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실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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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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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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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DUMMY

97. 선전포고


시현은 베아트리체와 함께 라구사 시의 구도심, 라구사 이블라(ibla)의 골목길을 거닐었다.

마을을 빼곡하게 채운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를 다니면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지붕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두오모의 돔 지붕과, 소박하고 정겨운 마을 풍경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혼자 여행을 와서 구경하며 돌아다녔어도 즐거운 시간이 되었을 시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매 순간순간이 감동의 연속이었다.

시현과 베아트리체는 발길이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골목길을 누비며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베아트리체가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받고 걸음을 멈췄다.


“시현아, 잠깐만 있어봐. 뭔가 느낌이 안좋아. 누가 우릴 보고 있는 것 같아”

“어?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그런 걸까?”


시현과 베아트리체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던 중, 골목길의 반대편에서 한 사람이 빠르게 다가왔다.

시현과 베아트리체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자 경계를 풀었다.

비탈레가 해맑은 미소를 빛내며 연인의 앞에 도달했다.


“이야~ 여기서 우연히 너희를 마주칠 줄이야, 이건 마치 운명인 것 같달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비탈레였지만,

베아트리체는 불안감을 느끼는 예민한 여자의 촉이 비탈레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머지않아 그 불안감은 최악의 모습으로 현실이 되었다.


“베아트리체, 너 우리 귀염둥이랑 사귀기로 했나 봐?”

“그런데요?”

“사실 나도 처음 본 순간부터 시현이에게 무언가 이끌림을 느끼고 있었거든.

미안하지만 나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을래?”


베아트리체는 비탈레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충격을 받고 뒷목을 잡았다.


“아이고~아이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비탈레 씨,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알아들은 게 맞는건가요?”


시현 또한 당황한 채, 비탈레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가진 비탈레는

마치 불도저와 같은 추진력으로 자신의 마음을 밀어붙여왔다.


“거절하더라도 괜찮으니까 똑바로 대답해 줘, 너 마피아 보스의 애인이 되어보지 않을래?”


시현은 비탈레의 충격적인 발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어물쩍 넘어가려다가, 뒷목을 잡고 자신을 노려보는 베아트리체와 눈이 마주쳤다.


“야, 이시현, 너 말 똑바로 해라. 나야 이 아줌마야?”

“아줌마라니, 성숙한 매력에 더해 재력과 권력을 두루 갖춘 연상의 미녀라고 해 주지 않을래?”


시현이 어버버거리며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자 이윽고 두 여자의 기싸움이 발생했다.

지금이라도 시현이 비탈레에게 단호한 거절의 말을 했다면,

이 논쟁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벌어진 일은 시현에게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테나가 나타난 것이다.


“둘 다 잠깐 멈추게나!”

“여신님이 여긴 어떻게?!”


베아트리체가 갑작스러운 아테나의 등장에 놀라 묻자,

아테나는 웬일로 장난꾸러기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와 시현은 계약(engagement)로 이어진 관계이니 말이지”


이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시현과 아테나가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아테나는 시현이 어디에 있던지 시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시현의 상태를 감지할 수 있으며,

시현의 곁에 나타날 수 있다고.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아테나의 말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충격을 받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이제는 여신님과 약혼(engagement)을 했다고?”

“이게 또 무슨 소리야, 절대 아니지! 계약 말하는 거야! 계약! Contract!”


시현은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런 사태를 유도한 여신은 능청스럽게 다음의 말을 꺼냈다.


“여자의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하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일세.

그리스 신화에도 메데이아, 키르케와 같은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있지”


시현은 이 여신 같지도 않은 여신이 또 어떤 말을 꺼내려는 것인지 불안해졌다.

시현의 생각에 이 갈등은 자신이 비탈레의 마음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끝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재미난 일을 쉽게 끝낼 생각이 없는 여신의 말은

시현의 기대를 아주 참혹하게 배신했다.


“신들 사이에서도 재판관을 맡은 이 몸이 직접 판결을 내려주도록 하마.

이 일은 절조 없이 여러 여성들을 유혹해 분쟁의 씨앗을 만든 시현의 죄가 크도다.

그러므로 본 판관은 두 여성이 공평하게

시현을 반으로 잘라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판결을 내리는 바이다!”


시현은 아테나의 막무가내식 판결에 기가 찼다.

아테나의 말대로 한다면 시현은 토막난 생선 신세가 될 참이었다.

시현은 아테나에게 꼬박꼬박 해 오던 존댓말도 잊은 채 소리쳤다.


“거 여신님이라고 곱게 대접해줬더니만 이거 안되겠네! 지금 나보고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라고?”

“아, 시현군, 지혜의 여신인 나의 깊은 뜻을 어찌하여 몰라주는가?”


아테나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깊은 뜻을 해설해 주었다.


“자네를 반으로 자르라 하면, 자네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자는,

자네를 상대에게 넘겨주어도 좋으니 제발 반으로 자르지 말아 달라고 할 것이 아닌가?”


어디서 솔로몬의 판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어이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아테나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비탈레는 생각을 달리 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거 나쁘지 않은데? 반으로 나눠 갖는 거 말이야”

“제발 인간다운 생각을 해 주시겠습니까? 비탈레 씨!”


비탈레는 시현이 딴지를 걸어도 아랑곳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베아트리체, 하루를 반으로 나눠서 낮에는 너, 밤에는 내가 시현을 갖는 거 어떨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세요,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눠 가지자는 소리랑 뭐가 다른데요?”


기어코 두 여자의 분쟁은 시현의 아랫도리에 대한 영유권 주장으로 번졌다.

거기에 아테나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시간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자는 의견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듯하네,

하루를 반으로 나누지 말고, 하루씩 번갈아 가면서 시현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떤가?”


나름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고 자부하는 시현의 머리로는 따라갈 수 없는 대화가 이어지더니,

결국은 아테나의 의견이 반영된 정책이 날치기로 채택되었다. 물론 당사자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다수결 원칙의 불합리한 부분을 활용하는 아테나의 모습이 최초의 대의 민주주의 국가를 수호하는 여신 다웠다.

마치 어느 나라의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는 듯했다.


98. 고지전


시현의 시간을 나누어 가지자는 취지의 이 정책의 초안은 하루씩 번갈아 시현을 점유하자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먼저 시현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 관계로 발전한 베아트리체의 입장에서 잃는 것이 많다는 부분이 참작되어,

월, 화, 수, 목, 금 중 베아트리체가 3일, 비탈레가 1일을 점유하고 하루는 시현의 휴식을 위해 중립으로 남겨 두며, 토요일과 일요일은 각각 하루씩 갖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회의를 주도한 아테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시현을 쳐다보았다.

어깨가 잔뜩 올라간 채로 ‘나 잘했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그 모습이 괜시리 얄미웠다.


“저는 한 번에 두 여자를 연인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요?”


시현이 퉁명스럽게 아테나를 쏘아붙이자,

아테나는 능청을 떨며 오히려 시현을 꼬집었다.


“얼마나 많은 여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는 전적으로 남자의 그릇에 달린 것이지.

신들의 왕이신 내 아버지, 제우스께서 얼마나 많은 여성을 품에 안았는가 생각해 보게나”

“저는 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왕도 아닙니다만?”


시현이 반박하자, 아테나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제우스의 적장녀로서 올림포스의 왕좌에 가장 가까운 신일세,

그런 나의 가호를 받은 영웅들은 모두 왕위에 올랐지.

그것이 바로 영웅 된 자로서의 의무이자 책임인 걸세.

자네도 이제 슬슬 자신이 왕의 그릇임을 자각하게나”


아테나가 심각한 말투로 시현을 꾸짖자,

여신으로서의 존재감이 부풀어오르며 시현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시현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세계에서 살아왔던 자신이

이제는 그런 세계와는 거리가 있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 시현에게 베아트리체와 비탈레가 다가와 시현의 양 쪽 팔을 하나씩 붙잡아 팔짱을 꼈다.


“시현아, 그래서 오늘은 너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어. 우리 둘 중에 누구랑 먼저 시간을 보낼래?”


만약 시현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비탈레를 밀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여인의 고백과 아테나의 돌발행동에 멘탈이 흔들린 시현은

두고두고 후회할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어···일단 오늘은 베아트리체와 데이트를 하던 중이었으니 그걸 계속 하고, 비탈레 씨는 내일로···”


자유의지를 잃어버린 인형과 같은 상태가 된 시현은

두 여인과 한 여신의 의견에 휩쓸려 일부다처제를 허락하고 말았다.


시현이 내놓은 답에 납득한 비탈레는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아테나를 데리고 떠나가며 시현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내일은 꼭 나랑 데이트 하는거야!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 내 사랑! 귀염둥이! 안녀엉!”


떠나가는 비탈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시현이 베아트리체의 눈치를 봤다.


“너는 지금 이 결론이 마음에 들어 베아트리체?”

“솔직히 너를 내가 독점한다면 더 좋기는 하겠지만, 너 정도의 남자를 독차지하는 건 나한테 너무 과분한 모양이야, 그래도 내가 허락해 줄 수 있는 건 비탈레 씨와 아일라 까지니까, 그 이상은 절대로 안돼! 알았지?”


베아트리체가 납득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던 시현은 뒤에 덧붙여진 이름에 흠칫 놀라 되물었다.


“뭐라고? 아일라? 갑자기 아일라 씨는 왜?!”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 아일라 씨가 너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눈치 채지 않았었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던 시현이 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물론 시현도 튀르키예에서부터 시작된 아일라의 시선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가 먼저 아일라와 시현을 이어주려고 하는 일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줘. 난 지금 하루에 두 명의 여자가 생긴 것 만으로도 혼란스럽단 말이야”

“그래서 아일라가 너한테 고백하면 거절할 거야? 비탈레 씨는 받아줘 놓고?”


시현은 폐부를 찌르는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미 비탈레를 받아들이는 발언을 한 입장에서,

아일라에 대해서 단호한 거절을 한다는 선택지는 사라져 버린 상황이었다.

비탈레가 한 손을 들어 시현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만약에 아일라가 너한테 고백을 했을 때, 거절한다면 나는 많이 실망할 것 같아”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너랑 비탈레 씨가 이미 있는데 아일라 씨가 나를 3분의 1로 나누고 싶어할까?”


시현이 그나마 희망?적인 관측을 내 보았으나,

베아트리체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너 없을 때 아일라랑 많이 이야기를 해 봤는데, 너 그 아이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말아 줬으면 해. 아일라도 나 못지 않게 너한테 빠져 있으니까”


시현은 베아트리체의 경고에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어쩌다가 이렇게 여난에 시달리는 팔자가 된 것일까.

하루만에 두 명의 여자친구가 생긴 것만으로도 그 마음의 무게에 버거움을 느끼는데,

아일라의 마음마저 생각하려니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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