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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post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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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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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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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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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DUMMY

95. 데이트


시현 일행이 티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임시로 정한 거처는 시칠리아 남부에 위치한 도시, ‘라구사’였다.


도시 전체가 회색 암석과 검은 화산토의 단조로운 구성으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칙칙한 인상이 있던 카타니아와는 달리,

시현과 베아트리체가 단 둘이 손을 잡고 거니는 라구사의 거리는

상아색, 노란색, 주황색 등 난색 계열의 색으로 칠해진 건물들과 더불어

겨울에도 따뜻한 날씨 덕에 초록을 빛내고 있는 식물들이

아름다운 휴양 도시의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런 밝은 분위기의 도시를 만나게 된 시현과 베아트리체는

한껏 들뜬 채로 길을 가다가 경치 좋은 곳에 있는 자그마한 식당을 발견했다.

식당의 외벽에는 검은 글씨로 Osteria(식당)이라고 적혀있었다.


길거리 반대쪽, 수풀이 우거진 언덕 방향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식당의 오너 셰프가 직접 테이블로 와서 메뉴를 설명해 주었다.


“tagliolini con tartufi e ricci di mare? 한번 먹어 보고 싶은데?”


시현이 주문한 음식은 트러플과 성게를 곁들인 탈리올리니 파스타였다.

베아트리체는 ‘Asino in umido con polenta‘라는 요리를 주문했다.

무려 폴렌타(일종의 옥수수죽)를 곁들인 ‘당나귀’ 고기 스튜였다.

그녀의 선택에 시현은 기겁했다.


“진짜 그거 주문하려고?”

“나는 여행까지 와서 굳이 흔한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베아트리체는 특별한 순간에는 특별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었다.

사실 말이 좋아서 특별한 음식이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보통 괴식으로 보일 것이다.


“별장에서 요리 대결할 때에는 흔하디 흔한 라구 파스타를 하지 않았던가?”

“할 줄 아는 요리가 그거밖에 없었단말이야!”


베아트리체가 얼굴을 붉히며 성을 냈다.

그리고,


“그러니까 앞으로 내 식사는 네가 만들어 줘”


흠칫!

발코니 너머 풍경을 감상하고 있던 시현은 예고없이 들려오는 대담한 발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베아트리체를 봤다.


자신의 수줍은 고백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베아트리체는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한층 더 부끄러워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술도 시킬까?”

“좋아, 나한테 맡겨 줘”


베아트리체가 메뉴판을 시현에게 넘기자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말고”

“뭐?”

“앞으로 네 식사, 나한테 맡겨 달라고”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까지 더듬어 가며 외쳤다.


“너! 그,그··· 그 약속 꼭 지켜! 안그러면 아빠한테 이를꺼야!”

“알았으니까 일단 앉아서 얘기해···”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놓이고,

시현은 베아트리체에게 자신의 파스타를 조금 덜어서 나누어 주었다.

베아트리체는 파스타를 한 입 맛보더니 음식의 맛을 평가했다.


“음! 역시 시칠리아는 해산물이 맛있긴 하구나”

“그치? 역시 이런 곳에 오면 특산물을 먹어봐야지. 그래서, 그 당나귀 스튜는 어때?”


그러자 베아트리체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큼직한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찍어 시현에게 들이밀었다.


“한국 표현으로 하자면 백문이 불여 일견이라고 하지? 한번 먹어봐 자, 아~”

“으으··· 먹어도 괜찮은 거 맞지?”


연인 사이에 직접 먹여주는 이벤트를 포기할 수 없었던 시현은 눈을 꼭 감고 베아트리체가 먹여주는 고기를 입에 넣었다.

다만, 시현과 베아트리체 양 쪽 모두 짓궂은 장난을 즐기는 성격인 만큼,

베아트리체의 포크를 꽉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야아~ 내 포크 돌려줘어~”


베아트리체가 콧소리를 내고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애교를 부리자,

시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머리속에서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어디서 들어 본 말투인 것 같은데 그거, 나더슈디 부인이었나?”

“야! 그 밥맛없는 흡혈귀랑 내가 비슷하다는 거야?!”


불과 몇 분 전에 수줍은 고백을 나눴던 신참 연인들은 그새를 못참고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꽁냥거리는 한 쌍의 잘 어울리는 연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멀찍이서 훔쳐보고 있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무시무시한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의 대모, 비탈레였다.


그녀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시현과 베아트리체의 사이를 모르는 채로,.

시현을 처음 만났던 카타니아 시 근처의 도로에서부터

시현과 함께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마음 속에서 자그마한 호감을 키워왔던 것이다.

그를 귀염둥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거나, 유독 그에게 이런저런 편의를 봐 주면서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시현은 오늘 아침, 퇴원 수속을 밟고 병원에서 나오자 마자

비탈레의 눈 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게 아닌가?


비탈레는 왠지 바보가 된 것 같은 허탈한 기분에

시현과 베아트리체의 데이트를 염탐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발길 가는 대로 떠돌다 보니,

라구사 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한 ‘라구사 두오모’가 비탈레의 눈 앞에 서 있었다.


96. 성 게오르기우스


‘두오모’는 이탈리아의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대성당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라구사에 위치한 두오모의 정식 명칭은 ‘성 조르지오 대성당’이다.


바로크 양식으로 건설된 두오모는 1775년 완공되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그 아름다움으로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 명소로 활약하고 있다.


비탈레는 그런 라구사 두오모의 열린 문 안으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문 옆 한쪽에 있는 성수반 안의 물을 찍어 성호를 그으며 기도했다.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그리고 나서 정면에 보이는 제단 앞으로 다가가 멍하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검은 수도복을 입고 안경을 쓴 젊은 수사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매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입니다. 혹시 에트나 산에서 일어난 재난 때문이십니까?”

“아니요, 그냥 왜 저한테는 좋은 남자가 안생기나 고민인데요?”


비탈레는 슬슬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3으로 바뀌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동안 연애를 아예 못해본 것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비탈레가 마피아 집안의 외동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남자들은 죄다 겁을 먹고 도망을 갔다.


이제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찾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연령대이기에 비탈레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 와중에 제법 괜찮은 남자를 발견했다 싶었는데,

눈 앞에서 베아트리체가 채 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는 비탈레에게 젊은 수사가 충고를 해 왔다.


“자매님께서는 충분히 매력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느껴질 테지요.

그러나 가만히 앉아 계신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다가 시현에게 대시할 기회조차 놓쳐버린 자신을 저격하는 듯한 수사의 말에 뜨끔한 비탈레가 질문을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수사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그리고 쟁취하십시오.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방법은 최대한 빨리 선택을 하는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선택을 해야

이 길이 틀린 길임을 깨달았을 때 다시 돌아올 시간이 있으니까요”


비탈레는 수사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을 느꼈다.

마피아 보스인 자신에 대해서 그 동안 만나왔던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에,

지레 겁을 먹고는 이성관계라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일단 호감이 가는 남성이 있으면 냅다 고백을 박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거절당한다고 해서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시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냅다 시현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볼까 싶었다.

어차피 거절당할 것은 알고 있다.

대신에 베아트리체에게는 미리 사과를 하리라.

시현과 그녀가 사귀기로 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이다.


탁하게 어지럽혀졌던 머리속이 한 순간에 명쾌하게 정리되자,

귀한 충고를 해 준 수사에게 무어라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사는 한 손을 들어 보이며 그녀의 감사를 막았다.


“감사의 말을 들으려고 말씀을 드린 게 아닙니다.

그저 길 잃은 어린양이 나아가는 길을 밝혀 주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제 직분이기 때문이지요”


수사는 사제와 달리 교황청에 소속되지 않고, 다른 신도를 이끌 의무가 없다.

그저 자발적으로 수행을 쌓고, 수도회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비탈레는 그런 수사에게 감탄하며 한 가지 질문을 했다.


“혹시 수사님께서도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저는 수도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이 바로 그런 고민의 순간이었답니다.

저는 시기를 놓쳐서 선택을 되돌리지 못한 채 후회하지만,

자매님께서는 그런 후회를 겪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수도사가 된 것을 후회한다고 하니 그의 말이 급속도로 신빙성을 잃었다.

그럼에도 비탈레는 이 결심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시현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활짝 열린 성당의 문으로 나서려던 순간,

충고를 해 주었던 수사님께서 비탈레에게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었다.


이 십자가에 담긴 것이 자매님에 앞길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비탈레는 수사님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고 길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후,

성당 안에 홀로 남은 수사는 성당의 문을 닫고,

옷 안에 감춰져 있던 무전기를 꺼내들고 어딘가에 보고를 했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자 무전기 너머에서 누군가의 대답이 들려왔다.


[좋은 소식이군,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반드시 포섭해라]

“네, 그렇지 않아도 십자가를 맡겨 놓았습니다”

[그래, 잘했다 앞으로도 꼭 그렇게 해 주길 바란다 체사레]


무전기 너머의 인물로부터 ‘체사레’라는 이름으로 불린 수사는

평범한 수사처럼 꾸미고 있었으나

사실은 장미십자회 중에서도 일명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바티칸 지부 소속의 ‘마르코 체사레’였다.

장미십자회에서 그들을 기사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은 실제로 기독교에 귀의하여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역사를 가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장미십자회 전체의 의견보다는 교황의 뜻에 따르며,

그 때문에 장미십자회 내에서는

다른 지부의 일에 훼방을 놓기도 하는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런 자들 중에서도, 티폰 사태 해결에 참여하여 시칠리아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고자

바티칸 지부에서 엄선한 정예중의 정예인 체사레는

다른 지부의 인물들보다 먼저 볼로냐 지부의 인물들과 접촉하기 위해

수도복을 벗고, 평범한 민간인의 복장으로 은밀하게 저 멀리 달려가는 비탈레의 뒤를 밟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비탈레는 들뜬 마음으로 시현을 찾아서 달려갔다.

자신의 미래에 닥칠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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