아스트라페를 붙잡은 시현도 들어가 있었지만,

정작 시현은 그 폭발의 위력을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


아스트라페를 손에 쥐고 있어서일까,

세상의 모든 번개가 시현의 손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휘두른 제우스의 번개도,

티폰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풍 속의 번개도,

저 멀리 화산재 구름 속에서 몰아치는 초록색의 번개도,

튀르키예에서 일루얀카와 싸웠을 때, 푸코 교수가 보여주었던 틀랄록의 번개도.


시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번개를 손 안에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더 이상 그 번개들은 시현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모든 번개가 자신의 일부가 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번개의 주인, 제우스의 권능.

진정한 번개.

세상을 떠난 헤파이스토스의 마지막 작품인, 아스트라페의 힘이었다.


112. 왕관의 무게


시현의 번개가 티폰에게 떨어진 뒤,

눈부신 빛과 희뿌연 먼지 구름이 가라앉자 보이는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수십억 볼트의 전기에 새카맣게 불타 숯이 되어버린 티폰의 머리통이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가루가 되어가고 있었고,

시현이 딛고 서 있는 땅은 음푹 파여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 있었다.


티폰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인 시현의 몸에선 아크방전이 발생하며 수천 도의 고열로 주변의 암석을 녹이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엄청난 고전압의 전류가 휘감은 시현의 모습은

신화 속 번개의 신. 제우스, 그 자체였다.


옆에서 시현의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티폰이라는 거대한 적을 드디어 쓰러트렸다는 승리감,

함께 싸워 온 전우들에 대한 유대감,

티폰을 처치했음에도 무엇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던 허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시현에 대한 경외심.


그 중에서도 가장 의외의 반응을 보인 것은 아테나였다.

아테나는 시현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현은 그런 아테나의 돌발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신님, 왜그러세요?!”

“그대가 제우스의 번개, 아스트라페의 주인에 걸맞은 존재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시현은 즉시 겉으로 드러나는 번개의 힘을 잠재우고, 무릎꿇은 아테나를 일으켜 세웠다.


“제가 아스트라페의 주인에 걸맞은 것과 여신님께서 무릎꿇는 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시현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으나,

아테나는 현대인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상식적인 언행도 할 줄 몰랐고,

사회적 체면을 신경쓰는 인간이라면 갖추고 있을 만한 거리낌도 없었다.

한 마디로, 빠꾸 없는 여신님은 비상식적인 말을 입 밖으로 내 버렸다.


“자네, 내 아버지가 되어주게”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난해한 발언에, 이게 대체 뭔소린가 싶어 바라보니,


“제우스의 번개는 올림포스의 왕관과 같은 것일세.

그런 번개의 주인이 되었으니 올림포스의 왕좌에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지.

그러니, 내 아버지, 제우스의 빈 자리를 채울 왕이 되어달라는 말이네”


아테나의 말을 들은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평범한 휴학생일 뿐인걸요. 왕이라뇨 그게 무슨”

“세상을 발 아래에 두고 지배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닐세. 그저 목적을 상실한 채 신화의 서사를 따라 관성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이끌어 달라는 말이지”


아테나는 티폰의 시체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저 티폰을 보게나. 수천년 동안 에트나 산에 봉인되어 살다가, 이제서야 풀려났음에도,

자유를 찾아 떠나지도 못한 채 신화 속 티폰의 정체성을 따라 무의미한 폭동과 파괴를 불러오지 않았는가?

에트나 산의 동굴에서, 내가 보는 앞에서 죽어갔던 헤파이스토스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신화 속 헤파이스토스가 신화 속 아테나에게 저질렀던 강간 미수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쓰러졌네.

나 또한, 자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일루얀카와 같이 이성을 잃은 뱀 괴물이 되어 토벌의 대상이 되었겠지

라포트와 계약한 로키 또한, 자네가 로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라포트와 함께 도망만 치다, 결국 일루미나티에게 당했겠지

이런 신들이 나와 로키뿐이겠는가?

과거 신화의 시대였다면 만신전에 모여 앉아 인간들의 숭배를 받고,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었을 신들이, 세월이 흘러 영락한 모습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쯤 되니 시현도 아테나가 하는 말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아테나는 지금 시현에게 신들의 왕, 즉 판테온(만신전)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하고 있었다.

세상 곳곳에 퍼진 신들을 찾아, 그들이 토벌당하거나 도망자 신세가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시현이 본의아니게 앉게 된 제우스의 왕좌, 그 주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

왕관의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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