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실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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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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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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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DUMMY

113. 로마


티폰을 쓰러트린 시현은 승리의 기쁨을 맛볼 새도 없이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간절하게 말하는 아테나의 부탁을 마주해야 했다.


한 때,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대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 제국.

그 제국의 상징이자, 정복한 국가와의 문화적, 종교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시행했던 정책.

타국의 신화마저 로마 신화의 일부로 받아들여 모든 신을 한 곳에 모았던 판테온.


그 판테온을 시현의 손으로 다시 한 번 만들자고, 아테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나긴 인류 문명의 역사 속에서 신화들은 융합과 분열, 그리고 변형을 반복하며 지금의 형태에 도달했다.

그리스와 이집트 중심으로 정복지의 신화를 융합하고자 했던 헬레니즘의 습합신.

로마 신화 속에 모든 신들을 받아들였던 로마 신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로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신들을 둘로 나누었던 조로아스터교.

야훼 이외의 모든 신을 부정하며 악마로 격하시켰던 기독교.


그들이 자신들의 교리에 따라 멋대로 재단하고 재편했던 수많은 신화들은

지금의 와서 모든 신들을 부정하는 과학 문명의 밑에서

인류 문명과 대립하는 애물단지에 불과한 존재로 영락했다.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이 시대에 부활한 아테나는

한 때 자신의 동료였던 이들의 타락을 가엾게 여겼다.

그런 마음은 에트나 산의 한 동굴 속에서 헤파이스토스의 죽음을 마주하며 더더욱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아테나의 동포들을 구원하면서도,

인간 문명을 거스르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옛 신화들을 모두 모아, 현재의 질서를 따르는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것.


로마의 판테온이 모든 신화를 로마의 질서 아래 재편하였듯,

시현과 아테나가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현대에 맞는 판테온을 재건하자는 말이었다.


그 말에 귀기울이던 이들 중 몇몇은 아테나의 꿈이 가진 가능성을 보았다.

신화의 힘을 빌려 현실에 그 권능을 실현하는 몇몇 이들의 개인적 욕심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

예들 들자면 장미십자회와 일루미나티의 대립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 파급력으로 인해 발생했던 몇몇 전쟁들,

과거로 돌아가자면 아메리카의 토착 신화를 뭉개버린 정복 전쟁,

이베리아 반도에서 발생했던 레콘키스타,

교황청의 주도로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 등

세계사의 여러 큼직한 사건들이 신화와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신화들과, 이를 이용하려는 몇몇 인간들은

세계의 평화에 크나큰 위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당장 직면한 일루미나티만 하더라도,

티폰을 이용해 이탈리아에 혼란을 초래하고,

이를 틈타 폭동을 일으켜 남이탈리아를 분리∙독립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런 이들이 멋대로 자연 재해를 일으키고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신의 권능을 빌려 쓰기 때문이다.

그런 신의 권능을 한 지붕 아래 모아, 악인들의 손에 휘둘리지 않도록 보호하면

강대한 신의 권능이 인간을 향하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을 것이리라.

과거 모든 신을 판테온의 지붕 아래에 모으려 했던 로마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 비전에 공감하는 몇몇 인물들은 아테나의 말에 동의하는 의견을 밝히며 나섰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온 것은 의외로 드레이크 선장이었다.


“크하하! 나는 일평생 장미십자회니 일루미나티니 하는 작자들이 평화를 위한답시고 벌여 놓은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살았는데, 정작 전쟁의 여신께서 평화를 만들고자 하시는구만!

이 늙은이가 한 몸 바쳐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드리지!”


시현은 그런 아테나와 드레이크의 기대에 부담을 느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실종되어 다니던 대학을 휴학한 상황이었고,

유물과 신화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개 대학생이었다.


그런 시현에게 새로운 판테온의 수장이 되어달라니,

그건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럴 그릇이 못됩니다. 신들을 모아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이야기에는 공감하지만, 그 수장이 반드시 저일 필요는 없잖아요”


시현이 극구 사양하며 물러나려 하자, 아테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방금 전 아스트라페의 진정한 힘을 끌어내는 모습에서 확신했네.

진정한 번개는 왕만이 휘두를 수 있는 무기이니 말일세”


그 말에 시현은 티폰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릴 때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분명히 티폰 또한 그렇게 말했었다.

번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그러므로 하늘의 주인, 신들의 왕만이 쓸 수 있는 무기라고.

그런 무기를 제대로 휘둘러 티폰의 숨통을 끊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왕이란 어떤 것인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아테나가 시현을 왕의 그릇이라 판단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바티칸 지부 소속인 체사레가 한 마디 거들었다.


“저는 카톨릭 신자라서 그 모임에 한 손 보탤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았을 때

그 용모와 신장을 보고 왕이 될 자라 칭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택하시며 말하셨습니다.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중심을 본다.

그러니 왕이 될 자질은 겉으로는 알 수 없고, 신의 눈으로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여신께서 왕이 될 자를 알아보셨으니, 그 시선이 향하는 자가 왕이 될 자 아니겠습니까?”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태도를 바꾸어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제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사단에서 제명될지도 몰라요!”


이쯤 되자 시현 또한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목상 리더의 자리에 앉는 것이 꼭 저여야만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왕이니 무엇이니 하면서 떠받들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현이 못내 수긍하자 아테나와 드레이크, 오셀로, 베아트리체, 비탈레, 그리고 아일라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유일신을 모시며 다른 신들을 이단으로 여기는 것이 의무인 체사레와,

로키와 상의를 하겠다며 거울을 찾아 골든 하인드 호의 선실로 들어가는 라포트,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마리오는 의견을 표하는 것을 보류했다.


114. 회수


그렇게 이야기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시현을 주축으로 하는 단체 하나가 만들어졌다.

노부스-판테온(새로운-만신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단체는 시현을 형식상의 수장으로 삼았지만,

이런 모임을 결성할 수 있었던 것에는 장미십자회 스페인 지부의 수장이기도 한 오셀로의 지분이 컸다.


“우리 스페인 지부는 장미십자회 내에서 새로운 판테온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다”

“이건 기존 장미십자회의 노선과 상반되는 일인데 괜찮으신 건가요?”


오셀로는 시현의 양 쪽 어깨를 붙잡고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커다란 덩치의 무어인이 근접해서 얼굴을 들이밀고 말하는 모습은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녹색 눈동자는 어딘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우리 지부가 있는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몇 개의 국가가 통합되어 만들어진 다민족 국가라는 이유로, 민족간 갈등이 심한 편이다.

종종 분리 독립을 외치는 시위나 테러 등이 활발하게 일어나지.

이렇게 된 배경에는 종교적, 문화적 차이가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스페인의 민족을 따지자면

켈트족, 바스크인, 로마인, 게르만족, 유대인, 무어인, 베르베르인 등등,

각자 역사도, 종교도 다른 민족들이 카톨릭 국가였던 카스티야 왕국의 깃발 아래 통합된 꼴이지.

그 동안 장미십자회와 일루미나티는 그런 차이를 수단으로 삼아 제 이득을 챙겨왔다.

일루미나티가 테러를 일으키고 시민들을 선동하면,

장미십자회가 수습을 돕는 대신, 정부에게 대가를 받아가는 식이었지.”


그는 그 동안 장미십자회가 일루미나티의 만행을 막겠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는 일이 커지고 나서야 뒤늦게 나타나서 이득만 챙기려고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온 것 같았다.

아마도 오셀로는 그런 장미십자회의 이중적인 행태에 염증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는 시현에게 기대를 거는 듯했다.


“내가 바로 장미십자회 스페인 지부장이지만, 장미십자회는 속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졌다.

이번 사태에도 영국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가 얼마나 욕심을 부렸는지 너희는 모를거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드레이크 선장은 자기네 나라의 이름이 언급되자 하고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크하하하! 영국 지부의 윗대가리 녀석들이 무슨 소리를 했을 지 눈에 선하군!

그렇지 않아도 티폰이라는 거물을 잡는 데 같지도 않은 애송이 녀석을 보내려고 하기에 억지를 부려서 내가 오겠다고 했지!

윗놈들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더라니까!

아마 티폰 토벌에 실패하는 게 그 놈들에게는 더 이득이 되는 부분이 있었을 테지!”


그 동안 볼로냐 지부와 튀르키예 지부 외에 다른 지부의 사정은 모르고 있었는데,

아마 다른 지부들은 내부적으로 정치질과 비리에 물든 모양이었다.


드레이크 선장이 호탕한 웃음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오셀로가 헛기침을 하며 드레이크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기대를 걸고 있네.

전 세계의 신화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건 즉, 전 세계의 모든 문화를 조화롭게 통일시키겠다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민족 간 갈등으로 매번 피를 흘리는 스페인의 사정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그렇게 새로운 조직에 대한 계획과 비전에 대해 논해가며 티폰이 저질러 놓은 사태의 뒷수습을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무지막지한 양의 화산재를 하늘로 뿜어내고 있는 화산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티폰의 숨이 끊어지면서 화산의 분화 자체는 멈추었지만 이미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 화산재들을 가라앉히는 것은 아일라가 맡았다.


티폰이 일으킨 해일을 통째로 집어삼켰던 만큼, 엄청난 양의 물을 저장하고 있었던 아일라가

글라우쿠스의 등에 올라타 하늘 위에서 그 물을 비처럼 뿌려댄 것이다.


이 정도로 비산한 화산재를 전부 가라앉히는 것은 어림도 없었지만,

적어도 인간의 힘으로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 다음은 거대한 티폰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이다.

전에 일루얀카의 시신을 처리했을 때처럼 푸코 교수의 아조트 검으로 흡수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사이에 시현은 아테나와 눈빛을 교환했다.

폭풍의 의인화라는 티폰이지만, 그 근본을 찾아가면 결국 대지의 뱀과 관련이 깊은 신.

튀르키예에서 처치한 일루얀카와, 마피아 카루아나가 갖고 있던 안드로메다의 유물에서 얻을 수 있었던 작은 실뱀이 이번에도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아테나와 함께 티폰의 시신에 다가간 시현은 조심스럽게 새카맣게 타서 숯이 되어버린 티폰의 머리통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기대한 대로, 작은 실뱀 한 마리가 시현의 손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새카만 뱀 한 마리가 총알과 같은 속도로 뛰어들어 그 주둥이로 자그마한 실뱀을 순식간에 채 갔다.


“억!?”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시현은 넋을 잃었다.

어떻게 찾은 기회인데, 아테나의 권능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만약에 이번에 그 실뱀을 아테나에게 줄 수 있었다면 진정한 아이기스,

메두사의 권능을 가진 방패의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시현은 허망함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숨걸고 티폰과 싸워서 얻어낸 보상을 한순간에 빼앗아 간 것이

다름아닌 야생 구렁이 한 마리라니!


그런 시현을 위로하는 아테나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장미십자회 일행들의 한 차례 소동을,

먼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구릿빛 피부와 검은 곱슬머리,

후줄근한 정장을 아무렇게나 걸친 사내는 시현 일행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발 밑으로 시선을 향했다.


새카만 구렁이 한 마리가 그의 발치에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사내는 그런 구렁이에게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어, 구렁이의 입에 물려 있는 실뱀을 받아갔다.


“키시싯! 멍청한 장미십자회의 샌님들 같으니라구,

기껏 티폰을 처치해 놓고 가장 중요한 것을 이리 쉽게 내주다니!”


장미십자회 일행을 비웃으며 혀를 낼름거리는 그 사내의 혀는 특이하게도

뱀의 혀처럼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상태였다.

스플릿 텅(split tongue)이라고 불리는 모양이었다.



작가의말

내일, 2024년 9월 18일은 하루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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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1화 24.08.22 22 0 12쪽
30 30화 24.08.21 26 0 11쪽
29 29화 24.08.20 2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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